국정원 대선 개입 판결, 민주주의의 911 테러 되나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세계의 역사를 뒤흔든 9.11 테러가 일어난 지 14주기가 되던 지난 9월 11일.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뒤흔든 판결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의 중심인물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이었죠. 이날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한 건설업자에게 1억 7000여 만 원의 뇌물을 받은  개인 비리 혐의로 1년 2개월간의 징역을 살고 만기 출소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에 대한 판결에 따라 출소한 지 며칠 만에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1심 재판부는 징역 2년 6월에 자격정지 3년 그리고 집행유예 4년으로, 유죄이긴 하나 애매하고 찜찜한 이율배반적인 선고를 내렸습니다.



출처 - JTBC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 공직선거법 위반은 무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에서 부정을 저지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고도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데 그친 이유는 법원이 "국정원법은 위반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이율배반적인 선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법원의 판결을 본 많은 국민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거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는 것처럼 당선된 선거는 처벌할 수 없다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과 국정원 직원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활동을 했다는 점, 그리고 선거 국면에서 국민의 여론 형성에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직접 개입했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재판부는 "피고인 원세훈은 국정원장으로서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할 책임이 있음에도 국정원 직원들에게 국정홍보 등을 지시하여 정치관여 활동을 이루어지게 했다"며 "특히 이와 같은 활동은 국민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 과정에 국가기관이 직접 개입하는 행위로서 어떠한 명분으로도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이 전 차장과 민 전 심리전단장에게 "소속 직원들의 정치관여 행위를 차단하고 방지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원세훈의 위반한 지시를 그대로 전달하여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했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찜찜한 유죄... 선거법 85조 아닌 86조였다면?(오마이뉴스)


어쨌든 재판부의 선고로 사실관계는 명확해졌습니다. 선거 시기에 국정원의 활동이 있었네 없었네, 정치 및 선거에 관여를 했네 안 했네 하는 식의 갑론을박을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국정원은 지난 대선이 치러질 시기에 국정원장을 정점으로 3차장과 심리전단장을 거쳐 지시-보고 체계를 통해 조직적 범죄를 저지른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유죄 판결이 나온 것이죠.



출처 - 세계일보


그런데 문제는 이번 판결의 핵심인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관한 부분입니다. 유죄 판결은 났지만 핵심인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국정원과 여당 입장에서는 무죄 판결이 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입니다. 혐의에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사실상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이유가 대체 뭘까요?


법원이 이번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중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핵심 논리는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엄격히 구분해서 적용한 데 있습니다.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내린 핵심 논리는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엄격히 구분한 데 있다. 재판부는 "비록 피고인들의 행위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라고 볼 여지가 있더라도, 그보다 좁은 개념인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공무원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하였음을 이유로 피고인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어떠한 행위를 선거운동이라고 보기 위하여는 목적성, 능동성, 계획성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찜찜한 유죄... 선거법 85조 아닌 86조였다면?(오마이뉴스)


정리하자면 1심 법원의 최종 판단은 국정원법상 정치관여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긴 했지만, 이것을 선거운동이라고 확정할 만한 결정적 증거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는 지나치게 선거운동을 좁게 해석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검찰이 기소한 선거법 조항이 선거법 제86조가 아닌 제85조라는 점의 이미도 파악해야 합니다. 선거법 제85조 내용은 공무원이 그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제86조는 몇 가지 행위를 나열하며 공무원 등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금지하는 포괄적인 조항입니다. 둘이 쌍이 되어 공무원의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이유에선지 이번에 국정원이 기소된 선거법 조항은 제86조를 제외한 제85조뿐이었습니다.


결국 판결의 행간에 숨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는 선거법 제86조인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는 해당할지도 모르지만, 검찰이 기소한 제85조 선거운동에 관해서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출처 - 트위터


법 해석을 지나치게 좁게 하여 일반인이 보기에 이율배반적인 판결로 해석되는 결과 때문에 짜맞추기식 판결이라는 비판 여론이 쇄도했습니다. 이 사건의 고발장을 작성하는 데 참여한 판사 출신 새정치민주연합의 박범계 의원은 이 판결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강간상해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있는데 재판정에서 보니 강간은 맞지만 상해는 아니라고 해보자, 그럴 경우 판사가 기소된 강간상해가 아니므로 무죄를 선고하는 게 맞느냐"면서 "그럴 경우 판사가 공소장을 강간으로 변경하는 게 어떻겠냐고 검찰에 권하는 것이 통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초 민주당에서 고발장을 제출할 때는 선거법 85조와 86조가 모두 들어가 있었다"면서 "그런데 기소단계에서 86조가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찜찜한 유죄... 선거법 85조 아닌 86조였다면?(오마이뉴스)


이 비유대로라면 강간은 맞는 것 같은데 때린 건 아닌 것 같으니 전반적으로 무죄로 보고 집행유예를 선고한 꼴입니다. 혐의는 명백하니 벌을 하긴 해야겠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판결을 할 수는 없으니 다분히 정치적인 선고를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거셉니다. 이 판결에 대해 청와대는 할 말 없다며 침묵했고, 여당은 벌써 야당의 정치공세일 뿐이라며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의 법 감정에서조차 이 판결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형평성의 문제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1심 판결 직후 SNS상에는 지난 대선 때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반인의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출처 - 트위터


일반인은 커피 제공 공약을 했다고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데, 국정원의 경우 정치관여 혐의가 모조리 인정된다면서도 공직선거법 위반이 아니다는 판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법의 위엄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상필벌을 엄격히 지키는 것. 즉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같은 죄를 지었으면 같은 벌을 내려야 법의 위엄이 생기고 권위가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죄임에도 사람에 따라 지위에 따라 돈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면 어떨까요? 그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이 됩니다. 대한민국에서 주먹을 가깝고 법은 멀다는 한탄처럼, 법이 우습게 보이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인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4.19 정신을 기억하라


최상위 법이자 대한민국 법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헌법 제정의 역사적 과정, 목적 그리고 이념 등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이 알고 계실 첫 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그렇습니다.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3.1 운동, 그리고 또 하나,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맞서 국민들이 일으킨 혁명인 4.19 혁명의 민주주의 이념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축으로 공명정대한 선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꼽고 있는 겁니다.



출처 - 경향신문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일어난 4.19 혁명으로 단죄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이기붕 부통령이 가족과 동반 자살한 지 54년이 지난 오늘, 부정과 부패를 알면서도 찜찜한 유죄와 무력한 무죄를 목도해야 하는 현실이 부끄럽습니다. 과연 2심과 3심에서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남은 두 번의 판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향방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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