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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일상비행

증거 조작 시대에 꼭 봐야 할 영화 5편

by 생각비행 2014. 3. 13.
서울시 공무원 간첩 의혹 사건에서 속속 밝혀지는 국정원의 증거 조작 행태가 점입가경입니다.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유우성 씨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재판에 제출된 검찰 측 진술서마저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국정원이 '국가조작원'이라는 국민의 비판을 듣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정보원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진술서나 조서를 미리 써놓고 나중에 탈북자 등 증인들의 도장만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정원이 중국 공문서에 이어 진술조서까지 광범위하게 자신의 입맛대로 위조한 구체적인 정황이어서 검찰의 수사 확대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진술서는 참고인 등이 자신이 할 말을 서술하는 것이고, 진술조서는 수사기관에서 문답 형식으로 작성하는 것인데, 모두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된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파렴치하게 유우성 씨 측 증인을 세 차례나 회유, 협박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지난해 초 화교 출신 탈북자 유우성(34·전 서울시 공무원)씨의 1심 재판을 앞두고 유씨의 간첩 혐의에 대한 무죄를 증언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온 화교 출신 A(여)씨를 세 차례 찾아가 회유·협박하려 한 정황이 녹취록을 통해 드러났다.


생각비행은 지난 삼일절에 헌법의 근본정신을 돌아보며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이나 유우성 공무원 간첩 사건이 오늘날의 드레퓌스 사건과 닮은꼴이라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참고 기사: 삼일절에 돌아보는 헌법의 근본정신). 국가 기관에서 증거를 조작해 죄 없는 시민을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수사 방식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드레퓌스 사건을 생생히 떠올리게 하니까요.
 
국가나 정부기관에 의한 증거 조작 사건처럼 엄청난 일이 역사 속에서 그저 사라질 리 만무합니다. 시대적 충격을 일으킨 사건은 언론, 방송, 문학, 회화, 공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든 재생산되기 마련입니다. 증거 조작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오늘은 좀 감성적인 방법으로 접근해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이 있는 영화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말입니다.

영화 검열의 시작, <드레퓌스 사건>

출처 - GEORGE MELIES : L'affaire Dreyfus

드레퓌스 사건은 그 자체가 워낙 극적이었기 때문에 영화란 매체가 막 생겨난 그 시대에도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영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조르주 멜리에스도 드레퓌스 사건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멜리에스 스스로 '재구성된 뉴스릴'이라고 부른 <드레퓌스 사건>은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건 전체를 12개 장면으로 재현한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1899년 프랑스 정부는 이 영화를 포함해 드레퓌스를 다룬 영화를 일괄해 상영 금지라는 초강수를 둡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이 막 시작되려는 민감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영화라는 매체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뤘다는 이유로 관객을 만나지도 못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의 생애>

출처 – 네이버 영화

드레퓌스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얼마 지났을 때 미국에서 에밀 졸라를 주인공으로 하여 드레퓌스 사건을 조명하는 영화가 나옵니다. 1937년 작 <에밀 졸라의 생애>라는 영화인데요, 프랑스 정부와 군부가 증거를 조작하고 침묵을 유지할 때 <나는 고발한다!>라는 명문으로 드레퓌스의 무죄 석방을 요구하고 진실 규명과 무죄 석방을 주장한 대문호의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영화는 국수주의에 빠진 권력층과 군부의 비겁함과 무능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인종차별을 고발합니다. 무죄 석방된 드레퓌스가 고인이 된 에밀 졸라의 무덤을 찾는 마지막 장면은 그 시절 많은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1938년 제1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작품상, 각본상을 받았으며 드레퓌스 역을 맡은 조셉 쉴드크로트는 남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에밀 졸라 역을 맡은 폴 무니는 상은 받지 못했으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세상에 맞선 어머니, <체인질링>

출처 – 유니버설코리아 공식 유튜브

1928년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여전사에서 어머니로 연기 변신을 한 앤젤리나 졸리가 주인공으로 열연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LA에 사는 싱글맘인 크리스틴은 회사에서 돌아와 9살 난 아들 월터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어 경찰에 신고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생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크리스틴은 5달 뒤 경찰로부터 아들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찾은 아이는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유괴 사건을 조기 종결해 대중의 신뢰를 얻으려던 경찰과 권력층은 일이 틀어지면 입장이 난감해지기 때문에 억지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진짜 아들 월터를 찾아달라고 사정하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가두기까지 합니다. 경찰이 찾은 아이를 아들로 인정하라는 거죠. 세상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못 알아볼까요? 결국 이때부터 크리스틴은 부패한 경찰과 세상에 맞서는 어머니가 됩니다.


원칙 없는 세상을 향한 경고, <부러진 화살>

출처 – 다음 영화


"재판장님은 100여 년 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간 드레퓌스 사건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시 재판부는 진범이 잡혔는데도 당국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한 채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지요. 그런데 100년도 더 지난 21세기에 대한민국 사법부에서는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억지 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부러진 화살> 주인공 안성기의 대사

2007년 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석궁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는 성균관대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명호 전 교수가 2007년 1월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의 항소심에서 패소하자 재판장인 박홍우 판사를 석궁으로 위협한 사건입니다. 

사건 자체에 관해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대입시험 문제의 오류를 지적하고 원칙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김 교수는 교수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부당하게 재임용에 탈락한 뒤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사법부는 사학재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에 승복할 수 없었던 김 교수는 석궁을 들고 담당 판사를 찾아가 위협했다고 하죠. 실제 사건은 영화의 내용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하는 게 사법부의 입장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화 자체는 권력의 손을 들어주는 사법부의 원칙 없음과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배급 문제 등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의외로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주인공을 맡은 안성기의 열연은 대단했죠. 이 영화에서 경찰의 증거보존능력이 의문시되고 담당 판사가 혈흔 DNA 검사를 거부하는 등 의심스러운 정황이 계속 드러납니다. 과학 수사와 증거법정주의를 지향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통쾌하게 드러낸 영화였습니다.

국가란 국민이다, <변호인>

출처 – 다음 영화

온갖 우여곡절에도 1000만 관객에게 감동을 준 <변호인>도 권력에 의해 증거 조작된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림 사건에서 변호를 맡은 실화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는데요. 송강호의 신들린 열연이 돋보였습니다. 독재정권에 의해 어설프게 조작된 증거들이 영화에 등장할 때면 실소를 금치 못하다가도 그런 행태가 오늘날에도 버젓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드레퓌스 사건> <에밀 졸라의 생애> <체인질링> <부러진 화살> <변호인>, 다섯 영화를 소개하고 보니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절이든 권력에 의한 증거 조작과 진실 은폐, 그에 따른 억울한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겠지요. <에밀 졸라의 생애>를 제외하면 모두 DVD 구매 또는 영화 관련 사이트에서 비용을 치르고 합법적인 내려받기가 가능한 영화들입니다. 이번 주말엔 위 영화를 다시 보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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