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물/추억비행

구한말과 1970~1980년대 풍경이 여기 그대로 있네!

by 생각비행 2012. 7. 10.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보려고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야외 전시물 중에 옛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곳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구한말의 모습과 1960~1980년대 거리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으로 가족, 친지, 연인과 함께 나들이한다면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으실 겁니다. 자, 그러면 시곗바늘을 한번 거꾸로 돌려볼까요?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 민족의 생활사와 관련된 방대한 민속자료를 상설 전시공간과 야외 전시공간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 민족 고유의 생활양식, 풍속, 관습 등을 조사·연구하고 생활 민속 유물을 수집·보존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전통문화를 보급·선양하며 국제 문화 속에서 한국 문화를 부각하고자 설립되었죠. 이곳을 찾는 방법은 [국립민속박물관 누리집]에 잘 나와 있으니 참고하세요.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풍경


국립민속박물관은 1945년 11월 8일 한국 민속학의 선구자인 송석하(宋錫夏)의 수장품을 중심으로 서울시 중구 예장동 2번지에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처음 창립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많은 변화를 거쳤고 1992년 10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 소속에서 문화부 1차 소속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직제 개편되어 1993년 2월 17일 경복궁 내 건물로 이전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3년 3월 6일 문화부에서 문화체육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1998년 2월 28일 문화체육부에서 문화관광부로, 다시 2008년 2월 29일에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소속이 변경되었습니다. 민족 고유의 시설과 자료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건만, 정치적 이유로 소속이 계속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안내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누리집)


오늘 생각비행이 여러분께 소개할 곳은 '추억의 거리'입니다. 이곳은 구한말과 1970~1980년대 거리 풍경을 실물 크기 그대로 재현해놓은 야외 상설 전시장의 한 부분입니다. 약 1900제곱미터 면적에 기존에 있던 개항기의 전차, 한약방, 포목전을 재정비하고 1970~1980년대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다방, 식당, 만화방, 레코드점, 이발소, 양장점, 사진관 등을 똑같이 재현해놓았습니다. 연세 지긋한 분은 이곳에서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으며 어린이들은 옛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체험할 수 있으니 교육 자료로도 가치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제 추억의 거리를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포목전


포목전은 비단과 포목을 판매하던 상점을 말합니다. 전시창에 기술되어 있는 설명 끝 부분에 '육의전'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육의전이란 조선 후기에 정부로부터 특권을 받은 시전(市廛) 중 6개의 큰 시전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육의전의 구성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은 하나의 상점을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같은 물종을 취급하는 상인들의 단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정부가 건축한 공랑(公廊)점포에서 영업했는데요, 그 위치를 현재 종로 1, 2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육의전의 의무는 정부수용품 조달이었습니다. 육의전은 자신들이 취급하는 물종을 다른 상인으로 하여금 거래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고 합니다. 난전은 전안(廛案:숙종 32년부터 실시한 제도로, 시전에서 취급한 물종과 상인의 주소, 성명을 등록한 상행위자 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자나 판매를 허가받지 않은 상품을 성 안에서 판매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결국 육의전은 쉽게 말하면 특권적 어용상인의 단체였던 것이죠.

죽물전


플라스틱 제품이 나오자 죽제품을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중국과 태국 상품이 전통적인 국산 죽제품을 내몬 양상을 보면 전 세계에서 값싼 상품이 유통되는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군요. 요즘은 중국산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공산품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전에 MBC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 없이 살아보기>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양태전


양태전은 갓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상점을 말합니다. '양태'는 '갓양태'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 "양탯값도 못 버는 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제 밥벌이를 못하여 장가도 못 들 녀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이 갓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 후기에 신분이 높고 재력이 있는 사람은 비 올 때 나막신을 신었습니다. 나막신이 흙길에서 얼마나 유용했을지 그 유용성에 조금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세를 과시하는 용도로는 확실한 기능이 있지 않았을까 싶군요. 구멍이 숭숭 뚫린 짚신에 비하면 버선발이 덜 젖기는 했겠지만 우산조차 없던 시절에 나막신이 적절한 비 대비책은 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빗길에 어딘가로 행차하려면 가마를 타지 않는 이상 발 젖을 각오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한약방


개항기 한약방의 모습을 재현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서랍이 많은 전통 가구에 각종 약재가 빼곡히 들어찬 모습은 요즘 한약방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듯합니다. 지금도 약재를 써는 작두를 흔히 볼 수 있지요. 예전엔 한약방이 약국이기도 하고 병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진료는 의사에게 받고 약 조제는 약사가 하는 식으로 분리되었지만 예전 약방의 풍경은 사뭇 달랐겠지요.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허준>에서 의술이 뛰어난 의원집에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요, 오늘날 을지로에 해당하는 구리개에서 이런 모습이 다반사였겠지요.

자, 이제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1970~1980년대 풍경으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30대 중반 이후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거리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름보일러가 없던 시절 월동 대비는 연탄을 들여놓는 일부터 시작하곤 했습니다. 행여 연탄이 비에 젖을까 비닐로 덮고 문단속을 철저히 하던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군요. 연탄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길에 넘어지지 말라고 아침이면 연탄을 깨서 길가에 흩뿌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라면은 꼭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었죠? 이런 추억 때문인지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연탄을 소재로 쓴 안도현 시인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두루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연탄 시인'이라는 별명도 있지요. 다음 작품은 아주 유명해서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너에게 묻는다
                           _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흔하디흔한 연탄재에서 이런 깊은 감성을 찾아낸 시인의 마음이 연탄불만큼 따뜻합니다. 최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의원인 도종환 시인의 시와 산문을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16종의 중학교 교과서에서 빼도록 출판사들에 권고한 사실이 밝혀져 문인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안도현 시인이 "도종환 시인의 시를 중학교 교과서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면 저의 작품들도 교과서에서 모조리 빼주기 바랍니다"라고 심경을 밝히기도 했더군요. 문학작품은 동시대의 기억을 공유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입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밀어 교과서를 함부로 재단해서야 되겠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역사교과서를 운운했던 일부 역사가들과 이번 문학작품 배제 권고로 물의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국립민속박물관 내 '추억의 거리'를 둘러보며 인생공부부터 다시 하기 바랍니다.


구멍가게나 이발관이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군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담배부터 이발 도구 등이 그 시절 모습 그대로 남아 있네요. 벽에 붙은 각종 상품 광고까지 똑같습니다. 학교는 반공교육에 앞장섰고 전국 어디를 가든지 간첩신고 번호와 반공 표어 하나쯤은 붙어 있었죠.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복덕방(福德房)은 부동산중개업과 부동산중개업소를 지칭하는 용어로 우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복덕방이란 용어가 주역에서 말하는 '생기복덕'에서 기인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복과 덕을 가져다주는 곳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니 참 정겹지 않습니까? 1970~1980년대 시절 복덕방은 물물교환이 일어나는 장터이자 정보를 주고받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덕방 벽에는 이런저런 전단이 늘 붙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 부동산중개소를 보면 어떤 물건이 얼마라는 식의 정보만 나열되어 있는데요, 이와 비교하면 예전의 복덕방은 그 이름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죠. 복덕방 가게 문을 골대로 삼아 축구를 하다 주인아저씨에게 혼나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분도 계실 듯합니다.


여기는 다방입니다. 들어갈 수 없는 가게도 있는 반면 다방은 내부를 공개하고 있어서 들어가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팥빙수 200원, 쌍화차 200원, 커피 150원, 위스키티 300원, 꿀차 150원이면 언제쯤 시절의 물가인지 궁금하군요. 음료를 판매하지는 않으니 미리 준비해서 다방에 둘러앉아 옛 추억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전쟁과 평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군요. 이 영화는 1956년에 킹 비더(King Vidor) 감독이 제작했고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멜 페러(Mel Ferrer), 헨리 폰다(Henry Fonda) 등이 열연했지요. 1977년 컬러판으로 재편집되었는데요, 상영시간이 무려 208분에 달합니다.


<스타워스> <슈퍼맨> <카사블랑카> <고고 얄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불후의 명작 영화 포스터가 색이 바랜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참 꼼꼼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볼거리가 더 풍성해지는 '추억의 거리'에 또 하나의 명물이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리네 삶에서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를 빼놓을 수 없지요. 아니나 다를까 정겨운 국밥집을 재현해놓았더군요.


지금도 장사를 하는 곳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잘 재현해놓았더군요. 들어가서 좀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옛 모습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만화가 왜 그리도 재미있었을까요? 꿈과 희망이 자라는 곳이 곧 만화방이 아니었나 싶네요. 여기 전시된 만화는 제가 어린 시절 보던 만화보다 더 이전의 만화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만화를 실물로 보려면 부천에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을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학교입니다. "학교종이 땡땡땡~" 노래에 나오는 수업종이 바깥에 달려 있네요. 교실을 보니 겨울에 도시락을 난로 위에 올려두고 데워서 먹던 모습까지 잘 재현해놓았군요. 요즘 아이들이 초록색 나무책상과 걸상을 알 리 없지요. 책상 한가운데에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우기던 시절도 그립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여드릴 곳은 의상실입니다. 동네마다 양장점과 의상실이 하나쯤은 있었습니다. 참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옛날 옷도 나름대로 세련된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패션은 돌고 돌기 때문일까요? 사진으로 보셔서 아시겠지만 '추억의 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가면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부모님이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이만한 배움터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돌아오는 주말에 '추억의 거리'로 나들이 계획을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