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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한국을 민주화 사회로 이끈 결정적 운동, 6월 항쟁

by 생각비행 2011. 6. 10.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지난 5월부터 연속기획으로 생각비행은 어두운 한국의 현대사와 민주화운동의 과정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 기사는 그 대단원에 해당하겠네요. 
박정희가 주도한 5.16쿠데타로 한국은 이른바 '군사정권'의 시기를 보냅니다. 10.26 이후 사람들은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의 '봄'이 올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는 진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품은 민주화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을 광주에서 무자비하게 학살한 신군부의 만행에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끝없이 저항했습니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신군부는 '간첩사건'으로 학생운동을 저지했고, 학생운동의 열기는 점점 사그라지는 듯했습니다. 그 와중에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어떤 학생을 조사하던 중에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하여 한국 사회에 민주화 시위의 불을 다시 댕긴 이른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의 잔인성을 드러낸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故 박종철,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故 박종철

6월 항쟁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앞서 소개한 박종철입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뜻있는 젊은이였습니다. 박종철의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던 박종운의 거취를 쫓던 공안 당국이 1987년 1월 13일 박종철의 자취방을 덮쳤습니다.

취조실에서 수사관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거취를 물었으나 순순히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습니다. 잔혹한 폭행과 고문을 이기지 못했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조사실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군사정권은 개헌 상황과 맞물려 시국이 어지러웠기에 박종철 사건을 은폐하려 했는데요, 마침 검찰청에 출두한 《중앙일보》 기자가 박종철 사건을 듣고 속보로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은폐하려 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신문으로 알려지자, 경찰은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고 기자회견을 엽니다. 여기서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합니다. 이른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이 나온 순간이었습니다.

故 박종철,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경찰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며 책상위로 쓰러졌다고 밝혔다'


20대의 건장한 청년이, 책상을 탁 하고 치니 놀라서 심장마비에 걸려서 죽었다는 황당한 경찰의 발표에 사람들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동아일보》에서 입수한 박종철 부검 의사 오연상의 진술은 박종철이 고문치사로 사망했다는 정황에 더욱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경찰에 불려 온 오연상은 사건 현장이 물로 흥건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고, 이는 물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물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을 숨길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경찰 2명의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고 축소·은폐 보도를 했습니다.

당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내무부장관 정호용까지 나서서 고문치사를 부인했는데요,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냐?"는 말을 해 비웃음을 샀습니다. 정호용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특전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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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100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에 나오는 박종철. "금방 다시 불이 붙을끼다"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주화운동의 불이 붙었다.

박종철 사건을 유야무야 넘기려던 정부의 노력은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8주기 추도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했습니다. 2명의 잘못으로 축소되었던 박종철 사건이 사실은 치안본무 5차장 박처원의 주도로 대공분실 수사관 5명 모두가 관련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한 것이죠. 이는 당시 박종철 사건을 맡았던 안상수 검사(현재 한나라당 의원)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 끝에 이뤄낸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전두환 정부의 비도덕성과 잔인함에 분노하기 시작했고 결국 6월 항쟁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을 분노하게 한 4.13 호헌조치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는 전두환 대통령(사진 출처 : 미디어 오늘)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방법과 관련된 개헌 논쟁에 찬물을 끼얹는 발표를 합니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바로 그것이죠. 전두환은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하여, 그간 논의되고 있던 개헌논쟁을 종식하고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차기 정부는 제5공화국 헌법으로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고, 그에 따른 대통령 선거인단 선출 및 대통령 선거를 연내 실시하고 개헌 논의는 서울 올림픽 대회 뒤로 미루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신정부 이래로 대통령 선출은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접선거로 이루어졌고 이는 독재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직접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에 대한 열망은 점점 커지고 있었고, 1985년 12대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 김이 이끄는 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직선제 개헌 요구는 점차 힘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열망을 비웃는 듯 4.13 호헌조치로 대통령 직선제는 물 건너가는 듯 보였습니다.

이때 4.13 호헌조치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종교계였습니다. 1987년 6월 김수환 추기경은 4.13 호헌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특별 미사를 봉헌하여 호헌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같은 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도 4.13 호헌조치 반대성명을 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각계각층에서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의 민주화 열망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한열 열사의 안타까운 죽음, 드디어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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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 이 사진이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로 실려 전두환 독재정권의 잔인성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말미암아 전국은 분노의 열기로 들끓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한 정부에 대한 분노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전국 재야 지도자들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4·13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러던 와중에 가슴 아픈 사건이 또 일어납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생 이한열 군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이 쏜 직격탄(소총으로 쏘듯 수평으로 놓고 발사하는 최루탄)을 맞아 부상해 뇌사 상태로 있다가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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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사건, 4.13 호헌조치, 경찰의 잔인한 진압에 대한 반발감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호응을 얻어내기 시작했다. -이미지《100℃: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조치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에 국민은 너무 엄청난 경험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은폐되고 조작되었던 군사정권의 무자비함과 잔혹함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98~99℃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100℃가 되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6.10 국민대회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를 개최했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오후 6시를 기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리고,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는 지침(6.10국민대회 행동요강)을 내렸습니다. 이에 길거리에서는 택시와 자동차가 울리는 경적이 울렸고, 시내버스에선 흰 손수건을 흔드는 사람이 줄지었습니다. 당시 여고생들은 6월 항쟁에 나선 사람들에게 마실 물과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지원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나서서 도왔다고 합니다.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
 

1.당일 10시 이후 각 부분별 종파별로 고문살인 조작 규탄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한 후 오후 6시를 기하여 성공회대성당에 집결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2. (1) 오후 6시 국기하강식 기하여 전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하고
   (2)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3)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하고
   (4)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삼창(민주헌법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든지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함으로 민주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3.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진행을 막는경우
    (1) 전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하며
    (2) 연행을 거부하고
    (3) 연행된 경우에도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한다.

4. 전국민은 오후 9시부터 9시 10분까지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전당대회에 항의하고 민주쟁취의 의지를 표시할 수 있는 기도 묵상 독경 등의 행동을 한다.

5. 대회가 만의 하나 경찰의 폭력에 의해 무산되는 경우 부분별 단체별로 교회 성당 사찰 기타 편리한 장소에서 익일 아침 6시까지 단식농성한다.

6. 8, 9일 양일간 전국민은 6.10국민대회 참여를 권유하고 상호 격려하는 '전국민전화걸기운동'을 전개해주기 바란다. 

7. 또 한번  부탁하거니와 6.10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해주시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손쇠 등을 자행하는 사람을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

8. 하오  6시부터 성공회대성당에서 진행될 국민대회 식순은 추후 발표한다.

9. 각 도시 등 지방에서도 위와 같은 행동요강으로 국민대회를 진행하되 시간과 장소는 지역의 편의에 따라 할 것이며  각계각층이 총망라하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민대회를 가져주기 바란다.


이후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여기서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누구도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막기 위해 정부는 6만 명의 경찰 병력을 배치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왔기에 시위 진압은 역부족이었습니다. 학생 주도의 항쟁이 6월항쟁에 이르러 시민항쟁으로 변모했습니다.

결국 국민의 뜻을 더는 거스를 수 없어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수습 선언 발표로 신군부는 시민에게 항복을 선언합니다.

6.29 수습 선언   

1.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2. 대통령 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3.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4.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5. 자유언론의 창달
6.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7.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6.29 선언의 골자는 4.13 호헌 조치를 철폐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입니다. 민주화에 대한 시민의 열망이 받아들여진 셈이죠. 제9차 개정헌법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드디어 실현되었습니다. 1987년 10월 27일, 제9차 개정헌법을 위한 국민투표를 시행했는데요, 총 유권자의 78.2퍼센트가 투표에 참여해 93.1퍼센트가 찬성했다고 합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실로 대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월 항쟁, 그로부터 24년... 다시 광장으로!

6월 항쟁이 승리로 끝나고 24년이 지난 오늘 아주 많은 분이 광장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값 등록금 때문에 거리에 나온 학생들, 그들을 독려하기 위해 함께하는 선배들,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을 반대하는 또 다른 모임, 그 이외 여러 가지 소셜 모임의 기치를 내걸고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이고 있습니다.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이명박 정권을 향한 국민의 분노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 6.10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화두를 제시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이명박 탄핵"이라는 주제가 네이버 검색어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경향신문》에 <촛불때 1만등에도 없던 ‘이명박 탄핵’ 실시간 검색어 1위>라는 기사가 떴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재미교포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단체들이 지난 8일부터 ‘이명박 대통령 탄핵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이날 전해지기도 했다"는 내용이 있군요.

오늘 생각비행도 청계광장으로 나갑니다. 24년 전의 모습을 시민이 다시금 보여줄 수 있을지, 어떤 결과를 남길지 지금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24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 한국 국민은 많은 거짓된 정권을 봐왔으며, 그 말로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꽤 진전되었으나 우리에게는 더 많은 민주화가 필요하며, 우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권은 결국 국민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억울함을 숨기고 감정을 억누르는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오늘 광장에서 시민의 욕구를 보려 합니다. 그들의 힘으로 오늘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확인하려 합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응원해주십시오. 시간이 허락하는 분은 나오십시오.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가 곧 시대의 증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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