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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5.16에 뒤돌아보는 박정희 신드롬

by 생각비행 2011. 5. 16.
오늘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꼭 50년 되는 날입니다. 한국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10.26, 12.12사태,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의 성장통을 겪으며 지금과 같은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경제 사정이 조금 어려워질 때면 많은 국민이 박정희 시절을 생각하며 그때가 좋았다고들 얘기합니다. 과연 3·4공화국 동안 한국 국민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크나큰 경제 발전을 이뤘을까요? 박정희라는 인물이 과연 칭송을 받을 만하며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일까요? 생각비행은 5.16 군사쿠데타 50주년을 맞이하여 박정희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해봤습니다.

5.16 군사쿠데타, 과연 정당한가

5.16을 맞이하여 여러 신문에서 군사쿠데타에 참여한 원로를 인터뷰하여 기사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일부 보수인사의 인터뷰를 인용하여 마치 5.16 쿠데타를 필연적인 사건으로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말마따나 과연 5.16 군사쿠데타는 정당한 것이었을까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관련 사진 복사 촬영. 박정희 소장(가운데)이 박종규 소령(왼쪽), 차지철 대위(오른쪽)와 함께 군사쿠데타 당일 시청 앞 광장에서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의 원인으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자주 거론되는 한국군 내부의 불만과 2공화국의 정치적 무능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쿠데타 당시 한국 군대는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급속히 팽창한 군부에서 종전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의 급속한 진급에 비해 정규 사관학교 출신 후진의 진급은 매우 더뎠고, 심지어 봉쇄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민주당은 7.29 총선에서 감군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 후 이 공약을 부분적으로 단행하여 군대의 불만을 샀습니다. 군 내부의 불만이 쌓여갈수록 같은 기수의 사관학교, 같은 지역 군인들의 결집을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집단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공화국의 무능함이 5.16 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는 사람도 많은 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7.29 총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혁신세력이라 할 사람들이 거의 국회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4월혁명 이후 진보운동으로서는 한계를 보인 국민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혁신정당들이 국민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결과가 더 크다고 봅니다. 부정축재자 처벌이나 부정선거 관련자 엄단과 같은 국민의 요구가 정치권에서 흐지부지되면서 2공화국은 점점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가 5.16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해주진 않습니다. 국민은 강압적인 구정치질서 , 만연한 부정부패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 특권층 발호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불만을 제기하긴 했으나 계속 되풀이되는 시위에 점차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시민의식이 성숙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런 시국에 굳이 쿠데타 세력이 이야기하는 '군사혁명'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5.16은 4.19혁명 이후 비등한 민주화, 민족통일 요구에 체제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이 모의한 집단 방어적 쿠데타였습니다. 합헌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하고 그 이유를 장면 정부의 무능으로 돌리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정면 정부 시기와 박정희 정부를 비교할 때 쿠데타 세력이 창출한 정권이 더 유능하다는 근거를 찾기도 어려우니까요.

쿠데타세력이 말하는 '혁명'은 과연 이루어졌는가

5월 16일 쿠데타 세력은 '혁명'에 성공했다고 내세우면서 다음과 같은 혁명공약을 발표합니다.

  1. 반공(反共)을 국시의 第1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력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용인즉 반공을 최고의 국시로 삼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며, 경제를 발전시킬 밑거름을 만들어 자신들은 뒤로 물러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발표한 혁명공약이 제대로 지켜졌을까요?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공약인 부패와 구악 일소입니다. 혁명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벌을 내세워 5월 28일 재벌 총수를 구속하고 외제품을 모아 불태우는 한편 많은 정치 깡패를 체포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특히 정치깡패들의 시가행진은 많은 사람한테서 박수를 받았죠. 몇몇 사람은 이 일을 두고 5.16 군사쿠데타는 혼란과 부패를 청산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호도하기도 합니다.

참회의 시가행진을 벌이는 깡패들 - 혁명정부는 자유당정권 밑에서 정치의 비호를 받으며 날뛰던 깡패세력의 일제 소탕에 나섰다.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 신정식을 사형으로 다스렸고, 1000여 명의 깡패가 국토개발사업에 나가 땀으로 속죄했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습니다. 부정축재 처벌로 구속되었던 당시 재벌 회장들은 곧 석방되었고, 공장 건설과 같은 주식 납부 방법으로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처벌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박정희의 "혁명은 끝나고 경제재건에 앞서야 하니 경제인들이 나서달라"는 말에 기업들은 경제재건촉진회를 발족합니다. 이 단체는 현재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기도 합니다. 결국 쿠데타 세력이 내세운 '구악 일소'는 초기에 큰 퍼포먼스만 보여준 채 흐지부지하며 넘겨버린 일이었습니다.

더 어이없는 행태는 쿠데타 세력이 저지른 4대 의혹사건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일본에서 승용차를 면세로 수입하여 두 배로 판매한 '새나라 자동차사건', 일본에서 도박기계를 면세로 수입한 '빠찡꼬사건', 1962년 4월 정부관리 주식을 145배나 뛰게 하여 폭리를 얻은 '증권파동', 마지막으로 유흥시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공사자금을 횡령한 '워커힐사건'입니다.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은 공화당 창당에 드는 엄청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일으킨 사건으로, 구악에 뺨치는 신악으로 명명될 정도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 국민은 과연 행복했을까

앞선 1·2공화국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혁명정부는 혁명을 완수했다며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는 듯했지만, 그들은 공화당 창당으로 말미암아 이미 자신들의 앞길을 다져둔 상태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고, 3선개헌과 유신선언으로 독재정부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에 과연 국민은 행복했을까요?

3공화국은 집권과 함께 경제개발계획을 내놓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자립경제의 구축을 위해 에너지원을 확보하고 기간산업,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죠. 하지만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조달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낮추어 잡고 자금을 외국에서 조달하는 방향을 선회합니다. 1·2차 경제개발계획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식량자급, 수출증대, 철강, 화학공업의 기계화에 성공했고 10.5퍼센트라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합니다.

YH무역이 문을 닫자 200여 여공이 실직에 항의, 신민당사에 몰려 '우리를 나가라면...'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곡물 수입액은 약 7배로 늘었고,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은 외국 자본이 국내로 들어오는 길을 활짝 열어버렸습니다. 또한 외자와 기술을 들여와 낮은 임금으로 만든 상품을 외국 시장에 파는 수출지향적 발전 방향의 채택은 후에 노동자들로부터 큰 반발을 얻게 됩니다. 1970년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과 1979년 YH사건은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통제를 통한 산업화 추진에 대한 노동자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결과였습니다.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는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었지만, 반대로 재벌들은 엄청난 이익을 얻었습니다. 1965년 제3공화국은 조세감면 규제법을 마련하여 기업의 세금을 덜어주었습니다. 수출소득세를 50퍼센트나 감면해주었고, 돈이 부족한 기업엔 수출산업기금을 조성하여 돈을 대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쟁 특수로 성장한 기업도 있었는데요,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건설업 분야에서 활동한 기업 가운데 큰 수익을 올려 신흥 재벌로 떠오른 기업도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명분도 없는 싸움터에 나가 목숨을 잃고 피를 흘릴 때 그들은 '전쟁 특수'를 노려 재벌이 된 것이죠.

당시 사회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과거 자신이 남로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미국정부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삼았습니다. 이는 혁명공약 제1조의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라는 말로 알 수 있죠. 이처럼 반공을 강조한 정부는 시시때때로 반공을 이용하여 사회비판 세력을 물리적이고 강압적인 통치방식으로 처벌합니다. 1·2차 인민혁명당사건, 통일혁명당사건, 민청학련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고, 유신 시기 남발된 긴급조치로 국민은 숨조차 맘 편히 쉬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인혁당 관련 피고들

이렇게 국민에게 힘든 생활을 조장하면서 돈 많은 사람과 권력자에겐 각종 혜택을 줬던 사회를 두고 과연 희망이 있고, 살기 좋은 사회였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반문해볼 일입니다.

박정희는 과연 한국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가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박정희와 5.16 군사쿠데타 세력은 한국을 기형적인 사회로 만든 암적인 존재들입니다. 박정희식 경제개발은 저임금, 고노동의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노동자가 일궈낸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한국인은 한국전쟁의 상흔을 벗어나고자 하는 잠재의식이 있었고, 각자의 어려움을 대물림해선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기인한 높은 교육열 덕분에 잠재적 산업예비군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한국인의 근면함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파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승 분위기 속에서 국제적 여건 또한 한국의 경제 성장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여러 선진국은 자국의 2차 산업을 물려받고 분업관계를 떠맡을 국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동아시아에서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그 역할을 떠안았으며,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이런 국내외 경제적 여건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박정희와 군사쿠데타 주역들이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 한국 국민의 힘과 국제정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경향신문》에 5.16 쿠데타 50주년을 돌아보는 <박정희 시대 산업화, 역사의 연속이지 신화 아니다>란 기획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박정희 시기 산업화에 대해 인정한다. 다만 너무 신화하되고 과대평가됐다. 객관성을 위해 세 가지 비교준거를 들겠다. 먼저 박정희 시기와 유사한 초기 산업화를 이뤘던 나라들과 비교할 때 박정희 정부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50년대 북한의 산업화와 비교해도 경제지표만으로는 박정희 시기가 특별히 우월하진 않다. 끝으로 87년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그 단계으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정부 못지않은 경제적 성취를 보여줬다. 종전 및 한·미동맹으로 인한 전쟁재발 가능성 종식과 국가역량의 국내발전에 집중할 여건의 도래, 토지개혁 성공으로 인한 산업화 저항세력으로서의 지주계층 몰락, 학교·학생·언론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교육기적과 국민교육 등 이른바 '산업화의 가능 조건들'은 전부 이승만 정부에서 이뤄졌다.

박정희와 군사쿠데타 주역들은 반공이라는 국시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에게 반하는 세력을 힘으로 억눌렀을 뿐입니다. 경제개발에 큰 역군이었던 공장 노동자들의 요구는 무시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정치인과 지식인은 억압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이들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어떻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몹쓸 향수에 젖어 있을 수 있습니까?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사회의 정의와 법적 질서를 어지럽혔고, 약육강식의 경제체제를 형성한 주범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비정규직 고용자가 800만 명이 넘고, 지금도 곳곳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각종 재벌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도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피해 갑니다. 생각비행은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과연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박정희의 그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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