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때 간단하고 노력이 덜 드는 방법으로 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에너지를 적게 쓰고 빨리 결정하고 행동해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기에 인류의 뇌가 이런 식으로 진화하지 않았을까요? '사과'라는 단어 대신 5~10cm 정도의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주로 빨갛거나 노란빛을 띠는 과일이라고 매번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처럼 '단어'는 길게 설명해야 하는 개념을 한 번에 인식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정치, 사회적 이슈를 정의하는 단어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틀이 달라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프레이밍 효과'는 특히 언론 미디어에서 자주 활용됩니다. 신임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이 유력한 이동관 대통령실 대외협력특별보좌관의 아들이 학교 폭력 논란에 휩싸인 사실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시 학교에서 학폭위를 열지 못하도록 이동관 특별보좌관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동관 특별보좌관은 2011년 하나고 1학년에 다니던 아들과 피해 학생 사이에 "상호 물리적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방적 가해는 아니었으며 당사자 간 사과와 화해가 이뤄졌다"고 해명했습니다. 학폭 피해자 중 한 명 역시 최근 언론에 "사과를 받고 1학년 1학기에 화해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2012년에 작성된 진술서에 등장하는 피해자는 4명입니다. 이 특보는 입장문에서 나머지 3명과도 화해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MBC
당시 학폭위가 열리지 않은 이유로 "학교폭력사안대응기본지침에 따르면 담임교사가 자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으로 규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지침은 '가해 행위로 피해 학생에게 신체, 정신 또는 재산상 피해가 있었다고 볼 객관적 증거가 없어야 한다'와 '학교폭력이 지속적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점을 자체 해결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2~3회 꼴로 때렸다", "책상에 머리를 300번 부딪히게 했다"는 내용이 피해 학생 진술서에 명확히 들어가 있는 이상 학폭위는 반드시 열렸어야 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학교 폭력의 줄임말인 '학폭'은 학교에서 학생 간에 일어나는 각종 폭력 사건을 통칭합니다. 그런데 "물리적 다툼은 있었으나 학폭은 없었다"고 하니 흥미롭지 않습니까? 음주운전 사고를 낸 사람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요? 정치 관여,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현천 전 국군 기무사령부 사령관이 최근 법원에 보석을 청구했습니다. 조현천은 2017년 2월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국민들을 쓸어버릴 계엄령 문건 작성 의혹의 핵심 인물이죠. 당시 기무사령관이었던 조현천 중장이 기무사 3처장이었던 소강원 준장을 불러 계엄령 발동 요건, 선포 절차, 과거 계엄 발동 사례 등에 대한 자필 보고서를 써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내용의 보고서가 나오자 화가 난 조현천은 소강원 처장을 다시 불러 '한민구 국방부장관께서 현 위중한 상황을 고려하여 위수령이나 계엄 관련 절차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며 보고서 작성을 다시 명령했다고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이에 소 처장은 인터넷 망은커녕 군 인트라넷 망도, 기무 인트라넷 망도, 군용 PC도 없는 기무사령부 수사단 208호실에 모여 비상계엄과 관련한 디테일한 지침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승인되지 않은 비인가 개인 노트북과 USB로 작성된 계엄 문건은 장관에게 보고된 뒤 모두 포맷됐고 문서가 담긴 USB 하나만 남겼습니다.
출처 - MBC
법원은 기무사가 비정상적이고 위법적인 방법으로 계엄 문건을 작성하고 그 내용 역시 통상적인 계엄 상황을 넘어서는 정치적 연금, 국회 해산 등의 위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했습니다. 게다가 계엄 문건 작성은 기무사 임무 범위 밖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어 '쿠데타'는 군사적 힘을 동원하여 정권을 빼앗으려고 갑자기 벌이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대통령을 탄핵하네 마네 하는 정치적 혼란 상황에 기무사령부 군인이 계엄 문건을 이상하리만치 자세하게 작성하고 비밀에 부쳤는데 조 전 사령관이 받고 있는 혐의는 ‘정치 관여’밖에 안 되는 현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출처 - YTN
1980년에 레이건 대통령은 부자들의 편에서 상속세를 줄이려고 했습니다. 부자들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때 부과되는 세금이 부담되니 좀 깎아주자고 하면 누가 그러라고 하겠습니까? 레이건 대통령은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상속세를 '사망세(Death Tex)'라고 프레이밍했습니다. 세금은 모든 납세자에게 고통을 주는 해로운 무기와 같은 것이므로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입니다. 보수파는 세금 인하에 반대하는 진보 진영을 악당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출처 - 월간조선사 / 아이엠피터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보수 언론은 앞다투어 '세금 폭탄'이라고 프레이밍했습니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종부세(종합부동산) 감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정치적인 프레이밍을 한국 언론이 매일 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 대신에 '상호 물리적 다툼'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고 쿠데타 대신에 '정치 관여'라는 희석된 표현을 일부러 쓰고 있으니까요. 대한민국 언론의 위기입니다. 과연 시민의 눈과 귀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물을 때입니다. 언론이 정권의 세탁기가 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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