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7일 서울에서 열린 클라이밍 대회에 출전한 이란 선수가 투옥될 신세에 놓였다는 외신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여성 선수인 엘나즈 레카비가 경기 당시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란 클라이밍 연맹 회장인 레자 자레이는 경기 직후 엘나즈 선수에게 안전보장을 빌미 삼아 이란 대사관으로 불러들였는데 그 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이 때문에 레카비 선수가 이란 내 '히잡 반대 시위'를 지지하는 의미로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추측이 나왔고 대회 이후 친구들과 연락이 되지 않자 실종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죠. 10월 19일 새벽 레카비는 이맘 호세이니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는데요, 이후 가택연금되었다는 설을 두고도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언론에 따르면 뉴욕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이란인권센터(CHRI)는 트위터 성명을 통해 "레카비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이 인권단체 및 모든 이란 선수들과 연대해야 한다"며 "이란 정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선 안 되며, 그들은 반대 세력을 구금하고 불구로 만들거나 죽였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출처 - Iranwire
세계 소식에 관심 있는 분은 잘 아실 테지만, 이란 히잡 반대 시위가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지금까지 최소 270명이 숨지고 1만 4000여 명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발단이 되는 사건은 지난 9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출처 - 한겨레
9월 13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경찰이 22살의 마흐사 아미니를 체포했습니다. 히잡 착용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인 이란에서는 도덕 경찰이 히잡 복장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여성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체포되었던 마흐사 아미니가 구금 후 3일 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란 경찰은 아미니가 갑자기 심부전증으로 쓰러졌고 이틀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목격자들의 얘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경찰이 아미니를 구타했고 경찰차에 머리를 찍기까지 하는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는 겁니다. 유족들도 아미니에게 평소 심장질환 같은 건 없었다며 경찰 의견을 전면 반박했습니다. CT 촬영 결과 머리에서 골절과 출혈이 발견되면서 아미니가 심부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머리를 맞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란 법의학기구는 구타가 아닌 질환에 의한 사망이라고 버티고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아미니의 의문사와 정부의 사실 조작에 이란 국민이 분노하여 들고일어났습니다. 9월 17일 아미니의 장례식에서 이란의 첫 히잡 시위가 열렸습니다. "여성, 생명, 자유"를 외친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했는데요, 이날부터 이란 전역에서 수백 건이 넘는 시위가 열렸는데 이란 정부가 강경 진압으로 일관하고 있어 사망자가 속출했습니다. 이란 인권단체에 의하면 19명 이상의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란 정부는 이런 상황을 숨기려는 의도로 인터넷을 차단해버렸습니다.
출처 - YTN
하지만 히잡 반대 시위는 전국으로 더 퍼지고 있습니다. 히잡 반대 시위는 이란의 시위 역사에서 특별한 사례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올해 9월 전체 350건의 시위 가운데 여성이 참여한 시위가 270건으로 77.1%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 시위를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는 건 이란 사회의 특수성을 생각할 때 여성에게 얼마나 절박한 문제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란에서 2009, 2017, 2019년에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나 이때는 남성들이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2022년 히잡 반대 시위에는 이란의 여성들이 히잡을 찢어 불태우거나 머리카락을 자르며 시위대의 선두에 섰죠. 외신들은 그간 이란 여성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중심에 선 적은 없었다고 평했습니다.
출처 - 아시아투데이
역사적으로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가 신정 체제로 전환하면서 여성의 인권이 추락하여 남성의 부속적인 존재가 돼버렸죠. 모든 여성은 히잡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고 제대로 입지 않으면 도덕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은 여성에게 도덕 경찰이 채찍질까지 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는데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지금은 CCTV와 안면 인식 프로그램을 통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단속하는 상황입니다.
출처 - 국제앰네스티
여성의 인권이 이렇게 낮은 수준이다 보니 이란에서 여성은 강제로 결혼하게 되거나 가정 폭력에 노출된다 한들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법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되레 박해받는 일이 허다하죠. 이란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가해자인 남성을 죽이고 범죄자가 되는 길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세계에서 여성 사형 집행이 가장 많은 나라가 이란입니다. 사형 집행 건수 자체는 중국이 더 많겠지만 여성으로 국한하면 이란이 항상 1위를 유지할 정도입니다. 이런 극한 상황 때문에 이란에서 여성은 죽기 살기로 히잡 반대 시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처음엔 여성들이 살기 위해 목소리를 낸 시위였지만 이제는 이란 건국 이래 최초로 모든 계층이 하나로 뭉치는 시위가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별, 세대, 나이, 학력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전부터 축적된 국민의 불만도 한몫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
2009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한 녹색운동 때만 하더라도 이슬람 정권 내에서 변화를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이제는 이 체제 안에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고등학생처럼 젊은 사람은 물론 과거 이란 혁명을 주도했던 에너지 산업 노동자층까지도 히잡 시위에 참여하는 모양새입니다.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대규모 파업으로 왕조를 몰락시키고 현 이슬람 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한 세대였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에 경제학자 같은 식자층도 정부를 향해 재정 투명성, 정치적 투명성을 요구하며 더 나은 국정 운영 체제를 갖추지 않는다면 지금 같은 시위가 계속될 것이라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출처 - YTN
히잡 시위를 응원하고자 마리옹 코티야르, 이자벨 위페르, 쥴리엣 비노쉬 등 배우들이 나서고 있고 전 세계 여성들이 이란 여성들처럼 머리카락을 자르는 영상을 SNS에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란에서는 머리카락을 잘라 항의의 뜻을 밝힌다고 하죠. 이라크 출신의 스웨덴 유럽의회 의원도 유럽의회 연단에 올라가 머리카락을 자르며 히잡 시위에 응원을 보탰습니다.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배우로 꼽히는 타라네 알리두스티도 "(시위로) 구금되거나 숨진 이들의 가족을 돕겠다"라며 히잡 반대 시위에 연대의 뜻을 밝히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여성, 삶, 자유"라고 쓴 종이를 든 사진을 올렸습니다.
출처 - 일리두스티 인스타그램 / 경향신문
이란의 히잡 반대 시위를 지지하며 실질적인 외교 조치를 취하는 움직임도 포착됐습니다. 10월 9일(현지시각) 멜라니 졸리 캐나다 외교장관은 "여성 외교장관들을 소집해 이란에 외교적 압력을 최대한 가할 것"이라며 "이란 시위가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재외 이란 동포 역시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각국 이란대사관 앞에 모여 히잡 반대 시위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위가 열리고 있죠.
출처 - 참여연대
10월 5일 한국의 52개 인권시민사회단체도 이란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히잡 관련 시위에 대한 탄압 중단, 아미니 씨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히잡 의무착용 단속 중단의 요구를 담은 입장문을 전달했습니다. 현재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도 이란 정부의 무자비한 히잡 시위 유혈 탄압을 막기 위한 탄원서를 받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긴급] 이란 시위대 사망, 유혈 시위 진압을 멈춰라! : https://amnesty.or.kr/onlineaction/46547/ |
우리나라뿐 아니라 깨어 있는 전 세계 시민이 잘못된 이란 정부에 대해 항의의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란 히잡 반대 시위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조속히 독립적인 유엔 조사 체계가 수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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