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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장애인 지하철 시위 여론 조작을 보는 우리의 자세

by 생각비행 2022. 3. 24.

지난 2월 한 게시물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석 달째 지하철 시위를 이어가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지난 2월 9일 지하철 5호선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열차가 지연되자 승객 중 한 명이 열차 지연 때문에 할머니 임종을 지키러 가야 하는데 어려움을 호소하자 시위 중이던 장애인이 '그럼 버스 타고 가세요'라고 답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이 발언이 퍼지자 인터넷에서는 여태 괜히 장애인들 편을 들어줬다며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유튜브에서는 사이버 렉카(교통사고가 나면 달려오는 렉카처럼 온라인 공간에서 사건사고, 각종 논란을 발 빠르게 정리하여 소개하는 영상으로 조회수를 올리는 크리에이터)들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사이코패스 악마집단으로 규정하며 선정적인 영상을 만들어 올리기 바빴습니다. 그러자 기레기들은 커뮤니티 게시물과 유튜브 지라시를 옮기며 장애인들의 시위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여론의 뭇매를 견디지 못해 결국 장애인 단체는 2월 23일부로 시위를 잠정 중단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3월 17일 YTN은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 단체를 싸울 상대로 보고 언론 플레이 방침을 정한 문서를 폭로하는 뉴스를 내보냈습니다. 서울교통공사의 대응 문건에는 지하철 시위를 벌이는 장애인 단체의 약자 이미지로 인해 공사 측이 여론전에서 불리하다면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서울교통공사는 이 문건을 장애인 단체에 대한 대응지침으로서 전체 직원들이 볼 수 있도록 정식으로 공유하기도 했죠.

 

출처 - YTN

 

이 문건은 제목부터 가관입니다.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이라는 제목의 문건은 첫 장부터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며 손자병법을 인용합니다. 문건 곳곳에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뜻의 언더도그마란 표현을 써가면서 대중이 이에 경도돼 원칙과 절차가 유명무실해졌다고 장애인과 대중을 동시에 비난합니다. 문건이 공개되자 서울교통공사는 직원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다고 꼬리를 잘랐습니다. 공사 차원에서 장애인 시위에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거나 내부 문건을 만든 적 없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공개된 문건을 보면 장애인 단체의 선 넘는 미스, 그러니까 잘못을 찾아내 '물밑 홍보'를 하자는 내용이 버젓이 실려 있었습니다.

 

출처 -  서울교통공사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 문건에는 시위자들이 승강장 틈새에 휠체어 바퀴를 일부러 끼워 넣었다는 '고의 운행 방해설'을 퍼뜨린 정황이 담겨 있었는데요, 열차 운행을 고의로 방해했음을 사진으로 '자연스럽게' 알렸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울교통공사 홍보팀은 각 언론사에 이런 사진과 관련 메시지를 전하며 공사에서 제공했다고 하지는 말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언론 플레이로 여론을 조작한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던 걸까요?

 

출처 - 뉴스1

 

문건에는 첫머리에 언급한 사건도 등장합니다. '할머니 임종 버스 타고 가세요 사건'이 장애인 단체의 결정적 미스라고 말입니다.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장애인 시위자가 임종을 지키러 가는 승객에게 심한 소리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상황은 그 뒤에 이어집니다. 욱 했던 시위자가 임종을 지키러 가는 승객에게 본인도 얼마 전 장애인을 위한 이동수단을 찾지 못해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자신도 그런 걸 당해봤기 때문에 잘 안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보면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 단체와 승객을 되레 갈라치기 하여 서로 싸우게 한 것이 사건의 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서울교통공사 트위터 / 더인디고

 

이 사건 역시 당일 보도자료에 공사의 언론 플레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진실이 폭로되자 서울교통공사는 그제야 임종 사건을 거론한 보도자료가 여론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변명하기 바빴습니다. 사진과 보도자료를 전달하며 공사가 줬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건 장애인 단체와 대립각을 세우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일관하면서 말이죠. 서울교통공사는 올해만 국고보조금으로 655억 원을 받는 서울시의 대표적 공기업입니다.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시민, 특히 약자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에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그 돈을 저런 저열한 언론플레이에 쓰고 있었던 겁니다. 3월 17일 YTN 보도 이후 서울교통공사는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번 보도는 개인이 작성한 문서를 마치 공사의 공식 의견인 것처럼 비춰지게 하여 시민 분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라고 하여 제대로 된 사과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출처 - 비마이너

 

대한민국에서 시대 퇴행적인 기관이 서울교통공사만은 아니죠. 지난 2월 17일 대법원은 2014년 시작된 장애인의 시외이동권 관련 소송에서 장애인인 원고들이 모든 광역, 시외버스를 이용할 현실적 개연성이 없다며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했습니다. 고등법원은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은 묻지 않았지만 버스회사들에 휠체어 승강설비를 마련하라는 적극적 조치를 명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장애인 시외이동권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면하게 해준 고등법원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버스 회사가 장애인 설비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장애인들에게 시외버스를 타지 말라는 얘기나 진배없죠. 현재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한 시외, 고속버스는 전국에 7대뿐이니까요. 지역당 7대가 아니라 전국에서 말입니다. 장애인은 법에 명시된 이동권조차 누릴 수 없다는 것, 바로 이게 8년 만에 내린 사법부의 판단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판결이죠.

 

출처 - 피델체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출처 - 경향신문

 

대선 직후인 지난 3월 14일 장애인 단체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려다가 경찰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이날 장애인 단체는 당선을 축하하는 난과 장애인 권리예산 관련 요구안을 전달하고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말이죠. 문재인 정부 때는 인수위 바로 앞에서 전달했고 면담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때도 인수위에서 이들의 축하와 요구안을 받는 시늉은 했습니다. 그런데 국민과 소통하겠다던 윤석열 인수위는 경찰을 동원해 장애인 단체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러고서 어떻게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는 건지, 무엇이 공정인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5년간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수모를 겪어야 할지 참으로 걱정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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