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인 미국이 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4년 전 트럼프가 당선된 순간부터 예정된 일이었겠지만 마지막까지 미국 민주주의 역사의 근간을 흔드는 큰 오점을 남기는 일이 발생한 것이죠.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트럼프 지지자들이 폭도처럼 모여 회의 중인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4시간 동안 파괴와 폭력사태를 유발했습니다.
연합뉴스
지난 6일 오후 1시는 주별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인증하고 대통령 당선인을 합법적 당선인으로 확정하는 상·하원 합동회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요식 행위에 불과했던 회의지만 이번에는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 불복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면서 당선인 확정의 마지막 절차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가 무사히 끝나면 트럼프가 더는 선거에 불복할 명분이 없어져 바이든이 이론의 여지없이 미국 대통령으로 확정되는 자리였죠.
출처 - 연합뉴스
이 때문인지 회의가 시작되자 공화당 의원들은 애리조나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문제 삼으면서 격론을 벌였습니다. 일부 의원은 선거에 불복하는 트럼프에게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작 1시간여 만에 회의는 갑자기 중단되고 상·하원 의원들은 폭탄 테러를 대비하기라도 하듯 벙커로 긴급 대피해야 했습니다. 오전부터 의회 앞에서 바이든 인증 반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트럼프주의자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넘어 회의 중인 의회로 난입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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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며 시위대 여성 1명은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시위대를 막던 경찰들도 줄줄이 부상해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결국 경찰은 최루가스까지 동원했지만 수로 밀어붙인 트럼프주의자들은 의사당 내부까지 쳐들어가 상원 의장석과 하원의장실을 점령한 채 각종 기물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 사태는 주방위군과 연방경찰까지 투입된 뒤에야 4시간 만에 정리됐습니다.
출처 - 트위터
미국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여러 번 밑바닥을 보여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국회 난입 사태는 민주주의의 바닥 밑 지하실이 드러난 정도의 무거운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회 경찰이 트럼프 지지자들로 구성된 시위대에게 정문을 개방해주고 방관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일부 의회 경찰은 의사당 방어가 아니라 시위대와 셀카를 함께 찍는 등 혼돈의 도가니를 연출했습니다. 더구나 시위대와 이를 방관한 경찰들은 대부분 백인들이어서 이번 국회 난입 사건으로 경찰력의 인종차별적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백인 폭도들은 바리케이드를 넘어 국회에 난입해 폭력사태를 일으켜도 현장에선 10여 명의 연행자밖에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트위터
이 사태가 일어나기 바로 전날 생존을 위해 오바마케어 폐지에 항의하러 온 장애인 180명은 의회 경찰들이 즉시 밖으로 끌어내 체포했습니다. 길을 가다 그냥 체포되는 흑인이 하루에 7000여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백인들이 국가의 심장부인 국회의사당에서 반달리즘을 일삼아도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고 체포조차 하지 않는 경찰의 대응을 보면 지난 4년간 트럼프가 심화시킨 미국의 인종차별과 약자에 대한 공격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출처 - CNN
사태가 심각해지자 트럼프는 의회의 시위대 해산을 요구하는 영상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지만 지지자들을 두둔하며 우리의 승리를 빼앗긴 것은 사실이라고 말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습니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주방위군과 연방경찰을 부른 것도 트럼프가 아니라 부통령인 펜스였습니다. 이 때문에 공화당 내에서도 트럼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빗발쳤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시위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공화당 하원 서열 3위인 리즈 체니는 트럼프가 지지자들의 신뢰를 오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화당인 밋 롬니 상원의원은 이는 역사의 수치이며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반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심지어 트럼프 정권의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이번 국회 난입은 테러범과 다를 바 없는 시위대가 벌인 미국에 대한 쿠데타라면서 비난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출처 - AFP·연합
공화당이 이럴 정도니 민주당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기자회견에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이라면서 이는 시위가 아니라 반란이라고 강하게 규탄했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은 트럼프의 임기가 2주밖에 남지 않았지만 당장 탄핵해야 한다며 펜스 부통령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수정헌법 25조에는 대통령이 그 직의 권한과 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부통령이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서는 펜스 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국회 내 많은 의원들이 트럼프가 무사히 임기를 마치도록 하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크나큰 오점이 될 것이라는 데 공감하는 듯합니다. 투명한 선거를 하고, 그 선거가 투명했다면 민의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대전제일 텐데 그 근간을 통째로 흔들어버리는 사태를 야기했으니까요.
출처 - 연합뉴스
폭동 해산 후 계속된 회의를 통해 결국 바이든의 당선이 최종 확정됐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추락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습니다. 자업자득인 면이 없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트럼프를 자기네 손으로 당선시키고 강자의 이기심을 용인하면서 약자들의 호소를 귓잔등으로도 안 들었죠. 그 결과 만연한 인종차별과 혐오, 증오가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공교육은 붕괴했고, 코로나19 앞에 의료 체계 역시 붕괴했으며,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마약 같은 가짜뉴스가 횡행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의 결과가 이번 사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득권층 혹은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자들이 부리는 이기심의 마지막 단발마로 보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미국에서 벌어진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처럼 보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민주주의도 위태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는 트럼프 같은 이명박과 박근혜를 국민이 선출하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사실 국회의사당에 침입한 폭도들은 우리나라에 먼저 있었습니다. 지난 2019년 말 태극기 부대가 국회의사당 경내에 침입해 본관 난입까지 시도한 일이 있었죠. 성조기를 흔들고 꽹과리를 치며 난입한 이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 의원들은 그나마 이번 폭도들의 국회 난입 사태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이와 반대로 제1야당 대표마저 태극기 부대의 국회 난입 시위를 격려하려고 나타났습니다. 당시 황교안과 김문수 등이 나타나 시위대를 격려했던 일을 생각하면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이번 미국의 사태가 결코 남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처럼 혐오와 차별에 뿌리를 둔 이기심의 단발마가 터지기 전에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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