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보도

고(故) 박원순 시장 사망을 기억하며

by 생각비행 2020. 7. 14.

며칠 전, 고(故) 박원순 시장의 실종 보도와 연이은 사망 보도를 보면서 마치 꿈을 꾸는 듯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고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호감을 품게 된 것은 그가 작년에 추진했던 ‘On Seoul Safe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였다. 생각비행 출판사에서 출간한 《누구나 흔들리며 페미니스트가 된다》라는 책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고 박원순 시장이 작년에 처음으로 추진했던 그 프로젝트에서 나는 10여 명의 크리에이터 중 한 명으로 카드뉴스를 제작했고, 프로젝트 출범식에도 참석했다.


출범식에서 만난 그는, 이 프로젝트에 상당히 열의가 있어 보였다. 당시 이 프로젝트는 고 박원순 시장이 전국 지자체 중에서 최초로, 그리고 서울에서도 제1회로 추진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의 각별한 관심과 적극적인 의지 없이 추진되기 어려웠을 것은 자명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시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성희롱 예방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서울 시내 지하철역 어디에서나 디지털 성범죄 예방 공익광고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고 박원순 시장이 그간 여성 인권을 위해 했던 노력은 손에 꼽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과거 변호사 시절 그는 국내 최초로 성희롱 재판 변호를 맡아 승소했으며,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울시장 재임 시절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출산율’이 아닌 ‘출생률’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남다른 성인지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성인지 예산을 도입했고, 성평등 관련 조례를 제정했으며, 여성안심귀가서비스, 여성안심택배함 설치 등 여성 안전을 위한 제도들도 운용했다.


그는 대권 물망에 오르내리는 정치인 중 여성 인권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 앞서갔다. 그래서 내심 그가 다음 대통령이 되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신뢰하고 지지하던 정치인이었던 만큼 슬픔과 배신감이 뒤얽힌 복잡한 심경으로 요 며칠을 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기대를 걸던 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어쩌면,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슬픔과 배신감을 감당하지 못해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지자가 겪는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이유로 피해자를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박원순을 무너뜨린 사람은 피해자가 아닌, 박원순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던 정치인이 사실은 자신의 비서에게 성범죄로 고발당했다는 데서 그가 과거에 추진했던 여성 인권 정책들도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공과와 개인적인 비위는 구별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시가 서울시장의 소유물이 아니듯, 그의 정책들도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변호사 시절 개인적으로 했던 활동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정치인으로서 추진한 정책들은 유권자를 대변했을 따름이다.


그의 곁에는 여성 인권을 부르짖는 이름 없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여성 정책을 연구했던 연구자들이 있었고, 그를 뽑아준 유권자들이 있었다. 그가 추진한 정책들은 우리가 모두 함께 만든 것이지, 그의 개인적인 성과가 아니다. 여성 관련 정책뿐만 아니라 다른 정책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없이도, 우리를 대표할 다른 사람을 선출하여 잘 해낼 수 있다. 한 사람이 한 진영 전체를 대변하는 듯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우상화요, 한국 정치의 커다란 문제점이다. 어떤 진영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쓰러지면 그 진영 전체가 쓰러지는 듯 과도하게 개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우리 시민사회가 그만큼 약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네가 잘나가는 정치인을 무너뜨렸다.”라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2차 가해라는 점에서도 문제이지만, 우리 민주주의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18년부터 시작된 미투 운동으로 인해 많은 유력한 정치인이 추락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그것을 고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미투 운동이 장기적으로는 한국 민주주의의 체질을 개선하여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믿는다.


남성 쪽은 사회적 입지가 굳건하고 여성 쪽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 “너 하나 참았으면 사회 전체에 더 보탬이 되었을 텐데”라는 비난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풍토 때문에 여성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적기 때문에 남성을 밀어주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바로 그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여성이 사회에 기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장래가 촉망되던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 초년 시절 성범죄로 인해 싹도 틔워보지 못한 채 무너진다. 유력한 남성을 상대로 성범죄를 고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고발한 여성들이 이토록 많다면,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성범죄가 없었더라면 여성 기업인으로, 여성 정치인으로 성공했을지 모르는 수많은 여성들이 젊은 나이에 성범죄로 인해 자신의 커리어를 잃고, 더 성장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결과만 보고 ‘어차피 성공하지도 못할 여성들이 성공한 남자의 발목을 잡는다.’라고 비난한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피해 여성이 가해 남성의 미래를 위해 참았다면, 우리 사회 전체에 더 보탬이 되었을까? 이런 의문은 우선 인권의 차원에서 옳지 못하지만, 잠시 그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가해 남성이 능력을 인정받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짓밟은 수많은 피해 여성 중 그보다 더 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었을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남에게 가해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킨 사람은, 그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한 바 이상으로 사회 전체에 피해를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미래의 인재를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위대한 능력보다 여러 사람의 작은 능력이 모여 이뤄내는 결과를 더 중시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치인의 범죄는 용인될 수 없다. 단지 ‘악한 자가 벌 받아야 한다.’라는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결로 몰아가선 안 된다. 범죄는, 특히 정치인의 범죄는 특정인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범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유주 _《누구나 흔들리며 페미니스트가 된다》 저자.

 

* 생각비행 저자 중 한 분인 이유주 작가의 기고문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