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나치의 만행을 빼돌린 필름으로 증언하다

by 생각비행 2020. 7. 3.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최다 세계기록유산 보유국입니다.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많은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역사로 이어진 듯합니다. 지난 6월 25일 광주시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밝혔습니다. 정부 지원 없이 민간 NGO가 주도적으로 추진해 달성한 성과이기에 그 의미가 큽니다.

 

최근 정부는 일본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취소를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군함도로 알려진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의 섬 하시마는 1940년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가 100명 이상 숨진 곳이죠. 일본은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 왜곡은 어떤 이유로든 허용되어선 안 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치의 참혹한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진사 한 명을 소개할까 합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신간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Francisco Boix)’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영화를 보실 수 있는데요, 그래픽 노블인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가 원작입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절멸될 수감자들”

1938년 3월 독일 제3제국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지 며칠 후, 새 정권은 오스트리아에 집단수용소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한다. 나치 친위대는 포로의 수가 급증할 것을 내다보고 수용소 추가 건설을 고려했다. 동시에 나치 친위대 사령부는 건설자재 산업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렇게 친위대는 강제수용소 확장을 정당화하고 수용소 내 활용 가능한 노동력을 독점함으로써 친위대의 재정을 튼실히 하고자 했다.


친위대는 그들의 경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용소 부지를 물색하는 데 착수하여 마침내 화강암 채석장을 인근에 둔 마우트하우젠(Mauthausen)과 구젠(Gusen)을 낙점했다. 나치 친위대 기업은 독일 제3제국의 화려한 기념물과 건물에 필요한 건축자재를 수용소 포로들을 동원해 채석하여 공급할 계획이었다.


1938년 8월 8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포로를 태운 첫 기차가 마우트하우젠에 도착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수감될 수용소 건설을 위해 노동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화강암 채석장 개발과 확장에도 동원되었다. 수감자들은 극도로 열악한 조건 아래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적합한 도구나 작업복조차 받지 못했고, 늘 부족한 음식에 시달려야 했으며,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받지 못해 숱한 질병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심각한 사고의 위험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고된 노역 과정에는 친위대의 끊임없는 폭행이 이어졌다.


1938년 설치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는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약 33만 명이 수감되었으며, 그중 12만 명 이상이 죽었다. 마우트하우젠은 나치에 의해 기획된 절멸수용소(Extermination camp)였다. 이 명칭은 공식적으로 존재한 적은 없으나, 실제 역할은 다른 강제수용소와 명확히 구분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6개의 강제수용소는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설립했다. 이곳은 범죄 행위에 대해 형벌을 주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전쟁 중 절멸 정책을 일괄 마무리하는 곳이었다. 희생자의 시체는 통상 소각 처분 내지 집단 묘지에 묻어 처리했다.
1941년 1월 2일, 당시 나치 독일의 국가보안본부 수장인 하이드리히(Heydrich)는 25개에 달하는 강제수용소를 3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카테고리I 수용소는 나치의 입장에서 개선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위한 수용소였다. 다하우, 작센하우젠, 아우슈비츠 등이 그런 곳이었다. 카테고리II 수용소는 부담스럽지만 재교육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위한 수용소였다. 부헨발트, 플로센뷔르크, 노엔가메, 비르케노 등이 그런 곳이었다. 카테고리III 수용소는 교화 가능성이 없는 수감자들이 수용되었고, 그들은 노동을 통해 절멸될 운명이었다.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 마우트하우젠, 구젠 등이 그런 곳이었다.

 


“나치의 만행을 폭로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프랑시스코 부아”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입은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프랑코와 히틀러가 조기에 맺은 동맹을 참작할 때 말이다. 그러나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안티-파시스트 군대가 유럽의 다른 곳보다 일찍 조직된 스페인의 복잡한 실상을 드러낸다.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대항하여 무기를 든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1936년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의 지지를 받은 프랑코 장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신속한 귀환을 희망하며 프랑스로 대거 망명했는데, 그 수가 50만 명에 달한다.


안전한 피난처로 굳게 믿었던 나라에서 스페인 공화파 망명자들은 자신들을 “달갑지 않은 빨갱이”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야 했다. 남자들은 프랑스 군대, 외인부대, 보병대대 또는 군사 시설인 외국인 노동자 회사(CTE)로 들어가도록 강요받았다. 공장, 농장, 군사방어 시설의 건설 현장에서 하급 노동을 수행하면서 그들은 “삽과 곡괭이 부대”가 되어갔다. 1940년 5월 독일 부대의 공격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바로 이런 회사에서 일한 스페인 망명자들이었다. 생존자들은 흩어져 도주하거나 스위스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계속하다가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었다. 약 1만 명에 달하는 이들을 비시정부(Vichy政府)는 프랑스 군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포기해버렸다. 스페인 정권도 히틀러와 협상하면서 마찬가지 태도를 취했다. 결국 고국인 스페인으로도, 망명지인 프랑스로도 갈 수 없었던 이들은 대부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0년 8월 시작된 강제수용은 1944년까지 이어졌다. 대략 1만 명의 공화파 사람들이 공화정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파시즘에 맞서 투쟁했다는 이유로 나치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1941년 1월 27일 1506명이라는 가장 큰 이주 대열 속에 한 명의 사진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프랑시스코 부아(Francisco Boix)’다.


초기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스페인 포로들에게는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수용소 내 주요한 보직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더 좋은 식단과 생존의 기회가 보장된다는 의미였다. 미용사, 음악가, 소목장 등의 직군에서 일하면서 이들은 수용소에서 비교적 오래 존속할 수 있었다. 수용소를 지휘하는 나치 친위대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부리는 편이 유용하다고 여겼다. 이런 특별한 혜택을 받은 수감자들을 ‘프로미넨텐’이라고 불렀다.


프랑시스코 부아는 스페인 수감자들인 동료들에 의해 프로미넨텐으로 연결되었으며, 수용소 내에 있던 신원확인국에서 일하며 필름을 현상하는 일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나치에 의해 은밀하게 작동하는 끔찍한 체계를 목도한다. 프랑시스코는 신원확인국의 책임자였던 파울 릭켄을 도우면서 그가 꾸미고 있는 일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파울 릭켄은 나치 친위대나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 나치의 앞잡이)에 의해 살해된 포로들의 시신을 자살이나 사고사로 위장했다. 때로는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 죽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시신의 자세를 바꾼 다음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파울 릭켄은 노출, 초점, 구도 등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촬영했다. 그는 단순히 시체의 모습을 찍는 게 아니라 마치 자연의 아름다움을 불멸화하는 것처럼, 영상의 구성과 원근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자신만의 미적 감각을 총동원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프랑시스코 부아는 스페인 수감자들의 지하 레지스탕스 한가운데에서 동지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나치의 범죄행각을 드러내고 나치 최고 수장들을 고발하는 데 증거가 될 필름을 빼돌리려는 은밀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이 계획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선 대장정의 출발일 뿐이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한 인물의 영웅담을 기록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스페인 생존자들의 운명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픽 노블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실화이며, 책의 후반부는 사료를 중심으로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참혹한 삶을 증언하고 있다.  


프랑시스코 부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빼돌린 필름으로 나치의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수많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역사적으로 조명되었다. 그의 생생한 증언은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며, 그가 남긴 기록 역시 불멸할 것이다.


 

 

 

▌만든 이들

그림  페드로 J. 콜롬보(Pedro J. COLOMBO)
페드로 콜롬보는 1978년 스페인 그라노예르스(Granollers)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만화 주인공인 스파이더맨(Spider-Man)이 되기를 꿈꾸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뒤 자신의 영웅과 최대한 가까운 것(만화)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998~2000년 바르셀로나의 호소 만화 학교(Éole de bande désiné Joso)에서 제9의 예술의 역사와 자신이 그릴 만화의 기본을 공부했다. 동료와 만화가 친구들의 우정과 자기초월의 경향에 힘입어 프랑스의 만화 전문 출판사인 다르고(Dargaud)의 시리즈물인 《셋...그리고 천사(Trois...et l’ange)》 세 권을 그리는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합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경력을 다져왔다.
2001년에 배우자이자 자신의 채색 전담이 될 아인차네(Aintzane)를 만났고, 현재 두 사람은 빌바오(Bilbao)에서 살고 있다. 시나리오작가인 살바 루비오와 함께 롱바르 출판사에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출간했다.

 

채색  아인차네 란다(Aintzane Landa)
아인차네 란다는 1980년 스페인 바라칼도(Barakaldo)에서 태어났다. 배우자인 만화가 페드로 콜롬보가 그린 작품의 채색을 맡고 있다.
유럽에서 명작 만화인 《마팔다(Mafalda)》, 《탱탱(Tintin)》, 《아스테릭스(Astéix)》를 보며 자랐고, 지금도 손에 잡히는 작품들이면 죄다 읽는다.
그라나다(Granada)에서 페드로와 정착하면서 채색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기에와 프랑스 출판사의 만화 시리즈물 채색을 다수 담당했으며, 페드로 곁에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채색 작업을 했다.
현재 페드로와 함께 빌바오에 살고 있으며, 여가를 이용해 아미구루미, 수첩, 레터링, 스크랩북 등을 만든다.

 

글  살바 루비오(Salva Rubio)
살바 루비오는 1978년 스페인 마드리드(Madrid)에서 태어났다. 시나리오작가, 작가, 역사가다.
역사물 기획이 전문으로, 스페인작가출판협회(SGAE)가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 ‘Julio Alejandro’의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며 많은 상을 받았으며, 2010년에는 그의 단편영화 중 하나가 스페인 세자르상에 해당하는 고야상(los Premios Goya) 예선에 진출했다.
마드리드 카를로스Ⅲ대학에서 영화와 텔레비전 시나리오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단편영화뿐 아니라 장편 애니메이션 〈딥(Deep)〉(2017) 등 스페인 소재 영화제작사의 다양한 기획에 참여했다. 작가로서 다양한 창작물과 각색 작품을 발표했으며 서사에 대한 강의도 한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모네, 빛의 노마드(Monet, Nomade de la lumièe)》에 이어 만화 시나리오작가로서 두 번째로 출간한 그래픽노블이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삽화가이며 여가를 이용해 재즈 트럼펫 연주를 한다.

 

옮김 문박엘리
서울에서 자라 학교를 다녔으며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다.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했으며 일반회사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다. 인간과 자연과 우주 만물의 연계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옮긴 책으로 《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 《생물의 다양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