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안타깝게도 의인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임세원 교수가 담당 환자인 박모 씨를 진료하던 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자기 몸만 지키려면 충분히 살 수 있었으나 남을 챙기다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임세원 교수를 추모하고, 그의 죽음을 계기로 진료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임세원 교수의 담당 환자였던 박모 씨는 예약없이 찾아왔습니다. 조울증으로 격리 입원 치료를 받다가 퇴원한 후 수개월간 병원을 찾은 적이 없었다고 하죠. 정규 진료 시간을 훌쩍 넘긴 저녁에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를 임 교수는 마다하지 않고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모 씨는 상담 도중 문을 잠그고 준비해간 흉기로 임세원 교수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KBS
당시 진료실에는 만약의 상황에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임 교수는 그곳으로 일단 몸을 피했으나 간호사 등 밖에 있는 이들이 걱정되었던 그는 대피 공간을 나와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다고 하죠. 남을 피하게 하려다 흉기에 찔린 임 교수는 응급실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습니다.
임세원 교수는 20여 년간 우울증, 불안장애 전문가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자살 예방에 힘써온 것으로 알려졌죠. 100여 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고, 한국형 표준 자살 예방 교육인 '보고, 듣고, 말하기'를 개발했으며,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저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내기도 했습니다.
출처 - KBS
이 저서에서 임 교수는 자신도 3년여를 우울증을 앓았으며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허리 디스크로 생긴 통증이 낫지 않자 차를 몰고 나가 난간을 들이받아 죽으려고 했으나 차 열쇠를 찾다가 잠든 가족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고 하죠. 그 이후에는 자신이 우울증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관해 얘기합니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임 교수는 환자와 공감하는 삶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SNS에 환자를 보듬는 마음이 묻어나는 글들을 많이 썼기에 인터넷상에 그를 추모하는 글이 수없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12월 31일 오후 코트를 입고 검은색 모자를 쓴 30살 남성 박모 씨가 집을 나섭니다. 박모 씨는 마트에 들러 흉기를 산 뒤 강북삼성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박모 씨는 경찰에서 "임 교수에게 '내 머리에 소형 폭탄을 넣고 장기는 어디에 팔아먹었냐'며 욕설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죠. 경찰은 임세원 교수를 살해한 혐의로 박모 씨를 구속기소 했습니다. 경찰은 박모 씨가 '양극성 정서장애를 앓던 중 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박모 씨가 2010년 군 제대 이후 경기도 하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면서 컴퓨터 게임에 몰두한 사실도 추가로 확인되었죠. 박모 씨의 망상은 지난 2015년 강제 입원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조울증을 앓고 있던 박모 씨가 가족의 동의로 입원을 하게 되자 당시 주치의였던 임세원 교수에게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출처 - KBS
의협은 새해 첫날 이번 사건이 예고된 비극이라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습니다. 국회에서 응급의료 종사자 폭행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통과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반 진료실에서 의사가 사망하는 참변이 벌어졌으니까요. 실제로 지난해 의료 방해 행위로 신고, 고소된 건수는 893건으로 하루 평균 2~3건 수준으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 폭행이 가장 많습니다. 정신과의 경우 회복과 악화를 반복하는 병인 까닭에 정신병동에 근무하는 의료진은 환자로부터 신체 손상을 입을 위험이 다른 의료진보다도 285.5배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지난 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보건복지부는 병원 진료실 내 대피 통로(후문)와 비상벨 설치, 보안 인력 배치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의료 현장에서 폭행 사건이 발생할 시 엄정한 법 집행을 위해 행정안전부, 경찰청 등과 협조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의료인 안전 대책을 위한 법안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위원회 윤종필 의원(자유한국당)이 지난 9일 대표 발의한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건의료인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서와 연계된 긴급출동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환자 및 보호자가 의료진을 폭행할 때 가중처벌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죠.
출처 - KBS
임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의료계는 임세원법을 발의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사건이 벌어지게 될 때 현실적으로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진료 공간에 비상벨과 대피 공간이 있다고 해도 진료 특성상 기본적으로 의사와 환자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위해를 가하겠다는 마음을 품는다면 막을 방법이 거의 없죠. 임세원 교수도 환자의 이상 행동을 보고 비상벨을 눌렀지만 안전요원이 도착했을 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후였습니다. 그렇다고 의사가 환자와 격리된 상태에서 정신과 진료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죠. 그래도 임 교수의 죽음 이후 병원들도 자체적으로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출처 - 뉴스1
서울대병원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 상시 배치된 보안 요원을 1명에서 2명으로 증원했고 응급실 등 일부 근무지 보안원을 ‘원내 폴리스’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원내 폴리스는 삼단봉, 전기충격기 등 진압 장비를 착용합니다. 다른 병원들도 보안 인력 근무시간이나 인원을 늘리거나 비상벨 설치 등의 대책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한두 가지 개선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안전요원 배치, 폭행 시 처벌 강화 등과 같은 단순한 조처보다 이런 환자들이 지역사회와 시설에서 보호받으며 치료를 받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출처 - 뉴스와이어
이번 사건을 정신질환자들을 핍박하는 핑계로 활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해자인 박모 씨가 앓고 있는 조울증의 경우 꾸준히 치료하지 않으면 재발률이 높고 격리 입원 치료를 받다가 1년여간 진료를 받지 않아 증상이 악화할 대로 악화한 경우였습니다. 적절하게 치료받지 못한 환자의 공격성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번 사건이 정확히 정신질환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의료계에서 피의자 범행 동기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정밀한 정신건강의학적 감정을 요구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작년에 한창 언론, 방송에 다뤄졌다시피 의사를 공격하는 사람은 정신질환자가 아니어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강화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 평생토록 정신질환자들을 보듬으며 살았던 임세원 교수가 싫어할 일일 테니까요. 평생을 헌신하다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임세원 교수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