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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친절까지 외주화하는 세상 - SRT 청소 노동자 인사 논란

by 생각비행 2018. 1. 19.

얼마 전 한 사진이 SNS상에서 공분을 샀습니다. 들어오는 기차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는 청소노동자의 사진이었죠. 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민간 고속열차인 SRT를 이용하면서 열차가 역에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던 청소노동자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객실을 정리정돈하는 용역회사 직원들인데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객차 길이 간격으로 도열해 허리를 구부려 공손하게 인사한다고 하는데요, 기차가 멈출 때까지 인사를 거듭한다고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 사진을 올린 분은 안전하게 장거리 운행을 마친 기관사와 승무원들의 노고에 드리는 헌사 같은 것이라 생각하려고 했는데 기관차가 지나간 후에도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는 그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죠. 그러면서 과잉 친절을 강요하는 어떤 압박이 있지 않았겠나 싶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에 공감한 사람들은 청소하는 사람이 무슨 노예도 아니고 저렇게 도열해서 대기하다 인사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했습니다. 수많은 항의가 들어가자 SRT 운영사는 이와 반대로 왜 인사를 안 하냐는 민원이 과거에 많았다면서 난색을 표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들이면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얘긴데, 참으로 씁쓸한 풍경입니다. 

 

물론 일본 같은 철도 왕국에서도 기차가 떠나거나 들어올 때 인사나 수신호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나라처럼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차에 승차하는 기관사나 승무원 같은 정규직이며, 승객을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의미에서 하는 인사입니다. 친절까지 비정규직에게 외주를 주는 우리의 현실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출처 - 매일경제


사실 우리의 민낯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경제지인 《매일경제》는 ‘평창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이라는 기사를 내어 평창 올림픽 경기장을 향해 달리는 KTX 용산역 일대가 폐가 등 낙후지를 그대로 노출하니 임시 가림막이라도 설치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국격을 높일 올림픽이 되레 국가 이미지 훼손을 가져올까 우려된다는 게 이유였죠. 대체 기자가 생각하는 부끄러운 민낯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마치 전두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민낯이 무엇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기사는 이건 다 용산 재개발이 안 되었기 때문이라며 건설 마피아들을 핥아주기에 바쁩니다. 아무리 낙후된 곳이라도 엄연히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88올림픽 때처럼 또 사람들을 타지로 몰아내어 가둬두고 싶은 걸까요? 정말요?


출처 - 한겨레


그나마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기사가 같은 날 나와 다행이었습니다. 환경부는 환경미화원 안전사고의 원인인 새벽 작업을 앞으로 낮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연평균 590건에 달하는 환경미화원 안전사고를 오는 2022년까지 90퍼센트 이상 줄이겠다는 방침입니다. 새벽 작업은 피로 누적의 원인이 되며 밤 거리의 사고 위험 또한 큽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광주에서 쓰레기를 치우던 청소 노동자가 쓰레기 수거차 뒷바퀴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죠. 음주운전이나 밤거리 부주의 운전에 의해 숨지거나 다치는 청소 노동자들은 셀 수도 없습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쓰레기 수거를 새벽이 아니라 낮에 합니다. 쓰레기 수거 작업은 남이 봐서는 안 될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하고 누군가 해야 하는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런 일을 두고 미관 차원이니 어쩌니 하면서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새벽에 일을 시켰던 그동안의 관행이 직업에 귀천이 있는 듯한 오해를 낳는 겁니다. 

 

청소 노동자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전 세계가 깨닫게 된 사건이 있죠. 2017년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주요 도시를 열흘 넘게 쓰레기 대란으로 몰고 갔던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약 6500명의 임시직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이자 고용 계약 갱신과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6월 19일부터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정규직으로 정식 계약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청소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은 사이 그리스 주요 도시 거리는 쓰레기로 가득 찼고, 무더위 때문에 벌레가 들끓고 악취를 풍겨 시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결국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노동자 대표들을 만나 계약 연장과 신규 채용 추진을 약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청소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이때 정부는 일자리를 구실로 정부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서 파업으로 인해 피해가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비난했고, 노동자들은 고조되는 비판 여론과 혹서 예보에 마음을 돌려 결국 일터로 복귀하게 되었죠.

 

출처 - 연합뉴스
 

그리스에서 일어난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를 임금 투쟁 정도로 단순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원인을 들여다보면 그리스가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2010년 이후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채권단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재정 지출을 대폭 축소하는 바람에 공공 부문에서 정규직 채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는 현재 소방, 환경미화 등 필수적인 부문조차 저임금 계약직 노동자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죠.

출처 - 경향신문

 

청소 노동자가 하는 일이 의사들의 의료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청소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노동이 공중 보건의 가장 중요한 바탕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모든 노동이 존중받아야 하며 친절마저 외주화하여 강요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합니다. 넓게 보면 대한민국 안에 사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위한 노동자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일상이 누군가의 노동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회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하는 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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