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에 경찰 수천 명이 치닫고 졸업식이 파행을 겪으며 정권에 대한 비판과 총장 퇴진을 외치는 모습... 아마 1980년대 독재 타도 시절 대학가 풍경인가 하고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2016년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자대학교인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이런 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생교육 단과대학사업인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화여대의 학내 분규 사태가 한 달을 맞은 지난 8월 26일, 교내 대강당에서 개최된 2015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은 마치 독재 시대 때처럼 여러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출처 – 헤럴드 경제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이 학위수여식사를 낭독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서자 2층에 자리 잡고 있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해방 이화, 총장 퇴진"이란 구호를 외치며 일어났습니다. 학부모들과 일반 학생들이 자리 잡은 대강당 2층에서는 최 총장을 반대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 설치 문제를 놓고 학교 측과 학생 측이 충돌을 빚었습니다. 이 때문에 학부모들이 나서서 교직원들을 막아서는 일도 생겼습니다. 한 달 동안 벌어진 교내 충돌 상황이 그대로 재연된 겁니다.
출처 - 한국일보
이화여대 내의 단과대학사업이 이런 사태로 비화한 원인은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평생교육 단과대학사업인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때문입니다. 미래라이프대학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사업입니다. 2년 6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직장인들이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코스죠.
학생들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욕구를 참아가며 인생을 올인해 이화여대에 입학해 허리가 휘는 등록금을 내고 4년 동안 공부해야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반면 직장인들은 2년여 만에 간단히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학교 측은 학생들과 충분히 논의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미래라이프대학을 신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돈벌이를 위해 학문을 버렸다며 학교 측이 노골적인 학위 장사를 시작했다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출처 - 뉴시스
문제를 인식한 이화여대 학생들은 지난 7월 28일 SNS를 통해 소통하며 삼삼오오 이화여대 평의회 위원들이 회의 중이던 본관에 모여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사업 방침에 반대하는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몇 명에서 시작된 농성이었으나 점점 참여하는 학생이 수백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또다시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학교 측에서 112에 신고하여 자신들이 감금되었다고 한 것이죠. 사태를 관망하던 경찰은 옳다구나 싶었는지 무려 1600명의 경찰을 이화여대 시위 현장에 투입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200여 명의 여학생이 있었으니 무려 8배 정도의 경찰력이 투입된 겁니다.
지난해 10월 29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여성의 힘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제50회 전국여성대회에 참석차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을 거부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인 학생들에 의해 가로막혔던 일이 기업 납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모교를 방문한 대통령에게 국정교과서와 노동개악 추진을 중단하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손솔 총학생회장은 "박 대통령은 대학가에서 커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은 적이 있느냐”며 "유신시대로 되돌리려는 박 대통령의 방문은 필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대 사태 때 이례적으로 1600명의 경찰력이 동원된 것이 지난번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대통령을 욕보인 학생들을 벌하는 듯한 느낌은 저희만 받은 걸까요? 아무튼 학교와 경찰이 계속 악수를 두며 이대 사태가 커지자 이화여대는 우리가 안 불렀는데 경찰이 왔다며 거짓말로 사태를 수습하려다 일을 더 크게 키웠습니다. 회의장에 감금된 위원을 나오게 해달라고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 명의로 들어간 공문도 공개되었죠. 정황을 잘 살피면 대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총장과 학교 측이 경찰에 팔아넘긴 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뉴시스
이후 이화여대 사태는 점입가경입니다. 지난 8월 1일 미래라이프대학사업에 반대하는 재학생들의 점거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공권력 투입에 반발한 이화여대 졸업생들과 학부모들까지 가세해 경찰 추산 7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문제로 논란을 겪고 있는 동국대, 외대 등도 성명을 내고 각기 시위에 돌입했지요.
출처 - 한국일보
이번 이화여대 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 근원에는 정부가 주도한 대학 구조조정 사업이 있습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가시화되어 대학 부실에 대비해 선제적 구조조정을 시작한 것인데요, 학내 의견 수렴 없이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되어 끝없는 갈등을 빚었죠. 진행 방법도 문제였습니다. 재정지원사업을 경쟁 구조로 재편해 대학들의 복종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등록금을 멋대로 올리기 힘든 상황에서 정부 지원금으로 재정의 상당 부분을 충당해야 하는 대학으로서는 이 사업을 따야만 했습니다. 결국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닌 직업훈련 양성소로 탈바꿈했고, 학과 통폐합을 진행한 것도 모자라 돈벌이에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이대 사태 역시 돈이 되는 사업을 따내기 급급해 벌어진 일입니다. 돈을 미끼로 학교를 쥐고 흔드는 정부와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학교 당국의 독단적 의사 결정 구조 및 후진적 마인드가 사태의 본질인 겁니다.
출처 - 한국일보
이화여대는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들과 학부모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들을 경찰에 떠넘기고 대화조차 회피해온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처 - 한국일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운동권 문화가 이끌던 1980년대 대학 시위나 농성은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학원 자율화 등의 외침이 학교가 연루된 시위의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시위의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이대 사태처럼 학생들은 이제 외부 사회가 아닌 학내 문제, 자신의 문제에 거세게 분노합니다. 시위 현장에선 민중가요가 아닌 소녀시대의 노래를 합창합니다. 과거 의식화 교육을 해주던 선배와 조직의 힘 대신 공감과 SNS를 통한 느슨한 연결이 농성 현장으로 학생들을 견인합니다. 시위의 주모자가 없는 이대 사태에서 주모자 색출에 전전긍긍하는 학교나 경찰을 보노라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사회도 달라졌습니다. 1980년대는 시위를 했더라도 졸업하고 나면 대기업을 골라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사회적 문제와 민주주의, 정의 등의 대의에 학생들이 청춘을 불사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도 자기 한 몸 건사하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거의 모든 대학생이 3000만 원에 달하는 빚을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번 이대 사태에서 학생들이 이례적으로 시위와 농성을 꾸준히 이어가고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적극 참여하여 힘을 실어주는 것은, 고생하여 손에 넣은 이대 졸업장을 헐값으로 만들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뇌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뀐 시대, 바뀐 사회, 바뀐 학교... 변해가는 현실 때문에 입맛이 쓰기도 하지만 결국 대학은 학생이 주체로서 당당히 설 수 있을 때 가치 있는 교육의 장이 되는 겁니다. 학생들의 권리와 행복을 앗아가는 어떠한 현실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학교와 정부 당국이 깨닫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