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비판은 불만과는 전혀 다르다.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불만은 증오로 가는 길일 수 있지만
비판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목에 항상 있다.
비판은 불만과는 전혀 다르다.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불만은 증오로 가는 길일 수 있지만
비판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목에 항상 있다.
"늦더라도 국민은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한다고 믿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2주기를 기념하며 시작한 연재는 10회를 마지막으로 끝냅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어록만을 발췌하여 정리합니다. 《사랑의 승자》 책에 더 많은 사진과 알려드리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생은 어떠한 고난, 고충 속에서도 살 가치가 있으며 감사할 가치가 있다 할 것입니다.
-비록 고난 속에 살더라도 자기 양심에 충실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고난의 가치를 세상이 알아줄 때 그는 더욱 행복하다.
-좋은 문학작품은 메말라가는 정서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정신에 활기와 탄력을 주는 윤활유의 역할을 합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의 격려와 때로는 비판만큼 큰 자극이 되는 일은 없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참으로 큰 빚을 진 사람입니다. 자식들에게, 형제·친척들에게, 친구·동지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과 폐를 끼치고 있습니까. 비록 본의는 아니라 해도 그 피해가 너무나 크고 장시일長時日입니다.
-아버지의 한결 같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위해서 보람 있는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점이지만, 가까이에는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는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우리는 자기 코스를 정하기 전에 미리 신중한 고려 끝에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정하면 결코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에서의 도덕과 윤리의 구현이 되지 않고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더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할 게 분명하다.
-역사를 보면 많은 창조적 선구자들이 고독하고 절망적인 것 같이 보이는 투쟁을 전개한다. …… 그러나 그는 백성은 결코 그들의 안에서 울려오는 진리와 정의에의 갈망의 소리를 오래 외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역시 잘 안다.
-비판은 불만과는 전혀 다르다.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불만은 증오로 가는 길일 수 있지만 비판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목에 항상 있다.
-비록 고난 속에 살더라도 자기 양심에 충실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고난의 가치를 세상이 알아줄 때 그는 더욱 행복하다.
-좋은 문학작품은 메말라가는 정서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정신에 활기와 탄력을 주는 윤활유의 역할을 합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의 격려와 때로는 비판만큼 큰 자극이 되는 일은 없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참으로 큰 빚을 진 사람입니다. 자식들에게, 형제·친척들에게, 친구·동지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과 폐를 끼치고 있습니까. 비록 본의는 아니라 해도 그 피해가 너무나 크고 장시일長時日입니다.
-아버지의 한결 같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위해서 보람 있는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점이지만, 가까이에는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는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우리는 자기 코스를 정하기 전에 미리 신중한 고려 끝에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정하면 결코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에서의 도덕과 윤리의 구현이 되지 않고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더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할 게 분명하다.
-역사를 보면 많은 창조적 선구자들이 고독하고 절망적인 것 같이 보이는 투쟁을 전개한다. …… 그러나 그는 백성은 결코 그들의 안에서 울려오는 진리와 정의에의 갈망의 소리를 오래 외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역시 잘 안다.
-비판은 불만과는 전혀 다르다.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불만은 증오로 가는 길일 수 있지만 비판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목에 항상 있다.
책을 닫으며
끝내면서, 다시
이 사진첩이 결국 겉모습만 바꾼 또 다른 위인전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이 점을 가장 우려했다. 사대적 사고와 권위주의를 버리자, 이런 생각이 책을 낸 이유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우리 국민이 권위주의나 사대주의만 떨쳐낸다면 사회는 자연히 민주주의로 한결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막연하고 추상적 단어인 민주주의나 평등사상만 앞세울 일이 아니다. 우리 속의 권위나 사대적 근성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사대 중에 생겨난 권위는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큰 권력 앞에는 굴종하면서 작은 집단에 대해서는 그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구속·통제·억압하는 수단으로서 휘두르는 권위. 우리나라에 오래전부터 이것이 공존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잠재의식이 못내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을 깨려면 제 깜냥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에는 제 몫, 제 할 일, 제 분수껏 사는 모습이 담겨 있다. 운 좋아 잘나게 태어났다면 잘난 대로 제 분수를 지켜야 하고, 불행히도 못나게 태어났다면 그대로 제 몫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순수하게 사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김대중 사진첩을 세상에 내놓게 된 동기였다.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김대중, 그가 토해낸 울분을 보았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한 개인의 딱한 죽음과 아울러 다시 암울한 시대로 돌아가게 될 현실에 비분하며 강개하던 모습에서 순수하고 순한 한 인간을 보았다. 그 후 불과 두 달 만에 그는 노무현에 이어 세상과의 이별을 스스로 재촉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죽음을 보고서야 나는 역사책을 꺼내 들었다.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사랑하는 가족에게: 김대중 옥중서신 모음》이었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에서 다시 희망을 읽어냈지만, 그것은 이루지 못한 희망이었다. 어둠에 갇힌 희망. 우리 역사의 거룩한 밤은 너무나 고요하기만 해서 여명을 기다리는 긴 침묵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에는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며 새날에 대한 희망은 충만했으나…….
김구 선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하다 나는 효창공원과 현충원을 함께 떠올렸다. 그러다 그만 비분강개하고 말았다. 전직 대통령이 안장된 현충원을 권위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이 자주 한 말이다. 그는 살면서,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양심일 수 없다”던 말을 지켰다. 그런데 현충원에 안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아들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은 무엇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며,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나는 그에게서, 권위의 땅에 묻혀 우리로부터 멀어져가는 김대중에게서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찌 그 말이 자신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니던가…….
나는 예전에 카메라에 담은 김대중의 모습 가운데 한 장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품을 참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난 그의 지난한 삶(끝없는 참음, 이겨내고자 했던 끈기)과 끝내 이뤄낸 성취(하품, 민족사랑과 통일의지)를 사진 한 장에서 발견하며,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희망을엿본다. 지금 이 땅의 우리나라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아내려고 하는, 한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아직 이루지 못한, 참고 견뎌내야 하지만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과도.
우리와 동시대인으로 살다간 김대중. 그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우리보다 좀 더 가진 게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끈기’였다. ‘참아냄’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음’이요,희망을 얻게 되리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그에게서 배울 점은 바로 이것,끈기’다.
참고 견디는 삶은 힘들어하는 모든 자의 어깨를 도닥이는 격려가 된다. 나는 그에게서 ‘참아내어 끝내 얻어낸 희망’을 배웠다. 그 때문에 내세울 것 없는 이 작은 사진첩이 한 개인의 위인전 격인 사진 모음이 아니라, 희망의 서書, 지혜의 서, 그리고 참된 처세의 서가 되길 기대한다. 이 바람을 떨치지 못해, 이제라도 편히 쉬고 있을 김대중을,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는 것이다. 철딱서니 없는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김대중의 하품과 졸음이 영원한 잠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난 왠지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김대중, 그에게 이제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한다. 난, 그분이 나의 바람을 듣고 있으리라 믿고 있고, 그 바람이 개인의 힘이 아닌 인간을 넘는 큰 힘에 의지해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다.
“우직했던 당신의 팔십 평생이 에이도록 그립습니다. 당신의 행동하는 양심이 또 아리도록 그립습니다. 진정한 친구인 국민, 그래요, 대중 곁으로 돌아오셔서 매일매일 우리와 함께하시면 안 될까요? 현실이 힘든 우리 막걸리 들고 가서 함께 잔 나눌 수 있는, 오늘이 힘겨운 우리 소주 들고 가서 더불어 잔 기울일 수 있는, 지금이 막막한 우리 내일을 희망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뜨거운 가슴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와 매일 함께하실 수는 없는지요.
‘가장 작은 자에의 헌신을 우리들의 당신에 대한 충성의 척도로 판단하겠다’던 예수의 마지막 유언을 당신의 편지에서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는 다짐의 말씀 아닌가요? 지금 당신은, 당신의 몸은 어디에 뉘어 있습니까? 소위 가장 큰 자들의 곁 아닌가요? 보호받지만 국민과 멀리 떨어져 있는 차갑고 쓸쓸한 땅을 떠나 작은 자들에게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작은 자들에게로 돌아오셔야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끝내면서, 다시
이 사진첩이 결국 겉모습만 바꾼 또 다른 위인전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이 점을 가장 우려했다. 사대적 사고와 권위주의를 버리자, 이런 생각이 책을 낸 이유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우리 국민이 권위주의나 사대주의만 떨쳐낸다면 사회는 자연히 민주주의로 한결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막연하고 추상적 단어인 민주주의나 평등사상만 앞세울 일이 아니다. 우리 속의 권위나 사대적 근성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사대 중에 생겨난 권위는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큰 권력 앞에는 굴종하면서 작은 집단에 대해서는 그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구속·통제·억압하는 수단으로서 휘두르는 권위. 우리나라에 오래전부터 이것이 공존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잠재의식이 못내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을 깨려면 제 깜냥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에는 제 몫, 제 할 일, 제 분수껏 사는 모습이 담겨 있다. 운 좋아 잘나게 태어났다면 잘난 대로 제 분수를 지켜야 하고, 불행히도 못나게 태어났다면 그대로 제 몫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순수하게 사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김대중 사진첩을 세상에 내놓게 된 동기였다.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김대중, 그가 토해낸 울분을 보았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한 개인의 딱한 죽음과 아울러 다시 암울한 시대로 돌아가게 될 현실에 비분하며 강개하던 모습에서 순수하고 순한 한 인간을 보았다. 그 후 불과 두 달 만에 그는 노무현에 이어 세상과의 이별을 스스로 재촉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죽음을 보고서야 나는 역사책을 꺼내 들었다.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사랑하는 가족에게: 김대중 옥중서신 모음》이었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에서 다시 희망을 읽어냈지만, 그것은 이루지 못한 희망이었다. 어둠에 갇힌 희망. 우리 역사의 거룩한 밤은 너무나 고요하기만 해서 여명을 기다리는 긴 침묵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에는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며 새날에 대한 희망은 충만했으나…….
김구 선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하다 나는 효창공원과 현충원을 함께 떠올렸다. 그러다 그만 비분강개하고 말았다. 전직 대통령이 안장된 현충원을 권위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이 자주 한 말이다. 그는 살면서,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양심일 수 없다”던 말을 지켰다. 그런데 현충원에 안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아들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은 무엇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며,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나는 그에게서, 권위의 땅에 묻혀 우리로부터 멀어져가는 김대중에게서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찌 그 말이 자신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니던가…….
나는 예전에 카메라에 담은 김대중의 모습 가운데 한 장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품을 참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난 그의 지난한 삶(끝없는 참음, 이겨내고자 했던 끈기)과 끝내 이뤄낸 성취(하품, 민족사랑과 통일의지)를 사진 한 장에서 발견하며,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희망을엿본다. 지금 이 땅의 우리나라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아내려고 하는, 한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아직 이루지 못한, 참고 견뎌내야 하지만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과도.
우리와 동시대인으로 살다간 김대중. 그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우리보다 좀 더 가진 게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끈기’였다. ‘참아냄’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음’이요,희망을 얻게 되리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그에게서 배울 점은 바로 이것,끈기’다.
참고 견디는 삶은 힘들어하는 모든 자의 어깨를 도닥이는 격려가 된다. 나는 그에게서 ‘참아내어 끝내 얻어낸 희망’을 배웠다. 그 때문에 내세울 것 없는 이 작은 사진첩이 한 개인의 위인전 격인 사진 모음이 아니라, 희망의 서書, 지혜의 서, 그리고 참된 처세의 서가 되길 기대한다. 이 바람을 떨치지 못해, 이제라도 편히 쉬고 있을 김대중을,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는 것이다. 철딱서니 없는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김대중의 하품과 졸음이 영원한 잠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난 왠지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김대중, 그에게 이제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한다. 난, 그분이 나의 바람을 듣고 있으리라 믿고 있고, 그 바람이 개인의 힘이 아닌 인간을 넘는 큰 힘에 의지해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다.
“우직했던 당신의 팔십 평생이 에이도록 그립습니다. 당신의 행동하는 양심이 또 아리도록 그립습니다. 진정한 친구인 국민, 그래요, 대중 곁으로 돌아오셔서 매일매일 우리와 함께하시면 안 될까요? 현실이 힘든 우리 막걸리 들고 가서 함께 잔 나눌 수 있는, 오늘이 힘겨운 우리 소주 들고 가서 더불어 잔 기울일 수 있는, 지금이 막막한 우리 내일을 희망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뜨거운 가슴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와 매일 함께하실 수는 없는지요.
‘가장 작은 자에의 헌신을 우리들의 당신에 대한 충성의 척도로 판단하겠다’던 예수의 마지막 유언을 당신의 편지에서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는 다짐의 말씀 아닌가요? 지금 당신은, 당신의 몸은 어디에 뉘어 있습니까? 소위 가장 큰 자들의 곁 아닌가요? 보호받지만 국민과 멀리 떨어져 있는 차갑고 쓸쓸한 땅을 떠나 작은 자들에게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작은 자들에게로 돌아오셔야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어제 내린 비로 흙탕물이 된 큰 바다가 거듭되는 작은 파도에 깨끗이 정화되어가는 자연의 큰 힘을 바라보며,
제주도의 한 작은 바닷가에서
오동명
제주도의 한 작은 바닷가에서
오동명
사랑의 승자 - 김대중, 빛바랜 사진으로 묻는 오래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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