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전시 의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이미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입니다. 조선왕조 내내 의궤는 꾸준히 제작되어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특징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통치 철학 및 운영체계를 알게 하는 대단히 의미있는 기록물입니다. 특히 이번에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이라는 점과 국내외에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의궤 연구 및 활용에 있어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왕실 의례 보고서, 의궤
의궤란 의식의 궤범이라는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마무리에 이르는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한 기록물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인 15세기부터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국가 의식과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궤가 제작되었습니다. 왕의 일생, 각종 제례와 의식, 편찬 사업이나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형태의 의궤가 있습니다. 의궤의 제작 과정은 이렇습니다. 우선 왕실의 각종 의식과 행사를 집행하는 임시기구인 도감이 설치됩니다. 총책임자인 도제조(1명)는 정승급에서 임명되며, 부책임자인 제조(3~4명)는 판서급에서 맡습니다. 의식이 끝나면 도감이 해체되고 의궤청이라는 기구로 바뀝니다. 바로 이 의궤청에서 각종 문서와 반차도를 수집하여 의궤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외규장각 의궤의 면모를 6부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1부에서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 의궤의 개념과 구성을 설명하고, 정조 대에 이르러 강화도 행궁(行宮)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어람용 의궤와 같은 왕실의 중요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한 내용에 대해서 다룹니다.
왕권과 통치
특별전시 2부부터 6부까지는 외규장각 의궤를 내용별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2부의 주제는 ‘왕권과 통치’로 의궤 속에 보이는 조선시대 통치 이념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종묘제례, 친경, 영건, 녹훈 관련 의궤를 전시합니다. 특히 유일본인 《보사녹훈도감의궤》(1682년, 숙종 8)는 한글이 기록된 희귀한 사례로 주목할 만합니다.
궁궐은 왕을 정점으로 정치와 행정이 이뤄지는 통치의 공간이자 국가 최고의 관부(官府)였습니다. 왕이 있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法宮)이라고 하고 이어할 목적으로 지은 궁궐을 이궁(離宮)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왕들은 목적에 따라 두 궁궐을 오가며 운영했습니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창덕궁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전란이나 화재로 궁궐이 불탔을 때에는 사용하지 않는 궁궐의 전각을 헐어서 사용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궁궐의 재건은 재정적 부담이 큰 공역이었으므로 전체를 완전히 새로 짓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이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중건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국왕은 국가나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신하에게는 공신(功臣)의 칭호와 함께 여러 특전을 내렸습니다. 이를 공신녹훈이라고 하는데, 개국이나 반정에 참여하거나 전란에서 전공을 세운 경우, 반란이라 역모를 적발하거나 진압한 경우에 내려졌습니다. 조선시대에 내려진 공신호는 모두 28종류였다고 합니다.
나라의 경사
3부의 주제는 ‘나라의 경사’로 왕실의 혼례, 책봉, 존호 등에 관한 의식을 기록한 의궤를 다룹니다. 조선시대에는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도감을 설치하고 업무를 분담하는 하부의 작은 조직들을 구성하여 국가의 경사스런 행사를 치렀습니다. 의궤를 통해 제작물품의 목록과 재료, 장인 명단, 도설, 행렬 그림인 반차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차도(班次圖)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의장물의 수, 위치 등을 정해놓은 그림을 말합니다. 반차도는 이동하는 행렬도 형식으로 그리거나, 일정 공간 내의 위치를 글자로만 표기한 형식으로도 그렸습니다. 반차도는 행사 거행 전에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실제 행사 전에 반차도에 따라 몇 차례 예행연습을 하여 시행착오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공식 행사가 끝나면 그 내용은 의궤에 수록되었습니다.
반차도에는 각종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하여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행렬에는 의장기와 의장물이 배열되어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고 행렬에 위엄과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3D 영상으로 반차도를 재현한 모습입니다.
현존하는 왕실의 혼례의식 의궤는 모두 20종입니다. 이 가운데 9종이 국왕으로 재위하고 있는 기간에 이뤄진 혼례의식을 기록한 것이며 나머지 10종은 왕세자 시절, 1종은 왕세손의 혼례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영조정순황후가례도감의궤》(1759년) 반차도부터 국왕의 가마가 등장하고 그 분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변호를 보이는 등, 조선 후기부터 가례 행사의 규모가 커지고 내용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됩니다.
왕실의 장례
4부의 주제는 ‘왕실의 장례’입니다. 조선시대 왕실 의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이었습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임종과 장례 준비, 무덤의 조성, 장례 행렬, 삼년상 동안의 제사 등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왕실의 장례는 그 대상에 따라 명칭이 달랐습니다.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고 했습니다. 왕이 사망하면 당일로 장례 절차를 담당할 임시 관서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했습니다. 장례의 총괄과 국장 행렬은 국장도감이 담당했습니다. 5부의 주제는 ‘추모와 기억’으로 3년상을 마친 후 혼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는 부묘,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에게 일생을 함축한 이름을 올리는 시호, 왕의 초상을 그리는 영정 제작 등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선왕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추모하는 방식을 살펴봅니다. 이외에 ‘숙종의 일생과 의궤’ 테마 코너에서는 외규장각 의궤 중 숙종의 일생과 관련된 것들을 전시하고, 의궤 하이라이트 코너에서는 외규장각 의궤 중 8점을 선별하여 시기적인 변화 양상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마지막으로 6부에서는 1866년 병인양요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과정을 짚어봅니다. 이를 위하여 병인양요 때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쥐베르의 기록 등 관련 서양 도서를 다수 소개합니다.
1993년 9월 대한민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상) 1책을 전달하고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할 의지가 있음을 밝혔으나 그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2010년 3월 협상을 재개한 뒤 11월 12일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 중 이명박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간의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2011년 2월 7일 양국 정부 간 합의문이 체결되었습니다.
의궤는 조선 왕조의 철저한 기록 정신을 바탕으로 제작된 문화유산으로 전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외규장각 의궤의 중요성과 예술적 품격, 오늘의 결과가 있기까지 애쓴 국내외 여러 사람과 기관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도서의 귀환을 반기며>라는 글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인 이태진 교수는 "피탈의 아픈 역사의 상처를 씨는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회복된 자부심이 문화유산에 대한 바른 연구의 길을 여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우리의 문화유산은 인류 문화의 발전에 직접 기여하는 터전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특별전시는 9월 18일까지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셔서 의궤에 담긴 기록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한껏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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