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을 즐겨본 분이라면 《검정고무신》이라는 작품을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1992년부터 스토리 작가 도래미(이영일)와 그림 작가 이우영이 15년에 걸쳐 연재한 만화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지금도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즐겨 보는 작품가운데 하나입니다. 만화책 《아기공룡 둘리》의 뒤를 이어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가 공통적으로 아는 몇 안 되는 한국 만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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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3월 12일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검정고무신》의 그림 작가인 이우영이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였습니다. 세대를 관통한 작품을 만든 작가가 사고나 지병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떠날 정도의 큰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원인은 불공정 계약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죠. 문제는 2004년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의 시즌3이 방영되던 시기로 돌아갑니다.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필름북을 제작하기로 계약한 형설출판사가 이우영 작가를 비롯한 저작권자와 제대로 된 합의 없이 선을 넘어 멋대로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직접 그려서 만화책을 출판해버린 겁니다. 문제가 불거지자 당시 형설 대표는 선처를 부탁했고 작가들은 너그럽게 넘겼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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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형설은 이를 계기로 《검정고무신》 작가들과 총 5차례에 걸쳐 사업권 설정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캐릴터의 가치를 키워주고 투자를 하겠다는 제안을 하며 사업을 하려면 출판사 측도 권리가 있어야 한다며 캐릭터 지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고는 2008년 형설은 한국저작권위원회에 《검정고무신》 캐릭터 저작권 지분 중 36%를 가지고 있다면서 등록 신청을 했습니다. 본래 《검정고무신》 캐릭터 저작권 지분은 작화를 맡은 이우영 작가 형제가 65%, 스토리 작가인 도래미가 35%를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형설은 이우영 형제에게 28%, 도래미 작가에게 8%의 지분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순식간에 36%의 지분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형설은 대가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2011년 형설은 도래미 작가의 지분을 추가적으로 인수하여 결국 작가들보다도 많은 53%의 지분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형설은 《검정고무신》의 저작자인 양 행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초 2007년 작성한 사업권 설정 계약서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계약 기간이 명확하지 않아 작가들이 계약을 종료할 수 없었고 계약 범위가 만화 본편은 물론 2차적 사업권까지 포괄하는 형태였던 것입니다. 계약 조건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작가들이 계약 수정을 요구했지만 형설은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이후 만화와 캐릭터, 애니메이션 같은 사업이 모두 형설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형설의 지분이 100%가 아니니 이우영 작가 측에 수익의 일부를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업권을 형설이 가지고 있었고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탓에 작가는 제대로 정산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2020년 인터뷰에 의하면 이우영 형제가 받은 '검정고무신' 사업 수익은 4년 동안 435만 원에 불과했다고 하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을 봤을 텐데, 28% 지분이라지만 4년간 500만 원도 받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우영 작가 사건을 맡고 있는 담당 변호사는 지난 15년간 형설이 《검정고무신》으로 사업화를 한 개수가 77개가 넘어가는데 이우영 작가가 수령한 금액은 총 1200만 원에 불과하다고 밝혔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기가 막히는 일인데, 형설은 작가의 부모가 운영하는 농장 홈페이지에 《검정고무신》 캐릭터가 무단 활용됐다며 고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작가가 자신이 그린 캐릭터를 썼다고 고소를 당했으니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요? 이런 모든 일을 출판사가 계약서를 무기로 작가에게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으니 절망감이 더 컸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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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을 풍미한 작가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자 유족과 한국만화가협회 등 관련 단체는 물론 웹툰협회, 음악저작권협회 등이 나서서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이런 비극이 앞으로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만화, 출판계의 계약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검정고무신》처럼 창작자가 근본적인 권리를 잃는 사태는 앞으로 더는 없어야 합니다. 계약기간을 설정하지 않아 영구적인 사업권을 설정한다거나, 사업 내용과 종류를 특정하지 않는다거나, 원작자의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공정한 계약은 효력이 발휘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작권법이 창작자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보장할 수 있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가 《검정고무신》 관련 계약의 위법 여부를 전면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3월 29일 문화체육관광부가 특별조사팀을 설치해 이우영 작가가 생전 출판·캐릭터 업체와 맺은 계약의 위법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제2의 검정고무신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문화계가 자성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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