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6주기가 되는 5.18 민주화항쟁도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으로 시작했습니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이런 일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죠. 박근혜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실상 제창하지 못하게 지침을 내렸으며 박승춘 보훈처장은 이 교시를 받들어 올해도 제창을 불허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청와대 회동에서 협치를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또 하나의 쇼였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야당은 청와대 회동 무효를 선언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심지어 새누리당 원내대표조차 청와대와 보훈처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야당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내기로 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


1997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제창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제외되기 시작했습니다. 집권당과 정권의 성격을 보면 그 의도가 너무나 명백하죠. 보훈처의 해석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적으로 제창과 합창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개념이지만, 보훈처의 유권해석으로는 제창은 참석자 전원이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지만 합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죠.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5.18 민주화항쟁 기념식 동영상을 보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입을 다물고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외워서 부르고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주먹을 움켜쥔 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반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들고 있는 종이만 들여다볼 뿐 입을 열지 않습니다.


출처 - 유튜브


보훈처의 유권 해석대로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국가 기념식의 관행을 어긴 것이며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를 고의로 부르지 않은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보훈처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례와 무식함을 계속 알리고 싶어 이런 방침을 자꾸 고수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를 막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고 있는 걸까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그 이유가 그대로 드러나긴 합니다.


출처 - 페이스북


〈임을 위한 행진곡〉은 보수단체의 주장과 달리 종북이나 김일성 찬양을 위한 노래가 아닙니다. 탈북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는 주성하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에서 허락없이 부르면 잡혀가 정치범이 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과 연결시키는 찌질한 짓거리" 좀 그만하라면서 말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한 노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보면 그 수준의 저열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한편 5.18 민주화항쟁 당시 학살의 책임자였던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4대 조건이 선결되어야 된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신변 보호와 박탈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를 갖추는 등의 조건이 선결되어야 5.18 묘역을 참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광주에서는 죄인에게 무슨 예우냐는 반응이 나오고, 5.18 관련 단체는 책임 인정과 광주에 대한 사죄 그리고 대국민사과가 선결 조건이라고 대응하기도 했죠. 

 

출처 - KBS


하지만 살인마 전두환은 지난달 27일 《신동아》 기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항쟁 당시 시민군을 향해 총을 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동석한 전두환의 지인들도 인터뷰에 참여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나왔습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광주 침투와 관련된 정보 보고를 받은 적 없다는 전 전 대통령 말에)


고명승 전 삼군사령관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연희동에서 코멘트 한 일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전 의원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전 대통령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일베에서 5.18 관련으로 "종북, 빨갱이" 타령할 때 흔하게 나오는 주장이 북한 특수군 얘기죠. 그런데 그 주범인 전두환이 이런 논거를 부정한 셈입니다. 광주와 북한이 관련 있다는 일베의 주장이 헛소리임을 전두환이 밝힌 셈입니다. 한편 역사적 책임감으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두환은 "광주에 내려가 뭘하라고요"라고 되물어 책임 인정과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출처 - 스포츠동아


한국인 작가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얘기했죠.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출처 - 《소년이 온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과 같이 고립되고 힘으로 짓밟히고 훼손된 사건 이면에는 광주를 수없이 되태어나게 한 국가의 원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해마다 후벼지는 그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철철 나고 있습니다. 5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나날이 퇴보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정권에 비판적인 멘트를 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말씀드릴까요? 뉴스데스크에 광고가 24개 정도 붙고 하나당 5000만 원 정도 호가합니다. 근데 제가 그만둘 무렵 광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중소기업 하나 남았습니다. 그래서 대포 광고했습니다. 회사가 돈을 안 내지만 이름만 쓰는 겁니다. 서너 개 회사 이름을 써서 내보낸 적이 있는데, 그 회사에서 전화 와서 돈을 줄 테니 이름을 빼달라고 합니다. 제가 그때 청와대도 조지고 삼성도 조지고 군도 조지고 국정원도 조지던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 회사의 상무에게 왜 그러십니까? 물었더니 '저쪽'에서 어제 광고 잘 봤다고 매일 아침에 전화가 온다는 겁니다. 국정원이 그런답니다. 그렇게 오래전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제발 그런 짓을 안 하길 바랍니다만."


―MBC 뉴스데스크에서 물러난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중에서


신경민 의원의 발언대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나날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파업을 불사하며 국민을 대변했던 MBC가 이제는 TV조선과 어깨를 겨루며 박근혜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죠. 그 정점은 얼마 전에 터진 MBC 녹취록 파문입니다.


출처 - 뉴스타파



MBC가 증거도 없이 기자와 PD들을 해고했다는 녹취록



"그때 최승호하고 박성제 해고시킬 때 그럴 것을 예측하고, 알고 얘들을 해고시켰거든, 그 둘은. 왜냐면 증거가 없어… 그런데 이놈들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 가지고 해고를 시킨 거예요" - 2014년 4월 1일 녹취록


MBC 고위간부의 밀담, "그 둘은 증거없이 잘랐다"(뉴스타파)

 

2012년 170일간 이어진 파업의 도화선이었던 김재철 사장은 끝내 해임됐지만, MBC는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청자에게 친숙했던 아나운서들이 한 사람씩 회사를 떠났습니다. 시사교양국 분리 해체로 해당 PD들은 예능 프로로 발령이 나거나 스케이트장 관리직 등 전문 분야와 상관없는 곳으로 좌천되기도 했습니다. 파업에 대한 보복이자 정권에 비판적인 PD들의 싹을 자르려 한다는 비판적인 여론을 무릅쓰고 MBC는 정당한 인사권이라며 이를 무시해왔죠. 그런데 지난 1월 25일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폭로한 녹취록은 세간의 의혹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합니다. 해고의 직접적 피해자들은 후안무치한 녹취록이 공개되자 기가 막힌다고 토로했습니다. 당시 최승호 PD는 4대강 사업이 사실상 대운하 사업이라는 사실을 파헤쳤으나 김재철 당시 MBC 사장은 방송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방송을 불허한 MBC 결정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일주일 후에 방영되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 잘 보여야 했던 경영진은 최승호 PD를 비롯해 정권 비판적인 시사교양국 PD들을 한 사람씩 찍어낼 궁리를 했죠.

 

출처 - 한겨레


문제의 녹취록에는 라디오는 새빨갛다며 눈엣가시인 패널은 교체를 지시하고, 국부이신 이승만 프로그램은 좌파뿐인 MBC 내부에 만들 놈이 없으니 외주 제작을 해야겠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인 임시정부를 폄훼하면서 말이죠. 또한 MBC 노조를 비판한 극우 인터넷 매체의 편집장을 만난 자리에선 방송 출연과 외주 청탁을 주고받는 말이 오고 가기도 했습니다. 녹취록을 통해 의도된 부당 해고, 프로그램 제작 자율성 개입, 진보 언론 탄압 행위 그리고 청탁 비리까지 천태만상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PD수첩>의 기수였던 백종문 PD의 타락


이 녹취록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백종문 미래전략 본부장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녹취록에서 최승호 PD 등을 증거 없이 해고하고 비판적 시사 프로그램을 못 하게 통제하고 있다며 자랑스레 말한 그가 바로 <PD수첩> 출신 PD이기 때문이지요.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변절하여 일제에 부역하는 셈이랄까요?

 

1990년대 <PD수첩>은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를 표방하며 성역 없는 비판을 추구했습니다. 당시 백종문 PD는 그런 <PD수첩>의 기수였습니다. 지금도 제목만 들으면 알 만한 '의혹 기도원에서 생긴 일'(1993.03.26), '죽어서도 사람대접 못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1994.01.25.), '의혹 영생교를 벗긴다'(1994.02.15), '사람대접 받고 싶어요 외국인 근로자들의 절규'(1995.01.17), '시대유감! 우리 사회의 노래심의'(1995.10.17), '80년 5월 광주 이 얼굴들을 아십니까?'(1999.05.18) '고문 이근안 뿐인가'(1999.11.09) 같은 대표작으로 종교, 정치, 사회문제 등 문자 그대로 성역 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었죠. 그랬던 그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변절 끝에 정권의 충견이 된 것일까요? 웹툰 <송곳>의 명대사처럼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변하기 때문일까요?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후배들을 이끌어주었어야 할 사람의 변절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윗물이 탁한데 아랫물이 깨끗할 리 만무하지요. 지난 8일 MBC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긴급설문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사드 배치와 관련해 의도된 결과를 얻기 위해 편향된 질문을 했다는 주장이 나와 충격을 안겼습니다. MBC는 미국의 사드 한반도 배치 필요성에 대해 국민의 67.8퍼센트가 공감하며 25.8퍼센트가 그렇지 않다고 답해 사드 배치 찬성 의견이 두 배 이상 많았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여론조사 설문지 전체 내용을 보면 원문 질문 자체가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맞서기 위해..."라며 사드의 필요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답변으로 공감한다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짜여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국회 쟁점 법안에 대한 국회의장 직권상정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마치 국회선진화법이 법안 처리를 가로막는 악법인 양 질문을 던져 직권상정 찬성으로 투표를 유도하는가 하면 노동개혁에 관해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도록 질문지 자체를 조작하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편향된 프레임으로 짠 설문이라 엄밀히 설문조사라고 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이 밝힐 정도입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이 설문조사 왜곡 논란을 취재하던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MBC 최기화 보도국장은  "개새끼야. 어디서 내 정보를 알아낸 거야. 싸가지 없는 새끼 아냐"라고 원색적인 쌍욕을 퍼부어 문제가 되기도 했죠. 기자가 "욕하시면 안 되죠"라고 말하자 "욕이고 지랄이고 간에 내 개인정보를 네가 왜 아냐. 네가 녹음을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고 마치 시정잡배처럼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 가재는 게 편이라죠? 이런 사달이 나고 직접적인 증거도 명확함에도 박근혜 정권 인사로 가득한 방송문화진흥회는 MBC 백종문 미래전략본부장을 재임했습니다. 자신들의 충견을 쓰다듬어준 셈입니다. 최근 MBC 대주주이자 관리감독기관인 방문진은 MBC 녹취록 논란의 장본인 백종문 본부장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로 했으나 보수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방문진 여당 추천 이사들은 녹취록 파문은 선거철을 앞두고 기획된 정치공작이라는 MBC 측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미디어오늘》 보도 내용처럼 방문진 이사들이 백종문 본부장의 일방적인 해명을 듣고 내릴 결론은 뻔합니다. '사적인 자리에서 나눈 개인적 의견일 뿐이고, 업무상 불법행위가 있다면 법적으로 처벌받으면 되는 일이므로 방문진은 이 문제에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겠지요.

 

 

언론 및 표현의 자유 vs 테러방지법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날 우리나라 주요 방송사의 기사 타이틀은 위와 같았습니다. MBC와 KBS는 '정치쇼'로 치부했고, SBS는 법안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다며 우회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의견만 옳다는 것을 전제하고 정한 제목이니 프레임 자체가 왜곡되었다고 봐야 하겠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무슨 이유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필리버스터를 강행했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방송은 JTBC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공중파 3사의 프라임 뉴스 상황이 이러하니 시청자가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없고 왜곡된 의견을 사실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이 언론 장악에 열을 쏟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겠죠.


국제적인 저널리스트 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는 매년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를 발표합니다. 세계 각국·지역 보도의 자유도에 순위를 매김으로써 검열 상황, 제도장치, 투명성, 인프라 등의 항목으로 세계 180개국·지역을 채점해왔습니다. 2015년 2월 12일에 발표한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 2015'에서 한국은 전체 180개 조사 대상국 중에서 60위를 기록했습니다.

 

출처 - 국경 없는 기자회

 

우리나라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노무현 정부에서 최고 31위(2006년)를 기록했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는 하락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언론자유지수가 역대 최하위인 69위를 기록했을 때는 2009년이었죠. 아시다시피 그 당시에는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등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 등이 악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후 이명박 정권하에서 언론의 자유는 계속 위축되어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례없이 언론사 총파업 같은 행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4년 57위, 2015년 60위라는 순위가 알려주듯이 박근혜 정권 들어 언론자유지수는 회복될 기기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비행은 출판사 창립 이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겨 탐사보도를 중심으로 관련 기사를 꾸준히 발행해왔는데요,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주요한 기사를 정리해서 보여드립니다. 시간순으로 정리했으니 대한민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떻게 위축됐는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현시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검사와 스폰서 사건에서 발견한 탐사보도의 가치
http://ideas0419.com/126

 

《PD수첩》 무죄판결로 살피는 탐사보도의 가치
http://ideas0419.com/220

 

사진으로 보는 '으랏차차 MBC' 공연 참관기
http://ideas0419.com/312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며 표현의 자유를 다시 돌아보다
http://ideas0419.com/354

 

삼일절에 돌아보는 헌법의 근본정신
http://ideas0419.com/456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주류 언론
http://ideas0419.com/470

 

<세월오월> 전시 유보, 박근혜 무엇을 얻었나?
http://ideas0419.com/493


빅브러더, 국정원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다
http://ideas0419.com/566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와 압제에 항거하여 만세시위를 펼친 역사를 기념하는 제95주년 삼일절입니다.

2014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3.1운동의 의미를 독립운동(민족혁명)이라는 좁은 의미로 이해할 게 아니라 민주혁명으로서 그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찬란한 '3·1 혁명', 누가 '3·1 운동'으로 바꿨나). "1919년 3월 1일부터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민중의 힘으로 주권재민의 근대국민국가 수립과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한 민족·민주혁명이었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복권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늘 이 자리에서 논의하려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선열이 흘린 핏값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헌법 제1조를 얻었습니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95주년 삼일절을 맞이하며 과연 헌법의 근본정신이 이 시대에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수많은 국민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정이 유지되고 있건만, 정작 국가가 국민의 권익을 보장하지는 못할망정 죄 없는 시민을 간첩으로 내모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만행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23년 만에 무죄 판결.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을 잘 아실 겁니다. 이 사건은 1991년 명지대생이었던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사건에 항의해 분신한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이 대신 써줬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3년을 복역한 시국사건입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운동권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동료의 자살을 종용하는 파렴치한으로 몰렸습니다. 먹이를 물은 듯 주류 언론은 연일 맹공을 퍼부었고, 이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은 조작이었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사회와 일부 언론은 사건 초기부터 유서 대필이 검찰의 조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해왔습니다. 6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오랜 시간 동안 20대 피고인은 어느덧 50대가 되었고, 30대 변호인은 60대가 되었습니다. 그간 유서를 대신 써주며 동료의 분신자살을 방조한 범죄자라는 누명을 감내해야 했던 강기훈에게 드디어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말을 굳게 믿는다." 이 말은 무죄 판결을 받은 김용판이 기자들에 둘러싸여 의기양양하게 읊조린 말이다. "이 사건으로 삶이 뒤틀린 수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이 판결로 그분들의 아픔에 위안이 되길 바란다." 이 말은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의 소감이다.


1991년 12월 4일 서울형사지법의 유죄선고가 있은 지 만 23년 만입니다. 재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는 13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았던 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날 법정 안은 숙연했고 박수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

강씨의 변호인단은 “재판부가 검찰의 무리한 추론은 받아들여 ‘운동권은 목적을 위해 유서를 대신 써주기도 하는 집단’이라는 엄청난 편견을 합리화시켜줌으로써 그동안 대필 여부를 두고 사실관계로 두터던 사건을 정말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만들고 말았다.”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식의 승리‘라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조르쥬 클레망소의 말대로 ’상식의 승리‘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며 항소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과거 강 씨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항소와 상고를 기각했던 사법부의 사과는 없었으며, 검찰 역시 아무런 사과의 뜻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상식의 승리를 믿고 23년간 함께 싸워준 변호인만이 무죄 판결이 난 선고의 최후 변론에서 “진실 만세!”로 끝을 맺었을 뿐입니다. 이번 무죄 판결에 목이 메었다는 이석태 변호사의 인터뷰를 함께 보시죠.

출처 – 오마이뉴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말이 자꾸 등장하는데요, 증거조작과 마녀사냥에 의한 인권탄압의 대표적인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삼일절을 맞이하여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나는 고발한다!

제목 : 가족의 저녁식사
“우리 오늘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맙시다.”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잖아!”
출처 – 르 피가로

선거철 우리나라 밥상머리 상황같이 꽤 친숙한 모습입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양분하여 극한으로 대립하게 했던 드레퓌스 사건 당시 신문에 실린 만평입니다.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드레퓌스는 어느 날 갑자기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됩니다. 비공개로 진행된 군법회의 끝에 간첩 혐의로 종신유형이 선고됩니다. 이때 재판부가 유죄판결을 내린 근거는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음에도 당시 프랑스 군부, 보수 가톨릭 교회, 수구 언론은 일제히 유대인인 드레퓌스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결국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한 섬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2년 후 군 정보국에서 근무한 피카르 중령의 중대한 발견으로 문제가 부각됩니다. 간첩 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는 겁니다. 피카르 중령이 우연히 당시 문건을 열람한 결과 독일대사관에 팔려간 프랑스 기밀문서의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이 조사 결과를 상부에 알리고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지만, 군 상층부는 그를 한직으로 좌천시켜 쫓아내고 재심 요구를 무시합니다. 제국주의가 시작되던 시기에 가톨릭과 보수세력은 자국 군대의 위신과 국가의 질서가 일개 유대인에 의해 교란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에 따라 진범인 에스테라지는 오히려 존재치도 않는 유대인 비밀조직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피카르 중령은 좌천도 모자라 군사기밀누설죄로 체포됩니다. 그 후 드레퓌스의 형도 에스테라지를 고발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며 이를 묵살합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대통령 각하,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립니다."

_<나는 고발한다!> 중에서 

이때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대문호인 에밀 졸라가 행동에 나섭니다. 그는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란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보냅니다. 이를 통해 에밀 졸라는 죄 없는 드레퓌스에게 종신유배를 선고한 법정과 진범인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정을 고발하고, 재심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에밀 졸라의 용기 있는 행동은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습니다.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은 에밀 졸라에게 깊은 존경과 찬사를 보내며 진실을 감추는 군인과 성직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결국 드레퓌스 찬·반파로 프랑스 사회는 양분되어 극한 대립에 돌입합니다. 이 와중에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법원이 재심을 열었지만 드레퓌스를 종신유배에서 10년형으로 감형하는 데 그칩니다. 재심으로 진실이 승리할 것으로 믿었던 세계 각국의 인사들은 다시 의기투합하여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나섭니다.

결국 세계 여론에 떠밀린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하게 됩니다. 무죄가 아닌 특별사면 형식이어서 불만의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몸이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이를 일단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 만인 1904년에 형의 도움으로 새로운 증거를 첨부해 재심을 청구하고 피카르 중령과 함께 최고재판소에서 무죄와 함께 복권을 선고받습니다.

이후 건강상 이유로 전역했던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베르덩 전투 등 큰 전투에 참가하여 세운 공훈으로 레지옹도뇌르 훈장까지 받습니다. 자신에게 온갖 누명과 고난을 안긴 조국을 위해 희생하여 다시금 큰 공을 세우다니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사코와 반제티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안타깝게도 드레퓌스와 유사한 처지에 놓였던 이는 강기훈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계 이민이었던 미국의 사코와 반제티도 누명을 썼으나 드레퓌스 사건처럼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나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1920년 4월, 매사추세츠주(州)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제화공장(製靴工場)의 회계담당 직원과 수위(守衛)가 두 명의 남자에게 사살되고 종업원의 급료를 탈취당했다. 경찰은 이탈리아계(系)의 이민(移民)인 N.사코와 B.반제티를 용의자로서 체포, 이듬해 5월부터 재판이 열렸다. 두 사람 모두 무죄를 주장하여 7년에 걸친 법정 투쟁이 전개되었으나, 용의자들이 외국 이민이라는 것, 제1차 세계대전 중 징병을 기피했다는 것, 무정부주의자라는 것 등이 사람들의 편견과 반감을 샀다. 또 당시의 미국사회가 외국 이민을 좌익분자로 보는 경향도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의혹이 남겨진 채 1927년 4월에 사형을 선고하였고, 재심(再審)을 요구하는 세계 여론도 아랑곳없이 그 해 8월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런데 1959년에 진짜 범인이 판명되어, 이는 미국 재판사상 하나의 큰 오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처럼 사코와 반제티 역시 이탈리아 이민자라는 사실로 공격을 받았고, 무정부주의자로서 징병을 거부했던 점 때문에 애국심이 부족하다며 법정은 물론 대중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이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세계의 지성들이 항의 서한을 보내고 호소문을 발표했지만, 미국은 사형선고를 내린 지 4달 만에 형을 집행하고 맙니다. 결국 사코와 반제티는 누명을 쓴 채 전기의자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50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무죄 사실이 입증되어 복권되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죠.

출처 - 위키피디아

드레퓌스 사건이 강기훈 사건과 겹쳐 보인다면, 사코 반제티 사건은 사법살인이었던 인혁당 사건과 겹쳐 보입니다. 역사는 장소를 옮겨가며 반복되는 걸까요? 아니, 장소조차 바뀌지 않고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정권의 편의에 따라 간첩을 만들어내던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의혹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증거마저 조작하는 오늘날 검찰의 행태를 보면 말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김요한 기자는 “‘간첩’과 ‘증거조작’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 ‘유우성이 간첩이냐’와 ‘국정원이 증거를 조작했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유우성이 간첩이든 아니든 수사기관은 증거를 조작해서는 안 된다”며 “검찰도 정치권도 언론조차도 ‘사실이 무엇인가’보다는 ‘누구 편에 유리한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비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수사기관이 직접 증거자료를, 그것도 외국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을 속이려 했다면 이는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을 만한 일이며, 검찰 자체가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권도 언론도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를 애써 꺼리는 듯한 분위기”여서 “사안의 본질은 어디 가고 여느 때처럼 곁가지 공방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드레퓌스, 사코, 반제티, 강기훈, 그리고 어쩌면 유우성.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드레퓌스 사건이 회자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관심과 목소리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국가폭력, 언론을 통한 여론조작 문제를 좌시할 수 없습니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하다면 이런 상황 자체가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버린 형국을 방증합니다. (관련 자료: 국정원·검찰 '증거 조작' 의혹에도 '눈뜬장님' 행세하는 '불량 언론'! )


박근혜 정부 1년, 무엇을 남겼나?

박근혜 정부 출범 1년을 맞은 지난 25일, 여러 시민사회 단체가 한목소리로 민주주의와 민생 후퇴를 지적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을 지킬 것을 촉구했습니다.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 10개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에서 "지난 1년간 표현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권리는 공권력에 의해 위축됐고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으로 민주주의가 공격당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실로 그렇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걸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사실상 폐기 또는 변질했습니다. 최근 박 대통령이 발표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선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마저 사라졌습니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노조탄압, 민영화 정책 등의 실정을 반성하기는커녕 정부가 앞장서 대선개입 사건 수사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한 사실이 속속 증명되고 있으며, 민영화 반대를 외친 철도파업 행위를 탄압하기 위해 정부가 여론 조작과 허위사실 유포 같은 치졸한 행위마저 서슴지 않았음이 보도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1년을 돌아보면 '이명박 정권 6년차'라는 세간의 비판이 아주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최시중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삼는 등 측근 인사를 요직에 앉혀 제왕적 통치의 기반을 굳히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도 ‘친박’ 인사로 분류되는 이경재 전 새누리당 의원,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인 김원배 목원대 총장, 김병호 전 새누리당 의원을 각각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문화방송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에 앉히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저널리스트 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는 매년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를 발표합니다. 세계 각국·지역 보도의 자유도에 순위를 매김으로써 검열 상황, 제도장치, 투명성, 인프라 등의 항목으로 세계 180개국·지역을 채점해왔습니다. 지난 2월 12일에 발표한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 2014'에서 한국은 57위를 기록했습니다.

출처 - 국경없는 기자회

우리나라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노무현 정부에서 최고 31위(2006년)까지 기록했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속적으로 하락했습니다((2011년: 42위, 2012년: 44위, 2013년: 50위). 아시다시피 2009년 역대 최하위인 69위까지 떨어진 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등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 등이 순위에 영향을 주었죠.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자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유래 없이 언론사 총파업 같은 행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이번 2014년 결과 순위가 알려주듯이 정권의 언론장악 환경은 큰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생각비행은 지금까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겨 관련 기사를 꾸준히 발행해왔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정리해서 보여드립니다.
 
-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기각과 언론 재벌의 독과점
- 언론은 진실만을 전하고 있는가?
- 맷값 최철원 선생과 PD수첩 무죄 판결
- 이 시대의 폭로 저널리즘? '위키리크스'
- <PD수첩> <시사매거진 2580>과 같은 '탐사보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법원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
- 한국의 탐사보도 - MBC가 제작한 탐사보도 프로그램
- PD수첩이 사라진다면 무한도전도 위험합니다
- 검사와 스폰서 사건에서 발견한 탐사보도의 가치
- 중요한 사회문제를 덮어버린 서태지-이지아 가십기사
- 다시 기억해야 할 5.18 광주민주화운동, 신군부의 독재와 언론·방송의 굴종사
- [서울디지털포럼 참관기] 위키리크스로 돌아보는 탐사보도의 역사와 현황
-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사회 변화의 씨앗 있다
- 《PD수첩》 무죄판결로 살피는 탐사보도의 가치
- 《경향신문》 창간 65주년 기념 MB氏 불통강령 단독입수!
- 1퍼센트의,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를 위한 종편 개국
- 리영희 선생 1주기에 돌아본 한국 언론의 현실
- 1퍼센트를 위한 종편을 넘어 SNS에서 대안을 찾자
- 질질 끄는 미디어렙법 처리, 누구를 위한 정치 놀음인가?
- <뉴스타파> <제대로 뉴스데스크>에서 대안언론의 가능성을 보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며 표현의 자유를 다시 돌아보다
- <천안함 프로젝트>,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95주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헌법의 근본정신을 이야기하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지난 2013년 촛불시민과 누리꾼이 주축이 되어 발표한 선언문을 게재하는 것으로 이만 인사 올립니다.

<촛불시민·누리꾼 3차 시국선언문>
 
- 우리는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민저항권을 발동한다 -
 
대한민국의 근본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국가의 근본 질서를 규정하는 헌법이 특정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마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법과 민주주의가 무너진 결과 대한민국은 정의와 진실과 원칙이 짓밟히고 거짓과 음모와 술수가 판치는 삼류 국가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을 이렇게 치욕스럽게 만든 주범은 1219 부정선거의 주범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이며, 이러한 범죄 행위에 대한 최고 책임자는 이명박과 박근혜이다. 우리는 이승만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저항한 4.19 시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굴복하지 않은 유구한 민주화 투쟁과 80년 5월 광주의 민중항쟁 그리고 86년 6월 민주항쟁에 바친 피와 죽음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장구한 세월 동안 민주열사와 애국시민들의 희생을 바쳐 쟁취한 민주주의가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에 의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이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종교계를 필두로 대학 교수와 청년 학생 그리고 수백 개 시민단체와 일반 시민들 그리고 고등학생들까지 나서서 국정원의 개혁과 박근혜의 책임 있는 결단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반성과 사죄는커녕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선량한 시민을 종북좌파 세력으로 매도하며 제2의 유신독재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향후 어떤 선거도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어 마침내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덤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 반역의 무리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경고한다. 일제강점기의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열사들과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친일 종속적인 망언, 망동으로 민족정신을 훼손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자격이 없다. 민족 분단의 비극과 모순을 극복할 의지도 능력도 없이 선량한 시민들을 향해 종북좌파 운운하며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에 편승하여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급급한 세력에게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자들이 더 이상 민주주의를 능멸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반역의 무리들을 척결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갈 것이다.
 
우리는 헌법 파괴와 국기문란의 주범인 박근혜 정권을 향해 엄숙하고도 강력하게 선언한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는 국민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 선거의 공정성을 지키는 데 있다. 하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는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의 야합과 음모 속에 부정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는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무시하고 국기를 문란하게 한 범죄 행위이다. 더구나 위의 세 집단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가리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과 범법 행위를 무차별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국기문란 세력을 진압하고 이들의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을 권리와 책임을 통감한다. 이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국민 저항권을 발동한다.우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 강령을 선포한다.
 
하나,우리는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을 바로잡기 위한 무기한 투쟁에 돌입한다.
 
하나,국정원과 경찰의 부정선거 연루자는 국민 앞에 사죄하고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부정선거를 주도한 국정원은 즉각 해체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국가 기관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한다.
 
하나,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이 공모한 부정선거의 최대 수혜자이자 최고 책임자인 박근혜는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하나,우리 촛불 민주시민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복하는 세력에 맞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그날까지 어떠한 위협이나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임을 독립열사와 민주열사 앞에 맹세한다.
 
2013년 10월 5일
촛불시민·누리꾼 일동

지난번 기사(세계가 인정한 우리의 기록유산)에서 세계기록유산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아울러 한국이 보유한 세계기록유산의 일부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다 알려드리지 못했던 유산을 마저 설명해드리고, 현재 우리가 남기는 일상의 기록이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채택된 사례를 아울러 소개하겠습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기록물


5. 직지심체요절 (2001년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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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체요절(출처: 위키피디아)

《직지심체요절》의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입니다. 백운화상이 75세이던 고려 공민왕 21(1372)년에 노안을 무릅쓰고, 불교적 깨달음과 안목을 자각하게 하고 불교적인 가르침과 그 맥을 계승하고자 저술한 기록물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의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직지심체요절》의 원본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고종 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 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을 골동품 수집가였던 앙리 베베르(Henry Vever)가 경매에서 구입했습니다. 앙리 베베르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직지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래 《직지심체요절》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하권뿐입니다. 그나마 39장이어야 할 내용 중 첫장은 유실되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어 있다는군요.

《직지심체요절》이 주목받은 이유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직지를 인쇄했던 흥덕사의 창건 연대와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직지심체요절》 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독일 구텐베르그의 활판인쇄술보다 무려 70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6. 팔만대장경판 (2007년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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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팔만대장경판(출처: 위키피디아)

고려대장경판(대장경[大藏經]은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가 일생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 주석서, 이론서를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를 의미한다)은 13세기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8만 1258장의 목판에 대장경을 새긴, 아시아 전역에서는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현존하는 판본자료입니다. 고려대장경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대장경판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언어로 된 경전, 계율, 논서, 교리 및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을 집대성하여 한역한 내용과 더불어 중국어가 원문인 일부 문헌을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고려대장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 기록물이기도 합니다. 경판 표면에는 옻을 칠하여 글자의 새김이 76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상태로 남아 지금까지도 인쇄가 가능하다고 하니 그 기술이 실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고려대장경》은 당대 동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던 모든 불교 경전의 내용을 집대성한 가장 방대한 문헌으로 동아시아 지역 당대 최고의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대의 송나라 대장경을 비롯하여 그 이전에 중국 및 일본에서 제작된 경전과 비교해 볼 때 학술적 내용 및 품질 관리에 투입된 심오한 노력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놀라운 수준이라고 합니다.

7. 동의보감 (2009년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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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출처 : 위키피디아)

《동의보감》은 많은 분이 아시리라 믿습니다. 드라마 허준을 통해 《동의보감》을 들어보신 분도 많으실 테고요. 《동의보감》은 1613년 한국에서 집필된 의학적인 지식과 치료기술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선조의 지시로 여러 의학 전문가들과 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허준이 편찬했습니다.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뿐 아니라, 사회 보건 개념의 확립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까지는 유래가 없었던 예방의학과 국가적 의료 행위의 기본이라고 하는 공공 보건정책에 대한 관념을 세계 최초로 구축했다고 합니다. 또한 실용성을 주요하게 여겨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물 재료를 바탕으로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한다는 '양생'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러한 우수성 때문에 《동의보감》은 2009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의학전문가들은 《동의보감》이 질병 치료와 관련해 정신적·심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동양의학의 ‘총체적 접근법’을 담고 있어, 단순한 기술적인 가치를 넘어 사회적·철학적 가치도 인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초간본 《동의보감》의 보존 상태가 이상적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되었다고 하는군요.

8. 일성록 (2011년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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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출처 : 문화재청)

《일성록》은 조선 영조 즉위 36년인 1760년부터 1910년까지의 국정 전반을 기록한 왕의 일기로 총 3243책으로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 《일성록》은 정조가 세손 시절의 일상생활과 학업 성과를 기록한 《존현각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즉위 이후에는 규장각 각신(직원)들이 날마다 정사를 기록하는 공식적인 국정 기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성록》은 왕이 국정을 반성하려는 목적으로 집필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많지 않은 기록물이라고 합니다.

《일성록》은 조선 후기의 역사 기록뿐 아니라 18세기~20세기 사이 동서양의 정치 및 문화 교류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세계사적으로 사료적 우수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일례로 그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일성록》은 당시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국내에 전파되었는지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어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일성록》은 19세기 서양의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과 그에 따른 충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그 당시 국제질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며, 서민의 청원서와 이와 관련된 여러 조치를 포함하고 있어 18세기 하류 계층의 변화가 국제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일성록》은 편찬 목적, 구성 방식, 내용 면에서 독특한 성격을 보입니다. 근대 이전 역사 기록물은 주로 과거 사건을 다루는 반면 《일성록》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시대의 기록을 담고 있으며 국가를 통치하는 데 참고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성록》은 사건을 정돈되게 기록하고 있으며 참고용으로 주석을 달고 있는데요, 이는 조선시대의 다른 역사 기록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하들의 상소문, 외교문서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현 시대의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되다

9.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앞서 8건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우리 조상이 기록을 남기는 일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세에 도움을 주고, 현실정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선조가 남긴 기록유산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변용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요, 우리의 현재와 과거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일성록》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런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고, 국내 일부 우익단체는 등재 반대 청원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김황식 총리가 국회에서 답변한 "이미 역사적 심판이 내려진 것인 만큼 그런(우익단체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국제자문위원회(IAC)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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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18 기념재단)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발발과 군사정권의 진압, 이후 진상 규명과 보상 등의 과정과 관련해 정부, 국회, 시민, 단체 그리고 미국 정부 등에서 생산한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민주화 과정에서 진상규명 및 피해자 대상 보상 사례를 이끌어내어 여러 나라에 좋은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세계의 학자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과거 청산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사례라고 말했을 정도죠. 다른 국가의 과거 청산 작업이 단편적으로 이뤄진 반면 5.18민주화운동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피해 보상, 기념사업의 5대 원칙이 모두 관철되었기 때문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크게 3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 공공기관에서 생산한 문서로 정부의 행정 문서, 군 사법기관의 수사 재판 기록 등입니다. 둘째, 5.18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각종 단체가 작성한 문건과 개인이 기록한 일기, 기자들의 취재수첩 등입니다. 셋째,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종료된 후, 진상규명과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회와 법원 등에서 생산된 자료, 주한미국대사관과 미국 국무성과 국방부 사이에 오고간 전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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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관련 개인 기록물. 개인이 작성한 기록, 일기장, 신문 스크랩 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는 예를 보여주었다(출처 :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여기에서 생각비행은 둘째 종류에 해당하는 개인의 기록물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에는 앞서 소개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되지 않는 자료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개인이 작성한 기록물입니다. 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등재 심사를 받을 때 국가기록물과 함께 제시된 기록물은 어느 시민의 일기, 신문 스크랩북, 그리고 한 여고생의 일기였습니다. 이런 개인의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 기록물은 자신이 본 현재의 상황을 여과하지 않고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일성록》이 영조, 정조의 시기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국정에 도움을 주었던 것과 같이, 5.18광주민주화운동 개인 기록물 또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상황을 각자의 시선으로 빠짐없이 기록했고, 당시 발간된 신문을 스크랩하여 모은 귀중한 사료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기록을 토대로 신문과 방송이 날조한 어이없는 기록이 아닌, 광주 시민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왜곡 없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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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에 거주한 조영춘 할아버지의 가계부. (출처 : 연합뉴스)


세계기록유산까지는 아니어도 개인 기록이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는 사례는 또 있습니다. 1957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54년간 가계부를 쓴 80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전파를 타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는데요, 조영춘 할아버지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가계부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들고나는 돈의 목록을 아주 꼼꼼히 적어놓은 할아버지의 가계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선 할아버지의 가계부를 분석하면 한국의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1957년과 비교하면 쌀값은 47배 오른 것으로 확인되었고, 강아지는 200배, 소주는 154배 오른 것으로 각각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 기록한 할아버지의 가계부는 한국 농촌 가구의 서민 물가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초자료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소중한 기록물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1세기가 지난 후의 후손이 1950년대 후반부터 2011년도의 물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렇듯 여러분이 작성하는 일기, 편지, 트위터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남기는 글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록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이나 감정, 그리고 사회의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둘 적어서 남긴다면, 그런 기록이 모여 후대에 의미 있는 문화콘텐츠가 되지 않을까요?

기록의 가치를 훼손하는 이명박 정부의 어이없는 행태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조상은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후세에 큰 도움을 주기 위해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 훌륭한 기록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선조의 기록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을까요? 어이없게도 지난 2010년 7월, 정부는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의 개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의 주요 골자는 "보존기간 1년에서 3년 이하 기록물 평가 및 폐기 시 기록물평가심의회의 심의를 생략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정부기록물은 중요도에 따라 보존기간이 1·3·5·10·30년·준영구·영구 등 7단계로 나뉩니다. 모든 기록물을 폐기할 땐 ▲생산부서 의견 조회 ▲기록물 관리 전문요원 심사 ▲기록물평가심의회의(외부 전문가 2명 포함) 심의 등 세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보존연한이 3년인 기록물을 무조건 폐기하는 게 아니라 심의를 거쳐 결정하게끔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을 준비한 저의는 무엇일까요? 같은 시기에 터졌던 민간인 사찰 논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 2010년 6월, 《PD수첩》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자윤리지원관실에서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내용의 탐사보도를 방영한 바 있습니다. 전직 은행원이었던 김종익 씨는 명예퇴직 후 사업체의 대표로 있었는데요, 2008년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링크했다는 이유로 공직자윤리지원관실의 조사를 받아 사업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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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을 손쉽게 폐기할 수 있다면 당연히 진실도 왜곡될 수 있다. (사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공직자윤리지원관실의 사찰에 대한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공직자윤리지원관실에서 경찰서로 직접 수사 의뢰 공문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만약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개정되어 자의적인 폐기가 가능해진다면, 이런 진실을 밝힐 기록조차 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김종익 씨와 같은 억울한 사람이 더 많이 생기겠죠.

이처럼 기록물의 자의적 폐기는 후대에 엉뚱한 결과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국가기록관리위 출신의 한 인사는 “보존기한이 지나도 더 남겨둬야 할 기록물들이 많은데 공무원들이 입맛대로 문서를 폐기하겠다는 것”이라며 시행령 개정을 비판했습니다. 다행히도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의 개정은 철회되었습니다만, 역사의 기록을 함부로 폐기하려는 일부 권력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기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기사에서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도 실록의 근간이 되는 사초는 왕이라도 건드릴 수 없었으며,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의 이름을 남겨 실록 저술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몇 명의 인부와 몇 개의 돌을 썼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한 기록을 빠짐없이 남겨놓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록정신을 남긴 선조의 마음가짐을 후대에 올바르게 전하고, 기록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이들과 맞서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를 튼튼하게 하는 힘이 되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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