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기록물
5. 직지심체요절 (2001년 등재)
직지심체요절(출처: 위키피디아)
안타깝게도 《직지심체요절》의 원본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고종 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 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을 골동품 수집가였던 앙리 베베르(Henry Vever)가 경매에서 구입했습니다. 앙리 베베르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직지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래 《직지심체요절》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하권뿐입니다. 그나마 39장이어야 할 내용 중 첫장은 유실되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어 있다는군요.
《직지심체요절》이 주목받은 이유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직지를 인쇄했던 흥덕사의 창건 연대와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직지심체요절》 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독일 구텐베르그의 활판인쇄술보다 무려 70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6. 팔만대장경판 (2007년 등재)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출처: 위키피디아)
7. 동의보감 (2009년 등재)
동의보감(출처 : 위키피디아)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뿐 아니라, 사회 보건 개념의 확립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까지는 유래가 없었던 예방의학과 국가적 의료 행위의 기본이라고 하는 공공 보건정책에 대한 관념을 세계 최초로 구축했다고 합니다. 또한 실용성을 주요하게 여겨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물 재료를 바탕으로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한다는 '양생'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8. 일성록 (2011년 등재)
일성록(출처 : 문화재청)
《일성록》은 편찬 목적, 구성 방식, 내용 면에서 독특한 성격을 보입니다. 근대 이전 역사 기록물은 주로 과거 사건을 다루는 반면 《일성록》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시대의 기록을 담고 있으며 국가를 통치하는 데 참고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성록》은 사건을 정돈되게 기록하고 있으며 참고용으로 주석을 달고 있는데요, 이는 조선시대의 다른 역사 기록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하들의 상소문, 외교문서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현 시대의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되다
9.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앞서 8건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우리 조상이 기록을 남기는 일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세에 도움을 주고, 현실정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선조가 남긴 기록유산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변용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요, 우리의 현재와 과거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일성록》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런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고, 국내 일부 우익단체는 등재 반대 청원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김황식 총리가 국회에서 답변한 "이미 역사적 심판이 내려진 것인 만큼 그런(우익단체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국제자문위원회(IAC)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진: 5.18 기념재단)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발발과 군사정권의 진압, 이후 진상 규명과 보상 등의 과정과 관련해 정부, 국회, 시민, 단체 그리고 미국 정부 등에서 생산한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민주화 과정에서 진상규명 및 피해자 대상 보상 사례를 이끌어내어 여러 나라에 좋은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세계의 학자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과거 청산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사례라고 말했을 정도죠. 다른 국가의 과거 청산 작업이 단편적으로 이뤄진 반면 5.18민주화운동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피해 보상, 기념사업의 5대 원칙이 모두 관철되었기 때문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크게 3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 공공기관에서 생산한 문서로 정부의 행정 문서, 군 사법기관의 수사 재판 기록 등입니다. 둘째, 5.18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각종 단체가 작성한 문건과 개인이 기록한 일기, 기자들의 취재수첩 등입니다. 셋째,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종료된 후, 진상규명과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회와 법원 등에서 생산된 자료, 주한미국대사관과 미국 국무성과 국방부 사이에 오고간 전문이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 개인 기록물. 개인이 작성한 기록, 일기장, 신문 스크랩 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는 예를 보여주었다(출처 :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여기에서 생각비행은 둘째 종류에 해당하는 개인의 기록물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에는 앞서 소개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되지 않는 자료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개인이 작성한 기록물입니다. 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등재 심사를 받을 때 국가기록물과 함께 제시된 기록물은 어느 시민의 일기, 신문 스크랩북, 그리고 한 여고생의 일기였습니다. 이런 개인의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 기록물은 자신이 본 현재의 상황을 여과하지 않고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일성록》이 영조, 정조의 시기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국정에 도움을 주었던 것과 같이, 5.18광주민주화운동 개인 기록물 또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상황을 각자의 시선으로 빠짐없이 기록했고, 당시 발간된 신문을 스크랩하여 모은 귀중한 사료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기록을 토대로 신문과 방송이 날조한 어이없는 기록이 아닌, 광주 시민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왜곡 없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라남도 진도군에 거주한 조영춘 할아버지의 가계부. (출처 : 연합뉴스)
세계기록유산까지는 아니어도 개인 기록이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는 사례는 또 있습니다. 1957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54년간 가계부를 쓴 80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전파를 타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는데요, 조영춘 할아버지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가계부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들고나는 돈의 목록을 아주 꼼꼼히 적어놓은 할아버지의 가계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선 할아버지의 가계부를 분석하면 한국의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1957년과 비교하면 쌀값은 47배 오른 것으로 확인되었고, 강아지는 200배, 소주는 154배 오른 것으로 각각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 기록한 할아버지의 가계부는 한국 농촌 가구의 서민 물가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초자료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소중한 기록물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1세기가 지난 후의 후손이 1950년대 후반부터 2011년도의 물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렇듯 여러분이 작성하는 일기, 편지, 트위터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남기는 글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록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이나 감정, 그리고 사회의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둘 적어서 남긴다면, 그런 기록이 모여 후대에 의미 있는 문화콘텐츠가 되지 않을까요?
기록의 가치를 훼손하는 이명박 정부의 어이없는 행태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조상은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후세에 큰 도움을 주기 위해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 훌륭한 기록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선조의 기록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을까요? 어이없게도 지난 2010년 7월, 정부는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의 개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의 주요 골자는 "보존기간 1년에서 3년 이하 기록물 평가 및 폐기 시 기록물평가심의회의 심의를 생략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정부기록물은 중요도에 따라 보존기간이 1·3·5·10·30년·준영구·영구 등 7단계로 나뉩니다. 모든 기록물을 폐기할 땐 ▲생산부서 의견 조회 ▲기록물 관리 전문요원 심사 ▲기록물평가심의회의(외부 전문가 2명 포함) 심의 등 세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보존연한이 3년인 기록물을 무조건 폐기하는 게 아니라 심의를 거쳐 결정하게끔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을 준비한 저의는 무엇일까요? 같은 시기에 터졌던 민간인 사찰 논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 2010년 6월, 《PD수첩》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자윤리지원관실에서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내용의 탐사보도를 방영한 바 있습니다. 전직 은행원이었던 김종익 씨는 명예퇴직 후 사업체의 대표로 있었는데요, 2008년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링크했다는 이유로 공직자윤리지원관실의 조사를 받아 사업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국가기록을 손쉽게 폐기할 수 있다면 당연히 진실도 왜곡될 수 있다. (사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공직자윤리지원관실의 사찰에 대한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공직자윤리지원관실에서 경찰서로 직접 수사 의뢰 공문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만약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개정되어 자의적인 폐기가 가능해진다면, 이런 진실을 밝힐 기록조차 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김종익 씨와 같은 억울한 사람이 더 많이 생기겠죠.
이처럼 기록물의 자의적 폐기는 후대에 엉뚱한 결과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국가기록관리위 출신의 한 인사는 “보존기한이 지나도 더 남겨둬야 할 기록물들이 많은데 공무원들이 입맛대로 문서를 폐기하겠다는 것”이라며 시행령 개정을 비판했습니다. 다행히도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의 개정은 철회되었습니다만, 역사의 기록을 함부로 폐기하려는 일부 권력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기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기사에서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도 실록의 근간이 되는 사초는 왕이라도 건드릴 수 없었으며,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의 이름을 남겨 실록 저술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몇 명의 인부와 몇 개의 돌을 썼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한 기록을 빠짐없이 남겨놓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록정신을 남긴 선조의 마음가짐을 후대에 올바르게 전하고, 기록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이들과 맞서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를 튼튼하게 하는 힘이 되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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