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많은 직장인이 근로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당하게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징계를 당하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많은 근로자가 자신에게 그런 부당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늘 사건은 예상치 못할 때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근로자의 권리를 이해하는 일은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대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비행 편집자 중 한 명도 예전에 외국계 출판사에 다니다 속한 부서가 6개월 후에 사라지는 바람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퇴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부당한 해고를 당했지만 나중에야 근로자의 권리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꽤 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때의 충격이 《입사부터 퇴사까지 직장인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근로자의 권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김남주 시인은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생각하며 <고난의 길>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고난의 길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이소선 여사가 그 어머니고
전태일 열사가 그 아들입니다

나는 혹사의 노역장으로 노동자를 내모는 자본의 세계에 살면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상복을 입고
불에 타 죽은 아들의 사진을 껴안고 오열하는 이 여인이 그 어머니인가
목놓아 흐느끼는 모습이
험한 세상에 자식을 빼앗기고
가파른 인생을 사는 우리네 어머니들과 꼭 닮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여
자식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여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식이 굴리다 굴리다 힘에 겨워 못다 굴린 삶의 무게를
그 무게를 머리에 이고 당신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그 길의 시작과 끝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길에는 끝이 있습니다 나도 가렵니다
자본의 무게에 짓눌린 노동자의 틈에 끼여 어깨동무하고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을 함께 가렵니다
노동자가 여는 해방의 길이 인류해방의 길과 맞닿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한테 배워서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근로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법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최소한의 근로 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여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근로조건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근로실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사용자들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하고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 후 1970년 9월 재단사로 평화시장에 다시 돌아온 전태일은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만듭니다. 그러고는 또다시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설문지를 만들어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이런 사실이 《경향신문》에 실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자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임금과 노동시간,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입니다만, 일이 확대되기를 싫어했던 박정희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또한 사용자들은 삼동친목회를 빨갱이 조직으로 몰아 근로자들로 하여금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임을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하고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사용자들과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끝나려 할 때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내달렸습니다. 그는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정도의 권리나마 누리고 있는 것은 전태일 열사와 그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희생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고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노동자의 현실은 더 열악해지고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알리려고 했던 노동자의 권리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상 앞에 놓인 이소선 여사의 영정사진

시인 김남주의 시적 주제는 현실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은유나 상징보다는 직설적으로 주제를 드러내는 예리한 육성으로 현실을 노래했습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1980년대에 문학의 보편적 주제는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통일논의와 노동자들의 권익향상 같은 문제였습니다. 시인 김남주는 철저하게 1980년대 상황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시인이기보다 전사로 불리기 원했고 자신이 쓴 시가 부조리한 현실에서 혁명의 도구로 쓰이길 원했습니다. 그는 <나는 나의 시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또한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 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일어서는 봉기의 창 끝이 되기를

김남주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를 사용했습니다. 시가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지만 어두운 현실조차 미화한다면 아름다움의 진정성은 빛을 잃고 맙니다.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시는 아무도 읽지 않는 언어의 낭비입니다.

이런 김남주 시인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시가 있습니다. <법 좋아하네>의 한 구절입니다. “이게 법이지요/목에 걸면 그것은/부자들에게는 목걸이가 되고/가난뱅이들에게는 밧줄이 되지요.” 시를 통해 시인은 현실에서 법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자의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는 현실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의 표현은 불행하게도 2012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온갖 비리를 저지르다 심판대에 선 대기업 총수나 정치가들에겐 면죄부를 주는 법,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땐 밧줄로 목을 조이는 법.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끝까지 행동하며 온몸으로 시를 쓴 이가 바로 시인 김남주입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김남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처럼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가졌다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아니라 힘 있다고 국민을 무시하는 세상이 아니라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나누는 세상, 힘이 없어도 도와가며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요즘 '경제민주화'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경제민주화입니까? 헌법 제119조 1항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런 법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런 법이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전태일과 이소선이 앞으로 또 자신의 삶을 불살라야 헌법이 규정한 소득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날로 팽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이소선과 전태일 모자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업의 목적이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땀 흘린 노동자가 생존을 위협받지 않고 행복한 경제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본을 지키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를 위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알고, 법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일터를 사랑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남주
1946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94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라남도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3선개헌 반대와 교련반대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1973년 유신반대운동을 하다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2년형을 받고 8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1974년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습작생활을 하다 그해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1978년 서울로 올라와 남조선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97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88년 12월 가석방됐다. 그는 살아서 "시인이라기보다,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전사"라는 말을 즐겨 말했다. 시집으로 《진혼가》《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사상의 거처》등이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합니다. 며칠 전만 해도 가뭄을 걱정했는데 이제는 물난리를 걱정하며 행여 비가 더 오면 어쩌나 근심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재정위기에 봉착했고 지방자치단체들은 복지예산이 바닥났다고 울상입니다. 점입가경으로 가계부채는 나날이 더 늘어나기만 합니다.

최근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고는 있지만, 고용 없이 성장 일변도인 대기업은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6조 7000억 원으로 2분기 최대 실적이라고 떠들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MB정부의 대기업 중심 정책과 백혈병으로 죽어간 삼성 근로자의 희생, 외국보다 국내에서 비싸게 휴대전화를 판 결과여서 슬프고 화가 납니다. 정부는 서민보다는 대기업이나 부자들 편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언론은 대기업과 권력의 눈치를 살피느라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출처: 뉴시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웃이 서로 잘 사는 길은 과연 없을까요? 정치政治는 부정不正을 바로잡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정치가들은 스스로 부정不正을 저지르고 국민을 속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고려가요로 알려진 <청산별곡>을 읽으면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방식은 별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특히 〈청산별곡〉 5연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어듸라 더디던 돌코/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마자셔 우니노라”를 해석하면 “어디로 던지는 돌인가/누구를 맞히던 돌인가/미워한 사람도 사랑한 사람도 없지만/맞아서 우노라”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날 봉변을 당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열심히 살지만 가난함을 벗어날 수 없는 삶, 세대를 거듭하고 반복되는 절망적인 삶입니다. 이러한 절망적 현실을 피해 청산이든 바다든 어딘가에 숨어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권력은 국민한테서 나옵니다. 아주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피하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대사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명분을 만들고 국민의 고혈을 짜냅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권력자들이 말하는 '국민'은 단 10퍼센트도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법은 90퍼센트의 국민에게는 평등하지 않고 마치 10퍼센트의 기득권층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합니다.

고려 시대 가요인 <청산별곡>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끼 묻는 쟁기’나 ‘경작하던 밭’과 같은 구절을 보면 농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 힘들고 외롭고 의욕마저 상실한 상태입니다. 제정신으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어 현실을 떠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은이는 누군가를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일 뿐 아니라 낮에 그럭저럭 지내도 저녁에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 없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지은이는 왜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게 되었을까요? 경작하던 밭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고 자신이 사용하던 농기구를 이끼가 낀 채로 버려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누구를 원망할 기운조차 없는 듯합니다. 사랑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매일 경험하는 현실은 또다시 아픔을 줍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형벌입니다. 희망을 거세당한 그에게 청산과 바다는 도망가고 싶은 곳이고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잊고 벗어날 수 없으니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출처: 민중의 소리)

<청산별곡>의 저자가 살았던 땅에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사람이 내일을 걱정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힘없는 그들에게 제발 돌마저 던지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바로 그들이 권력자에게 권력을 부여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곧 기업을 움직이는 근로자이자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이고, 오는 12월 9일 이 나라의 대표자를 뽑을 투표권자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돌을 던지지 마세요.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청산별곡靑山別曲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가시리> <서경별곡>과 아울러 가장 뛰어난 고려가요 중의 하나이지만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문이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수록되었고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는 제1연 및 곡조가 실려 있다. 옛 문헌에서 제목이나 해설을 찾을 수 없어 고려 시대의 노래라는 확증은 없지만, 형식이 《서경별곡西京別曲》《쌍화점雙花店》과 유사하고 언어 구사나 상념 ·정조가 조선 초기 가요의 건조함과는 판이하므로 고려 시대의 가요로 보고 있다. 형식은 전편이 8연, 매연은 4구, 매구의 운율은 3 ·3 ·2(3)조이며 연마다 후렴구가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말랐던 땅에 촉촉이 비가 내렸습니다.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비 한 방울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말로만 상생을 외치는 대기업과 정치권의 외침 속에서 중소기업과 서민의 삶은 언론조차 외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혁명을 외치던 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가끔 4.19 혁명 때, 1980년대 민주화운동 때, 군사정권 이후에 왜 이 사회를 바르게 바꾸지 못했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젊은 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며 무엇인가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4.19 혁명 시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 거리를 메웠던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먹고살기에 팍팍한 일상을 하루하루 견디는 기성세대가 되어 지금 현실을 더욱 목마르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러한 원망은 곧 '나'를 향하는 화살이 되어 비수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세상을 향해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는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이런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대의 순수함와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혁명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이가 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나'를 보게 합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미래를 꿈꾸기보다 노후를 걱정하고 변화를 바라기보다 개인의 안녕만 바라는 부끄러운 일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나이보다 생각이 더 늙어버린 것은 아닌지, 건방지게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욕만 하는 것은 아닌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읽으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붐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철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는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시인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어'를 구사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언어를 그대로 시로 옮겨 표현하기 때문에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역시 일상적 언어를 사용하고 특별한 비유법을 쓰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시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순수했던 젊은 날의 기억과 현실에서 타협하는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겹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겠지요. 

시는 보이는 표현도 중요하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내면의 일렁임이 있을 때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는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1979년 처녀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벌써 31년이 지났습니다. 1990년 성탄절에 친구한테서 선물로 받은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이 시를 읽고난 이후 김광규 시인의 시집을 모두 사서 읽었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현실의 뒤틀린 모습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기주의와 속물근성을 단순화하여 보여줍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찔림'을 느끼게 합니다. <나>라는 시에서 시인은 상황에 따라 아들, 아버지, 동생, 형, 남편, 오빠, 조카, 아저씨, 제자, 선생, 납세자, 예비군, 친구, 적, 환자, 손님, 주인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냐고 말이지요. 현대 철학은 근대적 주체가 아닌 '관계적 주체'를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여러 역할 속에서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성찰하고 있습니다. <버스를 탄 사람들>이란 시에서는 대학가에서 최루탄 냄새가 나는 젊은이들이 올라타도 아무말 하지 않는 시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범한 시민이라 할지라도 그저 실없는 구경꾼이나 행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낯익은 그들에게서 동지애를 느끼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게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시인의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광규 시인은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며 주변 인물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면서 잊고 지내는 모습과 현실의 뒤틀린 모습을 이야기를 하듯 표현합니다. <나의 자식에게> 라는 시에서 " 위험한 곳에는 아예 가지 말고/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중략).../지진이 일어나는 날은 /집에만 있는 것도 위험하고/아무 짓을 한해도 의심받는다/조용히 사는 죄악을 피해/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평온하게 살지 마라/무슨 짓인가 해라/아무리 부끄러운 흔적이라도/무엇인가 남겨라"라고 말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사는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현실은 언제나 올바르지 않을 수 있으며, 그른 것을 보고만 있어도 죄악이 됩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세상을 바꾸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연 바뀐 세상이 왔을 때 살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운동경기의 구경꾼으로 세상을 관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동경기에서 반칙이 일어날 때 심판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구경꾼들은 소리를 지르고 야유를 보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구경꾼입니까? 아닙니까?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를 준비가 됐습니까?

김광규

1941년 1월 7일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했다. 괴테 인스티투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서독으로 유학가서 뮌헨대학교에서 수학했고 현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1975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했으며 첫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으로 제1회 녹원문학상을, 1983년 두 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김수영문학상을, 다섯 번째 시집 《아니리》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2003년 여덟 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로 제11회 대산문학상을, 2007년 아홉 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제19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시집 《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하루 또 하루》, 시선집으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으로《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육성과 가성》, 번역서로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로렐라이》등이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한국전쟁을 수나라, 당나라, 원나라의 침략처럼 과거에 일어난 일로 치부하고 역사의 화석같이 취급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실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한반도의 상흔은 복구 노력과 오랜 개발의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정서적 충격과 이데올로기적 논리는 1970~1980년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분열시키는 정치적 도구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준비가 부족했던 해방을 맞이한 뒤, 우리의 의사와 무관한 분단과 남북 갈등을 겪은 것도 모자라 같은 민족끼리 피를 뿌리는 참혹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처럼 1945년부터 1950년 초반까지의 한반도는 기쁨과 희망에서 슬픔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 맺힌 공간이었습니다. “아아~6.25!” 하고 슬픈 탄성을 자아내는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살아남은 이에게는 괴로움, 분노, 삶의 허무함만 남겼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많은 분이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의 충격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과연 그 감정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생각비행이 찾은 하나의 답은 박인환의 <어린 딸에게>라는 시입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소개합니다.

1955년 발행된 박인환의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시집.

 

어린 딸에게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 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 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박인환 하면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시를 떠올릴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박인환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남긴 <어린 딸에게>라는 시는 막연하게 서구를 동경하는 시인으로 알고 있던 박인환의 또 다른 면을 엿보게 합니다. 이 시는 1955년에 나온 박인환의 첫 시집《박인환선시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박인환 시인은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지하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는 도중 서울 수복 3일 전에 딸이 태어났고, 1.4 후퇴 때 시인은 딸을 안고 가족과 함께 피난 열차에 오릅니다. <어린 딸에게>라는 시는 이런 참담한 배경을 두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마치 유서처럼 써내려간 작품입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태어난 딸의 불투명한 미래와 빈곤한 형편, 불안한 조국의 현실과 좌절감, 참혹한 현실에서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를 전쟁으로 단절된 현실과 절망적 상황을 형상화하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일상적 심정을 배설하고, 현실 극복의지가 떨어진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펜대를 휘둘러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한국전쟁은 시인 박인환의 정신에 깊숙이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는 곧 허무주의로 나타났으며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극복하지 못한 그의 한계가 되었습니다. 사실 박인환은 <샤르트르와 실존주의>라는 글에서 사르트르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행동철학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소박한 감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가 김수영처럼 4·19 혁명을 겪으며 1960년대를 맞이했더라면 어쩌면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군요.

전쟁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고,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화하고,
전쟁은 살아 있는 것 자체를 절망으로 만듭니다.

박인환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6년 3월 20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서울로 상경하자 덕수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으며, 경기공립중학교를 다니다 영화에 빠져 만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퇴했다. 그 후 명신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해방이 되자 중퇴했다. 그는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운영하며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며 많은 문인과 교류했다. 마리서사는 그가 시인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6년 《국제일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을 남겼으며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해 많은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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