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더위도 한풀 꺾여 곧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 이제 좀 살만하다고 느껴야 할 텐데, 그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오르는 물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경제위기와 관련된 불안한 소식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건들만 보도하는 뉴스와 신문 때문에 국민의 속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뭔가 기분 좋은 소식이 없나 싶어 눈을 굴려보지만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값 등록금 논의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고, 중국과 FTA를 한다는 소식만 무성할 뿐 잘나가는 공기업을 민영화하겠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주는 언론이 없네요. 노동자를 탄압하는 사설 용역회사의 문제,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목소리와 현장의 투쟁상황을 주요 언론이 외면하는 가운데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드는군요. 

누구를 위한 FTA이고 누구를 위한 민영화이며 누구를 위한 해군기지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고도 위정자들은 오늘도 국민의 뜻대로 정치를 펼치겠노라고 헛소리만 해댑니다. 참 슬프고 우울한 세상입니다. 일찍이 함민복 시인은 사회적 소통이 단절된 공간 속에 은거하고 있는 현대인의 소외된 삶을 <우울氏의 一日>이라는 연작시에 담아낸 바 있습니다.

단지 공짜라는 이유로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나와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했지만 기계와 대면하는 삶이 힘들어 4년간의 근무를 끝으로 서울예전 문창과에 늦깎이로 들어간 함민복. 그는 2학년 때인 1988년에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슬픔마저 관조하는 여유로움을 보여줍니다.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삭월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이 땅에 많은 사람이 현실에 순종하며 살면서 저마다 행복을 꿈꿉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만 있다면 참을 수 있는데, 그 희망마저 빼앗는 세상이라니 사는 게 고역입니다. 졸업과 동시에 등록금 대출이라는 빚을 떠안고 사회로 나와 좁은 취업문을 두드리다 희망보다 절망에 익숙해지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 그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 게 바로 앞선 세대와 국가의 의무가 아닌가요? 

과연 누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라는 시를 쓴 함민복 시인 자신도 이처럼 미래를 논할 수 없는 곤궁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등록금을 대기 위해 형은 전세에서 사글세로 옮겨야 했고, 그런 형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의 심정은 참혹했습니다. 

그런 일상 가운데 함민복 시인은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의 삶을 보았습니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고 하면서 그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함 시인은 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젊은 부부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실낱같은 희망에 행여 그림자라도 드리울까 염려하여 이미 물배가 찼으나 마지막 면발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함 시인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 사회엔 아직 무수한 희망이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건설 현장에서 뜨거운 태양에 굴하지 않고 빗물 같은 땀방울을 흘리는 노동자의 모습에서, 날품팔이 재래시장에서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노파의 모습에서, 국가 폭력과 공권력 폭력이 난무하는 투쟁의 현장에서 남의 고통을 제 것인 듯 견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슬픔으로 배부른 세대, 좌절에 익숙한 세대에게 그저 기다림이 희망의 묘약이 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젊은 중국집 부부처럼 작은 일에 감사하며 하루를 온 힘으로 버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젠가 일어설 것입니다. 들풀처럼 민중은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함민복
1962년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 근무하다 서울예전 문창과를 졸업했다. 1988년 《세계의문학》에 <성선설>로 등단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강화도에서 전업시인으로 살고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애지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받았다. 그가 펴낸 책으로는 시집 《우울씨의 일일》《자본주의의 약속》《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말랑말랑한 힘》, 에세이집 《눈물은 왜 짠가》《미안한 마음》《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가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곧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독립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죠.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에서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했습니다. 

광복절의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뜻합니다. 1930년 3월 1일을 기념하여 소설가로 알려진 심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는데요,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오이다.

출처: 《한국대표시선》, 참한문화사, 1983년/ (원서:《그날이 오면》,漢城圖書株式會社, 1949년)

1901년에 태어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어 퇴학당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그날이 오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이라는 구절에서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그날’은 그가 죽은 지 9년 후에 도래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했기에 뼈아픈 역사의 길로 이어지고 맙니다. 해방 후 좌우의 사상대립, 동족끼리 총칼을 겨눠야 했던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성취하기까지 흘린 국민의 피... 이 모든 것이 따지고 보면 친일인사를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는 그대로 반복된다고 하지요.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채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맺은 ‘한일기본조약’은 지금까지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을 가로막는 지나치게 친일적이고 굴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문학계도 친일논란에서 비켜갈 수 없습니다. 일제 때 학도병 자원을 독려하는 내용의 시를 썼던 모윤숙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외교관으로, 박정희 정권에서는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친일 시인으로 알려진 서정주는 훗날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습니다. 이처럼 친일 인사는 사회 기득권과 연결되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를 이어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친일 문학인 31명의 작품은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글만 잘 쓰면 반민족 행위인 친일을 했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선례로 남아 대한민국의 역사의식을 흐리고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 중 친일문학인 31명>

김기진(金基鎭) 김동인(金東仁) 김동환(金東煥) 김문집(金文輯) 김억(金億) 김용제(金龍濟) 김종한(金鍾漢)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박영희(朴英熙) 백세철(白世哲) 서정주(徐廷柱) 유진오(兪鎭午) 윤두헌(尹斗憲) 이광수(李光洙) 이무영(李無影) 이석훈(李錫(水+熏))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장덕조(張德祚) 장은중(張恩重) 정비석(鄭飛石) 정인섭(鄭寅燮) 정인택(鄭人澤) 조용만(趙容萬) 조우식(趙宇植) 주영섭(朱永燮) 주요한(朱耀翰) 채만식(蔡萬植) 최재서(崔載瑞) 최정희(崔貞熙)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합니다. 작가 심훈은 그런 점에서 삶 가운데 온 힘을 다한 예술인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소설에서, 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친일의 도구로 사용했던 여느 예술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였습니다. 특히 그가 쓴 대표적인 장편소설인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사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어 그해 9월 10일~1936년 2월 15일까지 신문에 연재되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심훈의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젊은이들의 강한 저항의식과 휴머니즘이 그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계몽운동은 러시아의 브나로드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브나로드’는 말기 러시아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입니다. 1874년에 많은 러시아 학생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이 계몽운동을 브나로드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운동은 국내에서 농촌계몽운동으로 발전해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담은 작품 <상록수>는 리얼리즘 농촌문학을 여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제의 억압으로 신음하는 민중을 깨우치는 역할을 잘 담고 있습니다. 심훈은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가 살면서 <상록수>를 집필했는데요, 이런 농촌의 경험이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았던 심훈이 그토록 원하던 해방의 ‘그날’은 67년 전에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67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이 온전히 완성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친일,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그날은 오지 않을까요? 많은 국민의 바람인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완성되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심훈

본명은 심대섭이며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으로 활동했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당하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해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 영화, 소설 등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7년 결혼한 왕족 이해영(李海暎)과 1924년 이혼했다. 1925년 번안한 소설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했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하여 제작했으며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성공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으로 영화제작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는 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했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했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했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무산되고,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두 번에 걸쳐 연재가 중단된 소설 <동방의 애인><불사조>와 애국 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는 가난한 인텔리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다. 대표작인 <상록수>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해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휴머니즘이 기본적으로 흐른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최근 각 당 대선주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정치인들이 내놓는 과거사 관련 견해가 구설에 오르는 일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한들 독재를 미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이 있을 수 없겠지만 군사독재 시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민주주의적 가치가 더 충만하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라니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아 끔찍합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이 합법적이었다고 말하는 일본 우익의 역사 인식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습니다. 역사의 향방을 걱정해야 하는 이때에 윤동주의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_1942. 1. 24.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살면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노래한 시인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란 무엇에 관한 걸까요?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때인 1942년에 썼다고 합니다. 1941년에 일제는 조선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각종 악법을 공포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라 식민지 현실은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윤동주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 절차를 밟기 위해 창씨개명을 합니다. <참회록>에 나오는 참회의 내용은 그 일에 관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념과 양심을 저버리고 참전을 독려하는 글을 썼던 문인 가운데 해방 후 누가 참회의 글을 썼던가요? 군부독재 시절에 독재자를 찬양하는 시를 썼던 시인 가운데 누가 참회의 글을 썼던가요?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은근슬쩍 넘어가는 행태 아니던가요? 우리는 해방 후에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군사독재 시기가 끝났어도 그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모순된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장관이나 대법관 같은 요직의 인사청문회 물망에 오르는 사람 가운데 편법으로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8대 국회의장 김형오, 여권 대권주자 박근혜, 경기도지사 김문수 등 많은 정치가가 공공연하게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윤동주의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읽었다면 당연히 <참회록>이라는 시도 읽었을 테지요. 그들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회의 뜻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비 오는 날의 인사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나이를 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잊은 채로 당신의 나라에 와 버렸고

잊은 채로 당신의 학교에까지 와 버렸습니다

팔짱을 끼고 독수리상을 지나서 좀 왼쪽으로 올라가면

당신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를 넘은 제 삶을

여기에 옮긴 것은 옳았던 것인지


―여기는 윤동주 선배님의 조용한 안식처입니다. 담배 꽁초를 버리지 맙시다.

오늘은 비가 지독하고

팻말은 풀숲 속에 쓰러진 채 비에 젖어 있었지만 후배들은 여기서 담배 따위는 피우고 있지 않아요

여기 올 때마다 조그마한 꽃다발이 놓여 있습니다

―시인이 시인이라는 것만으로 학살당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라고 일본의 한 뛰어난 여성시인이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저의 어머니의 시대 할머니의 시대입니다

저는 당신의 종점으로부터 출발해 왔습니다

언제나 종점으로부터 출발해 왔습니다

이제 폭풍우는 우상을 뒤집어서

저는 당신의 말 앞에 서 있습니다

실현될 때 말은 빠릅니다

빛처럼 실현될 때

말은 운명입니다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 지상에서

녹지 않는 별의

그 딱딱한 눈동자의 빛에 비추면서

저의 부끄러움과 당신의 부끄러움은

서로 얼굴을 맞을 수 있는 것인가요


비가 그치면

<사람이 되지>라 대답한 

수없는 당신의 동생들이

뛰어다니는 이 대학가 상공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최루가스가 자욱하게 있습니다

 이 시는‘사이토우 마리코’라는 일본인이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쓴 시입니다. 내용에도 나오지만 시인 윤동주에 관해 쓴 시입니다. 이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녀는 윤동주 시인이 죽은 곳에서 출발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이 시인에게 저지른 만행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이 시인이라는 것만으로 학살당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라고 일본의 한 뛰어난 여성시인이 쓴 적이 있습니다/당신에 대해서입니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처럼 일본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말합니다. 

시인 윤동주의 종점에서 출발해 시인 윤동주의 출발점에 선 시인 사이토우 마리코의 시선에 들어온 연세대학교 하늘은 최루가스가 자욱했습니다. 그녀는 시인 윤동주의 출발점에서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참회를 요구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지 않는 기득권층을 향해 시위하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이 시가 발표된 지 근 20년이 흘렀습니다. 대학가에서 최루탄은 사라졌지만 공권력은 시위 진압현장에서 여전히 최루액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부끄러움을 모르던 기득권층은 여전히 '참회'라는 단어를 모릅니다. 같은 하늘을 지고, 같은 바람을 느끼고, 같은 별을 보고, 같은 시를 읽으며 살면서 말입니다.

윤동주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했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하고, 광명중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조선일보》《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자화상><쉽게 쓰여진 시>를 발표했고, 대학시절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후 1948년에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을 모은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짧은 생애 동안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빼어난 서정성이 담긴 시를 써 '서정적 민족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도종환 민주통합당 의원이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도종환보다 시인 도종환으로 훨씬 유명한 그가 세간의 이슈로 떠오른 계기는 편향적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잣대 때문이었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국회의원 신분이 된 도종환 시인의 작품을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중학교 교과서에서 삭제하도록 해당 교과서 출판사에 권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교육평가원의 이러한 삭제 권고의 근거로 “교과서 심사 원칙은 교육의 중립성 유지를 위해 현존 인물(현역 정치인 포함)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는 것이었음”이라고 밝혔습니다만, 이러한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박원순 서울시장의 수필 <아무나 가져가도 좋소>도 빠져야 하고,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뛰어드는 순간 <내 삶의 가치>라는 수필도 교과서에서 빼야 할 겁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실제로는 편향적인 교과서 심사원칙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정치가의 기준을 정당에 관련된 인물이나 투표로 선출된 사람으로만 한정할 수 있을까요? 대표적인 뉴라이트 인사로 박근혜 대선캠프에 속한 박효종 교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의 공동저자입니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정치적 이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김동길 교수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라는 글도 교과서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교육평가원의 기준이 공정하다면 이들의 글은 교과서에 왜 실릴 수 있을까요?


종점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오다
―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골목을 채운 아이들 육이오 노랠 듣는다.
구름은 북으로 기울고 새들은 낮게 나는데
우리 누이들 단발머리 풀풀 고무줄 할 때
양지쪽에 기계충독 오른 머릴 쪼이며
― 원수에 하나꺼지 쳐서 무찔러
쪼그려 앉아 따라 부르던 노래
지금도 도깨비 시장 리어카 끄는 서상사 아저씨
짧은 여름밤은 전쟁 얘기로 흥겨웁고
멋진 군인이 되고파 주먹을 쥐게 하더니
아직도 유월이면 이 증오의 노랫소리 들리고
장마전선은 내일도 걷히지 않으리라 한다.
그땐 어찌하여 말해주지 않았을까.
일방적인 증오가 애국심이 아니라는 것쯤
폭력의 언어와 내용없는 적개심만으로
글짓기 대회 그리기 대회의 상들을 타게 하고
그것은 통일의 방법도 뭣도 못된다는 것쯤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전쟁은 신나는 일도 스릴과 써스펜스도
아니라는 것쯤 왜 가르치지 못했던 것일까.
어둠은 쉬이 오고 곤청색 산들을 끌며
비구름은 지평선을 넘는데
벽 돌담 아래에 아이들은 모여든다.

도종환 시인의 <종점>이란 작품에서 “일방적인 증오가 애국심이 아니라는 것쯤/폭력의 언어와 내용없는 적개심만으로/글짓기 대회 그리기 대회의 상들을 타게 하고/그것은 통일의 방법도 뭣도 못된다는 것쯤/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라는 구절이 가슴에 남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보다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실 지금 사회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세대가 이런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고스란히 받은 이들입니다. 지금도 교육현장에서 이러한 주입식 교육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도종환 시인은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쳐왔고 바른 교육을 정립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적어도 그는 <종점>이라는 시에서 지적한 일방적인 증오심을 키우는 교육, 적개심을 일으키는 교육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민중이니 민족이니 역사니 하는 것을 먼 곳에서 찾지 않는다.
식민지 시절에 앗기우며 한 세월을 보낸 할아버지, 태평양전쟁 말기 남양군도에 징병으로 끌려가 돌아가신 큰아버지, 그 큰아버지와도 싸웠을 군대에 배속되어 분단의 전쟁을 치른 아버지, 소금장수, 이발쟁이, 날품팔이, 농사군 형제들, 언청이, 못난이 누이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내 이웃의 삶 속에는 생생한 역사와 삶의 아리고 한스러운 흔적들이 흉터처럼 박히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민중은 내 가까운 피붙이와 내 자신 속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다. 이 모든 동시대인들의 삶에 몇 발작 비켜서서 자학하고 탄식하며 오만함 속에 또한 신비한 체험 속에만 빠져서 반성문 같은 시, 변명 같은 시만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하리라 믿는다.
분단시대 약소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들 속에 서서 튼튼한 시를 쓰고 싶었다."
-《고두미 마을에서》 후기 중에서


시인 도종환은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의 후기에서 말하는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시를 충실하게 써왔습니다. 전교조가 사회의 이슈로 떠올라 시끄러웠던 때에 전교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시를 썼고, 사회의 벽이 느껴질 때는 그 벽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시를 썼습니다.
 
그렇게 사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대면했던 시인 도종환은 이제 국회의원 도종환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정치와 관련 없는 시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더 힘든 정치인생을 겪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자랐던 우리는 이제 시인 도종환이 아닌 정치인 도종환의 모습을 지켜볼 것입니다.

이번에 시인 도종환의 시를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했던 한국교육평가원의 판단은 정치인 도종환이 쓴 <담쟁이>의 일부분을 문재인이 대선에 참여하면서 인용했고, 정치인 도종환이 문재인 대선 캠프에 합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이던 2004년에 문학사상사가 펴낸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라는 책에서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되었고, 살아가면서 풀어가야 할 과제가 되었다”면서 “인생의 지표가 된 이 시를 매일 아침 새롭게 가슴에 새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측근 비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는 요즘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로 끝나는 함석헌 선생의 시를 아직도 이명박 대통령이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는지 의심스럽군요.
  
정치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많은 사람에게 밝힌다는 것은 그 시의 상징적 무게를 등에 업는 것과 같습니다. 새누리당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과 김문수 경기지사는 윤동주의 <서시>를,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정치가는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고들 합니다만, 시의 상징성을 등에 업으려 하는 정치가에게 '시어'는 오만한 거짓을 드러내는 진실의 현미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의 <서시>중에서)”는 시인의 표현에 맞게 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하며,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중에서)”라는 외침을 과연 실천할 수 있는지 그들은 되물어야 할 겁니다.

2012년은 정치의 해입니다. 많은 사람의 눈과 귀가 정치가의 언행에 쏠려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정치가가 그립습니다. 정치 세력을 따라 호가호위하려는 언론이나 검찰 등 권력층의 행동은 이 더위에 국민을 더 짜증 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도종환
1954년 청주에서 출생하여 충북대 사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7년 청산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사의 길과 시인의 길을 함께 걸어오다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고 투옥되었으며, 1998년 해직 10년 만에 덕산중학교로 복직하여 교사로 재직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청주지부장, 장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충북지회 문학위원회 위원장, 제4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을 지내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제8회 신동엽 창작기금, 제7회 민족예술상, 2006년 올해의 예술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2006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해인으로 가는 길》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마음의 쉼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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