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추석 명절을 보낸 가을, 유난히 고향이 그립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에게 시골의 고향은 그림이나 영화 또는 여행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처럼 아련하기만 합니다. 방학 때 친척을 찾아 시골에서 논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향 하면 앞에 강이나 바다가 있고 뒤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오늘 소개할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를 쓴 김준태 시인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입니다. 그는 "살구꽃이 피고, 보리꽃이 피고, 봄마다 뜸북새가 울고, 여름마다 물꼬싸움이 찾아들고, 매미가 울고, 가을엔 저녁노을처럼 들기러기가 내려앉는 곳. 뿐이랴, 논밭들이 헐떡거리는 들판 건너 바다도 보이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이다" 하고 자신의 고향을 소개합니다.

시인의 말마따나 고향은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편안함을 주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장 일변도인 정부와 지자체의 개발 논리 앞에서 전국의 고향은 위태롭습니다. 댐을 만들어 수몰되거나, 공장이 들어선다고 파헤쳐지거나,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고층 아파트가 세워지거나, 항구를 만든다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산과 들과 강과 해변이 추억으로만 남을 위기에 처한 곳도 많습니다. 4대강 공사로, 해군기지 건설로, 간척사업 등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우리의 고향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에서 표현되어 있듯이 시인은 도시생활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참깨를 터는 작업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라고 심경을 직접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휘파람불며 참깨를 털어내는 손자에게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하며 가볍게 일러주십니다.

‘참깨 털기’가 도시생활에 익숙한 손자에게는 큰 즐거움이겠지만, 할머니에게는 해마다 돌아오는 일상생활입니다.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며 참깨를 텁니다. 깨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젊은 손자는 해지기 전에 집에 가려고 빨리 털어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할머니는 귀여운 손자에게 가벼운 꾸중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흔합니다.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농촌의 삶을 막연히 즐겁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조선 시대 윤선도처럼 가난하지만 낭만적인 생활을 하고 왔다는 식으로 농촌생활을 '쉼'과 '재미'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윤선도가 자연과 어촌의 평화로운 풍경을 노래하며 즐기는 동안 보길도 주민은 일상의 힘겨움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체험'을 하러 내려가는 사람들에겐 그곳의 일상이 재미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논밭에서 땀 흘리는 현지인들로서는 일상을 재미로 국한하여 말할 수는 없겠지요. 젊은 손자의 모습과 농촌을 문화체험의 현장 정도로 생각하는 요즘 도시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김준태 시인이 <참깨를 털면서>를 발표한 1970년대는 농촌에서 많은 젊은이가 빠져나와 도시로 이주하던 때였습니다. 농촌에서 젊은이를 찾아보기 어렵고 노인들만 남은 곳이 허다했습니다.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파헤치고 개발 논리를 내세워 고향을 배반하고 팔아먹기도 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런 일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준태 시인은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집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고향을 잊어먹거나 고향을 배반하거나, 고향을 뒷발로 차버리거나, 고향을 올라타고 말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아. 고향! 이제 우리는 고향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고향을 깊이 어루만져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사방팔방으로 입맞추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노래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울어주어야 할 것 같고, 아주 우리가 진짜로 고향이 돼버려야 할 것 같다. 사람들아, 오 사람들아. 이제 우리는 저마다 고향이 되어서 기실 천지간이 온통 고향으로 둘둘 뭉쳐졌으면 환장하게 좋을 것 같다.
몇 주먹 더 털어놓자면, 사람들아, 나의 고향은 나의 宇宙다. 나의 고향은 나의 敎科書요, 바이블이요, 눈알이요, 망원렌즈요, 배꼽이요, 귓구멍이요, 속옷이요, 머슴이요, 스승이요, 보리밥이요, 天國이요, 개똥이요, 구정물통이다. 요컨대 나의 고향은 나의 모든 것이다. 나의 未來다.

글을 마무리하며 《참깨를 털면서》의 발문을 쓴 조태일 시인과 천상병 시인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조태일은 김준태의 시를 읽고 자신보다 인생의 연륜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가 보내온 약력을 보고 대학교 초년생이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 뒤 김준태는 중앙의 발표지면을 통해 좋은 시를 맹렬히 발표합니다. 하루는 《창작과비평》에 실린 김준태의 <감꽃> 등의 시를 읽고 천상병 시인이 조태일 시인을 찾아왔습니다. 

감꽃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대낮부터 청진동 막걸릿집으로 조태일을 데려간 천상병 시인은 백 원어치의 막걸리를 이 세상에서 남에게 사는 처음이자 마지막 술이라며 권했다고 합니다. 김준태의 좋은 시를 읽고 매우 기쁘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옛동무를 만나 고향의 추억을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김준태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과를 졸업했다. 1969년 월간 《시인》지로 등단했다. 베트남전쟁에 1년 동안 참전했으며 13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11년간 전남일보, 광주매일 편집국, PBC광주평화방송 시사자키, 5·18구속자 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문창과 초빙교수로, 광주 금란로에 작은 학교 <금남로리케이온>을 마련하여 교육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참깨를 털면서》《나는 하느님을 보았다》《국밥과 희망》《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칼과 흙》《지평선에 서서》, 소설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 외 액자소설 88편, 통일시해설집 《백두산아 훨훨 날아라》, 세계문학기행집《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 평전《명노근 평전》 베트남전쟁소설《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등이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가을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과 단풍, 낙엽의 계절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이런저런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최근에 편지를 쓴 기억이 있습니까? 휴대전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메일, 메신저 등이 익숙한 시대입니다. 종이에 정성껏 펜으로 꾹꾹 눌러 편지를 써본 지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부는 이때, 편지나 엽서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이메일이라도 편지 형식으로 누군가에게 진솔한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건 어떨까요?

가을편지
                    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는 분이라면 이 시의 감흥을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편지나 엽서를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내기 어렵다면 이메일로 편지의 형식을 갖춰서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누군가의 그대가 되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면 스산한 가을 저녁에 외로운 밤을 보내진 않을 테니까요.

<가을편지>는 시인 고은이 쓴 노랫말에 약관의 미대생인 김민기가 곡을 붙이고 샹송 가수 최양숙의 목소리로 1972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입니다. 그 이후로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했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듣다 보면 당장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대인가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대이길 바라나요?’
현대인은 직장이나 각종 모임 혹은 온라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이 가을에 누군가를 그대로 생각하고 편지를 써보세요. 여러분이 바로 아름다운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호승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하지만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말입니다. 요즘 연인들은 예전처럼 편지로 소통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편지보다는 전화나 문자, 메신저 등으로 즉각적으로 소통합니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답문자가 오지 않거나 통화가 되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일이 잦습니다. 설레는 시간도 짧아졌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에서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은 꽤 길어집니다. 그리움의 눈물도 흘렸지만 원망보다 사랑이 더 깊어집니다. 외로운 마음은 첫눈으로 녹고 다시 설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사랑이 성숙하고 깊어지는 자양분입니다. 그 시간을 타고 편지가 옵니다. 마치 첫눈처럼….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또 기다리는 편지>와 다른 느낌이긴 해도 <즐거운 편지>에 나타난 ‘기다림의 정서’는 공통적입니다. '편지는 기다림'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말을 하고 평범하게 쓰지만 진한 울림을 간직한 채 수취인을 찾아갑니다. <즐거운 편지>의 화자는 사랑을 기다림으로, 기다림을 사랑으로 바꾸고 항상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귀한 사랑의 행위와 같습니다. 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여길 때 사랑은 완성됩니다. 편지도 받는 이가 즐겁고 설렐 때라야 기다림이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기다림과 사랑이 언제나 영원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화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는 표현처럼 화자는 기다림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며 편지를 계속 쓸 것이고 계속 기다릴 테지요. 

편지
            김명인

다시 가을이다
돌틈 새에 숨는 몇 마리 도마뱀들
숨어도 보이는 우리들의 꼬리를 
아프게 잘라버린다
친구여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느냐?
계절을 받고 또 계절을 내주고 섰는 
산 속으로 들어서며
가을이 가고 있군 가을이
풀잎 위에 떨구는 산여치의 울음
바람은 개울 위에 새 주렴을 펴고 있다
뒤따라가며 우리도 또한 흩어질 것이냐?
묵묵히 견디고 섰는
더 괴로운 물풀도 만나고 싶다
괴로움도 이제는 괴로움이 아니라고
친구여 맨살에 끊임없이 감기는 물소리
홀로 흐를 때 
물소리는 한결같이 차갑게 스민다


김명인 시인의 <편지>를 보면 친구와 보낸 어린 시절의 일들이 행간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편지는 추억이고 기억입니다. 시인처럼 친구에게 옛이야기를 써보세요.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겠지요. 이렇듯 '편지는 과거로의 여행'이기도 합니다. 괴로운 여행일 수도 있고, 행복한 여행일 수도 있습니다. 여행을 통해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죠. 그 즐거운 여행을 누구하고 할지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중략>… 그저 당신은 자기 작품 속에서 자랑스럽고도 자연스런 재화,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 그 생명의 목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적 필연성에서 이루어진 예술 작품은 훌륭한 것입니다. 시의 원천에 의해서만 시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이것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파고들어서 당신의 생명이 근원한 그 깊이를 음미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 원천에서부터 창작을 해야 할까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해답이 어떻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모르긴 해도 당신은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외부로부터 보상 따위는 염두에 두지 말고 그 무겁고도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창조하는 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이어야만 하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어울려 하나가 된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 글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인지망생 프란츠 크사버 카프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카프스는 자신이 습작한 시를 보내 평을 듣고 싶어 릴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위의 글은 릴케의 첫 답장 중의 일부분입니다.

시인 릴케는 자기 생각을 시인 지망생인 카프스에게 친절하고 성의 있게 썼습니다. 이들은 꽤 오랫동안 편지로 교류했습니다. 이들은 편지로 세대를 넘어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편지를 쓰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진심을 말이 아닌 글로 옮겨 보낼 때 더 큰 울림을 상대방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편지는 용기'입니다. 반드시 답장을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보내는 이에겐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요. 시인 지망생 카프스는 시인 릴케에게 자신의 습작을 보여줄 용기가 있었고 실행했기에 답장을 받을 수 있었죠. 

어느덧 완연한 가을입니다. 편지를 쓰세요. 그때가 ‘누군가의 그대’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기다리세요. 기다림은 사랑이요, 추억이니까요. 언젠가 편지는 사랑을 싣고, 추억을 싣고, 기다림과 설레는 마음을 싣고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이 시대에 친구를 잃고, 연인을 잃고, 사랑을 잃고, 과거를 잊고, 마침내 자신마저 잃어버리지는 않았나요? 편지는 이 모든 것을 찾게 도와줄 테니, 지금 곧 펜을 드세요.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제16호 태풍 '산바'의 영향으로 전국에서 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주택과 상가는 600여 동 넘게 침수됐고, 323세대 6백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한때 전국 52만 7000여 가구의 전기 공급이 끊겼고, 3000여 가구는 아직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도 100여 곳의 도로가 유실됐고, 40여 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습니다. 8~9월 집중 호우와 태풍 3개가 한반도를 휩쓸면서 손해보험사는 운영에 비상이 걸렸다죠. 

15호 태풍 볼라벤, 14호 태풍 덴빈에 이어 16호 태풍 산바까지 연이어 발생한 태풍 세 개가 한반도에 모두 상륙한 것은 1904년 태풍 관측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대자연을 이해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풍이 지나갔으니 이제 가을 중턱에 접어들겠지요. 어느새 긴 소매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복귀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가을 중허리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다시 꺼내 읽다가 <우리 동네 목사님>이란 시에 눈길이 머뭅니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더불어 신앙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과 익숙하지 않은 존재나 일에 대해 배타적일 때가 잦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틀린 게 아닌데도 무조건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은 참 속 좁은 행동입니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시 서두를 보면 기형도 시인은 아마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 관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 

동네 목사에 관해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찬송하는 법도 없어/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는 걸로 봐서 그 동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는 데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시인이 동네에서 흔히 보던 광경이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철공소 앞에서 만난 목사는 동네 교회 교인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분이어서 시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눈에 비친 동네 교인들은 신에게 복을 구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목사가 필요했겠죠.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는 표현을 보면 교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감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예수의 삶을 닮아가는 생활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은 더욱 필요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저 자기 삶에 축복이 임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을 때, 아마도 교인들은 안수기도나 영적 능력을 통해 병을 고치지 못하는 목사에 대한 신뢰를 거뒀는지도 모릅니다. 신기를 잃은 무당을 찾지 않는 사람들처럼 교인 중에 반이 장마통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남은 교인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목사의 말에 교회 집사들은 분노합니다. 신앙을 생활에서 표현해야 한다는 기본을 말한 것뿐이지만, 집사들은 목사의 말을 이해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을 찌르고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목사의 올바른 설교가 싫었을 뿐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교인들로 가득 찬 교회에서 떠나야 할 사람은 목사뿐이었습니다. 집사들의 계략이 시의 행간을 채웁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고개를 끄떡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내용에서 새로운 목사를 세우고 기득권을 누리며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집사들의 계략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기형도 시인은 동네 교회 목사를 교회가 아닌 철공소 앞에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목사에 관한 주변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한참 보다가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목사의 모습을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기형도 시인은 신앙을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목사와 그를 향해 수군대는 교인들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기형도 시인이 마지막으로 ‘쓸쓸한 목사의 얼굴’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커다란 벽에 가로막혀 떠나야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고 올바른 진리의 외침을 외면한 채 복 타령이나 일삼는 사이비 교인들을 향한 애통함이 아니었을까요? 목회 세습과 기복신앙의 마법으로 초월적인 힘을 부리는 이 시대 목사들을 보고 기형도 시인이 다시 작품을 쓴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할지 가만히 귀를 기울여봅니다.

기형도

1960년 2월 1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문화부·편집부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등단했으며 강한 개성을 담은 독특한 시들을 발표했다. 1989년 3월 7일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심야영화를 보다 뇌졸중으로 죽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8월 말에 찾아온 태풍 '볼라벤'과 '덴빈'을 보면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하루빨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이 잘 복구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무더위로 힘겨웠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가을 날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맘때 많은 사람이 '가을을 탄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이는 아마도 잊지 못한 추억을 저마다 마음 한자리에 남겨둔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을은 사랑과 이별의 추억으로 시작하여 붉게 물든 단풍이 마른 나뭇잎이 되어 거리를 채울 때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끝을 맺는 짧고도 긴 계절입니다.

오늘은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이별을 노래하고 있지만 결코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낼 수 없다는 심정을 노래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소개하겠습니다.

1925년 출간된 시집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2008년 11월 15일 KBS 1TV가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만세>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대국민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우리나라 국민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가장 좋아한다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기사보기)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한국적인 정서를 그만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적'이라는 의미는 형식적으로 3음보의 전통적 리듬에 내용적으로 이별의 아쉬움과 슬픔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김소월은 <접동새><초혼><엄마야 누나야><산유화> 등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민요시 형식에 고통과 슬픔의 정서를 담아 우리 민족의 삶을 표현했습니다. 1920년대 한국 시단을 휩쓴 낭만주의 시의 한 특징으로 민요시가 성행했다는 점에서 김소월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 낭만주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김억이나 주요한의 작품들보다 김소월의 민요시를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합니다. 김소월 시에 깔린 고통과 슬픔의 정조를 개인의 성향 탓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전 국민이 느낀 고통, 슬픔, 분노의 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겠지요. 이러한 정서는 민족 고유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살어리 살어리 랏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같은 민요나 고려가요를 보면 3음보는 다분히 한국적인 리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나 슬픔의 정서는 고조선의 노래로 알려진 <공무도하가>,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 고려가요 <가시리><서경별곡>, 민요 <아리랑>, 정지상의 한시 <송인> 등에 잘 나타나는 민족적 정서입니다. 이처럼 <진달래꽃>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가장 한국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시가 된 것이겠지요.

그러면서도 <진달래꽃>이 노래하는 이별의 정서는 이전 시가와는 사뭇 다릅니다. 떠나는 대상에 대한 애절함이야 <공무도하가><황조가><가시리><아리랑>과 같지만 떠나보내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공무도하가>는 “當奈公何 (당내공하, 떠나셔서 어이할꼬”로, <황조가>는 “誰其與歸(수기여귀,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로 떠난 대상에 대한 아쉬움과 상실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시리>는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나는(가시는 즉시 돌아오소서)”라는 바람을, <아리랑>은 “십리(十里)도 못 가서 발병난다”며 떠나는 대상을 향한 애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꽃>에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며 상실과 슬픔, 바람과 애원을 넘어서는 비장함을 표현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말 없이 고이보내”줄 것 같지만 가려거든 나를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고 위협하면서 그래도 가겠다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라며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보낼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비장함 때문에 <진달래꽃>의 임을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조국으로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가을은 봄보다 빨리 지나갑니다. 하지만 어떤 계절보다 긴 여운을 내포하고 있는 계절이기도 하지요. 단순한 감상에 젖어 ‘가을 탄다’며 하루하루 보내기보다는 옛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거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으며 기억 저편에 묻어둔 '사랑'과 '열정'을 다시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소월

본명은 정식이며 190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에서 조만식 선생과 평생의 스승 김억을 만났다.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3·1 운동으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 졸업했다.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했으나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그 후 고향에서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을 도왔으나 실패하여 처가인 구성군에 《동아일보》 지국을 차렸지만 이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사업 실패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술로 세월을 보내다 1934년에 33세의 나이로 죽었다(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사후 43년 만인 1977년 그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 중에 스승 김억의 시로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저서로는 1925년 낸 시집 《진달래꽃》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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