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꽃 한 송이가 집 한 채 값?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

지난번에 튤립이라는 꽃 한 송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네덜란드 초유의 투기 사건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영국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투기 사건을 소개해 드릴 텐데요,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라는 곳이 벌인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영국 경제가 몰락의 길을 걸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남해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이었죠.

공공부채 정리를 위해 설립한 회사
남해 거품 사건을 풍자한 그림. 나무에 올라간 사람들이 바다로 빠지고 있다.(출처: 위키피디아)
남해회사는 1711년 영국 토리당의 로버트 할리라는 사람이 설립한 회사입니다. 회사를 설립할 될 당시 영국은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요, 지출 가운데 채무상환이자 지급과 군사비가 재정지출의 9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남해회사는 이러한 영국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자 공공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회사 설립 후 영국정부는 부실 채권과 증권 일부를 강제로 남회회사 주식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국고를 지원한 무역으로 이윤을 창출하여 채무를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스페인과 아시엔토 조약을 맺어 아프리카 노예를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수송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했죠.

하지만 이러한 영국정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밀무역으로 말미암아 스페인과 형성한 관계가 날로 악화했는데요, 스페인이 정한 노예 무역량은 영국이 필요로 하는 양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에 밀무역이 성행했습니다. 더구나 빈번한 해난 사고 때문에 노예무역은 남해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1718년에는 스페인과 전쟁이 시작되어 무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이로써 남해회사의 경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국채를 탕진하여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무역회사에서 금융회사로, 어이없는 변신을 꾀하다
경영이 어려워진 남해회사는 현실을 타개할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1718년 시험적으로 복권을 발행했는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영국에서 복권을 처음으로 발행한 시기는 1694년이었는데요, 10파운드짜리 복권을 사는 사람이 1등에 당첨되면 16년간 해마다 100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당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기간 동안 매년 1파운드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수많은 사람이 복권을 사들였고, 수백만 장의 복권이 팔려나갔습니다. 이러한 복권 열풍에 남해회사도 편승하여 수익을 거둔 셈이죠.

복권으로 큰 수익을 거둔 남해회사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무역회사에서 금융회사로 변신을 꾀한 것이죠. 1719년 남해회사는 거액의 채권 인수 대가로 액면가에 해당하는 남해회사 주식을 발행하는 권한을 얻어냅니다. 남해회사가 가진 무역독점권으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리라는 기대심리가 커지면서 투자자들은 보유하고 있던 국채를 남해회사 주식을 사들이는 데 사용합니다.

'거품경제'의 원조가 되다
남해회사는 주식을 판매할 때 이상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남해회사 주식가격을 부풀려서 국채와 교환을 했습니다. 원래 남해회사 주식가격이 100파운드인데 실제 거래되는 가격을 200파운드라고 가정해봅시다. 주식과 국채를 같은 가격으로 교환하면 남해회사는 100파운드라는 이익을 얻는 셈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편법도 사용했습니다. 주식 발행 허용 수량은 교환 금액에 의해 정한다는 규칙을 적용한 것입니다. 한 번에 판매되는 남해회사 주식의 최소량은 100파운드분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100파운드분의 주식이 실제로는 200파운드에 거래되죠? 남해회사는 주식을 발행할 때는 액면가로 발행합니다. 그런데 200파운드분의 국채를 준 사람에겐 시가를 적용하여 100파운드분의 주식을 줍니다. 결국 남해회사는 시가로 발행한 200파운드 분의 주식 가운데 100파운드 분의 주식이 남습니다. 남해회사는 이것을 또 매물로 내놓아 시가로 팝니다. 그러면 남해회사는 200파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식 발행을 놓고 장난 아닌 장난을 친 남해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얻었고, 남해회사의 주가는 점점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거품이 낀 것이죠.

남해 회사에 투자했던 유명인들. 좌측 음악의 어머니 헨델, 우측 만류인력 법칙의 뉴턴.(출처 : 위키피디아)

남해회사의 주가가 상승하자, 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급등하는 남해회사 주식은 좋은 투자처로 각광받았는데요,귀족, 부르주아 서민 계층을 불문하고 주식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너나없이 무모한 투자, 아니 투기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투기 열풍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당시 허가제였던 주식회사가 무허가로 난립하는 계기가 된 것이죠.

거품의 붕괴, 비극의 시작
남해회사의 거품을 시작으로 많은 회사가 난립하고, 주가 상승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1720년 1월 100파운드였던 주식이 5월에 700파운드가 되더니 6월 말에 이르러서는 1050파운드까지 치솟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영국정부가 규제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거품 회사 규제법'을 만들어 무허가로 난립한 회사를 정리하면서 시장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남해 거품 사건을 수습한 로버트 월폴(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순식간에 거품이 꺼지면서 주가가 제자리를 찾자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이른바 '남해 졸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산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유명한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남해회사 주식으로 7000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으나 거품이 꺼지자 오히려 2만 파운드의 손해를 보기도 했답니다. 반면 이익을 얻은 사람도 있는데요, 음악의 어머니로 칭송받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남해회사 주식을 매매하여 얻은 이익으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했다는군요.

남해 거품 사건이 터지자 많은 투자자가 정치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해회사의 주식을 뇌물로 받은 정치인들이 방만한 경영에 대해 눈을 감아주었기 때문이었죠. 사태가 커지자 결국 당시 수상이었던 스탄호프는 정계에서 물러나 급사하기까지 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수습한 사람은 로버트 월폴이었습니다. 그는 1721년까지 남해 거품 사건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여 다시금 경제를 회복시켰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겐 조사를 느슨하게 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토리당으로 정권을 넘기지 않으려 했던 정치적 노림수가 있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회계 감사제도의 등장
남해 거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영국정부는 책임추궁위원회를 꾸리고 조사를 진행합니다. 당시 위원회에 속해 있었던 찰리 스넬은 남해회사의 회계 기록을 자세히 알고 있는 간부가 경영하던 회사인 브리지상회의 장부를 조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브리지상회의 장부에 대한 소견>이라는 보고서가 나왔고, 이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브리지 상회의 장부에 대한 소견>은 세계 최초의 회계감사 보고서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반 대중에게 자금 조달을 하는 사헙 형태인 주식회사는 정당한 제3자에 의한 회계 기록 평가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보여주었고, 이로써 공인회계사 제도와 회계감사 제도가 탄생했습니다.

수백년 전 사람들의 모습과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 크게 다를 바 없군요. "인생 뭐 별거 있어? 한탕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나 봅니다.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사회 체계와 법 체계를 탄탄하게 하여 잘잘못을 가리고 사고를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는 일에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적은 노력으로 크게 벌겠다는 심보는 언젠가 화를 부른다는 마음으로 건전한 투자로 경제를 살리고 그 이익을 나누어 가지려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제주도 서귀포 南元 포구 앞

봄이 왔다
바다도 바쁘기 시작한다
다 먹고 살기에 바빠지는 봄
그래서 생명의 봄이다

끼~~우!
갈매기가 짓는 소린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해녀가 3~4분간 잠수하고 물 위로 나올 때 내는 숨 고르기였고, 해녀들끼리 주고받는 일종의 위치 신호이기도 한 셈이다. 바다에선 갈매기나 해녀나 같은 노랠 부른다.
갑자기 해녀 한 분이 말한다.

"노래요? 이 양반, 참말로 속 편한 소리하고 있네! 숨이 차서 내지르는 생명유지의 소리로소이다. 구경꾼은 저리 가소~~"

지상에 봄바람이 매서운 3월이 되면 제주의 바다엔 해녀가 부쩍 는다. 한 해녀가 잠수를 준비하고 있고 그 뒤로 다른 해녀가 올해 첫 물질을 시작한다. 높이 나는 갈매기를 기도하는 해녀에게 상상으로 붙여본다.


* 해녀가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합니다. 해녀들의 힘겨운 삶을 상징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이젠 한국을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우리의 일상을 보호합시다.




지난 포스팅 : [주식 이야기] 원래부터 주식은 천재지변 같은 극단적 위험 때문에 생겼다

일본 대지진과 주가의 상관관계를 말씀드리면서 주식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간단한 역사를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천재지변 같은 극단적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고수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투자의 일환으로 주식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죠. 그렇다면 그런 위험천만한 투자를 바탕으로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는 무엇일까요?

향신료, 애증의 기호품
이전 기사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1600년대 당시 유럽은 기술의 발달로 이른바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바다로 나가 무역을 했습니다. 거대한 함선과 무역선을 이용하여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동아시아와 교역해 막대한 부를 얻기 위함이었죠.

다양한 향신료. 15세기에 이 정도의 향신료를 가졌다면 섬 하나를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출처: 엔사이버 백과사전)

그때 사람들은 후추로 대표되는 향신료를 얻으려고 목숨을 내놓는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인들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부터 후추를 사용했습니다만, 중세 이후 중동의 이슬람교도가 로마의 무역로를 가로막자 아랍 상인을 통해 얻는 방법 외에 별다른 수단이 없었습니다. 후추 이외에도 정향(丁香), 육두구(肉荳蔲)와 같은 향신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후추는 인도에서, 정향과 육두구는 몰루카 제도(인도네시아)까지 가서 가져와야 했으니 향신료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게다가 이슬람권 국가의 지도자들은 향신료에 과대한 관세를 부가하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하는군요.

이러한 상황에서 항해기술의 발달, 잇다른 아프리카, 인도 항로의 개척-포루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의 희망봉(남아프리카 공화국) 발견,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 발견-은 많은 유럽인을 흥분시켰습니다. 이후 유럽 각 국가들은 앞다투어 함대를 만들고 신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유럽에서 선봉에 선 나라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는데요, 두 국가의 식민지 쟁탈전이 얼마나 심했는지 교황이 양국 간에 토르데시야스 조약(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가 차지하도록 인정한 조약)을 맺게 하여 중재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만큼 향신료는 당시에 큰 돈을 거머쥘 수 있는 황금알 낳는 거위와 같았죠.

동아시아에 등장한 서양인,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 후, 1511년 포르투갈은 말라카(말레반도 끝에 있는 항구 도시)공략하여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진출합니다. 1513년에는 중국과 자바섬에도 포르투갈 선대를 파견했는데요, 테르나테 섬(몰루카 제도의 섬 가운데 하나. 인도네시아 최북단에 있는 섬)에 도착한 이들은 포르투갈 군의 성채를 축조하고 그곳에서 향신료를 가져왔습니다. 몰루카 제도는 정향과 육두구의 산지였기에 이곳을 향료 제도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이곳에 에스파냐의 마젤란 선단이 도착하면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대립이 심해졌습니다. 1600년대에 들어 포르투갈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네덜란드인들은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동인도 회사 본부(출처: 위키피디아)


그 이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향신료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얻었으나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의 분쟁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되는 상황을 틈타 네덜란드인들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합니다. 이때 세운 회사들이 바로 동인도회사입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료 무역이라는 큰 유혹으로 말미암아 10여 개의 회사가 난립했습니다. 이는 기업 간의 불이익을 초래하여 동아시아에서 경쟁하던 에스파냐에 점차 밀리는 형국을 빚었습니다. 이에 1602년 정부에서 나서 10개의 기업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통합하기에 이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자카르타, 인도네시아 수도)에 총독정청을 두어 본격적인 동아시아 향료무역을 독점합니다. 진입 당시에 있었던 포르투갈, 영국 세력을 모두 축출하여 17세기에는 동양 무역을 관할하는 최고의 지위를 확립하고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합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과 무역을 한 유일한 국가였습니다. 동아시아에 진출했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로마 카톨릭 교회 선교 활동으로 말미암아 도쿠카와 막부와 충돌이 잦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를 믿었던 네덜란드는 선교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이에 도쿠카와 막부는 나카사키(長崎) 앞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 섬을 만들어 제한적으로 무역을 개방합니다. 이로써 일본은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의 서양 학문을 접하였고, 네덜란드는 당시 국제 결제 수단이었던 은화의 수입원을 마련했습니다. 벨테프레(박연)과 하멜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주식의 관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주식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지배권이 약해지자 네덜란드는 동아시아 진출을 도모했습니다. 네덜란드 왕실과 상인연합은 향료 무역에 나설 회사를 만들고 대선단을 꾸리기 시작하죠. 하지만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선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네덜란드에서 배로 몰루카 제도까지 가는 건 엄청난 비용을 요구합니다. 대규모의 무역선을 건조해야만 했고, 선원들을 모집하고 선원들을 먹일 식량, 그리고 그 지역에 정착하기 위한 재반 물품들을 구입해야 했으니까요.

162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채권.(출처 : 위키피디아)

이때 네덜란드 왕실과 상인들이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시민에게 돈을 투자받아서 대선단을 조직하고, 향료 무역에서 얻은 수익을 나누어준다는 생각이었죠. 당시 향신료의 가격은 어마어마했기에 선단이 네덜란드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투자금을 갚고도 남을 정도였죠. 이들은 네덜란드 국가 재정과 상인들에게도 엄청난 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투자한 돈에 대한 이익을 분배할 때, 누가 얼마나 투자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투자자가 한두 명이 아닌 수백, 수천 명이나 되니 정확한 이익 분배는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투자받은 돈을 모두 한 곳에 모으고, 그것을 자본금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보여주는 종이를 발급합니다. 자본금에 대비해 얼마만큼 투자했는지 증명하는 종이, 즉 주권·주식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이 궁하여 자신이 투자한 돈 가운데 일부를 돌려받고 싶어할 수 있습니다. 또 동인도회사가 크게 발전할 것으로 생각하여 더 많은 주식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도 생기겠죠. 이런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만나, 한 사람은 주식을 팔고 한 사람은 주식을 사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거래를 원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면, 더구나 서로 사는 지역이 다르다면 얼마나 불편할까요? 이런 번거로움을 해결하고자 특정한 장소를 정해 주식을 서로 거래하도록 정했습니다. 증권거래소의 시작이었던 것이죠. 암스테르담에 있는 증권거래소가 바로 그곳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주식'이란 개념으로 투자자를 모으고 성공을 거두자, 유럽의 여러 왕실은 앞 다투어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합니다. 여러 나라에 동인도회사가 생기게 되었죠. 이렇게 각 국가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유럽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주식이 생겨나게 된 짧은 역사를 돌아봤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는 분들 가운데 과연 그 시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그냥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주식투자를 한다면 수익을 거두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면 그 시장이 돌아가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생각비행에서 《이렇게 하면 나도 주식왕》을 출간했으니 앞으로 개미투자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전하겠습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투기(投機)라는 말의 의미는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사전을 보니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고 함'이라고 되어 있군요. 즉 올바른 투자나 발전을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시세 변동을 예상하여 이익을 보려는 발전 없는 행위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투기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한 몫 잡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큰 이익에는 그만큼 큰 위험이 따르는 법. 시세 차익을 노려 투기하는 경우, 투자한 대상에 거품이 끼기 마련입니다. 그 본래 가치 이상의 가치가 매겨지기 때문이죠. 이런 거품은 또 다른 거품을 낳아 결국에는 사라지고 맙니다. 거품이 꺼지면 피해자가 속출하니 종국에는 경제를 어지럽힙니다.

생각비행은 주식투자도 자칫하면 투기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주식투자 관련 연재물을 기획했습니다.
근대 유럽에는 3대 거품 사건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 <영국의 남해 거품 사건>, 그리고 <프랑스의 미시시피 계획>입니다. 이 버블 사건들을 보시고 앞으로 주식을 비롯해 투자 활동을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부디 투기가 아니라 올바르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튤립이 어떤 꽃이기에 투기의 대상이 되었나

튤립(출처: 위키피디아)

튤립의 원산지는 텐산산맥(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서 키르기스스탄까지 뻗어있는 산맥)이라고 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사업을 벌이는 가운데 튤립을 발견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시키고 궁전을 세우면서 몇 종의 튤립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튤립은 16세기 들어 유럽 각지에 전해졌습니다.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튤립은 네덜란드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네덜란드라고 하면 풍차와 튤립을 연상할 정도죠. 네덜란드에서 튤립 농사를 시작한 계기는 식물학자인 샤를 르 레클루제(Charles de l'Écluse)가 레이던 대학교(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에 소포로 튤립을 보낸 뒤부터라고 하는군요. 나중에 레클루제는 레이던 대학에 초빙되어 튤립을 연구하고 재배하는 활동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튤립을 얻는 방법은 씨앗으로 육성하는 방법과 모근 복제로 자근을 육성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씨앗을 파종하여 꽃을 얻기 위해선 6~7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므로, 대개는 모근 복제로 자근을 육성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바로 꽃이 피어 튤립을 빨리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모근 복제로 생성한 자근은 2-3개 정도만 모근으로 성장하고, 발아하지 않는 종근도 많았습니다. 튤립은 단기간에 수를 늘리기 어려운 꽃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튤립에 대한 급격한 수요를 생산이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튤립을 향한 지나친 욕망

세상에서 가장 비싼 튤립,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출처: 위키피디아)

1610년대에 튤립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비교적 재산에 여유가 있는 식물 애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아름다운 튤립의 뿌리는 고가로 거래되었습니다. 원예 애호가 사이에서 독자적인 품종개량을 거쳐 새롭고 아름다운 튤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품종은 돌연변이을 일으킨 보라색과 흰색 줄무늬 꽃을 가진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 영원한 황제)'였다고 하는군요. 일반적인 단색 계통의 튤립은 싼값에 판매되었으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구근은 아주 비싼 값(당시 집 여섯 채에 해당하는 가격)에 팔렸습니다. 튤립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이 그 인기가 높아졌고, 가격은 엄청나게 상승했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이 그린 유명한 그림 가운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그림이 있는데요, 그림의 주인공 툴프 박사의 원래 이름은 클라스 피테르존이었다고 합니다. 튤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름을 툴프(Tulp, 네덜란드어로 튤립을 뜻하는 말)로 바꿨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식물 애호가들의 튤립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대단했음을 방증하는 일화입니다.

인기가 높아진 튤립 때문에 튤립을 상업적으로 재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튤립을 꽃이 아닌 투기의 대상으로 본 것이죠. 이러한 투기바람은 튤립을 처음 재배했던 레이던에서 암스테르담, 하를럼과 같은 다른 네덜란드 도시로 전해져 수요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확천금을 번 사람도 나왔는데요, 고급 품종의 구근 하나를 팔아 집을 산 사람마저 나올 정도였습니다.

당시 튤립 구근이 현물로 거래된 것은 겨울이라는 한정된 기간이었습니다만, 투기 열풍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언제든 튤립을 거래하고 싶어했습니다. 계절을 불문하고 말이죠. 이에 연중 거래와 그에 따른 선물거래(품질, 수량, 규격 등이 표준화되어 있는 상품 또는 금융자산을 미리 결정된 가격으로 미래의 일정 시점에 인도·인수하기로 약정한 거래) 제도가 도입되는 결과를 양산하기도 했습니다.

투기가 낳은 어처구니 없는 거래 방식
그렇다면 튤립 거래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튤립 거래는 특정한 거래소가 아니라 그냥 술집에서 열렸다고 합니다. 거래를 위해 현금이나 현물 구근은 필요 없었다고 합니다. 그냥 "언제 돈을 내겠다" "언제까지 배달해주겠다"는 증서만 오갔고, 아주 적은 중도금으로도 튤립을 선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도금이라는 게 현금이 아니라 가축이나 가구와 같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헨드릭 게리츠 포트가 튤립 열풍을 풍자하여 그린 그림.(꽃의 신인 플로라는 두 얼굴의 여성과 환전상, 술꾼과 함께 차를 타고 바람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뒤를 타락한 하를럼의 직조공들이 따르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가는 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렇게 부실한 거래가 이뤄지는 가운데, 거래증서는 많은 사람을 거치면서 누가 채권자이고 누가 채무자인지도 모르는 상황이 속출했습니다. 이처럼 부실한 거래 방식 탓에 자본이 없는 사람도 투기에 참여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또한 이전에는 그저 열심히 일만 하던 농민들마저 튤립 투기 열풍에 가담하면서 튤립의 수요는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추세로 말미암아 값이 싼 튤립 품종의 가격마저 오르는 진풍경을 빚었습니다.

튤립 거품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어느 한 농민이 친구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에 갔습니다. 그는 친구 집 앞마당에 있는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알뿌리를 양파로 생각해 한 알을 캐서 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화를 내면서 농민 친구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농민이 먹은 것은 양파가 아닌 튤립의 구근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가격이 무려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네요. 결국 농민 친구는 평생토록 그 돈을 갚아야 했답니다. (튤립 투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튤립 구근 하나의 가격은 2500플로린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2500플로린이면 다음과 같은 물품을 살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밀 2마차분(550ℓ), 호밀 4마차분(1100ℓ), 살진 소 4마리, 살찐 돼지 8마리, 살찐 양 12마리, 와인 큰 통 2개(약 200ℓ), 맥주 4배럴, 버터 2톤, 치즈 1천 리브르, 침대 하나, 양복 한 벌, 은제 컵 한 개 - 찰스 매케이가 쓴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서)

비정상적인 투기의 종말

1637년 발간된 네덜란드 튤립 마니아에 대한 소책자. 튤립 시장에 참가한 사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으로, 튤립을 로마 신화의 여신 플로라에 비유하여 "욕심많은 플로라에게 바치는 바보들"이라고 했다.(출처 :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인들의 비정상적인 사랑은 1637년 2월 3일을 기점으로 종말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튤립의 가격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투기 거품이 꺼지면서 튤립 가격은 폭락합니다. 이 때문에 어음은 부도가 나고 지급할 수 없는 채무를 진 사람이 3000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튤립을 실제로 구매하려는 사람보다 투기를 위한 부당 구매자가 많은 상태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튤립 가격 폭락으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빚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과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 간의 말다툼과 야만도주가 성행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채권자인 동시에 채무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의회가 중재에 나서서 "조사가 끝날 때까지 튤립 거래를 보류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계약서가 일괄적으로 무효가 되었기 때문이죠. 이때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가난에 허덕이며 평생 빚을 갚다가 죽거나 혹은 자살하는 사람과 벼락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었죠. 작은 꽃 한 송이가 빚은 진풍경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튤립 투기, 어떻게 보셨나요? 튤립 투기의 역사를 보면서 올바르지 않은 투자, 즉 투기 행위가 사람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주식을 비롯한 투자 행위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할 때라야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귀중한 사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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