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시비(詩碑)를 찾아서〉를 연재하겠습니다. 무심코 지나는 길가나 공원에 세워진 시비를 찾아 걸음을 멈추고 비(碑)에 새겨진 시를 읽겠습니다. 시인의 삶을 엿보며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잠시 생각하겠습니다. 

 

봄 길목에 선 3,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있는 시비(詩碑)를 보기 위해 안산(연세대학교 뒷산) 둘레길을 걸었다. 둘레길은 무악재 하늘다리 넘어 인왕산 자락길로 이어졌다. 이 길 위에서 독립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국사당 등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을 만났다.

그리고 다다른 윤동주 시비.

앞에는 서시가, 뒤에는 슬픈 족속(族屬)이 시인의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서시
슬픈族屬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를 읽을 때면 사이토우 마리코의 시 비 오는 날의 인사중 한 구절이 생각난다.


“- 시인이 시인이라는 것만으로 학살당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라고 일본의 한 뛰어난 여성시인이 쓴 적이 있습니다”

 

시인이 제 나라 말로 시를 썼다고 죽어야 하는 시대였다. 제 나라를 찾겠다며 몸부림치던 이들이 끔찍하게 죽어야 하던 시대였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피 흘리던 시대였다.

시비 뒤쪽에 보이는 광화문 빌딩숲 사이로 해방된 나라에서 독재에 항거한 외침이, 나라를 나라답게 세우자며 촛불을 든 이들이 떠올랐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비를 지나 언덕을 내려오면 자화상을 모티브로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활용해 조성한 윤동주문학관이 나온다.

 

 

전시실에는 간도 용정 시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 있다. 시인은 이 우물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바람, 자기 얼굴을 떠올리며 자화상을 썼을 것이다. 이곳엔 시인의 육필원고, 사진,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옆 열린방을 통해 닫힌방에 들어가면 시인의 생애와 시를 정리한 짧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쓴 시 참회록. 별을 노래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젊은 시인. 혹자는 윤동주의 시는 서정성만 있을 뿐 저항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를 저항 시인이 아니라고 한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어를 사용해야 저항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는 삶이 곧 시였던 시인이다. 우리말로 시를 쓴 것이 죄고 윤동주가 일본 감옥에서 죽어야 했던 이유다. 시인 정지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서문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 그의 '시'로써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라고 썼다. 시인 윤동주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었고 그 길을 시로 옮겼다. 일제를 찬양하고, 지원병이 될 것을 독려하는 시를 쓰며 해방 후에도 부끄럼 없이 편히 살던 이들이 있다. 식민지 시대도 아닌데 이들의 시를 중·고등학교 때 배워야 했던 기억이 슬프다. 별을 노래하고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했던 시인 윤동주. 문학관을 돌아보는 내내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되뇌었다.

문학관을 내려와 서촌 세종마을에 들어서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곳에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 시인이 하숙하던 집터가 있다. 시인의 흔적은 없으나 벽에 붙은 동판을 통해 시인이 하숙한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시인은 별 헤는 밤, 참회록, 또 다른 고향을 썼다. 아마도 윤동주 시인은 밤마다 언덕에 올라 별을 노래하고 고향을 생각하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고민했으리라.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지금은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대다. 삶이 시가 되어 별이 된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글 한 줄에 죽어야 했던 시인과 그의 시대를 떠올리며, 시인의 나이를 두 번 넘어 버린 나에게 '잘 살고 있느냐? 잘 살고 있느냐?' 물으며 참회록한 줄을 읽어준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빛나는 것 하나 없는 서울의 하늘, 안락만 좇으며, 줏대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며, 불의를 외면하며, 다음에 올 세대를 생각하지 않으며, 젊음을 낭비하며 살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밤이다.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 직업이다》라는 책을 출간하고 생각비행 블로그에 처음 소개한 때가 2017년 11월 14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수험생이 수능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왜 수능을 보는 걸까?”, “대학에 가면 인생이 달라질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으로 소개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 직업이다 - 나답게 살기 위한 최고의 준비


2022학년도 수능 시험이 끝나고 며칠 전에 성적표가 배부되었죠. 성적에 맞춰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지난 2021년 9월 1일자 《충청투데이》에 취업난 때문에 학위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까지 대학원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4년 전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 직업이다》에서 손영배 작가는 박사조차 취업이 어려운 현실을 소개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현재 교육과 관련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죠.

 
가장 큰 변화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취업의 문이 훨씬 더 좁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위드 코로나’ 혹은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사회가 안정을 좀 찾아가나 싶었던 순간도 잠시, 확진자가 연일 6000~7000명 대를 오르내리면서 그마저도 불투명한 상황이 되고 말았죠. 코로나19 여파로 취업의 문이 좁아지긴 했지만 세상은 학력보다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4년 전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 직업이다》를 펴내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추어 직업을 찾고, 그 직업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진짜 공부를 시작할 때다!"라고 주장했던 손영배 작가의 일침은 많은 학생과 학부모님 들의 생각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진로상담부장으로서 숱한 학생과 학부모님을 만나 '진학'보다 '진로' 위주 선택의 중요성을 피력해온 손영배 작가는 대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공부'를 위해 대학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대학 진학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일 뿐, 취업이나 창업 그리고 창직 등 다양한 진로의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필요를 느낄 때 대학에 진학해 학습을 이어가는 길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특성화고에서 제자들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안정된 삶을 누리고, 진짜 공부가 필요할 때 대학에 진학해 공부의 맛을 알아가며 행복해하는 사례를 소개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사이에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 직업이다》는 초판 13쇄를 발행하고 개정판 작업을 한 뒤 개정 2쇄까지 판매되며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녀의 인생에 관심이 있는 학부모님들,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고민하는 학생들, 성적에 맞춰 일단 진학했다가 휴학을 하거나 자퇴를 한 다음 다른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 이들은 모두 ‘나답게 살기 위한 최고의 준비’가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손영배 작가는 4년 전 소개한 9명의 제자들을 인터뷰하여 그중에 5명의 사례를 [개정판]에 다시 소개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공인이 아닌 까닭에 각자의 삶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건 어쩌면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로 탐색의 다양한 예시로 예전 책에 소개했던 제자들이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아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안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학생과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영배 작가 유튜브 <행진가tv>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 직업이다》[개정판]에는 취업과 진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움켜잡은 제자들의 실제 사례가 여럿 수록되어 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각자의 적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진로상담을 해준 결과입니다. 손영배 작가는 제자들의 실제 삶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다가오는 미래의 직업 세계에 대한 준비는 ‘진학’이 아니라 ‘진로’라는 생각을 전달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이라는 스페인 공포영화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 아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아이들이 우리와 똑같은 놀이를 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영화에서 술래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 대신 “Un, dos, tres, Toca la pared(하나, 둘, 셋, 벽을 만져라)"라고 말하는 것만 다를 뿐, 술래가 돌아볼 때 움직이면 안 된다는 놀이 방식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스페인과 우리나라 사이에 놀이문화가 직접 교류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처럼 똑같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이 참 신기합니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이라는 영화의 제작자 중 한 명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기예르모 델 토로'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제작자는 '마르 타르가로나'라는 스페인 여성 감독입니다. 이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지난 2018년에 넷플릭스에 공개했습니다. 이 영화가 바로 생각비행이 펴낸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작품,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입니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울의 아들〉 등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과 강제수용소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피해자들을 다룬 홀로코스트 영화는 꽤 존재합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부터 예술영화까지 다종다양하죠. 홀로코스트를 다룬 그래픽 노블 중에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작품 중에서 〈마우터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영화가 독특한 이유는 실화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스페인 사람들의 홀로코스트를 조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영화 제목에 나오는 '마우트하우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건설한 강제수용소의 이름입니다. 생각비행이 펴낸 책은 '마우트하우젠'으로 번역되어 있죠. 마우트하우젠은 오스트리아에서 화강암을 채석할 수 있는 지역의 지명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명명했습니다. (이후 영화 제목을 제외하고는 '마우트하우젠'으로 통일하여 쓰겠습니다.) 이곳은 이른바 '절멸수용소'였습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25곳의 수용소를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습니다. 그중에 '카테고리 III'는 나치의 입장에서 볼 때 '개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수감자'들을 가두는 곳이었습니다. 절멸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은 살아서 나갈 희망 없이 문자 그대로 노역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죠. 참고로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수용소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치의 입장에서 '부담되지만 재교육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카테고리 II 수용소로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가 대표적입니다. 나치의 입장에서 '개선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를 수용한 카테고리 I 수용소로는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대표적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가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을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겠죠.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영화와 책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는 1941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된 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신원확인국의 사진사로 일했습니다. 수용소에 수감자가 들어오면 머그샷처럼 수감번호를 들고 신원 확인을 위한 사진을 찍게 되는데, 프랑시스코 부아가 바로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원만한 사교적 성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나치 장교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남다른 사진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신원확인국에서 일하는 도중 그는 나치의 충격적인 만행을 목격하게 됩니다.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다 죽은 사람이나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 나치의 앞잡이)나 나치 친위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마치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거나 사고사, 자살 등으로 조작한 사진을 발견한 겁니다. 나치는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사진술을 이용하여 교묘히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각종 일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에 동원되어야 했던 프랑시스코 부아는 진실을 은폐하는 사진들의 원본 필름을 외부로 반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나치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서였죠. 그를 중심으로 수감자들은 2만 장에 달하는 필름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나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수용소 밖으로 내보냅니다. 강제수용소가 해방된 이후 프랑시스코 부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재판인 뉘른베르크 공판에 증인으로 나서서 빼돌린 필름을 증거로 나치의 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합니다.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이 장면을 담은 기록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이 납니다. 손가락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하는 사람이 바로 프랑시스코 부아입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인 쉰들러가 자신의 공장을 통해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다면, 프랑시스코 부아는 사진사로 일하던 보직을 이용해 나치의 만행을 담은 원본 필름들을 빼돌렸습니다. 그의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은 원작인 그래픽 노블과 넷플릭스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생각비행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영화 이후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어 무척 흥미롭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넷플릭스 영화 속에 나오는 프랑시스코 부아는 영웅적인 주인공처럼 부각됩니다. 용감하고 선한 마음을 품은 주인공으로서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나치의 만행을 폭로함으로써 정의를 이룬다는 클리셰처럼 말이죠. 하지만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주인공의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려 하기보다 더 큰 그림을 보여주려 합니다. 역사적으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위키백과

 

그 발단은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 17일 프랑코의 쿠데타로 시작되어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난 전쟁입니다. 반란군인 우파가 이끄는 프랑코 측과 좌파 인민전선 정부 측 사이에 발발한 내전으로, 우파와 프랑코의 독재로 끝이 나죠. 스페인 내전은 시기상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대리전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 내전 당시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프랑코를 지원했고, 소련과 각국의 의용군은 공화파인 인민전선을 지원했습니다.

 

Francisco Franco Bahamonde / 출처 - 위키미디어

 

종군기자의 대부인 로버트 카파, 《어린 왕자》의 작가인 생텍쥐페리, 《노인과 바다》의 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1984》의 작가인 조지 오웰 등 수많은 지식인이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참전했습니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험을 통해 대표작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중에 압권은 피카소의 대표작인 〈게르니카〉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에서 벌어진 학살을 표현하고 있죠. 수많은 의용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의 결과는 나치 독일과 손잡은 프랑코 독재정권의 성립이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느꼈던 절망감을 알베르 카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 위키미디어 공용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_알베르 카뮈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진 일을 도왔고 신문기자로서 사진을 찍었던 그는, 자신의 고향인 카탈루냐를 위해 인민전선 쪽에서 참전했다가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귀결되자 국적을 상실하고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던 스페인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치에 대항하다 붙잡혀 결국에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게 됩니다. 프랑시스코 부아가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가게 된 이유, 수용소 내 신원확인국에서 일하게 된 경위, 사진사로서 나치의 만행이 담긴 필름을 빼돌린 일 등 이 모든 것을 스페인 내전이라는 배경을 통해 이해하지 않으면 실존 인물인데도 작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낸 존재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프랑시스코 부아는 스페인 내전을 촬영한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처럼 생각하며 수용소에서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Magnum Photos / © Robert Capa ©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스페인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기교가 필요 없다. 카메라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스페인 자체가 사진이고, 당신은 그저 찍기만 하면 된다.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_로버트 카파

 

좌파 인민전선에 참여했던 프랑시스코 부아는 공산당원으로서 신념이 매우 투철했습니다. 나치의 필름을 빼돌리는 과정에서 그의 신념과 다른 당원 동지들의 협력은 아주 주요하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영화만 보신 분은 만듦새가 성글다고기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보면 여러 장면이 뜬금없어 보이고 산만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반면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그래픽 노블의 특성상 사료와 해설, 풍부한 역주를 통해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책과 영화를 함께 본다면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실제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백미는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영웅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해방 이후의 내용입니다. 영화는 프랑시스코 부아의 영웅적인 면모를 기록 영화의 한 장면을 써서 부각하며 끝맺고 있지만, 사실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에 증인으로 참석한 그가 느낀 절망감은 책을 통해서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은 보면 볼수록 한국전쟁을 생각나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놓고 인트로와 아웃트로로 수미쌍관을 이룬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한 국가의 내전이었지만 수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국제 대리전 성격이 강했던 상황, 국민의 염원과 달리 외세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않았거나 국민들의 뜻을 무시한 것도 유사합니다. 스페인을 독재정권에서 해방하기를 거부한 연합군, 통일 정부로서 선거를 치르기를 앙망했던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남한 단독 선거로 정부가 수립되었던 모습도 겹쳐 보입니다. 두 내전의 결과가 결국 독재정권으로 귀결되었다는 점까지 비슷하죠. 스페인에는 프랑코,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그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무국적자 신분의 프랑시스코 부아의 처지는, 해방이 됐건만 일본은 물론 남북한 어디서도 제대로 된 환영을 받지 못했던 조선적(朝鮮籍) 사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서두에 언급했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별다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스페인과 한국의 역사에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를 더욱 뜻깊게 보기 위해서라도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영화만 보는 것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15년 동안 갇혀 있었던 부분만 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대사로 표현되었다시피 〈올드보이〉의 핵심은 15년 동안의 감금이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시스코 부아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페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무국적자로서 어떤 나라의 환대도 기대할 수 없었던 스페인 수감자들의 절망감을 이해하는 것이 책과 영화의 핵심입니다. 그래픽 노블을 통해 스페인 내전이라는 그 배경에까지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보다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제72주년 제헌절입니다.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5일 뒤인 7월 17일, 조선왕조 건국일에 맞춰 헌법이 공포되었고 이날을 우리는 제헌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제헌절은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과 더불어 5대 국경일에 속합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 "시대변화에 발맞춰 헌법을 개정할 때가 되었"다면서 "코로나 위기를 한고비 넘기는 대로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자고 했습니다. 아울러 "정치권의 이해가 아닌 오로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시대 정신을 반영한 새 국가 규범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헌법은 항구불변의 가치를 담은 약속이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국민의 요구에 부합해야 하며, 더 많은 권익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출처 - 뉴시스

 

7월 17일 과거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84년 전인 오늘,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정권을 잡은 공화진영에 맞서 국민진영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소련이 공화진영을 지원한 반면 파시즘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진영을 지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 양상으로 비화했고,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내전으로 약 50만 명이 숨지고 스페인의 국토가 황폐해졌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장군은 총통의 지위를 꿰차고 공화파를 학살했습니다. 그러고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파시즘 독재정치를 이어갔습니다.

 

출처 - Magnum Photos / © Robert Capa ©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 당시 〈어느 인민전선(공화군) 병사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해 싸우다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쓰러지는 공화파 병사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착한 덕분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사진으로 로버트 카파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누렸지만 한편으로 사진을 조작했다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Amical de Mauthausen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Benito Bermejo

 

이와 달리 자신이 찍지 않은 사진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 있습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의 주인공 '프랑시스코 부아'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있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친위대나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 나치의 앞잡이)에 의해 자행된 '비자연사 죽음'을 속이기 위해 나치는 사진을 조작했습니다. 이런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된 프랑시스코 부아는 조작된 일련의 사진 원본 필름을 빼돌렸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하여 나치 지도자들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아울러 그의 노력을 통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가 부각되었죠.

 

 

오늘은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번역하신 문박엘리 님과 인터뷰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시스코 부아'와 '스페인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Q 안녕하세요? 생각비행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들께 간략히 소개 부탁합니다.

A 안녕하세요.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번역한 문박엘리입니다. 서울에서 대학교 졸업 후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일반회사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고요, 지구와 인간과 우주 만물의 연계, 그리고 역사 등 다방면에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사와 그 유산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 말기의 유럽 정세와 오늘날에 이르는 영향까지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Q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그래픽 노블'입니다. 장르의 특성과 함께 출판계에서 그래픽 노블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해주시죠.

A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은 대개 문학적 구성과 특성을 지닌 작가주의 만화를 가리킵니다. 영어의 '코믹스'와 일본의 '망가'와 한국의 '만화'보다 무게감과 진지함이 부여된 듯한 이 용어는 1960년대 이후 널리 쓰이게 됩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탄탄한 스토리와 구성으로 전개되는 만화 부분과 그 만화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인물과 사실을 설명하는 사료 부분으로 이루어져 전형적인 그래픽 노블에 속합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프랑스어권 만화는 오랫동안 유럽 만화 시장을 지배해왔는데요, 특히 그래픽 노블 영역은 1960년대 이후 크게 번창했습니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그래픽 노블을 포함한 프랑스 만화 업계는 최근 10년 동안 매출이 20% 증가했으며 프랑스 출판 시장에서 일반 문학과 청소년물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만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로 인정받았고 만화 전시회가 점차 대중적인 인기와 전문가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빠트릴 수 없는 축제가 1974년 이래 매년 프랑스 앙굴렘에서 개최되는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만화 페스티벌 중 하나로 매년 1월 말에 열리는데요, 이 축제에서는 프랑스는 물론 세계 각국의 만화와 관련 영상물이 전시되고, 다양한 강연회와 상영회, 시상식 등이 열립니다. 이 축제를 찾아오는 전 세계 만화 애호인들과 관련 종사자들과 기자들의 수가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Q 넷플릭스에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책과 영화는 어떻게 다른지요?

A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스페인 여성 영화감독 마르 타르가로나(Mar Targarona)가 연출한 작품으로, 2018년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프랑시스코 부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참상과 나치의 만행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특히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프란츠 치라이스 소장이 아들의 생일 파티에서 시중을 들던 포로들을 죽이는 장면은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합니다. 실제로 치라이스는 아들 생일 파티에서 40여 명의 포로를 살해합니다. 프랑시스코가 빼돌린 실제 사진들이 마지막에 나오면서 끝나는 영화는 여러 사건을 두서없이 나열한 듯해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스페인 시나리오 작가인 살바 루비오와 스페인 만화가 페드로 콜롬보가 합작하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책이 영화보다 한 해 앞서 2017년에 출간되었죠.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매된 이 책은 만화계 인사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만화의 경우, 실존 인물인 프랑시스코 부아를 중심으로 수용소 사진 빼돌리기와 전쟁 후 그 사진의 용도를 드러내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영화보다 한층 탄탄한 플롯으로 전개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주인공의 내레이션은 독자가 주인공의 심리에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적절한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영화보다는 책이 재미와 감동을 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Q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이 부분을 말씀해주시고, 이후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시죠.

A 스페인 홀로코스트는 종전 후 일반 대중에게 대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전후 사학자들의 우선 관심사도 되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 참전국이 아니었기에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수많은 스페인 포로가 희생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 후 강력한 독재체재를 구축하고 1975년 종신 때까지 스페인의 총통을 지낸 프랑코 장군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스페인 포로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홀로코스트는 사실상 프랑코 정권과 나치의 합작물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기원은 1936년 7월 17일(84년 전 오늘이군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로 발발한 스페인 내전이라고 봅니다.

왕당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원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스트 세력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파에 맞서 싸운 이들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을 비롯한 공화파 사람들이었습니다.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에서 패한 공화파의 상당수가 망명길에 오르는데, 당시 프랑스로 망명한 이들만 50만 명에 달합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거나 레지스탕스와 연대하는 방식으로 나치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나치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Amical de Mauthausen

 

이 수용소는 책에 나오듯 노역으로 인한 절멸수용소로 분류된 지옥이었습니다. 서류상 입증된 수만 거론하자면 4816명의 스페인 포로가 이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스페인 공화파 포로들은 1945년 해방 이후 대부분 프랑스를 비롯하여 제3국으로 제2의 망명을 해야만 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끝내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처럼 두 번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을 만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프랑시스코 부아의 경우는 스페인 포로 대다수의 여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는 어떤 사람인가요?

A 1920년생인 프랑스시코 부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열렬한 공화파 가족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청소년기에 스페인 사회주의청년연합당(JSU)의 일원이었던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파 군대에 입대하여 싸웠습니다. 패전 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억류되기까지 부아의 운명은 앞서 말씀드린 스페인 공화파 참전 포로들과 비슷합니다. 그는 1941년 1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된 이래 해방 때까지 신원확인국에서 사진사로 일했습니다. 

 

© Amical de Mauthausen

 

특이한 점은 부아가 수용소 내 나치의 만행을 담은 사진을 빼돌리는 데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 나치 상관들과 관계가 원만했다는 사실입니다. 나치가 사진사로서 부아의 실력을 인정했음은 기록에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밝고 사교적이었던 그의 성품이 한몫을 한 것 같습니다. 종전 후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약했던 그는 1951년 7월 파리에서 31년이 채 안 되는 생애를 마칩니다. 그의 사후 현실화된 스페인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스페인 홀로코스트 관련 참고자료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관련국(프랑스, 독일 등)에서 생존자와 유가족 대우에 관한 후속 조치들이 시행되었습니다. 2017년 프랑스 정부는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 시장이 주재하는 안장식 행사와 함께 프랑스시코 부아의 유해를 파리 시내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치했습니다. 올해는 프랑시스코 부아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얻은 질병으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넋을 기리고 생전에 파시즘에 맞서 맹활약한 젊은 영혼을 기억하는 행사가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Q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다양한 인물이 있었지만, 신원확인국 책임자인 ‘파울 릭켄’이라는 인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존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는데요, 그는 어떤 일을 했고 프랑시스코 부아와 어떤 관계였나요? 

 

© Amical de Mauthausen

 

A 파울 릭켄은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신원확인국 책임자였습니다. 신원확인국에서 사진 현상을 담당했던 프랑시스코 부아의 직속 상관인 나치였죠. 릭켄은 부아의 업무능력을 높이 샀습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의 미학'을 부아에게 강변하는 것은 끔찍하긴 하지만 릭켄의 정신세계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릭켄이 촬영했던 수용소 생활과 포로들의 사진들은 훗날 부아가 수용소 밖으로 빼돌려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나치 전범들의 행적을 증언하는 증거자료로 제출됩니다. 그 사진들과 부아의 증언을 통해 수용소 내 만행이 드러났고 관련 나치 전범들의 죄가 입증되었습니다.

 

 

Q 책을 번역하면서 특히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지요.

 A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고 책의 사료 부분에 사진 한 장으로 소개된 인물인 카를로스 그레이키(Carlos Greykey)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피부색과 복장이 일반적인 수용소 포로들과 달라 의아하게 생각하다 곧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카를로스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유일한 흑인 포로였습니다. 수용소 나치 친위대원들은 그에게 호텔 웨이터 복장을 입히고 식사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수용소에 힘러와 같은 나치 고관이 방문하면 카를로스는 '식인종 아비의 자식이지만 스페인에 살던 흑인'으로 소개되기도 했어요. 굴욕적이었겠지만 견뎌내야 했습니다. 살인적인 채석장 노역으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포로들의 평균 생존 기간이 6개월에서 1년을 넘지 못했는데, 카를로스는 식사 시중을 하면서 수년을 버틴 끝에 살아서 해방을 맞이했거든요.

 

1941년 수용소 입소 당시 나치 친위대원은 수건으로 그의 피부를 문질러댔다고 합니다. 흑인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카를로스가 검댕이를 덮어썼다고 생각한 거죠. 그가 흑인임을 확인한 나치는 카를로스를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1925년 출간된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 의하면 유대인만이 아니라 흑인도 열등한 존재로서 아리아인 혈통을 오염시키는 위험한 인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카를로스가 나치 장교의 질문에 독일어로 대답했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즉각 처형을 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는 스페인어와 독일어 외에도 카탈루냐어, 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습니다. 191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의대생으로 재학 중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공화파로 참전했고 패전 후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스페인 공화파 참전용사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망명 후에도 반파시스트 전쟁을 프랑스 편에서 이어가다가 결국 독일 나치에게 체포되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어 사진 속의 모습으로 나치 친위대원들의 식사 시중을 들게 된 것이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프랑코 총통 치하인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는 프랑스에 두 번째 망명을 했고 몇 년 후 프랑스에 귀화해 결혼을 하고 자녀도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방 후 초기 카를로스는 수용소 생존자들의 정기 회합에 참석했으나 이후 발길을 끊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그의 자취는 상세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딸에 의하면 카를로스는 카바레에서 댄서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전기공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77년부터 1982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적도기니공화국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카를로스가 만년에 스페인 민주화가 아니라 적도기니공화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다는 기록은 그의 부모님이 스페인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페르난도 포(Fernando Pó)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포는 19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적도기니공화국에 속한 지역입니다.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한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ías Nguema)의 독재정치는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Teodoro Obiang)의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2대 대통령이 된 테오도로 오비앙은 1979년 이래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적도기니공화국은 독립 이래 현재까지 독재정권 치하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된 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책의 주인공도 아니고 심지어 만화에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인 카를로스 그레이키에 대한 소개를 길게 한 까닭은, 엄청난 영광도 명예도 동반하지 않은 삶의 여정을 처음에는 연민의 감정으로 띄엄띄엄 추적하는 와중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부색과 출신의 불리함과 아마도 풍족하지 못했을 생계 방편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회피하지 않았고, 잔혹한 차별의 세상과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가치에 따른 투신을 죽을 때까지 거듭했습니다. 그는 험난하게 굴곡진 세월을 선의로 뚜벅뚜벅 살아낸 영웅이었습니다.     

 

 

Q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3분의 2가 그래픽 노블의 형식으로 된 만화이고, 3분의 1은 사료와 해설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 상황과 실재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데요, 유심히 보신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Amical de Mauthausen


A 개인적으로 마리-클로드 바이앙-쿠튀리에(Marie-Claude Vaillant-Couturier)가 나오는 부분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946년 1월 28일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그녀가 증언을 마친 뒤 프랑시스코 부아가 증언을 했는데요, 이 책에서 그 상황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를 보고 그 세밀함에 감탄했습니다. 또한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증언을 마치고 난 그녀가 부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작가에 의한 상상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을 넘어 초당적인 명성과 존경을 받은 여성 정치인의 인품과 매력이 잘 드러난 부분이라 자꾸 보게 됩니다.

 

 

Q 짧은 인터뷰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를 독자들께 간략히 말씀해주시죠.   


 A 7월 17일 오늘은 한국의 제헌절이자 스페인 내전 발발일입니다. 스페인 내전 때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은 패전 후 스페인 밖에서도 파시즘과의 전쟁을 이어갔고, 그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스페인 홀로코스트로 희생되었습니다. 비단 스페인과 유럽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파시즘의 위협은 오늘날에도 지구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스페인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지구상에서 재발하지 않으려면 먼저 그것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배경과 진행에 대해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민지 통치와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군부독재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한국의 20세기 역사와 닮은 점이 많은 스페인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형식의 입문서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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