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위키피디아


705년 2월 22일, 중국의 측천무후가 퇴위하고 당나라 왕조가 복원되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측천무후는 당나라 고종의 황후이자 당나라 제7대 황제로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 황제입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 후궁 시절부터 암투를 밥 먹듯이 하고 황후가 되어서는 수많은 친척을 자살과 독살로 내몰았으며, 심지어 황태자인 자기 아들이 총명함을 보이자 자살시키고 그 죄를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기까지 했죠. 이와 대조적으로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태평성대인 정관의 치를 잇고 개원의 치의 토대를 만든 정치적 역량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는 음탕하고 간악하게 황위를 찬탈한 요녀라는 비난부터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이란 칭찬까지 함께 받고 있습니다. 측천무후를 대상으로 삼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나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겠죠.



출처 - 연합뉴스


측천무후는 정치적 역량이 출중했음에도 이중적인 평가를 피할 수 없어 결국 퇴위하였을진대, 정치적 역량은커녕 주변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한 박근혜는 자신이 공언했던 특검의 대면조사도 받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는 헌법 조문의 의미를 초등학생들도 다 압니다. 헌법재판소는 하루빨리 탄핵을 인용해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새로 개봉한 영화 〈컨택트〉가 영화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 내용에 대한 불만은 아닙니다. 휴고상, 네뷸러상 등 SF 계의 내로라하는 상을 휩쓴 작가 테드 창이 쓴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삼아 감독인 드니 빌뇌브가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훌륭히 각색해 영상화했으니까요. <컨택트>는 외계인만 등장하면 부수고 터뜨리기 바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언어'와 '소통'에 관한 지적 유희에 가까운 좋은 영화입니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이미 올해 아카데미상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있죠.


출처 - 유튜브


논란이 된 건 영화 제목이었습니다. 원제인 'Arrival'을 뜬금없이 '컨택트'로 바꿨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영화 마지막 하얀 화면에 나오는 제목은 'Arrival'인데 자막에는 '컨택트'라고 뜹니다. 보고 있자니 대체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조디 포스터가 주연으로 나온 SF 걸작 영화 〈콘택트(Contact)〉를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정작 영화 배급사 관계자는 그 영화와 제목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기사를 보고 알았다는 유체이탈 화법 같은 소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각 나라 배급사의 판단에 따라 제목이 달라지긴 했습니다. 중국은 '降臨(강림)', 일본은 'メッセージ(메시지)', 포르투갈은 'O Primeiro Encontro(첫 만남)', 폴란드는 'Nowy początek(새 시작)' 등으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 제목이 논란이 된 까닭은 우리나라 배급사의 안이하고 이상한 이름 짓기 때문일 겁니다. 

 

원제와 연관 없는, 게다가 기존 걸작에 대한 존중의 의미도 담기지 않은, 생판 다른 영어로 굳이 바꿔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관객에게 다가가는 제목을 원했다면 영어가 아닌 신선한 한국어 제목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컨택트〉처럼 영어 원제를 뜬금없이 다른 영어 제목으로 옮기는 영화도 많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외화 제목은 원제를 그냥 한국어로 바꿔버린 제목일 겁니다. 컨택트'처럼 인기 소설이 원작인 영화 '월드워Z'도 그렇습니다. 원작인 ‘세계대전Z’가 한국에 번역된 소설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도 배급사는 굳이 영화의 영어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곧 개봉할 마틴 스코세이지의 종교 영화 〈사일런스〉는 어떻습니까? 엔도 슈사쿠의 유명한 소설 〈침묵〉을 그냥 영어 그대로 읽어버리는 안이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세련되어 보인다는 얄팍한 장삿속이 드러나는 것 같아 이런 유의 영화 제목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계피'보다 '시나몬'이 더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물론 모든 배급사가 이처럼 영화 제목을 짓는 건 아닙니다. 좋은 한국어 제목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곳도 분명히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겨울왕국〉은 원작이 〈Frozen〉이었죠. 역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Gone Girl〉은 한국어 번역본 제목대로 〈나를 찾아줘〉로 개봉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전엔 원작의 제목보다 훨씬 좋은 번역 제목도 즐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랑과 영혼'이 있습니다. 원제는 ‘Ghost’였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현재 독립영화계의 최대 축제인 선댄스 영화제라는 이름의 모체가 된 '내일을 향해 쏴라'가 있겠네요. 극 중 로버트 레드포드가 분한 선댄스 키드의 이름에서 따온 건데, 영화 원제는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였습니다. 그냥 두 주인공 이름을 나열했을 뿐인 제목을 '내일을 향해 쏴라’로 멋지게 지어낸 것이죠.



앞으로 영화 배급사들이 제목에 대해 고민을 좀 더 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한국어 제목으로 깔끔히 번역하면 좋겠고, 안 된다면 최소한 원제를 그대로 옮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군요.

 

불금을 기다리며 매일 야근에 시달리시는 직장인분들, 지금도 모니터를 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계시겠지요? 예전에 '독수리타법'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잘 사용하지 않는 어린 분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네요. 과거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나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았던 기성세대가 손가락 한두 개로 겨우겨우 키보드를 치던 모습을 묘사한 단어입니다.

 

주판알을 튕기고 펜글씨 교본처럼 반듯한 글쓰기가 사회인의 무기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업무 환경의 변화는 기성세대에겐 가혹했습니다. 대기업 고위직들은 처음엔 손으로 쓴 종이를 부하 직원에게 입력하게 하며 버텼으나 결국엔 말단 직원한테 키보드로 입력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퇴출당하기 일쑤였죠.


출처 - 연합뉴스


생각비행이 속한 출판업계만 놓고 봐도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업무 환경의 변화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원고지 더미가 작가의 방을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디지털 원고로 출판사에 입고되고, 편집-디자인-출력 등 작업 대부분이 컴퓨터를 통해 이뤄집니다.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주문 접수, 출고, 재고 관리 등을 컴퓨터의 도움 없이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 세대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책을 둘러싼 업무 환경이 이전과는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좋은 만년필이 작가의 필수품이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좋은 기계식 키보드, 스캐너, 스마트폰, 태블릿 등 다양한 디지털 도구가 이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게 작가와 편집자의 미덕인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캘리그라피가 아닌 이상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서로의 필기체를 확인할 기회가 드물어지는 세상이니까요.

출처 - 연합뉴스


입력 방식의 차이가 어쩌면 사람과 업계의 세대를 가르는 척도가 될 수 있겠군요. 일본에서는 이 문제가 나름 이슈입니다. 작년에 저명한 비즈니스 주간지 《다이아몬드》에 '「젊은 세대의 컴퓨터 이탈 현상」이 시사하는 두려운 미래’라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독수리타법을 쓰는 기성세대를 은근히 깔보던 자신이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의 핸드폰 입력과 스마트폰 터치 입력 때문에 기성세대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한 글입니다.
 

「若者のパソコン離れ」が示唆する恐ろしい未来(원문) : http://diamond.jp/articles/-/98503


「젊은 세대의 컴퓨터 이탈 현상」이 시사하는 두려운 미래(번역문) : http://isao76.egloos.com/2592896


물론 이는 일본의 문제입니다. 일본에서 키보드로 글자를 입력하려면 영문 발음을 쳐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때문에 효율적인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이 더 빠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 입력은 이와는 다르죠. 현재로는 키보드 입력이 스마트폰 터치 방식보다는 훨씬 빠릅니다. 일부 엄지족이 웬만한 성인의 키보드 입력 속도를 웃도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직업 현장에선 여전히 마우스와 키보드를 통한 입력 방식이 최적의 조건입니다.

 

출처 - 기즈모도닷컴


애초 효율이나 속도만 따진다면 '쿼티' 방식이 아닌 '드보락', 즉 두벌식이 아닌 세벌식 자판 입력 방법을 써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방식이 제일 효율적인 업무 환경이 되는 법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도도한 시대의 변화는 우리에게 익숙함과의 결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 시대적 화두인데요, 이런 조류에서 우리나라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죠.

 

지난해 처음으로 모바일 기기의 인터넷 트래픽이 PC를 넘어섰습니다. 한국은 스마트폰 사용률이 90퍼센트를 넘은 지 오래됐습니다. 이런 접속 환경의 변화는 세계적인 추세이며 앞으로도 가속화할 겁니다. 지금도 회사 업무 외에는 PC를 쓰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키보드보다 스마트폰 입력에 더 익숙합니다. PC보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고 스마트폰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진 세대가 회사에 입사할 때쯤이면, 한국에서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은 뒤처진 기성세대가 되어 퇴출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출처 - 디지털데일리


2016년 딥러닝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나온 후 업계 판도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신경망 인공지능을 적용하여 모바일 기기의 음성 인식과 번역의 완성도는 이미 놀라운 수준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바둑은 이미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고, 올해는 고도의 전력이 중요한 프로포커판을 인공지능이 휩쓸기도 했죠.

출처 - 경향신문

 

타이핑의 시대가 저물고 말로 인공지능 기반의 기계와 소통하는 일이 대세가 되는 시대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싶군요. 이런 변화의 흐름에서는 키보드도 터치스크린도 아닌 인공지능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소양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말에 두서가 없고, 우주의 기운 운운하는 사람은 퇴출 대상 제1호가 되겠죠. 이런 변화를 마냥 좋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말의 무게는 동일할 겁니다.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는 사람이 설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세월호, 그날의 기록

 

 

1.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사고는 결단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인간과 생명보다 돈과 이윤을 우선시하는 권력이 풀어놓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민낯을 드러낸 참사였다.

 

2.
세월호 하면 떠오르는 숱한 잔상이 있다. 승객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선령 규제 완화, 더 많은 화물을 싣고 승객을 태우기 위한 선박 개조와 증축, 안전 규제 완화와 철폐, 승무원의 비정규직화, 사고 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구명벌, 승객보다 선장과 선원을 먼저 구조한 이해할 수 없는 해경의 구조 방식, 수백 명의 승객이 남아 있는데도 적극적으로 구조에 힘쓰지 않은 이유, 세월호 침몰 후 수색 작전에서 전권을 휘두르다시피 했던 잠수업체 언딘과 해경의 모호한 유착 관계, 승객 구조의 골든타임에 중앙부처 고위급 인사를 위한 의전 통화나 청와대의 요구를 들어주기 바빴던 119상황실과 해경의 업무 태도, 사고 초기 인명 수색 과정에서 드러난 재난구조 체계의 총체적 부실과 문제점, 재난의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며 책임 면피에 급급했던 정부와 대통령, ‘정피아’ ‘해피아’ ‘관피아’로 통칭되는 이권을 매개로 한 유착 관계, 세월호와 국정원 간의 드러나지 않은 의문의 관계, 유병언만 잡으면 세월호의 진실이 드러날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던 권력의 앞잡이들이 펼친 술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대통령의 잘못과 행적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국가 시스템, 이 모든 과정에서 허위 정보를 받아쓰기한 것도 모자라 진실을 감추는 데 일조한 언론과 방송의 저급한 보도 행태…, 더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3.
진실을 감추는 숱한 잔상에 의해 삶의 바탕이 무너져 하루하루 지쳐가던 그때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테러방지법 반대를 위한 필리버스터 정국, 4.13 총선 이슈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던 시기였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드러낸 숱한 사실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인가? 그렇다면 세월호에서 승객들에 의해 구조된 5살 권 양이 훗날 ‘그런데 왜 구조하지 못했나요?’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되었는가?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끝난 기록이 아니라 진행형인 기록이며 우리의 몫이 남아 있다.

 

 

4.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그해 추석 때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책을 곱씹어 읽으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의 의미를 묵상할 기회가 있었다. 프리모 레비는 나치에 의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한 당사자였음에도 평생토록 자신이 ‘구조된 자’라는 사실에 힘겨워했다. 그가 짊어지고 살았을 죄책감의 실체를 세월호 참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경솔한 판단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내가 무죄하다는 생각을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희생자와 유가족의 고통에 얼마나 깊이 마음 아파했던가를 반성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5.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순간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을 분노의 감정에 휩쓸려 지냈던가? 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지 못하는 정치권을 질타하고, 사회적 연대에 힘을 쏟지 않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희생된 분들이 겪었을 죽음에 대한 공포, 상실감, 고통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못한 나 자신의 부족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해의 제자도》라는 책에서 저자들은 “기독교적 희망을 배우는 것은 결과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또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사람들과 가까이할 때 우리의 소명은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만남에서 오는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데, 참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었다.

 

6.
세월호 사건과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속도를 늦추고 세상의 참상을 정직하게 보고 대면하도록 요구한다. 아울러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짜놓은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내려와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게 하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톨스토이는 이에 대해 일찍이 답을 내놓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7.
아픈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이요, 고통받는 사람들이 우주의 중심이다. 언젠가 우리는 세상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 될 존재들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 1011일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다짐했으면 한다. 무죄함의 의식에서 벗어나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면서 세월호라는 죽음의 공간을 평화와 화해가 넘치는 역사적 화해의 공간으로 되살려야 할 의무가 바로 우리에게 있다고. 촛불은 그 다짐의 약속이며, 《세월호, 그날의 기록》의 남은 진실을 바로 우리가 기록하겠다고 말이다.

 

*2017년 1월 20일 녹색당 서울시당에 기고한 글입니다. 

 

[편집자 X의 세상 읽기]라는 연재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책은 생각의 집합체입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생각이 모이면 한 권의 책이 됩니다. 그 책은 다시 사람들의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냅니다. 이런 생각의 선순환이 잘 이뤄진다면 세상은 좀 더 자유롭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상상의 나래를 펴자! 책으로 꿈꾸는 생각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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