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학살범 전두환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 당연한 1심 결과를 받기 위해 3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광주지방법원은 지난 11월 30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전두환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전두환이 자서전에 쓴 5.18 헬기 사격 목격자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것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징역 2년도 아니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결은, 그가 저지른 5.18 학살에 대한 벌로는 새발의 피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이번 재판이 5.18 학살 자체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 사자명예훼손에 대한 재판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사자명예훼손죄의 법정형 기준은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시민들의 법 감정을 생각했을 때 이번 판결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한편으론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5.18 당시 자국민을 향한 군의 헬기 사격을 인정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애초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전두환의 거짓말로 재판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전두환 측 변호인은 지난 10월 최후변론에서 "광주 상공에서 단 한 발의 총알도 발사된 것이 없다. 헬기 사격설은 국민을 분열시키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해 반성은커녕 여전히 사실 인정조차 하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했습니다. 1심 판결을 받으러 가는 11월 30일 아침에도 전두환은 집을 나설 때 5.18 학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조심해 이놈아!" 하고 소리를 질렀을 정도죠.


출처 - 경향신문


파렴치한 전두환을 향해 1심 재판부는 헬기 사격 여부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쟁점이라며 '광주소요사태 분석 교훈집' 등 다수의 군 문서와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피해자인 조비오 신부가 목격한 바와 같이 5.18 민주화운동 기간에 자국민을 향한 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점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결했습니다. 또한 전두환이 재판 내내 혐의를 부인하고 40년이 넘도록 광주 시민들에게 용서를 구한 적도 없고 사과도 하지 않아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실효성이 적은 벌금형이 아닌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5.18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피고인이 고통받아온 많은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길 바란다고 밝혔지만 전두환은 이날 재판에서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지난 10월 5일 KBS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 인터뷰에 응한 조영대 신부(조비오 신부의 조카)는 "역사적인 그런 재판이고 또 이 재판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자(死者) 명예훼손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 결국 광주 5.18 진상 규명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온 국민의 이목이 쏠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은 결코 이것을 양보할 수 없고 결코 사죄의 그런 뜻도 없고 이런 상황이어서 계속해서 온갖 완전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지금 재판을 2년 반이나 그렇게 끌어오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긴 재판 과정을 회고한 바 있습니다. 1심 재판 결과가 나오자 조영대 신부는 전두환에 대한 허탈감과 참담함을 토로하는 한편 헬기 사격 사실이 법적으로 인정된 만큼 5.18의 진실을 밝힐 다음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된 점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출처 - MBC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비로소 그날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게 됐다며 1980년 5월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진 만큼 발포 명령과 민간인 학살 등의 진상 규명에 속도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5.18특별법 역시 하루빨리 통과시키겠다고 밝혔습니다. 경제정의실천연합 역시 이번 재판은 법원이 최초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인정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면서도 형의 집행을 명예훼손 피해자에 국한시킨 점은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2심 재판부가 전두환에 대한 실형 선고와 법정구속 판결을 내리길 기대했습니다.


출처 - KBS


실제로 전두환 측은 지난 7일 1심 재판부의 결정에 사실오인이 있다며 광주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그에 앞서 지난 3일 광주지검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두환 사건에 대해 항소했습니다. 검찰의 항소 이유는 양형 부당과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였습니다. 전두환 측과 검찰 측이 다 '사실오인'을 말하며 항소함에 따라 이르면 내년 2월쯤 항소심 재판이 열릴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광주드림


항소심은 광주지법 합의부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로써 전두환은 광주 법정에 다시 서야 합니다. 이번 1심 판결로 그간 멈춰 있던 민사소송 항소심도 이르면 다음 달 재개될 전망입니다. 전두환 측은 민사 1심에서 자서전의 69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 및 배포를 금지한다는 조치를 받았으며, 5.18 단체 4곳에 각각 1500만 원, 조영대 신부에게 1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 전두환이 이에 불복해 항소했기 때문에 이 민사 재판의 항소심이 곧 재개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 뉴시스


2017년 4월 전두환은 회고록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이후 3년의 긴 법정 공방 끝에 1심 판결이 나왔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큰 판결이지만, 적어도 이번 판결로 5.18 당시 군의 사격이 부득이한 자위권 발동이라는 억지 주장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됐습니다. 또한 미필적으로나마 전두환이 자국민에 대한 헬기 사격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인정된 셈입니다. 이런 재판 결과를 발판 삼아 5.18특별법 제정으로 진실을 밝히고 학살범 전두환을 단죄하길 바랍니다.

지난 4월 27일 살인마 전두환이 광주 법정에 다시 섰습니다. '혹시 이번에는?' 했는데 역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광주를 찾은 전두환은 자신의 잘못을 털끝만큼도 인정하지 않았고 법정에서 얼토당토않은 주장만 늘어놓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해놓고 인면수심의 뻔뻔함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지난해 쿠데타 40주년 자축을 한 전두환과 신군부의 오만함을 생각비행에서도 다룬 바 있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쿠데타 40주년 자축연 벌인 전두환을 단죄하라 : https://ideas0419.com/1017


지난 4월 27일 법정에서 전두환은 꾸벅꾸벅 졸며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 흉내를 내다가도 자기주장을 할 때는 초롱초롱한 정신 상태였습니다. 재판장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냐는 물음에 학살자 전두환은 헬기 사격은 절대로 없었고 있었더라면 많은 희생이 있었을 텐데, 대한민국군은 대한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격을 했을 리가 있냐는 헛소리를 했지요. 그의 정신은 또렷했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과연 전두환이 알츠하이머 등 병자로 불출석할 이유가 되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실 헬기 사격에 대해서는 이미 재판에서 충분히 다뤄진 내용이라고 봅니다. 21명의 증언자 나와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했거나 피격당한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외국의 피터슨 목사의 경우에는 이미 영상 자료를 제출한 터라 헬기 기총 소사는 사실이라고 인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출처 - JTBC


헬기 사격이 없었다던 전두환의 주장과 달리 이와 관련된 증거는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 작전을 앞두고 계엄군이 무장 헬기 사용을 계획했던 문서도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이 작전 내용을 담은 전교사 충정작전계획 문건에 따르면 500MD 무장헬기를 5대 편성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헬기에 '무장'이라고 별도 표시를 해 무장헬기가 각 몇 대인지도 파악해놓은 겁니다. 그리고 2018년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조사 결과를 이미 내놓은 바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끝까지 사과는커녕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학살자 전두환의 뻔뻔함에 광주 시민들, 아니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1년 만에 광주 법정에 다시 선 전두환의 단죄를 바라며 모인 5.18 관련자들의 40년 묵은 울분이 터져 나왔습니다. 광주지법 법정동 앞에 모여 전두환의 사죄를 촉구하는가 하면, 하얀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은 전두환을 규탄하기 위해 강하게 항의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재판을 마치고 도망치듯 나온 전두환의 차량에 길목을 지키고 있던 5.18 관계자가 계란을 던져 분노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MBC


분이 풀리지 않은 시민들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재판에 맞춰 광주로 옮겨온 전두환 단죄 동상을 때리며 전두환의 사죄와 처벌을 촉구했습니다. 학살자 전두환의 구속과 학살 책임 인정, 사죄를 통해 단죄와 역사의 심판을 받기를 바란 것이죠. 하지만 이번에도 전두환은 한 마디의 빈말도 없이 광주를 떠났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기를 맞는 특별한 해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 정당이 분노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끝까지 파렴치한 전두환은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논평을 냈고, 민생당은 40주기를 맞아 전두환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가 5.18의 역사적 의미를 명백히 세워주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정의당은 꾀병으로 법정을 농락하는 전두환에게 분명히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학살자 전두환의 후계자들인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전두환처럼 침묵했습니다.


출처 - MBC


올해는 5.18 40주기입니다. 이제 국회와 정부는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학살자 전두환과 그 추종자들의 진실 왜곡과 폄훼, 희생자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를 강력하게 근절해야 합니다. 뚜렷하게 밝혀지기 시작한 헬기 사격에 이어 최초 발포 명령자와 학살 책임자, 암매장 등 각종 의혹과 관련한 진상규명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땅에 독재자와 학살자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관심의 끈을 놓아선 안 되겠습니다.


 

출처 - YTN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혐의로 전두환이 광주 재판에 첫 출석했던 지난 2019년 3월 11일, 광주지방법원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창가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구속하라"를 외친 초등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 학교는 1987년 6월 9일, 반독재 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모교였습니다. 전두환이 인정하지 않은 진실을 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외침으로부터 또 1년이 지났습니다. 내일은 어린이날입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나들이를 조심스럽게 계획하는 가족도 많으실 텐데요,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5.18 광주민주화항쟁 40주기를 맞이하면서 올바른 역사 인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제 곧 5월입니다. 5.18 민주화항쟁을 떠올리게 되는 때죠. JTBC 보도에 의하면 당시 공수부대 대대장이 시민을 향해 "저건 죽여도 좋다"고 지시하고 계엄군이 그 지시에 따라 시민을 사살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학살자 전두환과 쿠데타 세력은 광주의 시민군이 먼저 공격해 자위권, 즉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쐈을 뿐이라고 주장해왔지요. 그런데 국방부에 의해 내용이 지워진 채 공개됐던 11공수 상황일지 원본에는 계엄군이 시민을 사살해서 시범을 보였다라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시민 1명이 버스를 몰고 분수대를 돌아나가려 할 때 그 자리에서 사살, 폭도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고요.


출처 - JTBC


공수부대원의 자필 수기는 더 자세합니다. 버스가 오고 있을 때 대대장이 저건 죽여도 좋다고 했다며 중대장이 병사에게 실탄을 줘 조준 사격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격에 의해 운전을 하던 시민은 내리다 쓰러졌습니다. 버스가 계엄군에게 돌진한 것도 아니고 돌아나가는 순간 시민을 상대로 사람을 죽이는 시범을 보인 겁니다. 학살자의 수괴인 전두환의 죄는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MBC가 입수한 해병 7연대 상황일지에 의하면 전두환은 부마항쟁의 진압 또한 지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기 직전 부산과 마산에 들불처럼 번진 민주화 시위인 부마항쟁을 당시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으로 공수부대가 투입돼 무차별 진압했죠. 그런데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현장에서 이를 직접 지휘한 사실이 군사 기록을 통해 확인됐습니다.


출처 - MBC


전두환은 소요사태 수습은 초기 진압이 가장 중요하다며 시위대에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라는 등 당시 계엄사령관, 3공수 특전여단장 등과 강경진압 작전 계획을 강행합니다. 5.18 민주화항쟁과 관련해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으므로 진압작전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던 전두환이 사실은 그 전인 부마항쟁 진압 때도 현장에서 계엄사령부, 특전단과 작전 지휘를 했던 겁니다. 3공수 여단장을 앉혀놓고 전두환이 직접 보고를 받는다는 자료가 나온 것을 보면 전두환은 그때도 이미 권력의 핵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두환은 부마항쟁 진압 후 10.26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이 무너지자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합니다. 요컨대 전두환에게 부마항쟁은 5.18 민주화항쟁 학살의 예행연습이었던 셈입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얼마나 망가뜨리고 왜곡시켰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출처 - 경향신문


힘겹지만 왜곡된 역사를 시민의 힘으로 하나둘 고쳐가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난 23일 '박정희의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당시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1970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김모씨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건데요.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긴급조치 1호는 헌법의 근본 원리인 국민주권주의 등에 비춰봤을 때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동시에 박정희는 국민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해 대통령의 의무를 어겼다고 설명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 판결은 지난 2015년 3월 사법농단의 주역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이 긴급조치가 위헌이긴 하지만 박정희의 긴급조치 발동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개개인의 권리에 법적 의무를 지지는 않기에 불법행위는 아니라고 판결했던 것과 정면으로 대치됩니다. 게다가 지난해 헌법재판소가 현행법상 양승태 대법원 판결을 취소하지 못한다고 결정한 이후 나온 판결이기에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오늘 TBS 〈김어준의 뉴스쇼〉에 출연한 자유한국당 홍문종 의원이 "촛불집회는 아스팔트 쿠데타"라고 말했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진행된 탄핵을 쿠데타로 규정해 파문을 일으켰는데요, 전두환, 노태우에 의한 군사정권 당시 여당을 계승한 자유한국당이 촛불집회를 쿠데타로 운운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부마항쟁, 5.18 등 굴곡진 한국 현대사는 파면 팔수록 친일, 독재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친일파, 독재자가 아닌 민중의 시각에서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리려는 무리에 대항해 온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학살자 전두환을 드디어 광주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의 측근들 핑계대로 치매기라도 있다면 정신을 놓은 틈에 혹시 사과하는 얘기가 나오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역시나 전두환은 철면피였습니다.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이 "5.18 발포 명령을 부인합니까?"라고 묻자 "이거 왜 이래!"라며 역정을 내는 모습에서 그는 5.18 이후로 조금의 반성도 해본 적 없는 학살자였음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출처 - JTBC


3월 11일 오전 8시 30분,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전두환의 자택 앞에는 취재진과 극우 단체 회원 들이 운집해 어수선했습니다. 경찰 6개 중대 350여 명의 병력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으나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전두환의 광주행에는 그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며 망언을 일삼은 부인 이순자와 변호사가 동행했습니다. 서대문 경찰서 형사들과 평소 전두환을 경호하는 경찰 경호대도 같이 이동했다고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12시 30분경 광주지법에 도착한 전두환은 승용차에서 내려 스스로 걸었습니다. 경호원의 부축은 없었습니다. 정신이 또렷하고 건강 상태도 좋아 그가 여태까지 재판을 기피했던 모든 이유가 핑계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보여주었습니다. 검찰과 경찰은 전두환이 자진 출석하여 출석을 강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 법원과 협의해 구인장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이 자기 발로 광주를 찾은 것은 1987년 이후 32년 만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재판이 시작되자 전두환은 재판장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며 헤드셋을 이리저리 고쳐 쓰고 중간에는 지루한지 꾸벅꾸벅 졸았다고 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광주 법정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다니 학살자 전두환의 뻔뻔함에 기가 막힙니다. 이번 재판은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전두환이 펴내 출간정지를 받은 회고록에서 저열하게 비난하여 사자명예훼손으로 불구속기소 되어 열린 공판입니다. 법정에 선 전두환은 변호사를 통해 5.18 당시 헬기 사격과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모두를 부인했습니다. 재판은 1시간 15분 만인 오후 3시 45분에 끝났습니다.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피해 자택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2019년 3월 11일 광주는 1980년 5월로 되돌아간 듯했습니다. 법원 후문과 내부 곳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출정가〉 등이 울려 퍼졌고 당시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과 신군부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혹시 모를 전두환의 참회를 기대하고 법원 주변에 갔다가 전두환이 역정을 내고 밥 먹으러 갔다는 소리가 들리자 분노와 불만을 토로하는 시민도 많았습니다. "전두환을 구속하라!", "5.18 망언 국회의원과 극우 인사 구속하라!"는 구호가 연이어 나왔으며 5.18 당시 가족과 친지를 잃은 희생자 유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한편 법원 후문 앞 광주동산초등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초등학생 20여 명이 창문 쪽에 서서 "5.18 진실을 밝혀라!", "학살자 전두환을 처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며 구호와 노래를 외쳐 부르기도 했습니다. 정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광주 법정에 선 전두환을 규탄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학살자 전두환의 전면 부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별다른 충돌 없이 전두환의 공판이 끝나기까지 광주 시민들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학살자 전두환을 고소한 조비오 신부의 조카인 조영대 신부는 법원에 출석한 전두환에게 "정말 잘못했다고 한마디라도 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출처 - 뉴스1


자국 군인들에게 학살을 명령했던 전두환에게 상처 입은 광주 시민들이 바라는 건 과오를 인정하고 잘못했다는 진심 어린 참회의 한마디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화해의 손길을 학살자 전두환은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5.18에 대한 전체의 죄를 묻는 재판이 아니어서 아쉬운 감도 있지만 전두환을 광주 법정에 세우기까지 32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대부분 그러했듯 가해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피해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1997년 전두환은 선고 받은 추징금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50% 남짓 납부하는 데 그쳤습니다. 전두환은 광주의 영령들과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들에게 사과할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학살자 전두환이 광주 법원으로 향하는 날 각 당에서 논평을 냈습니다. 당마다 전두환에 대한 호칭이 달랐습니다. '전두환 씨', '피고인 전두환', '전두환 전 대통령', '살인마 전두환', 이렇게 서로 다른 호칭은 각 당의 입장이 서로 다름을 상징합니다. 학살자와 5.18 광주에 대한 입장의 차이 속에 '5·18 진상조사위'는 반년째 표류하고 있습니다.

 

출처 - SBS

 

하지만 이번 광주 법정에 전두환을 세운 것은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5.18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주의 진실이 드러날수록 망언을 했던 자들의 입지는 좁아질 테지요. 지난날 과오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에게 법의 단죄가 내려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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