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말랐던 땅에 촉촉이 비가 내렸습니다.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비 한 방울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말로만 상생을 외치는 대기업과 정치권의 외침 속에서 중소기업과 서민의 삶은 언론조차 외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혁명을 외치던 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가끔 4.19 혁명 때, 1980년대 민주화운동 때, 군사정권 이후에 왜 이 사회를 바르게 바꾸지 못했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젊은 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며 무엇인가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4.19 혁명 시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 거리를 메웠던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먹고살기에 팍팍한 일상을 하루하루 견디는 기성세대가 되어 지금 현실을 더욱 목마르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러한 원망은 곧 '나'를 향하는 화살이 되어 비수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세상을 향해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는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이런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대의 순수함와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혁명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이가 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나'를 보게 합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미래를 꿈꾸기보다 노후를 걱정하고 변화를 바라기보다 개인의 안녕만 바라는 부끄러운 일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나이보다 생각이 더 늙어버린 것은 아닌지, 건방지게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욕만 하는 것은 아닌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읽으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붐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철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는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시인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어'를 구사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언어를 그대로 시로 옮겨 표현하기 때문에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역시 일상적 언어를 사용하고 특별한 비유법을 쓰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시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순수했던 젊은 날의 기억과 현실에서 타협하는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겹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겠지요. 

시는 보이는 표현도 중요하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내면의 일렁임이 있을 때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는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1979년 처녀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벌써 31년이 지났습니다. 1990년 성탄절에 친구한테서 선물로 받은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이 시를 읽고난 이후 김광규 시인의 시집을 모두 사서 읽었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현실의 뒤틀린 모습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기주의와 속물근성을 단순화하여 보여줍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찔림'을 느끼게 합니다. <나>라는 시에서 시인은 상황에 따라 아들, 아버지, 동생, 형, 남편, 오빠, 조카, 아저씨, 제자, 선생, 납세자, 예비군, 친구, 적, 환자, 손님, 주인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냐고 말이지요. 현대 철학은 근대적 주체가 아닌 '관계적 주체'를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여러 역할 속에서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성찰하고 있습니다. <버스를 탄 사람들>이란 시에서는 대학가에서 최루탄 냄새가 나는 젊은이들이 올라타도 아무말 하지 않는 시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범한 시민이라 할지라도 그저 실없는 구경꾼이나 행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낯익은 그들에게서 동지애를 느끼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게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시인의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광규 시인은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며 주변 인물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면서 잊고 지내는 모습과 현실의 뒤틀린 모습을 이야기를 하듯 표현합니다. <나의 자식에게> 라는 시에서 " 위험한 곳에는 아예 가지 말고/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중략).../지진이 일어나는 날은 /집에만 있는 것도 위험하고/아무 짓을 한해도 의심받는다/조용히 사는 죄악을 피해/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평온하게 살지 마라/무슨 짓인가 해라/아무리 부끄러운 흔적이라도/무엇인가 남겨라"라고 말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사는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현실은 언제나 올바르지 않을 수 있으며, 그른 것을 보고만 있어도 죄악이 됩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세상을 바꾸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연 바뀐 세상이 왔을 때 살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운동경기의 구경꾼으로 세상을 관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동경기에서 반칙이 일어날 때 심판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구경꾼들은 소리를 지르고 야유를 보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구경꾼입니까? 아닙니까?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를 준비가 됐습니까?

김광규

1941년 1월 7일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했다. 괴테 인스티투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서독으로 유학가서 뮌헨대학교에서 수학했고 현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1975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했으며 첫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으로 제1회 녹원문학상을, 1983년 두 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김수영문학상을, 다섯 번째 시집 《아니리》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2003년 여덟 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로 제11회 대산문학상을, 2007년 아홉 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제19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시집 《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하루 또 하루》, 시선집으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으로《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육성과 가성》, 번역서로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로렐라이》등이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한낮의 햇볕을 피하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요즘, 무더위를 식히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으시도록 정호승 시인의 <또 기다리는 편지>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이 시는 1982년에 출간된 정호승의 두 번째 시집인 《서울의 예수》에 담겨 있습니다. 이 시집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정호승의 시에 나타난 서울은 밝은 모습이 아닙니다. 군사정권 아래서 바라본 현실이 밝을 수는 없었겠지요. 정호승의 시선은 소외되고 외로우며 하루하루 힘들게 연명하는 우리 주변 인물들을 향해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래선지 더 슬프고 아프게 다가옵니다. 

정호승 시인은 2009년 경향신문과 나눈 인터뷰에서 “76년 김명인·김승희·김창완 시인 등 젊은 시인들과 함께 ‘반시(反詩)’라는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60년대 선배 시인들이 난해하고 추상적인 시들을 많이 썼는데, 우리는 ‘일상의 쉬운 언어로 현실의 이야기를 시로 쓰고자 한다’는 의미로 ‘반시’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죠.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경향과의 만남] 등단 37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시인 정호승)라고 말했습니다.

1980년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서울이 결코 희망적인 도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일반인도 그렇게 느낄진데 감수성이 충만한 시인에게는 어땠을까요? 서울이라는 숨막히는 공간에서 희망은 절망으로, 절망은 더 큰 절망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정호승은 절망스러운 희망을 '기다림'으로 표현합니다. 그에게 희망이란 곧 기다림이었습니다. 모순이 가득하고 잘못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시인은 묵묵히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조금 먼저 가서, 조금 더 앞의 세상을 바라보고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2012년의 서울에서도 유효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광장에 나와 웃을 수 있는 세상, 더 많은 사람이 아픔 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세상, 강남과 강북이 물질적인 편견으로 나뉘지 않는 세상, 남과 북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세상.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더 좋아지리라는 기대로 그런 세상을 기다립니다. 꿈꿉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벽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라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평론가 정과리는 "한국 민중의 전통적 감성에 깊이 몸담고 있는 시인이다"라고 정호승 시인을 평했습니다. 정호승의 시를 읽어보면 그 의견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고려가요의 <가시리>, 정지상의 <송인>, 김소월의 <진달래꽃> 등 교과서에서 배운 전통적 정서는 정호승의 <이별노래><또 기다리는 편지><우리가 어느 별에서><새벽편지><슬픔이 기쁨에게> 등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별노래><또 기다리는 편지><술 한잔><수선화에게> 같은 아름다운 시에 양희은, 이동원, 김현승, 안치환이 곡을 붙인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지요. 특히 <부치지 않은 편지>는 김광석의 유작앨범에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앞서 정호승 시긴이 갖춘 특유의 기다림의 정서를 언급했는데요, 어쩌면 기다림이란 허무로 이어질 수도 있는 미묘한 감정입니다. 기다림의 끝이 결국에는 더 긴 기다림의 출발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기다림'이라는 소극적 감정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길은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세상을 바꾸며 사는 삶이 아닐까요?

<아버지>에서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만 쳐다보며/내 집 한 칸 없이 살아오신 아버지"처럼, <서울의 예수>에서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고 표현된 예수처럼 절망은 여전히 우리 앞에 버티고 있기에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이제 절망이란 벽을 조그만 희망이라는 망치로 내리치면서 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끝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은 시(詩)의 시대가 아니라고 합니다. 현실을 슬퍼하고, 비판하고, 기뻐하고, 괴롭다고 가슴을 치기도 하고, 욕도 내뱉던 시의 시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구보다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고 표현했던,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시를 쓰는 시인이 그립습니다.

정호승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시 변두리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전국 고교문예 현상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란 글이 당선되어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으며, 같은 대학의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제대 후에《한국일보》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당선됐다. 김요섭 선생에 의해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기도 했으며, 1973년에 《대한일보》에 <첨성대>라는 시가 당선되어 《1973》 동인지를 시작했다. 1982년에는《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위령제>가 당선되었다.
 
1976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숭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김창완, 권지숙, 이종욱, 하종오, 김명인, 김명수, 김성영 등과 《反詩》 동인지 활동을 했다. 정호승 시인이 참여한 '반시'동인지는 “삶은 곧 시다”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들의 시화(詩化)가 중요하다. 꽃이나 사랑 등의 관념적 어휘는 배제한다”며, 예술성은 지키되 시가 오늘의 현실인 삶의 문제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시 동인들이 만든 동인지 《반시》는 1978년 세 번째 동인지를 만들며 상업화되는 시단을 비판하고 동인지 중심의 시단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월시》 등으로 동인지를 양적으로 확산하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1979년 군사정권에 의해 동인지가 불법적인 정기간행물로 규정되어 박해를 받았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서울의 예수》《새벽편지》《별들은 따뜻하다》《사랑하다 죽어버려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눈물나면 기차를 타라》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산문집으로 《정호승의 위안》, 어른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연인》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4월 초파일을 맞아 천상병 시인의 <歸天>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4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에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는 까닭은 인사동 조계사 앞에 천상병 시인의 아내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찻집 '귀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문학가와 문학 지망생이 즐겨 찾던, 작지만 유명한 문화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슬픔을 초월한 듯한 마음과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을 가진 천상병 시인은 저에겐 마치 득도한 고승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歸  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가 표현한 '아름다운 이 세상'을 실제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순탄하지 않았던 그분의 삶 때문이겠지요. 천상병 시인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고등학교 3학년 때 추천을 받고 대학 2학년 때 추천이 완료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른 활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살아생전에 《새》라는 유고시집을 남겼습니다. 

천상병 시인과 부인 문순옥 여사

천상병 시인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 사건에 휘말린 이유는 간첩 혐의를 받던 친구의 수첩에서 천상병 시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천상병 시인을 친구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시집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받은 전기고문으로 몸과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로 풀려나 거리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행려병자로 오해를 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가난했지만 막걸리 한 잔에 행복을 노래했던 시인은 돈의 맛에 길든 세상, 이기심이 가득한 욕망의 세상을 향해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으로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행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나의 가난은> 중에서)이라며 작은 일에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천상병

1930년 일본에서 출생했으며 1993년 4월 28일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죽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강물>로 《文藝》지에 추천받고 서울대 상과대학 2학년에 추천이 완료돼 등단했다.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평생의 후원자이자 독자였던 목순옥 여사와 결혼해 시를 썼으며 중광, 이외수와 함께 3대 기인으로 불렸다. 
시집으로는 《새》《주막에서》《천상병은 처상 시인이다》《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등이 있다.

* 천상병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성년의날을 맞아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로 유명한 기형도 시인은 1960년에 태어나 1989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음은 태양처럼 빛날 수 있지만 청춘기엔 불안한 마음에 고민하고 방황하는 일도 많이 생깁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문제라도 지금은 밤을 새워 고민할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형도의 시는 는 이로 하여금 과거의 길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단순히 돌아봄이 아니라 찬찬히 살펴보게 하는 힘이라고나 할까요.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잛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

기형도를 처음 만난 1992년 여름날이었습니다. 그의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다시 천천히 그의 시를 읽었습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답답함과 허무함이 몰려오더군요. 또다시 시를 읽었습니다. 답답함과 허무함이 내 안에 있는 절망과 슬픔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는 듯했습니다. 다시 그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러고는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창 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감상에 젖기 쉬운 20대에 저는 기형도를 통해 스스로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시간을 얻었습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다른 사람보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낄 때는 오히려 절망감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그 절망은 극복의 대상이지 회피의 대상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일은 나에게 맞지 않아!" 하고 회피하며 다른 일을 찾아 나서거나 자신에게 맞는 일이 없다며 투덜댑니다. 어쩌면 이 세상엔 자신에게 딱맞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맞다고 스스로 믿고 해야 할 일만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5월의 태양처럼 그러한 믿음이 빛날 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시인의 삶에 대한 인식은 사랑을 다시 찾아 나서는 희망의 한걸음입니다. 그의 언어는 허무하지만 아주 따듯한 시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았던 1960~1980년대의 우울한 유년시절과 부조리한 세계를 추억의 공간에서 시로 풀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로 시인은 암울한 시대와 개인적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극복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탑골공원 뒤편에 있는 작은 극장에서 첫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보지 못하고 혼자 죽었습니다. 《입 속의 검은 잎》 해설을 쓴 비평가 김현은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내적 상처를 반성·분석하여, 그것을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이 맞다면 기형도는 좋은 시인임이 분명하겠지요. 


기형도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하여 1989년 3월 7일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심야영화를 보다 뇌졸중으로 죽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등단했으며 강한 개성을 담은 독특한 시들을 발표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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