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72주년 제헌절입니다.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5일 뒤인 7월 17일, 조선왕조 건국일에 맞춰 헌법이 공포되었고 이날을 우리는 제헌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제헌절은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과 더불어 5대 국경일에 속합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 "시대변화에 발맞춰 헌법을 개정할 때가 되었"다면서 "코로나 위기를 한고비 넘기는 대로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자고 했습니다. 아울러 "정치권의 이해가 아닌 오로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시대 정신을 반영한 새 국가 규범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헌법은 항구불변의 가치를 담은 약속이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국민의 요구에 부합해야 하며, 더 많은 권익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출처 - 뉴시스

 

7월 17일 과거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84년 전인 오늘,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정권을 잡은 공화진영에 맞서 국민진영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소련이 공화진영을 지원한 반면 파시즘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진영을 지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 양상으로 비화했고,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내전으로 약 50만 명이 숨지고 스페인의 국토가 황폐해졌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장군은 총통의 지위를 꿰차고 공화파를 학살했습니다. 그러고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파시즘 독재정치를 이어갔습니다.

 

출처 - Magnum Photos / © Robert Capa ©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 당시 〈어느 인민전선(공화군) 병사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해 싸우다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쓰러지는 공화파 병사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착한 덕분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사진으로 로버트 카파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누렸지만 한편으로 사진을 조작했다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Amical de Mauthausen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Benito Bermejo

 

이와 달리 자신이 찍지 않은 사진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 있습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의 주인공 '프랑시스코 부아'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있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친위대나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 나치의 앞잡이)에 의해 자행된 '비자연사 죽음'을 속이기 위해 나치는 사진을 조작했습니다. 이런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된 프랑시스코 부아는 조작된 일련의 사진 원본 필름을 빼돌렸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하여 나치 지도자들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아울러 그의 노력을 통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가 부각되었죠.

 

 

오늘은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번역하신 문박엘리 님과 인터뷰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시스코 부아'와 '스페인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Q 안녕하세요? 생각비행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들께 간략히 소개 부탁합니다.

A 안녕하세요.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번역한 문박엘리입니다. 서울에서 대학교 졸업 후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일반회사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고요, 지구와 인간과 우주 만물의 연계, 그리고 역사 등 다방면에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사와 그 유산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 말기의 유럽 정세와 오늘날에 이르는 영향까지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Q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그래픽 노블'입니다. 장르의 특성과 함께 출판계에서 그래픽 노블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해주시죠.

A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은 대개 문학적 구성과 특성을 지닌 작가주의 만화를 가리킵니다. 영어의 '코믹스'와 일본의 '망가'와 한국의 '만화'보다 무게감과 진지함이 부여된 듯한 이 용어는 1960년대 이후 널리 쓰이게 됩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탄탄한 스토리와 구성으로 전개되는 만화 부분과 그 만화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인물과 사실을 설명하는 사료 부분으로 이루어져 전형적인 그래픽 노블에 속합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프랑스어권 만화는 오랫동안 유럽 만화 시장을 지배해왔는데요, 특히 그래픽 노블 영역은 1960년대 이후 크게 번창했습니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그래픽 노블을 포함한 프랑스 만화 업계는 최근 10년 동안 매출이 20% 증가했으며 프랑스 출판 시장에서 일반 문학과 청소년물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만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로 인정받았고 만화 전시회가 점차 대중적인 인기와 전문가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빠트릴 수 없는 축제가 1974년 이래 매년 프랑스 앙굴렘에서 개최되는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만화 페스티벌 중 하나로 매년 1월 말에 열리는데요, 이 축제에서는 프랑스는 물론 세계 각국의 만화와 관련 영상물이 전시되고, 다양한 강연회와 상영회, 시상식 등이 열립니다. 이 축제를 찾아오는 전 세계 만화 애호인들과 관련 종사자들과 기자들의 수가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Q 넷플릭스에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책과 영화는 어떻게 다른지요?

A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스페인 여성 영화감독 마르 타르가로나(Mar Targarona)가 연출한 작품으로, 2018년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프랑시스코 부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참상과 나치의 만행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특히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프란츠 치라이스 소장이 아들의 생일 파티에서 시중을 들던 포로들을 죽이는 장면은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합니다. 실제로 치라이스는 아들 생일 파티에서 40여 명의 포로를 살해합니다. 프랑시스코가 빼돌린 실제 사진들이 마지막에 나오면서 끝나는 영화는 여러 사건을 두서없이 나열한 듯해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스페인 시나리오 작가인 살바 루비오와 스페인 만화가 페드로 콜롬보가 합작하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책이 영화보다 한 해 앞서 2017년에 출간되었죠.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매된 이 책은 만화계 인사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만화의 경우, 실존 인물인 프랑시스코 부아를 중심으로 수용소 사진 빼돌리기와 전쟁 후 그 사진의 용도를 드러내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영화보다 한층 탄탄한 플롯으로 전개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주인공의 내레이션은 독자가 주인공의 심리에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적절한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영화보다는 책이 재미와 감동을 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Q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이 부분을 말씀해주시고, 이후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시죠.

A 스페인 홀로코스트는 종전 후 일반 대중에게 대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전후 사학자들의 우선 관심사도 되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 참전국이 아니었기에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수많은 스페인 포로가 희생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 후 강력한 독재체재를 구축하고 1975년 종신 때까지 스페인의 총통을 지낸 프랑코 장군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스페인 포로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홀로코스트는 사실상 프랑코 정권과 나치의 합작물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기원은 1936년 7월 17일(84년 전 오늘이군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로 발발한 스페인 내전이라고 봅니다.

왕당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원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스트 세력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파에 맞서 싸운 이들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을 비롯한 공화파 사람들이었습니다.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에서 패한 공화파의 상당수가 망명길에 오르는데, 당시 프랑스로 망명한 이들만 50만 명에 달합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거나 레지스탕스와 연대하는 방식으로 나치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나치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Amical de Mauthausen

 

이 수용소는 책에 나오듯 노역으로 인한 절멸수용소로 분류된 지옥이었습니다. 서류상 입증된 수만 거론하자면 4816명의 스페인 포로가 이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스페인 공화파 포로들은 1945년 해방 이후 대부분 프랑스를 비롯하여 제3국으로 제2의 망명을 해야만 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끝내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처럼 두 번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을 만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프랑시스코 부아의 경우는 스페인 포로 대다수의 여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는 어떤 사람인가요?

A 1920년생인 프랑스시코 부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열렬한 공화파 가족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청소년기에 스페인 사회주의청년연합당(JSU)의 일원이었던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파 군대에 입대하여 싸웠습니다. 패전 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억류되기까지 부아의 운명은 앞서 말씀드린 스페인 공화파 참전 포로들과 비슷합니다. 그는 1941년 1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된 이래 해방 때까지 신원확인국에서 사진사로 일했습니다. 

 

© Amical de Mauthausen

 

특이한 점은 부아가 수용소 내 나치의 만행을 담은 사진을 빼돌리는 데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 나치 상관들과 관계가 원만했다는 사실입니다. 나치가 사진사로서 부아의 실력을 인정했음은 기록에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밝고 사교적이었던 그의 성품이 한몫을 한 것 같습니다. 종전 후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약했던 그는 1951년 7월 파리에서 31년이 채 안 되는 생애를 마칩니다. 그의 사후 현실화된 스페인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스페인 홀로코스트 관련 참고자료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관련국(프랑스, 독일 등)에서 생존자와 유가족 대우에 관한 후속 조치들이 시행되었습니다. 2017년 프랑스 정부는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 시장이 주재하는 안장식 행사와 함께 프랑스시코 부아의 유해를 파리 시내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치했습니다. 올해는 프랑시스코 부아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얻은 질병으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넋을 기리고 생전에 파시즘에 맞서 맹활약한 젊은 영혼을 기억하는 행사가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Q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다양한 인물이 있었지만, 신원확인국 책임자인 ‘파울 릭켄’이라는 인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존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는데요, 그는 어떤 일을 했고 프랑시스코 부아와 어떤 관계였나요? 

 

© Amical de Mauthausen

 

A 파울 릭켄은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신원확인국 책임자였습니다. 신원확인국에서 사진 현상을 담당했던 프랑시스코 부아의 직속 상관인 나치였죠. 릭켄은 부아의 업무능력을 높이 샀습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의 미학'을 부아에게 강변하는 것은 끔찍하긴 하지만 릭켄의 정신세계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릭켄이 촬영했던 수용소 생활과 포로들의 사진들은 훗날 부아가 수용소 밖으로 빼돌려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나치 전범들의 행적을 증언하는 증거자료로 제출됩니다. 그 사진들과 부아의 증언을 통해 수용소 내 만행이 드러났고 관련 나치 전범들의 죄가 입증되었습니다.

 

 

Q 책을 번역하면서 특히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지요.

 A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고 책의 사료 부분에 사진 한 장으로 소개된 인물인 카를로스 그레이키(Carlos Greykey)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피부색과 복장이 일반적인 수용소 포로들과 달라 의아하게 생각하다 곧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카를로스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유일한 흑인 포로였습니다. 수용소 나치 친위대원들은 그에게 호텔 웨이터 복장을 입히고 식사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수용소에 힘러와 같은 나치 고관이 방문하면 카를로스는 '식인종 아비의 자식이지만 스페인에 살던 흑인'으로 소개되기도 했어요. 굴욕적이었겠지만 견뎌내야 했습니다. 살인적인 채석장 노역으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포로들의 평균 생존 기간이 6개월에서 1년을 넘지 못했는데, 카를로스는 식사 시중을 하면서 수년을 버틴 끝에 살아서 해방을 맞이했거든요.

 

1941년 수용소 입소 당시 나치 친위대원은 수건으로 그의 피부를 문질러댔다고 합니다. 흑인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카를로스가 검댕이를 덮어썼다고 생각한 거죠. 그가 흑인임을 확인한 나치는 카를로스를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1925년 출간된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 의하면 유대인만이 아니라 흑인도 열등한 존재로서 아리아인 혈통을 오염시키는 위험한 인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카를로스가 나치 장교의 질문에 독일어로 대답했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즉각 처형을 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는 스페인어와 독일어 외에도 카탈루냐어, 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습니다. 191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의대생으로 재학 중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공화파로 참전했고 패전 후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스페인 공화파 참전용사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망명 후에도 반파시스트 전쟁을 프랑스 편에서 이어가다가 결국 독일 나치에게 체포되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어 사진 속의 모습으로 나치 친위대원들의 식사 시중을 들게 된 것이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프랑코 총통 치하인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는 프랑스에 두 번째 망명을 했고 몇 년 후 프랑스에 귀화해 결혼을 하고 자녀도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방 후 초기 카를로스는 수용소 생존자들의 정기 회합에 참석했으나 이후 발길을 끊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그의 자취는 상세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딸에 의하면 카를로스는 카바레에서 댄서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전기공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77년부터 1982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적도기니공화국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카를로스가 만년에 스페인 민주화가 아니라 적도기니공화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다는 기록은 그의 부모님이 스페인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페르난도 포(Fernando Pó)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포는 19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적도기니공화국에 속한 지역입니다.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한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ías Nguema)의 독재정치는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Teodoro Obiang)의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2대 대통령이 된 테오도로 오비앙은 1979년 이래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적도기니공화국은 독립 이래 현재까지 독재정권 치하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된 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책의 주인공도 아니고 심지어 만화에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인 카를로스 그레이키에 대한 소개를 길게 한 까닭은, 엄청난 영광도 명예도 동반하지 않은 삶의 여정을 처음에는 연민의 감정으로 띄엄띄엄 추적하는 와중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부색과 출신의 불리함과 아마도 풍족하지 못했을 생계 방편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회피하지 않았고, 잔혹한 차별의 세상과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가치에 따른 투신을 죽을 때까지 거듭했습니다. 그는 험난하게 굴곡진 세월을 선의로 뚜벅뚜벅 살아낸 영웅이었습니다.     

 

 

Q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3분의 2가 그래픽 노블의 형식으로 된 만화이고, 3분의 1은 사료와 해설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 상황과 실재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데요, 유심히 보신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Amical de Mauthausen


A 개인적으로 마리-클로드 바이앙-쿠튀리에(Marie-Claude Vaillant-Couturier)가 나오는 부분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946년 1월 28일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그녀가 증언을 마친 뒤 프랑시스코 부아가 증언을 했는데요, 이 책에서 그 상황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를 보고 그 세밀함에 감탄했습니다. 또한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증언을 마치고 난 그녀가 부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작가에 의한 상상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을 넘어 초당적인 명성과 존경을 받은 여성 정치인의 인품과 매력이 잘 드러난 부분이라 자꾸 보게 됩니다.

 

 

Q 짧은 인터뷰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를 독자들께 간략히 말씀해주시죠.   


 A 7월 17일 오늘은 한국의 제헌절이자 스페인 내전 발발일입니다. 스페인 내전 때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은 패전 후 스페인 밖에서도 파시즘과의 전쟁을 이어갔고, 그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스페인 홀로코스트로 희생되었습니다. 비단 스페인과 유럽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파시즘의 위협은 오늘날에도 지구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스페인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지구상에서 재발하지 않으려면 먼저 그것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배경과 진행에 대해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민지 통치와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군부독재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한국의 20세기 역사와 닮은 점이 많은 스페인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형식의 입문서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동시 투표가 최종적으로 무산되었습니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뿐 아니라 안철수, 홍준표 등 모든 대선 후보가 자신의 가장 큰 공약으로 내세웠던 개헌이 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4일 청와대 주재 국무회의에서 국민투표법이 원래 기간 안에 결정되지 않아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의 동시 실시가 무산되고 말았다며, 이번 지방선거 때 개헌을 하겠다고 국민께 다짐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며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동시 실시 무산에 대한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의 SNS에도 정리된 형태로 올라왔습니다.


출처 – 문재인 트위터


지방선거와 개헌 동시 실시가 무산된 이유는 국회의 방치 때문입니다. 6.13 지방선거와 개헌 동시투표 준비를 위해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시한인 4월 23일까지 국민투표법 개정안 처리가 되었어야 합니다.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현행 국민투표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치를 수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절대 개헌저지선을 확보한 자유한국당이 반대 입장이고 두루킹 사건으로 여야 대치가 심화되면서 국회는 사실상 혼수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때문에 1987년 이후 31년 만에 개헌을 이룰 호기를 놓친 셈이 되었죠.


출처 - 한겨레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드물게 강한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국민의 뜻을 모아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개정안을 국회가 심의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 당시 각 당의 대선 후보였고 지금은 당의 지도부인 사람들이 앞다퉈서 개헌을 약속했다가 이제 와 없던 일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게다가 법을 만들 의무와 권리가 있는 국회가 위헌 판결을 받은 국민투표법을 3년이 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입니다.


출처 - 문화일보


당의 입장에 따라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정 사항을 가지고 토론을 하던가 국회안을 자체적으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게 상식적인 국회의 모습이겠죠. 하지만 자유한국당을 위시한 이번 국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국회에서 논의하여 국민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의무라면 국민이 개헌안에 접근할 기회조차 막은 것은 심각한 직무유기 아닐까요? 자유한국당이 그렇게도 두둔하는 대기업 지도부가 자기 할 일을 방치하고 다른 일을 일삼는다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한중일 개헌 삼국지 – 어떤 나라 꿈꾸나? : http://ideas0419.com/820


생각비행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이번 대통령 개헌안은 헌법 전문부터 많은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6월 항쟁으로 이뤄진 개헌 이후 30년 동안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국민만을 주체로 한 기본권 조항은 외국인 200만 명 시대에 뒤처졌다는 지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성평등과 환경, 안전 등등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성인이 되어 성인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30년 전 청소년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꼴입니다. 특히 이번 개헌안은 박근혜를 탄핵하고 촛불혁명이 내포한 정치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결과물이었습니다. 개헌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큰 시기였는데 적절한 기회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맙니다.


출처 - 연합뉴스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야3당은 개헌논의를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야3당은 공동 입장문을 통해 "촛불 혁명을 완성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시작된 개헌 기회가 거대 양당의 정쟁에 가로막혀 좌초 위기에 처했다"며 "이른 시일 내에 국회 주도의 개헌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국회에서의 개헌 논의가 다시 논의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배합니다. 야권에서는 9월 개헌론을 이야기하지만 지방선거 이후 정계개편설이 나오는 가운데 선거 결과에 따라 여야 모두 조기 전당대회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아 정상적 개헌 논의가 이어지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죠.

 

자유한국당이 그간 국회를 공회전시킨 이유는 뻔합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6월 지방선거, 그후 총선까지 지금 이대로라면 자기네 밥줄이 끊어지게 생겼으니 뭐든지 물고 늘어지려는 겁니다. 지난 3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5당 대표 오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4월 말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 합의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정상회담 장소를 판문점 평화의 집으로 북한이 먼저 제안했다고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대표단 방북에 대해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6월 지방선거용 아니냐며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구시대적 안보 프레임으로 평화적인 남북관계의 여정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였습니다. 대통령 발의 개헌안을 보이콧했던 것도 자기네에게 불리한 국면을 피해보겠다는 심산이었죠. 하지만 촛불혁명을 이뤄낸 국민이 얕은 홍 대표의 생각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출처 - 국민일보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4월 전쟁설'을 운운하던 자유한국당의 예측과 루머가 무색하게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 남북 정상이 4월 27일 2018밀리미터 크기의 탁자 앞에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2018년 두 정상 간 거리를 탁자의 크기로 상징한 것이죠. 자유한국당의 발악이 무색하게 남북화해의 분위기는 이미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평화는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행보의 결과입니다. 개헌을 향한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여야 합니다. 역사적인 개헌을 가로막기 위해 국회를 공회전시킨 주범과 당을 심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켰던 주구인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분명히 보여줘야 합니다.

21세기 중국에 황제가 등극했습니다. 현재 중국 주석인 시진핑 얘기라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중국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전인대에서 99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중국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중국 국가 주석은 두 번 이상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이 삭제되었기 때문인데요. 이 개정헌법으로 시진핑은 임기인 2022년을 넘어 영구집권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셈입니다. 100페센트 찬성이라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와 기권을 끼워 넣어 99퍼센트 찬성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공산당 농담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 SBS 유튜브


한편 시진핑은 헌법 서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마오쩌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인 독재의 폐해를 막기 위해 마오쩌둥의 교시로 마련한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는 이번 개헌으로 와해되었죠. 반부패 작업 명목하에 장쩌민, 후진타오 등 전 주석들의 측근도 모두 제거했고, 국가감찰위까지 설치가 완료되면 측근 감시는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사실상 시진핑 주석의 1인 체제가 들어서게 되어 명실상부한 21세기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 원로들과 작가, 학자, 언론인 사이에서 질타가 쏟아졌지만 서슬 퍼런 검열에 잠잠해졌습니다. 이제는 관변학자들이 시진핑을 살아 있는 보살이라고 찬양하는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출처 - 이데일리


소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기 위한 일본의 개헌 드라이브도 만만찮습니다. 이번에 나온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개헌안, 즉 내각제인 일본으로서는 일본 정부 개헌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안 역시 일당 독재로 국민들을 옥죄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평화헌법인 9조의 개정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헌법 9조에 의해 공식적으로 군대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죠. 그러니 9조를 개정하여 일본 국방군을 신설하는 것이 현재 일본 아베 정권의 지상과제이며, 이를 위해 내놓은 개헌안에는 긴급사태발동권, 문민통제 철폐, 개헌안 발의 요건 완화 등등 군에 대한 족쇄를 풀어버리는 안건이 대부분입니다. 아울러 이에 반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주의적인 조항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특히 21조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는 표현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공익 혹은 공적 질서를 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 목적과 결사에 대한 단서 조항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표현의 자유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득이하게 제한하는 경우 단서 조항을 붙이더라도 자유와 인권의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마저 무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개정안 3조인 일본 국민은 국기 및 국가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보면 아베 정권을 위시한 자민당 일당 독재가 제한하고자 하는 표현의 자유와 그 목적, 결사에 대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중국과 일본이 개헌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드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정부 개헌안이 나왔습니다.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가 지난 13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헌법개헌안 초안을 보고했습니다. 여기에는 대통령 4년 연임제 채택, 수도조항 명문화, 대선 결선투표 도입, 5.18 민주화운동 등의 헌법 전문 포함, 사법 민주주의 강화, 국회의원 소환제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초안을 토대로 국회 통과 가능성을 고려해 현실적인 개헌안을 마련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대선 당시 공약대로 6.13 지방선거 투표일에 개헌 국민투표를 부치려면 늦어도 이번 달 21일까지는 개헌안을 발의해야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이번 초안에는 3.1 운동과 4.19 민주이념에 이어 5.18 민주화운동, 부마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등이 헌법 전문에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촛불혁명은 빠졌죠. 시민혁명으로서의 성격은 분명히 있으나 지난해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은 역사적 평가가 완료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정부 헌법개정안의 주요 내용으로 눈여겨볼 부분은 미국과 같은 식의 대통령 4년 연임제를 채택하고 선출된 대통령이 민주적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결선투표제를 도입한 점입니다.

 

출처 - 뉴스1


정부 헌법개정안은 삼권분립의 권한을 합리적으로 재조정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국회의 권한을 확대하고 실질화하는 한편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데 초점을 뒀다고 하죠. 또한 지방분권이 새로운 국가질서임을 천명하기 위해 자치분권의 이념을 헌법에 반영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경제민주화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토지의 특수성을 명시해 사회경제적 불평등 완화를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여러 요소가 도입되었습니다. '국민'에서 '사람'으로 기본권을 확대했고 새 기본권도 신설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국적이 있는 국민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보장입니다.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의 비례성을 강화하는 원칙을 명시했고, 무엇보다 국회의원 소환제와 국민 발안제를 포함했습니다. 국회의원 소환제는 국민이 투표로 국회의원을 파면할 수 있는 제도이며, 국민 발안제는 국민이 직접 법률안이나 헌법개정안을 발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출처 – SBS 유튜브


지난해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7.9퍼센트가 개헌에 찬성했습니다. 아울러 국민은 헌법 전문에 추가해야 할 시대정신으로 5.18과 촛불혁명을 꼽았습니다. 국민이 선호하는 정치 형태는 상당히 많은 국회의원이 좋아하는 내각제는 아니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한계가 많은 선거구제에서 현재 수준의 국회의원들이 중심이라면 내각제가 도입된다 한들 옆 나라 일본의 열화된 짝퉁에 불과할 겁니다. 사실상 일당 독재의 유사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우기는 나라가 될 뿐입니다. 그 점을 대한민국 국민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출처 – JTBC 유튜브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초까지 시민 2000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조사 결과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86.4퍼센트였습니다. 그런데 개헌 쟁점을 숙의한 후 토론을 거친 뒤에는 개헌 찬성 입장이 93.4퍼센트로 늘었다고 합니다. 개헌 시기와 관련해서는 6월 지방선거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응답이 과반을 차지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한중일 동아시아 3국 중 이미 중국과 일본은 개악이라 불러 마땅한 개헌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시민이 주축이 된 촛불혁명으로 헌법정신을 유린한 권력자를 법으로 심판한 우리나라만이라도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개헌안을 만들어 '사람'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72주년인 올해 광복절 기념식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이명박근혜 정권의 역사 왜곡에 대항해 쐐기를 박았습니다.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라고 언급한 것이죠.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있었던 1919년을 대한민국의 건국절로 본 것인데요.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천명을 바탕으로 한 당연한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그런데 자유한국당의 류석춘 혁신위원장은 1948년 건국을 견강부회해 1919년을 건국이라고 삼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반발했습니다. 1948년 건국과 1919년 건국 의지를 밝힌 것은 다른 말이라는 겁니다. 지난해 탄핵당하기 전 박근혜는 광복절 기념식에서 2016년은 광복 71주년이 아닌 건국 68주년이라는 발언을 해 건국절 논란을 일으킨 바 있었죠. 그런데 혁신위원장이란 사람이 아직도 그 얘기를 그대로 하는 걸 보면 박근혜가 탄핵당했어도 자유한국당의 혁신을 참으로 멀고 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 경향신문

 

자유한국당 류석춘 혁신위원장의 말은 조목조목 따져보면 결국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던 시절 했던 모든 말을 과거 박근혜의 말로 반박할 수 있었던 '박적박'의 재탕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른바 뉴라이트에서 주장하고 자유한국당을 위시한 극우파들이 주장하는 1948년 건국설은 그들이 재평가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이승만조차 확실하게 말이 안 된다고 남겨놓은 문서가 있습니다.


출처 - JTBC


이승만을 기념하는 우당기념관의 유물인 1919년 건국 통보문만 봐도 알 수 있죠. 이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일왕에게 보낸 문건으로,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일본에 알리는 문서입니다. 1919년 4월 23일 한국이 완전히 조직된 자주통치국가가 됐음을 일왕에게 공식적으로 통보하라는 한국민의 명령을 받고 이 문서를 보내니 일본은 대한민국이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주권국가임을 공식 인정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조약상 약속들은 무효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 의정원 기록에도 1919년 첫 회기를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뚜렷하게 기록했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이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1948년 기록에도 드러납니다. 1948년 7월 24일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밝혔습니다. 같은 해 9월 1일 나온 최초의 관보에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쓰여 있으니 대한민국 정부 첫 공식 기록으로도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고 밝힌 셈입니다. 뉴라이트가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도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는데, 1948년을 건국절이라고 하는 이들은 대체 무슨 논리를 내세우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전문을 보면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고 명백히 쓰여 있습니다. 1919년이 대한민국의 건립한 해이고, 1948년은 대한민국을 재건한 해라고 말이죠.


문서와 기록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극우파들은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국가의 3요소가 갖춰지지 않았으니 1919년은 건국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다른 나라의 예를 봐도 맞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국가가 국가의 3요소를 한꺼번에 갖춘 상태로 시작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기 때문입니다.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국가의 경우,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획득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 자체도 국제법적인 의미에서 건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글로벌이코노믹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미국만 해도 그렇죠. 미국이 영국에 독립을 선언한 1776년에 미국은 영토와 주권이 없었습니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시죠. 독립 선언 후 영국과의 전쟁, 프랑스와의 연합 등 여러 투쟁을 통해 7년 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때가 되어서야 조지 워싱턴이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독립선언일을 건국 시점으로 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이견이 없습니다. 자유한국당이나 뉴라이트의 논리대로라면 미국은 근거 없이 13년이나 건국일을 당겨쓰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말이 되는 얘깁니까? 시위 때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같이 들고나와 미국이 혈맹이네 미국 말을 들어야 하네, 하는 극우파들은 스스로 이승만뿐 아니라 미국까지 근본 없는 나라로 격하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렇듯 극우 세력의 건국절 논란은 자기모순으로 가득 찬,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둔 얄팍한 속셈을 드러냅니다.


출처 - 연합뉴스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친일의 역사는 만천하에 드러나 더는 감춰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2년 남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생각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대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고달프다는 인식부터 혁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못다 했던 친일 청산과 더불어 독립유공자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2년 후 광복절에는 건국절 논란처럼 우스운 얘기가 아니라 다음 100년을 내다보는 건설적인 토론이 벌어지길 기대합니다. 그동안 건국절 논란이 일 때마다 논의했던 생각비행 기사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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