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맛난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가족이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대화의 접점이 적어지고 맛난 음식을 준비하는 가사 노동을 여자들에게 전가되기 십상이며 집안에 나눌 재산이라도 걸려 있다면 명절이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기 쉽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세를 누릴 종가에서도 2018년 새해부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앙받는 영웅, 아니 성웅으로 불릴 정도의 위인인 이순신 장군의 집안에 큰 다툼이 벌어진 것이죠. 바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현충사의 현판이 화근입니다.


아산에 있는 현충사는 초임 군장교나 경찰 공무원이 임관되기 전, 불굴의 의지로 우리나라를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찾는 뜻깊은 공간입니다. 현충사에는 300년 역사의 숙종이 내린 현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6년 군부 독재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자신과 군부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곳 현충사에 자신의 친필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그 현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


그런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난중일기》의 소유주인 15대 맏며느리, 즉 종부가 이 박정희의 현판을 내리고 원래 있었던 숙종의 현판으로 교체해달라고 문화재청에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청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뒤로 미루자 2018년 들어 15대 종부는 박정희 현판이 내려질 때까지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합니다.

 

15대 종손에게 자손이 없었기에 현재 《난중일기》는 그 배우자였던 15대 종부에게 적법하게 상속된 유산입니다. 그렇기에 종부의 결정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친회는 현판 교체에 적극 반대하며 종부가 《난중일기》를 볼모로 사리사욕을 차리려는 속셈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일견 15대 종부의 입장은 민주주의 시민 사회의 당연한 요구로 보입니다. 독재자였던 박정희의 현판이 아직도 현충사에 걸려 있다는 것은 진보한 우리 사회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으며, 애초에 걸려 있던 숙종 사액 현판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가치와 정당성에서 빼어나기 때문입니다. 두 현판을 비교해서 보기만 해도 누구나 그 가치의 차이를 느낄 만합니다.


한편 종회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그들의 가치는 시대착오적이고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S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인터뷰를 한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 회장 이종천의 말을 들으면 대체 저런 사람이 21세기 한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죠.


◇ 김현정> 1966년에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그때.


◆ 이종천> 네. 그때 지어서 거기에 맞게 박 대통령이 현충사라는 현판을 썼는데.


◇ 김현정> 그렇죠.


◆ 이종천> 숙종만 임금인가, 박정희 대통령도 임금이요.


◇ 김현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 이종천> 박정희 대통령이 임금 아닙니까?


◇ 김현정> 대통령이 임금은 아니죠. 지금 군주시대가 아니니까.


◆ 이종천> 임금이나 마찬가지죠.


◇ 김현정> 이제 대통령이라는 거는 선거로 뽑힌 거니까, 민주주의 제도에서. 임금은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리더란 의미 말씀하시는 거예요, 국가의 리더?


◆ 이종천> 그래서 그 현판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그 현판을 내리려면 현충사를 다 부숴야 돼요. 박정희 대통령이 해 놓은 걸 현판만 내리면 됩니까? 다 부숴야죠.


◇ 김현정> 현판을 내리려면 현충사도 부숴라? 그거 너무 극단적인 주장 아니세요?


◆ 이종천> 여보세요, 최순선 얘기만 듣고 그런 얘기를 자꾸만 하는데. 현판을 내리려면 현충사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 놓은 현판이나 현충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그 현충사에는 숙종이 내린 현판은 보이지도 않아요. 너무 작아서.


현충사 현판 "숙종것으로 교체" VS "박정희도 임금인데.."(노컷뉴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이후에도 박정희 찬양에 열을 올리는 종회 회장은 박정희 현판을 내릴 거면 현충사까지 다 때려부수라며 예의 없는 인터뷰를 일관하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기에 이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독재자를 떠받드는 노추를 드러낸 겁니다.


출처 - 뉴스1


그러자 다음 차례로 인터뷰한 15대 종부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오염되어 온 면이 있으니 이 기회에 문화재청이 결단을 내려 숙종 사액 현판으로 현판을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무라이를 경배하며 술자리에서 매번 엔카를 불렀던 박정희가 왜색으로 치장해놓은 현충사도 이 기회에 복원해야 한다고 말이죠. 애초에 15대 종부인 자신이 상징적으로 소유권을 가진 건 맞지만 《난중일기》를 비롯한 충무공의 유물은 이미 1960년대부터 현충사에 위탁해 공공기관에서 관리를 해왔으니 《난중일기》를 볼모로 사리사욕을 채우려한다는 모함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사태만 놓고 보면 15대 종부의 발언이 이치에 맞습니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비롯된 적폐 청산의 차원에서도, 군부 독재 종식 차원에서도, 그리고 문화재 복원의 측면에서도 말이죠.


다만 종회의 비난이 거짓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실제로 15대 종부는 2009년에 사기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15대 종부는 2005년부터 충남 일대 토지를 매입해 건설사에 되파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모 씨에게 5억을 투자하면 배로 불려주겠다고 속여 투자금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구속될 당시 이미 13억이 넘는 빚을 지고 토지매입 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죠. 또한 같은 해 3월 빚 때문에 자기 명의로 돼 있는 현충사 충무공 고택 터 등을 경매 처분당했습니다. 자칫 현충사 고택 터가 무관한 남의 땅이 될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덕수 이씨 풍암공파 문중이 이를 되사서 겨우 막은 바가 있습니다. 15대 종부가 이번 현판 관련 건에 관해서는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있지만, 과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역사 바로 잡기를 위한 것인지는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깁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호부견자(虎父犬子)라더니 새해 벽두부터 가장 유명한 위인의 집안이 콩가루가 되어 싸우는 소식이 들려와 안타깝습니다. 이치는 명백하지만 어느 한편을 지지하기 힘든 이전투구로 보인다는 점에서 더 안타깝습니다. 하늘에 계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 부끄러운 후손의 모습이 누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올바른 역사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드러나는 일이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담은 영화에서 계엄군이 시위를 벌이는 광주시민을 사격하는 장면이 날조되었다고 반발하는 전두환 측 사람이나, 새해 벽두부터 12.28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를 짚기는커녕 외교기밀을 왜 공개했는가만 문제 삼는 등 말도 안 되는 발언으로 '혼수성태'라는 별명을 얻은 정치인도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혼이 비정상'이 아닌가 싶군요. 이들을 반면교사 삼아 2018년 한 해는 올바른 역사 인식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6월을 맞아 자연스럽게 6월 민주항쟁을 생각해봅니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인 6월 민주항쟁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1979년 10월 26일)으로 찾아온 '서울의 봄'이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짓밟히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수많은 시민이 떨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6월 민주항쟁의 경과는 저희가 일전에 소개한 <한국을 민주화 사회로 이끈 결정적 운동, 6월 항쟁>을 보시면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6월 민주항쟁 때 많은 대학생, 지식인, 시민이 신군부에 의해 고초를 당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1980년대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의 바람이었습니다. 그 바람 이면에는 민주주의를 외치다 죽어간 사람들의 피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물이 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도화선 삼아 일어난 6월 10일 국민대회에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민중의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최두석 시인

최두석의 <성에꽃>은 군사독재시대에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꽃은 개인의 힘으로 피울 수 없습니다. 나와 이웃, 우리가 모두 힘을 다할 때 비로소 피울 수 있는 꽃입니다. 그 꽃은 어렵게 피었다가 우리가 외면하면 이내 시들고 마는 아주 연약한 꽃입니다. 사람들은 그 꽃이 시들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절감합니다.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항쟁, 6.10 민주항쟁으로 움튼 꽃이 만개하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언론과 개인의 자유가 파괴되고, 공정하지 못한 노동환경으로 빈부의 차이는 나날이 극심해지는 반면 국민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기득권층의 욕심은 1970·80년대의 <겨울 공화국>으로 회귀하는 양상입니다.

제대로 피지 못하고 시들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꽃을 되살리려면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이 땅에 뿌려져야 할지 모릅니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선명해지는 '성에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에꽃>의 화자처럼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를 그리워하며 가슴 아픈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피눈물 나는 생활을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들을 그대로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6.10 민주항쟁의 정신을 다시금 되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두석

1956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 국어과와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에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대꽃》《임진강》《성에꽃》《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꽃에게 길을 묻는다》《투구꽃》 등이 있으면 평론집으로 《시와 리얼리즘》이 있다. 

리영희 선생(출처 : 위키피디아)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12월 5일, 어제는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7묘역에서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대한민국의 진보적 언론인이자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던 리영희 선생은 언론 자유를 신장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고양하는 일을 하면서 군사정권에 의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뜻은 아무도 꺾지 못했습니다.

생각비행은 리영희 선생 서거 1주기를 맞아 고인의 생애를 간략하게 돌아보면서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과 문제점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리영희, 자유언론과 민주주의의 투사

리영희 선생은 평안도 출신으로 고등학교 시절 상경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말미암아 숙식과 학비를 전액 지원해주는 한국해양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리영희는 여수·순천사건을 목격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에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근무하면서 국민방위군 사건을 접했습니다. 이때 리영희는 미군 고문단 장교와 함께 미군의 보급품을 빼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을 도왔습니다. 이후 거창 양민학살사건도 겪었는데요, 자신이 속한 부대인 11사단 9연대가 그 사건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국군 고위간부들의 부정부패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결국 제1공화국 정부에 대해 강한 혐오감으로 드러납니다. 

한국전쟁 이후 리영희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습니다. 1957년 《합동통신》을 시작으로 외신부 기자생활을 시작해, 이승만 독재에 대한 소식을 《워싱턴 포스트》에 익명으로 기고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지켜봤던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제1공화국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결과였습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진 후, 리영희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와 《조선일보》에서 외신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이때부터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는데요,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안 검토중〉이라는 기사가 반공법에 위반된다는 혐의로 구속된 일이 발단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반공법에 위반되었다는 근거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추진'이라는 국제회의 제안이 국익에 반하는 정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리영희가 5.16 군사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에 기고한 일에 대해 군사정부가 앙심을 품고 있다가 덜미를 잡은 것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출처 : www.life.com)

이후 리영희는 베트남전쟁 취재를 거부하여 《조선일보》에서 퇴직을 강요받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당시 언론들은 국가에서 보내주던 베트남전 취재를 다녀와 미군과 한국군을 미화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리영희는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직업적 양심과 훈련된 격식에 따라, 본 대로 있는 대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은 못 쓴다는 말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베트남전쟁 취재를 거부했습니다. 평소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리영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조선일보》는 그를 여러 한직으로 좌천시켜 결국 스스로 퇴직하게 했습니다. 

퇴직 후 외판원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다가 《합동통신》으로 다시 복직한 리영희는 언론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언론 관련 연구논문을 꾸준히 펴내는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에 정권 연장을 위해 3선개헌을 국회에서 변칙적으로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3선개헌을 막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빠진 민주진영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선언합니다. 이때부터 강연회와 좌담회, 성명서 발표, 인권탄압 사례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협의회 같은 각종 반독재 시민단체가 조직되었습니다. 

그해 10월, '64인 지식인 선언'이 발표됩니다. 선언문은 총통제 분쇄, 학원탄압 중지, 구속학생 석방, 대학생 강제 입영 중단, 대학 점령군인 철수 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선언에 언론인으로서 참여한 리영희는 언론계에서 강제 추방되기에 이릅니다. 이후 학생을 가르치는 강단에 섰지만, 리영희는 언론인으로서 독재정권을 끊임없이 비판할 뿐 아니라 곡학아세하는 언론인들을 향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이어지는 신군부 세력은 리영희에게 끊임없이 제동을 걸었고, 그의 고난의 시간은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진척되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 -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리영희 선생의 삶을 이렇게 압축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리영희라는 창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큰 줄거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창은 어떤 창인가? 투명한 창이다. 100% 투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리영희만큼 투명한 '인간 창'은 없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리영희는 순수 그 자체다. 이게 찬양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뒤집어 말해 보겠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에 관한 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물이었다.
'아사리판'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선 같이 따라서 미치거나 타락해야만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을 기할 수 있다. 선량한 보통사람들도 방어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는 그런 판에 물이 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리영희는 한사코 그런 최소한의 '방어'마저 거부했다. 미욱할 정도로 스스로 고난을 자초했다.
리영희는 아홉 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받고, 언론계에서 두 번 쫓겨나고, 교수 직위에서도 두 번 쫓겨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1012일에 이른다. 오로지 진실을 추구했다는 죄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렇습니다. 엄혹한 시절에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8억인과의 대화》 같은 책을 펴내고,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건에 참여해 논설고문을 지냈고, 방북취재를 추진하다 옥고를 치른 리영희의 삶을 보면 '순수 그 자체'라는 강준만 교수의 지적이 참으로 적절하다고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리영희라는 투명한 '인간 창'을 통하지 않고서 어찌 우리가 한국 언론사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리영희 선생은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소신을 지켰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는 리영희를 회유하고 협박하고 구속했지만, 그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개인적 신념을 지키며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참 언론인의 삶을 살아낸 리영희 선생이 오늘날 언론의 현실을 보면 얼마나 분개하실까요?

부끄러운 한국 언론의 현재

2011년 12월 1일 4개의 종합편성채널이 개국했습니다. 언론시장의 황폐화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날치기 통과된 미디어법에 대해 살아생전 리영희 선생은 '파시즘의 전조'라고 질타한 바 있습니다. 

종편 채널은 시작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강호동 야쿠자 연루" "김연아 앵커" 보도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4개 종편은 황색 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족벌 보수신문과 방송이 보이는 어이없는 행태는 더욱 가관입니다.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의 행태를 비판하기는커녕 KBS 뉴스는 '해외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 값싼 농산물을 먹게 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한미FTA가 가져올 위험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 등,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뉴스를 채워 문제가 되었죠. 

한편 MBC는 낙하산으로 부임한 김재철 사장이 〈W〉와〈후플러스〉 같은 간판 시사 프로그램을 폐지하고,〈PD수첩〉을 비롯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어이없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편향적인 뉴스를 내보낸 결과, MBC 로고를 보면 환영하던 시민이 이제는 MBC 기자의 취재를 거부하고 내쫓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꼼수다 오프라인 공연 포스터

기존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늘 새로운 대안언론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중에서도 2011년 4월 28일 팟캐스트를 통해 첫 방송이 공개된〈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나꼼수>는 자신들을 그저 잡담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잡담은 대중적 공감을 넘어 많은 시민을 거리로 나오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나꼼수>는 기존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않은 사회 이슈를 재미있으면서도 알기 쉽게 정리해주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대중적 전파력이 탁월한 새로운 비판적 여론형성 기제를 이명박 정부와 여권은 '괴담 유포자'로 지목하고 옥죄고 있습니다만,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나꼼수>에 민주언론상을 수여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여당, 거대 수구언론, 민심을 읽지 못하는 제도권 야당을 비롯한 기존의 권력집단을 향한 비판과 풍자로 국민의 눈과 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점을 인정한 결과입니다. 

기성언론과 수구언론은 <나꼼수>라는 대안언론의 출현을 보면서 자신들의 보도관행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비언론인 출신 진행자가 만드는 <나꼼수>가 기성 언론기관 종사자들의 보도보다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는 원인이 무엇인지 통렬한 자기반성도 해야 할 때입니다.

99대 1의 모순을 타파하는 정론을 바라며

최근 온 세계가 시끄럽습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시민이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금융권을 비롯한 사회의 부정부패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을 마련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유럽 각국에서도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로 말미암은 경제 파탄을 해결하라고 성난 시민이 나선 상태입니다. 우리나라도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고 한미FTA 비준 날치기 통과를 비판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과연 언론은 이를 제대로 다루고 있습니까? 일부 족벌신문은 1퍼센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도배된 뉴스를 내보내고 있으며, 종편까지 손에 넣은 이들이 방송까지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애플리케이션을 심의하는 전담팀을 신설하여 심의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에 비판적인 젊은층의 SNS 접촉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움직임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여러 글에서 지식인, 특히 언론인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고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회문화리뷰》에 실린 강연록 〈전환기 시대 민족 지성과 동북아 평화〉에서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문화·예술이 꽃필 수 없으며, 심지어 가치중립적이라고 하는 과학·기술도 발전하지 못합니다. 한 예로 문학을 들어봅시다. 노벨문학상이 한국(남한)에서 안 나온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활동이란 진정으로 자유로운 생각(사유·사상)이 보장되는 가운데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일본 정도의 사상적 자유의 분위기는 보장되어야만 인간 활동의 새로운 산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반공이라는 동앗줄로 꽁꽁 묶인 사회에서 노벨문학상이 어떻게 나올 것이며 자유로운 창작물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광적인 반공사상은 냉전주의와 하나가 되어서 휴머니즘을 왜곡하는 법입니다. 그것들은 다양한 인간 사상을 짓밟으면서 유일한 가치를 강요합니다."

리영희 선생은 시대의 우상을 타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우상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살았습니다.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곧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가려진 진실을 밝히는 일은 기자의 본분이요, 언론의 사명입니다.

수많은 언론인이 투쟁하여 이뤄낸 언론 민주화를 무효로 만들고 역행하는 이명박 정부의 독선과 아집을 비판할 대안언론이 앞으로 많이 생겨나야 합니다. 국민을 위하는 언론이라면 여당의 날치기에 침묵하고 영하의 날씨에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는 행태에 침묵해서야 되겠습니까? 1퍼센트의,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를 위한 언론이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는 이 시대에 고 리영희 선생의 삶을 돌아봅니다. 언론을 향한 시민의 감시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기입니다.

곧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주기가 돌아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생각비행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의 첫 책 《사랑의 승자》가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상을 담은 포토 에세이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앞두고 이 책을 출간했는데,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생각비행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는 말씀을 남긴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억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한국 정치사를 돌아볼 때 고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협박과 회유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 또 있을까요?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의 산 증인으로 납치와 감금을 당한 것도 모자라 사형수로 내몰린 인간 김대중. 그러나 갖은 고초를 이겨내고, 3전 4기의 도전 끝에 제15대 대통령이 된 그는 우리 시대의 양심이었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로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내는 등, 평생을 남북 평화협력과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살다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 현대사가 낳은 거목이기도 했습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단순한 ‘유화정책’이 아니라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바탕으로 평화통일을 이뤄내겠다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김대중을 남북관계를 화해와 공존으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 인식합니다. 인간 김대중. 그의 개인사는 이 땅의 역사와 함께 질풍노도 그 자체였습니다. 

일제식민지 치하의 유년 시절부터 좌우 대립, 분단, 남한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 유신독재, 민주화 투쟁, 10.26 사태, 5.18 광주민주화항쟁, 6월항쟁, 정계 은퇴, 대통령 당선, IMF 사태 극복, 6.15 남북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기 그의 인생은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는 말년에 이런 글을 일기로 남겼습니다.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 <마지막 일기> 2009년 1월 6일


2주기 추모행사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을 위해 2주기 추모행사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8월 18일(목)에 추도식이 있습니다. 그 밖에 추모 음악회와 출판기념회 등의 행사 소식도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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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도식
- 일시, 장소 : 8월 18일(목) 오전 10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관
- 식순 : 추도사, 김 대통령 육성 영상, 추모 노래, <김대중 연보> 헌정, 유족대표 인사
※ 추도식 후 김 대통령의 묘소로 이동, 헌화와 참배.

○ 추모음악회
- 일시, 장소 : 8월 17일(금) 오후 7시, 효창동 백범기념관 컨벤션홀
- 출연진 : 최선규 아나운서와 영화배우 오정해 씨 사회, 목포시립교향악단 및 합창단, 정은숙(소프라노),
  김철웅(바리톤), 신형원·안치환(가수), 신영희(국악인), 김정환(시인), 이명수(섹스폰 연주자) 등 출연

※ 추모기간 : 2011년 8월 10일∼8월 18일(9일간)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분향소가 마련되고, 추모사진전이 개최됩니다.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5층 김대중 대통령 집무실이 일반인에게 개방됩니다.

○ <김대중 연보> 출판기념회
- 일시 및 장소 : 8월 16일(화) 16:00,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

○ 추모사진전 ‘만남과 동행’
- 기간 : 8월 1일~31일(개막식 8월 1일 14:00, 김대중도서관)
- 장소 : 김대중도서관 지하 1층 컨벤션홀


비판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목에 항상 있다

2주기를 맞이하며 생각비행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억하며 예전의 언론기사를 한자리에 모아봤습니다. 《프레시안》과 《경향신문》이 비교적 잘 정리해두었더군요.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기사를 보시고 난 뒤 여러분도 다시 한 번 그분의 뜻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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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선 각계 인사를 직접 만나거나 혹은 그들의 글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을 돌아보는 기획을 진행했습니다. 〈김대중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총 32회에 걸쳐 연재된 이 기사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의 시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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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은 작년 김대중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이하여, 관련 기사를 묶어서 정리해놓았습니다. 《주간경향》에 게재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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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지만 생각비행도 《사랑의 승자》라는 책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조명한 바 있습니다. 아는 분은 알고 모르는 분은 모르는 책이죠. 판매량과 상관없이 이 책은 생각비행으로서는 뜻깊은 책입니다. 이 책으로 출판사로서 첫 비행을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사랑의 승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살아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 에세이집입니다. 저자 오동명 선생님이 기자로 활동하시던 때에 촬영한 김대중 대통령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담은 책이죠. 오동명 선생님은 《사랑의 승자》에서 인간 김대중을 노벨상을 탄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보다는 일상의 고단함에 지쳐 하품을 하고 정원 화초에 물을 주며 즐거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 김대중의 모습을 보고 싶은 분은 생각비행의 《사랑의 승자》를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비행은 김대중 전 대통령 2주기를 맞이하여 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일주일에 2회 정도 소개하겠습니다. 기대해주시고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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