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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리영희 선생 1주기에 돌아본 한국 언론의 현실

by 생각비행 2011. 12. 6.

리영희 선생(출처 : 위키피디아)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12월 5일, 어제는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7묘역에서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대한민국의 진보적 언론인이자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던 리영희 선생은 언론 자유를 신장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고양하는 일을 하면서 군사정권에 의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뜻은 아무도 꺾지 못했습니다.

생각비행은 리영희 선생 서거 1주기를 맞아 고인의 생애를 간략하게 돌아보면서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과 문제점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리영희, 자유언론과 민주주의의 투사

리영희 선생은 평안도 출신으로 고등학교 시절 상경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말미암아 숙식과 학비를 전액 지원해주는 한국해양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리영희는 여수·순천사건을 목격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에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근무하면서 국민방위군 사건을 접했습니다. 이때 리영희는 미군 고문단 장교와 함께 미군의 보급품을 빼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을 도왔습니다. 이후 거창 양민학살사건도 겪었는데요, 자신이 속한 부대인 11사단 9연대가 그 사건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국군 고위간부들의 부정부패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결국 제1공화국 정부에 대해 강한 혐오감으로 드러납니다. 

한국전쟁 이후 리영희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습니다. 1957년 《합동통신》을 시작으로 외신부 기자생활을 시작해, 이승만 독재에 대한 소식을 《워싱턴 포스트》에 익명으로 기고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지켜봤던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제1공화국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결과였습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진 후, 리영희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와 《조선일보》에서 외신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이때부터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는데요,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안 검토중〉이라는 기사가 반공법에 위반된다는 혐의로 구속된 일이 발단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반공법에 위반되었다는 근거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추진'이라는 국제회의 제안이 국익에 반하는 정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리영희가 5.16 군사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에 기고한 일에 대해 군사정부가 앙심을 품고 있다가 덜미를 잡은 것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출처 : www.life.com)

이후 리영희는 베트남전쟁 취재를 거부하여 《조선일보》에서 퇴직을 강요받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당시 언론들은 국가에서 보내주던 베트남전 취재를 다녀와 미군과 한국군을 미화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리영희는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직업적 양심과 훈련된 격식에 따라, 본 대로 있는 대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은 못 쓴다는 말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베트남전쟁 취재를 거부했습니다. 평소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리영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조선일보》는 그를 여러 한직으로 좌천시켜 결국 스스로 퇴직하게 했습니다. 

퇴직 후 외판원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다가 《합동통신》으로 다시 복직한 리영희는 언론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언론 관련 연구논문을 꾸준히 펴내는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에 정권 연장을 위해 3선개헌을 국회에서 변칙적으로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3선개헌을 막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빠진 민주진영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선언합니다. 이때부터 강연회와 좌담회, 성명서 발표, 인권탄압 사례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협의회 같은 각종 반독재 시민단체가 조직되었습니다. 

그해 10월, '64인 지식인 선언'이 발표됩니다. 선언문은 총통제 분쇄, 학원탄압 중지, 구속학생 석방, 대학생 강제 입영 중단, 대학 점령군인 철수 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선언에 언론인으로서 참여한 리영희는 언론계에서 강제 추방되기에 이릅니다. 이후 학생을 가르치는 강단에 섰지만, 리영희는 언론인으로서 독재정권을 끊임없이 비판할 뿐 아니라 곡학아세하는 언론인들을 향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이어지는 신군부 세력은 리영희에게 끊임없이 제동을 걸었고, 그의 고난의 시간은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진척되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 -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리영희 선생의 삶을 이렇게 압축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리영희라는 창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큰 줄거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창은 어떤 창인가? 투명한 창이다. 100% 투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리영희만큼 투명한 '인간 창'은 없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리영희는 순수 그 자체다. 이게 찬양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뒤집어 말해 보겠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에 관한 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물이었다.
'아사리판'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선 같이 따라서 미치거나 타락해야만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을 기할 수 있다. 선량한 보통사람들도 방어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는 그런 판에 물이 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리영희는 한사코 그런 최소한의 '방어'마저 거부했다. 미욱할 정도로 스스로 고난을 자초했다.
리영희는 아홉 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받고, 언론계에서 두 번 쫓겨나고, 교수 직위에서도 두 번 쫓겨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1012일에 이른다. 오로지 진실을 추구했다는 죄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렇습니다. 엄혹한 시절에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8억인과의 대화》 같은 책을 펴내고,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건에 참여해 논설고문을 지냈고, 방북취재를 추진하다 옥고를 치른 리영희의 삶을 보면 '순수 그 자체'라는 강준만 교수의 지적이 참으로 적절하다고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리영희라는 투명한 '인간 창'을 통하지 않고서 어찌 우리가 한국 언론사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리영희 선생은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소신을 지켰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는 리영희를 회유하고 협박하고 구속했지만, 그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개인적 신념을 지키며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참 언론인의 삶을 살아낸 리영희 선생이 오늘날 언론의 현실을 보면 얼마나 분개하실까요?

부끄러운 한국 언론의 현재

2011년 12월 1일 4개의 종합편성채널이 개국했습니다. 언론시장의 황폐화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날치기 통과된 미디어법에 대해 살아생전 리영희 선생은 '파시즘의 전조'라고 질타한 바 있습니다. 

종편 채널은 시작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강호동 야쿠자 연루" "김연아 앵커" 보도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4개 종편은 황색 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족벌 보수신문과 방송이 보이는 어이없는 행태는 더욱 가관입니다.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의 행태를 비판하기는커녕 KBS 뉴스는 '해외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 값싼 농산물을 먹게 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한미FTA가 가져올 위험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 등,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뉴스를 채워 문제가 되었죠. 

한편 MBC는 낙하산으로 부임한 김재철 사장이 〈W〉와〈후플러스〉 같은 간판 시사 프로그램을 폐지하고,〈PD수첩〉을 비롯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어이없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편향적인 뉴스를 내보낸 결과, MBC 로고를 보면 환영하던 시민이 이제는 MBC 기자의 취재를 거부하고 내쫓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꼼수다 오프라인 공연 포스터

기존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늘 새로운 대안언론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중에서도 2011년 4월 28일 팟캐스트를 통해 첫 방송이 공개된〈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나꼼수>는 자신들을 그저 잡담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잡담은 대중적 공감을 넘어 많은 시민을 거리로 나오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나꼼수>는 기존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않은 사회 이슈를 재미있으면서도 알기 쉽게 정리해주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대중적 전파력이 탁월한 새로운 비판적 여론형성 기제를 이명박 정부와 여권은 '괴담 유포자'로 지목하고 옥죄고 있습니다만,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나꼼수>에 민주언론상을 수여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여당, 거대 수구언론, 민심을 읽지 못하는 제도권 야당을 비롯한 기존의 권력집단을 향한 비판과 풍자로 국민의 눈과 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점을 인정한 결과입니다. 

기성언론과 수구언론은 <나꼼수>라는 대안언론의 출현을 보면서 자신들의 보도관행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비언론인 출신 진행자가 만드는 <나꼼수>가 기성 언론기관 종사자들의 보도보다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는 원인이 무엇인지 통렬한 자기반성도 해야 할 때입니다.

99대 1의 모순을 타파하는 정론을 바라며

최근 온 세계가 시끄럽습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시민이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금융권을 비롯한 사회의 부정부패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을 마련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유럽 각국에서도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로 말미암은 경제 파탄을 해결하라고 성난 시민이 나선 상태입니다. 우리나라도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고 한미FTA 비준 날치기 통과를 비판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과연 언론은 이를 제대로 다루고 있습니까? 일부 족벌신문은 1퍼센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도배된 뉴스를 내보내고 있으며, 종편까지 손에 넣은 이들이 방송까지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애플리케이션을 심의하는 전담팀을 신설하여 심의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에 비판적인 젊은층의 SNS 접촉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움직임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여러 글에서 지식인, 특히 언론인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고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회문화리뷰》에 실린 강연록 〈전환기 시대 민족 지성과 동북아 평화〉에서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문화·예술이 꽃필 수 없으며, 심지어 가치중립적이라고 하는 과학·기술도 발전하지 못합니다. 한 예로 문학을 들어봅시다. 노벨문학상이 한국(남한)에서 안 나온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활동이란 진정으로 자유로운 생각(사유·사상)이 보장되는 가운데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일본 정도의 사상적 자유의 분위기는 보장되어야만 인간 활동의 새로운 산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반공이라는 동앗줄로 꽁꽁 묶인 사회에서 노벨문학상이 어떻게 나올 것이며 자유로운 창작물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광적인 반공사상은 냉전주의와 하나가 되어서 휴머니즘을 왜곡하는 법입니다. 그것들은 다양한 인간 사상을 짓밟으면서 유일한 가치를 강요합니다."

리영희 선생은 시대의 우상을 타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우상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살았습니다.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곧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가려진 진실을 밝히는 일은 기자의 본분이요, 언론의 사명입니다.

수많은 언론인이 투쟁하여 이뤄낸 언론 민주화를 무효로 만들고 역행하는 이명박 정부의 독선과 아집을 비판할 대안언론이 앞으로 많이 생겨나야 합니다. 국민을 위하는 언론이라면 여당의 날치기에 침묵하고 영하의 날씨에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는 행태에 침묵해서야 되겠습니까? 1퍼센트의,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를 위한 언론이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는 이 시대에 고 리영희 선생의 삶을 돌아봅니다. 언론을 향한 시민의 감시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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