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말랐던 땅에 촉촉이 비가 내렸습니다.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비 한 방울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말로만 상생을 외치는 대기업과 정치권의 외침 속에서 중소기업과 서민의 삶은 언론조차 외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혁명을 외치던 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가끔 4.19 혁명 때, 1980년대 민주화운동 때, 군사정권 이후에 왜 이 사회를 바르게 바꾸지 못했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젊은 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며 무엇인가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4.19 혁명 시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 거리를 메웠던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먹고살기에 팍팍한 일상을 하루하루 견디는 기성세대가 되어 지금 현실을 더욱 목마르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러한 원망은 곧 '나'를 향하는 화살이 되어 비수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세상을 향해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는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이런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대의 순수함와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혁명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이가 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나'를 보게 합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미래를 꿈꾸기보다 노후를 걱정하고 변화를 바라기보다 개인의 안녕만 바라는 부끄러운 일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나이보다 생각이 더 늙어버린 것은 아닌지, 건방지게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욕만 하는 것은 아닌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읽으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붐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철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는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시인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어'를 구사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언어를 그대로 시로 옮겨 표현하기 때문에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역시 일상적 언어를 사용하고 특별한 비유법을 쓰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시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순수했던 젊은 날의 기억과 현실에서 타협하는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겹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겠지요. 

시는 보이는 표현도 중요하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내면의 일렁임이 있을 때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는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1979년 처녀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벌써 31년이 지났습니다. 1990년 성탄절에 친구한테서 선물로 받은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이 시를 읽고난 이후 김광규 시인의 시집을 모두 사서 읽었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현실의 뒤틀린 모습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기주의와 속물근성을 단순화하여 보여줍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찔림'을 느끼게 합니다. <나>라는 시에서 시인은 상황에 따라 아들, 아버지, 동생, 형, 남편, 오빠, 조카, 아저씨, 제자, 선생, 납세자, 예비군, 친구, 적, 환자, 손님, 주인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냐고 말이지요. 현대 철학은 근대적 주체가 아닌 '관계적 주체'를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여러 역할 속에서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성찰하고 있습니다. <버스를 탄 사람들>이란 시에서는 대학가에서 최루탄 냄새가 나는 젊은이들이 올라타도 아무말 하지 않는 시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범한 시민이라 할지라도 그저 실없는 구경꾼이나 행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낯익은 그들에게서 동지애를 느끼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게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시인의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광규 시인은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며 주변 인물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면서 잊고 지내는 모습과 현실의 뒤틀린 모습을 이야기를 하듯 표현합니다. <나의 자식에게> 라는 시에서 " 위험한 곳에는 아예 가지 말고/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중략).../지진이 일어나는 날은 /집에만 있는 것도 위험하고/아무 짓을 한해도 의심받는다/조용히 사는 죄악을 피해/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평온하게 살지 마라/무슨 짓인가 해라/아무리 부끄러운 흔적이라도/무엇인가 남겨라"라고 말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사는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현실은 언제나 올바르지 않을 수 있으며, 그른 것을 보고만 있어도 죄악이 됩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세상을 바꾸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연 바뀐 세상이 왔을 때 살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운동경기의 구경꾼으로 세상을 관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동경기에서 반칙이 일어날 때 심판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구경꾼들은 소리를 지르고 야유를 보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구경꾼입니까? 아닙니까?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를 준비가 됐습니까?

김광규

1941년 1월 7일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했다. 괴테 인스티투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서독으로 유학가서 뮌헨대학교에서 수학했고 현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1975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했으며 첫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으로 제1회 녹원문학상을, 1983년 두 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김수영문학상을, 다섯 번째 시집 《아니리》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2003년 여덟 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로 제11회 대산문학상을, 2007년 아홉 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제19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시집 《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하루 또 하루》, 시선집으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으로《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육성과 가성》, 번역서로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로렐라이》등이 있다.


첫눈이 내렸지만 휴일 잘 보내셨는지 여쭙기가 무서운 주말이었습니다. 23일 군인 두 명과 민간인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평도 포격전의 상처는 다 아물지도 못했고, 28일 일요일부터 시작된 한미연합훈련 시에는 북측에서 또 한 번 포성이 들려와 또다시 대피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소리로만 그치고 대피령도 곧 해제되었지만요.

주말 동안 인터넷에서 재밌지만 의미심장한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23일 연평도 포격전을 처음으로 알린 연합뉴스의 사진을 원본으로 좌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색감과 프레임 등을 바꿔버린 1면 사진들입니다. 《경향신문》《한겨레》《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일간지와 원본이 된 《연합뉴스》의 사진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네요.

원본과 비교하자면 《한겨레》의 경우 원본보다 다소 연기가 덜해 보이고, 《중앙일보》의 경우는 마치 핵전쟁이라도 일어난 거 같아 보입니다. 사실 언론사도 기업으로서의 속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자사 신문의 구독자 취향을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압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언론사별로 편집 기조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요.
그럼에도 이런 중대한 사건까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현실만을 보려 하고 또 그런 현실만을 골라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일에 언론이 앞장서는 행태는 최소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노출한 프레임을 통해 그 의도대로 현실이 확대, 재구축 되도록 하는 행위가 과연 언론과 기자의 본분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사태 해결을 위한 객관적인 현실 파악에도 혼란을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위 사진뿐 아니라 각 언론사의 기사 역시 각자 자기 입장을 대변하기 급급한 글이 대부분이었죠.

타벨은 록펠러의 삶을 조사하면서 한 개인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록펠러를 오직 선한 존재나 혹은 악하기만 한 존재로 한정하는 일은 전기적인 죄악 그 자체였다. 타벨은 록펠러의 생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면서 때로 인정사정없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사업적 성취를 선이나 악이라는 감상적인 틀에 맞춰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타벨은 록펠러에 대해 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을 '실로 대단한 스탠더드 오일 The Legitimate Greatness of the Standard Oil Company'이라고 붙이기도 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어떻게 한 명의 저널리스트가 독점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쓰러뜨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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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비행이 출간한 책《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 나온 위 내용처럼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가 견지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은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정보 전달이 아닐까요? 그것을 토대로 토론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건 바로 독자들의 몫일 겁니다. 그러니 적어도 독자를 현혹하는 일이 그들의 임무는 아니겠지요. 특정 계층의 나팔수라 불리기 싫다면, 우리나라 언론은 냉정함을 지키며 한 번쯤 초심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휴일
에 인터넷을 하다가 재밌고 생각해 볼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연애가 들어가는 드라마를 보며 빼놓을 수 없는 바로 그 단어, ''와 '그녀'에 관한 이야기죠.

'그녀'가 국적불명의 단어라는 것 아시나요?
( http://www.kormedi.com/news/culture/korealanguage/1198998_3007.html, KorMedi 뉴스 )

원래 우리나라 말에 그녀란 말은 없었고 성별 구분 없이 라는 3인칭 대명사를 두루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어 쉬She를 번역한 일본어 카노죠彼女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 말에 그녀라는 국적불명의 단어가 생겼다고 합니다.

상당수 국어학자가 그녀를 퇴출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많은 신문사에서 그녀라는 표현을 될 수 있으면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는 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던 그와 그녀의 구분이 언젠가부터 그로 통일되어 가는 것 같네요.

일본어의 잔재와 영어가 범람하는 지금 세상에 바르고 고운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특히 글로 책을 만드는 저희 생각비행 같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더더욱 말이죠. ^_^

다만 여기서 현실과의 괴리가 생기는 일이 문제일 겁니다. 기사에도 실린 국립국어원의 입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국립국어원은 ‘’라는 대명사 홀로 남녀를 공통적으로 지칭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현실 속의 풍경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그’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주로 남자를 가리킬 때 쓴다고 돼 있다. ‘그녀’는 주로 글에서,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여자를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로 돼 있다.

국립국어원의 답변: ‘그’와 ‘그녀’의 쓰임을 모두 인정할 수 있다. 다만 ‘그’는 남성대명사, ‘그녀’는 여성대명사와 같은 대립구조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삼인칭 대명사 ‘그’를 쓸 수 있다. 다만 남자를 가리킬 때 ‘그’가 많이 쓰이고 있으며 ‘그녀’는 사전 뜻풀이에 나오는 대로 주로 ‘글’에서 앞에서 이미 말한 여자를 가리킬 때 쓰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단어 하나에서도 첨예하게 드러나는군요.^_^;; 아무래도 언어는 언중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실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듯 그녀가 틀린 말이라거나 국어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 바로 세우기를 염원하는 지식인들은 "그녀라고 쓴 문장 어디에든 그를 대체해 넣어보면 하나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얼마 전에 모 일간지에 난 동성애 반대 광고로 유명세를 치른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생각해 볼까요? 이 드라마에는 이성 커플도 나오고 동성 커플도 나옵니다. 이때 모든 대명사를 올바르게 그로 통일했다고 하면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어제 가 키스했다."

©SBS. All rights reserved

여태까지 흔히 있었던 드라마를 떠올린다면 주인공 남녀 커플의 키스라고 바로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남남 커플의 키스도 등장하는 드라마라면 한 문장으로는 어느 커플이 키스를 했는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현재로서는 뉘앙스도 미묘해지죠. 이상윤(남)과 남상미(여)가 키스를 했다는 건지 이상우(남)와 송창의(남)가 키스를 했다는 건지 말입니다.

©SBS. All rights reserved

이런 현상은 사회가 다변화할수록 가속화할 것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다양해지고 사랑의 형태도 다양해지면서 대명사 하나로는 그 뜻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그와 그녀뿐 아니라 모든 단어에 점차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현실이상 사이에서 연애만큼 복잡한 그녀의 사정, 무엇이  정답일까요?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 이는 생각비행 출판사 전체가 아닌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폭염으로 녹아 내릴 것 같은 주말에 모두 건강하셨나요?^_^;;
야외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할 정도로 더운 날씨였기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극장을 택했습니다.

영화는 장안의 화제 <인셉션>. 이미 관객 520만 명을 넘겨 2010년 국내 개봉 외화 중 흥행 1위라지요?


아트 블럭버스터란 이름이 붙은 영화답게 발상부터 현실에 구체화한 모습까지 입이 안 다물어 지더라고요. 무중력 상태의 전투와 클라이막스에서 연속으로 터지는 싱크로나이즈드 킥은 더운 여름을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시원했습니다^_^

볼거리도 많았지만 가장 주목하고 싶었던 건 주인공 코브의 대사였습니다.

가장 까다로운 기생충이 뭘까요?
박테리아? 바이러스?
아니면 회충?

그건 바로 <생각>입니다
회복력과 전염성이 매우 강하죠.
일단 한번 고착되면,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위대한 업적의 씨앗이 되며 한편으로는 편견의 단초가 되기도 하는 <생각>. 실제로 남의 꿈속에 자유자재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그럼 현실에서 그 <생각>의 씨앗을 심는 건 무엇일까 궁리해봤습니다.

그건 바로 이 아닐까요? 좋은 책은 읽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위대한 업적의 씨앗이 되고, 나쁜 책은 읽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갖은 편견과 오류들을 강화시키죠. 그리고 책으로 말미암은 씨앗들은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 방향이 좋은 쪽일 수도 있고 나쁜 쪽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바꿔버리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같아요. 이 정도면 책을 현실의 인셉션이라고 부를 법 하지요?


이때 올바른 현실인식을 도와줄 토템이 <소통>이 아닐까 합니다. 각자 책을 읽고 쌓은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서로 나누다 보면 훌륭한 발상은 더 고차원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니까요. 소통은 헛된 망상이나 나쁜 생각을 현실에 붙들어 매 더 이상 폭주하지 못 하도록 하고, 서로를 더 잘 알게 하니 신뢰가 쌓이게 될 겁니다.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의 현실이 나쁠 리는 없겠죠?

사이토가 일어나자마자 약속을 지킨 것도 비록 꿈속이었지만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쌓인 신뢰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어요^_^

영화에도 나오죠.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야 인셉션이 완벽해진다고.

책과 소통과 긍정의 힘. 생각비행은 인셉션에서 이런 덕목들을 발견했습니다^_^

인셉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2010 / 미국,영국)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타나베 켄,조셉 고든-레빗,마리안 꼬띠아르,엘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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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일 하고 싶은 말은 오늘이 월요일이란 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어요ㅠ.ㅠ 지금 앉아 있는 사무실 의자에서 미끄덩 하면 그걸 킥으로 주말에 낮잠을 자던 제가 깨어나지 않을까요?ㅠ.ㅠ

오늘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날이 좀 선선해졌네요. 간식은 특별히 맛있는 걸로 먹고 월요병을 이겨내요 우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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