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 즉 김용균 특조위가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김용균 씨가 운송설비 점검을 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는 비극이 있었죠. 2016년 서울 구의역 안전문 사고에 이어 2018년에도 이런 사고가 일어나자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비롯해 산업 현장의 안전규제를 대폭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이른바 김용균법이 국회에서 통과하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출처 - SBS


이날 특조위 조사결과 발표에 의하면 고 김용균 씨 사고의 핵심은 발전 5사의 발전정비 사업 외주화와 민영화에 따른 원·하청의 책임 회피와 하청 노동자에게 위험이 집중된 구조였습니다. 특조위는 원청 및 하청은 모두 안전 비용 지출이나 안전 시스템 구축에는 무관심했다며, 김용균 씨 사망사고가 발생하기 전 석탄 운반용 컨베이어 설비 개선이 논의됐지만 이뤄지지 않았고, 이처럼 설비 개선이 무시된 건 원·하청의 책임 회피 구조 때문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실제로 특조위 조사에 의하면 원청인 서부발전은 김용균 씨 등 하청 노동자의 작업에 대해 실질적인 지휘 및 감독을 하면서도 하청 소속이라는 이유로 안전에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된 컨베이어에 대해 사고 11개월 전 원청인 서부발전에 설비개선을 요구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죠. 김용균 씨가 소속됐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도 사고가 날 위험이 있던 컨베이어 설비에 대해 자사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치했고요.


출처 - 오마이뉴스


사고 이후 원·하청 회사들은 김용균 씨가 근무수칙을 위반했기에 사고가 일어났던 것처럼 얘기했지만, 이번 조사 결과 김용균 씨는 작업지침을 충실하게 지켰기 때문에 숨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는 이제야 아들이 누명을 벗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출처 - MBC


가장 어이가 없었던 부분은 원청인 서부발전이 부서별 평가를 위해 만든 문서에서 드러났습니다. 산업재해로 사람이 숨졌을 때 발전사 직원은 –1.5점, 하청 직원은 –1점, 발전시설 건설 노동자가 숨지면 –0.2점이라며 사람 목숨을 3단계로 구분한 지표를 작성해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지표는 발전소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보령화력 발전소는 더 노골적으로 지표 제목부터 ‘신분별’ 감점계수입니다. 본사 직원이 숨지면 12점, 하청 직원이 사망하면 4점을 감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청직원 3명 목숨을 정직원 1명의 목숨으로 친다는 건데 대체 이걸 작성한 자들은 인간이기는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규직 목숨값이 비정규직의 3배라니 현대판 신분제이자 노예제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김용균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발전사에서는 12건의 산업재해가 발생했지만 이 중 6건은 은폐됐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이 밖에도 특조위는 김용균 씨의 작업이라면 월급이 원래 446만 원이 돼야 하는데 절반인 212만 원을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청업체가 노무비의 절반을 가져갔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 하청은 부당한 이익을 늘렸고 원청인 서부발전은 감독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전력산업의 공공성을 훼손했습니다. 결국 외주화와 민영화가 작업 현장의 위험을 증폭시킨 셈입니다. 더군다나 특조위 조사 과정에서 직원들 사이에 회사 측에 유리한 모범답안이 도는 등 특조위 조사를 원·하청이 집요하게 방해했음도 공표했습니다. 이에 특조위는 산업부와 고용부에 강력한 감사를 요구한 것도 밝혔습니다. 특조위는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발전산업의 외주화와 민영화의 철회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권고했습니다.


출처 - 뉴시스


지난 16일 대구의 대표 놀이공원인 이월드에서는 한 아르바이트생이 근무 중 롤러코스터에 다리가 끼어 한쪽 다리를 잃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대구 달서구청은 사람 다리가 잘린 사건에도 안전검사자료 공개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이월드와 법리적 다툼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겁니다. 정보 공개 청구도 이월드의 의견청취를 받아야 가능한지 살필 수 있다며 답변을 피했는데요. 시민단체들은 공익 앞에서 지자체가 업체 눈치를 보며 자료 공개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사고를 은폐하려 드는 것이라며 일제히 비난했습니다. 달서구청이 이월드에 대한 관리, 감독 부실 혹은 유착을 숨기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는 이유입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김용균법이 시행되었다지만 하청, 아르바이트의 처우는 현실적으로 변한 게 없습니다. 빈익빈 부익부는 돈뿐만이 아니라 안전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돈과 안전으로 나뉜 대한민국은 점점 계급제가 공고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출처 -경향신문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기 전에 죽음의 외주화를 멈춰야 합니다. 이대로 둔다면 그 죽음이 결국은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을 기억하는 1주기 추모식이 지난 지난 5월 28일 있었습니다. 하루 12시간 2교대라는 살인적인 근무에 쫓긴 스무 살이 채 안 된 하청노동자의 유품 가운데에는 컵라면 하나가 있었습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그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죠.

 

출처 - 오마이뉴스

 

사실 김군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참사가 아니었습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하청사회》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군 사망사고 1년 전 강남역에서도 비슷한 사망사고가 있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스크린도어 점검은 2인 1조로 진행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김군처럼 한 사람이 담당하고 있었죠. 서울메트로의 스크린도어 점검 업무를 수주한 하청업체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극도로 인력을 축소한 상태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2인 1조 점검이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구의역 지하철 사고와 관련한 기본 근로 조건을 보면, 49개 역사의 스크린도어를 관리하는 직원은 6명으로 1명당 5개 역을 담당하는 셈입니다. 하나의 역을 점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개 두세 시간인데 반해 하루 평균 고장 신고는 40여 건에 달했습니다. 여름철과 겨울처럼 온도가 급격히 변하는 계절에는 최대 하루 200여 건 가량의 신고가 접수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지만, 서울메트로는 유사한 안전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며 비정규직 근로자 개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서울시와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구의역에서 김군 혼자 스크린도어 점검 작업을 하고 있을 당시 서울메트로에서는 김군이 작업 중이라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청사회에서는 힘없는 을들에게 이러한 사고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갑이 비용 절감을 위해서 시행하는 외주화란 결국 ‘위험의 외주화’를 포함하거나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청년 김군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서울시에서 8월까지 서울교통공사 등 투자출연기관에서 근무 중인 무기계약직과 기간제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개선했다는 게 고작 고용기간만 연장하고 처우는 비정규직 그대로인 무기계약직이어서, 정규직도 아니고 비정규직도 아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중규직'이라는 비아냥도 있었죠.

출처 - 경향신문

 

'위험의 외주화'는 지하철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도처에는 위험을 하청업체로 떠넘기는 외주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1주기 추모 행사가 있던 지난 5월 1일에는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타워크레인이 넘어지면서 노동자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사망한 작업자 6명은 모두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이었고, 중경상을 입은 25명 역시 대부분 협력업체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정규직 근로자가 휴식하는 법정공휴일에 하청업체 근로자들은 쉬지 못하고 근무하다 참변을 당한 것이죠. 또한 5월 20일에는 인천공항에서 변전설비 정기점검을 하던 부산지하철공사 소속 간접고용 비정규직 근로자 3명이 감전사고로 크게 다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우리 사회 노동의 현주소가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재난의 현장에 본청의 정규직은 존재하질 않습니다.

 

출처 - JTBC


첨단산업에 속하는 스마트폰 제조 현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된 삼성전자, LG전자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젊은이 6명이 업체의 관리 소홀과 보건 조치 미흡으로 생산공정에서 쓰는 독극물인 메탄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시각을 잃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 노동자는 비정규직이 아니라 불법 파견이기까지 했습니다. 앞날이 창창한 20대가 시력을 잃은 것만이 아나라 심한 경우 뇌손상까지 입었다고 합니다.

 


출처 - JTBC

 

지난 6월 9일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총회에서는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실무그룹이 조사한 국내 대기업들의 인권 침해 현황을 담은 보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유엔 측은 메탄올 피해자 사례와 노조 탄압 등을 언급하며 원청 대기업들이 인권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습니다.

 

6명의 노동자가 시력을 잃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사이 본청의 정규직들은 과연 어떻게 지냈을까요? "이게 나라냐?" 싶을 정도로 별탈 없이 지냈습니다. 삼성중공업 타워크레인 사건의 경우 크레인 신호수로 일한 1명만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을 뿐 원청업체 관련자에 대한 영장은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스마트폰 공장 메탄올 실명 사건의 1심 판결은 불과 일주일 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 중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6명이 눈을 잃고 뇌 손상을 입었지만 불법 파견과 메탄올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실명의 책임이 있는 업체 사장까지 모두 집행유예와 수십 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불법 파견사업주들도 집행유예에 끽해야 벌금 100만 원이 다였습니다.

 

6명이 앞을 보지 못하는 채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제대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이상한 노동 현실이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이기에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제도와 장치를 불합리한 규제라고 우기는 기업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뉴시스


지난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50회 산업안전보건의 날 기념식 자리에서 영상메시지를 통해 제도는 물론 관행까지 바꿀 근본적 개선 방안을 찾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산업 현장의 위험을 유발하는 원청과 발주자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국민이 납득할 때까지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는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외주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원청과 발주자의 책임을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긴 하나, 이런 내용은 다른 정권에서도 한 적이 있습니다. 말보다 실행이 중요하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산업재해를 당하는 노동자 중 하청업체 노동자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인 만큼,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가 '사람이 먼저다'라는 그들의 슬로건을 실행으로 증명할 때입니다.

 

갑질사회, 대한민국

 

지난 6월 25일은 한국전쟁 67주년이었습니다. 이 땅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과 이름 없던 작은 나라를 위해 참전하여 희생한 세계 각국의 영령들을 기리는 날이죠. 한데 그 누구보다도 이분들의 뜻을 기리고 실천해야 할 대한민국 군의 현실은 자랑스럽지 못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한국전쟁 기념일 다음 날인 지난 26일 이한열 기념관에서 군인권센터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경남 지역 39사단장인 문 소장이 공관병, 운전병 등 병사들을 대상으로 갑질을 일삼은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문 소장의 갑질은 가관이었습니다. 지난 3월 술을 마신 뒤 심야에 공관으로 간부들을 데리고 들어와 공관병에게 술상을 차리라고 지시하고는 공관병의 뺨과 목 부위를 때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취침 중인 병사를 깨워 술상을 차리게 한 것도 심각한 문제이고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할 군의 지휘권자가 새벽에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만취한 상태로 병사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니 징계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 식구 감싸기에 바쁜 육사 마피아들은 문 소장이 병사의 뺨에 손을 대긴 했지만 때린 것은 아니라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며 수사는커녕 징계위원회에 회부조차 하지 않았죠. 


문 소장의 갑질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운전병을 개인 기사처럼 써서 임무와 상관없는 민간인을 만나러 갈 때도 수시로 불러냈습니다. 또한 그는 새벽에 공관 보일러 담당 장병을 불러 보일러 작동 확인을 시키더니 추운 이유가 뭐냐고 따졌습니다. 온도를 올렸으나 원인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장병에게 폭언을 쏟아낸 문 소장은 다음 날 아침에 보일러 담당 장병에게 해안 경계를 보내버리면 정신 차리겠느냐는 위협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밖에 문 소장은 자신의 대학원 과제를 대신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거나 담배를 피울 때 당번병에게 곁에서 재떨이를 들고 있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머니투데이


이 뿐이 아닙니다. 짜장면 배달을 시켰는데 철가방에 넣어서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를 공사판 노가다 취급했다며 부하에게 욕설을 퍼부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애초 저따위 인성으로 어떻게 별을 달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런 심각한 인성의 소유자에 대해 육군본부는 구두경고를 했을 뿐 사실상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아 문제가 심각합니다.


문 소장의 행동을 보면 장군에게 과연 공관병과 당번병, 운전병이 꼭 필요한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직급에 따라 당연히 있는 국가공인 사노비 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업무상 필요하다면 월급도 많이 받는 장성급이 스스로 필요한 만큼 고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당번병, 공관병 제도는 아예 없애거나 큰 틀을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아울러 육사끼리 제 식구 허물을 덮어주는 군 내부의 적폐 청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참고로 미군은 본인 돈으로 고용하는 형태라고 합니다. 왜 국방의 의무를 지는 청년들을 사노비처럼 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출처 - JTBC


대한민국 남성 중 군대를 갔다 오신 분들 가운데 황당한 사례를 경험하지 않은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징병제를 채택해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하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정상 군대는 애증의 대상입니다. 특히 사회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에게 집단적으로 가해지는 부조리와 갑질의 향연은 이상한 군대 문화를 내재화하여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 젖어 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군대는 원래 다 그래." "군대 더러운 게 어제오늘 일이야?"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라 이번에야말로 군대 내부에 잠재한 부조리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알베르 카뮈도 말한 바 있습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말입니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에 하는 갑질, 교수가 조교에게 하는 갑질, 회사 상사가 부하에게 하는 갑질, 아파트 단지에서 택배 기사들에게 벌이는 갑질 등등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갑질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도됩니다. 최근 서울 중랑구의 한 아파트 단지 우편함에서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반대합니다'라는 내용의 전단 수십 장이 발견되고 벽보가 붙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가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방침을 세우자 이에 반대하는 이들이 행동에 나선 겁니다.

 

출처 - 울산매일

 

그런데 경비실 에어컨 반대 추진자들의 전단과 벽보 내용에 대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말라"며 에어컨 설치를 찬성하는 의견을 개진하는 글을 붙인 주민도 있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여러분께서 쓴 글이 경비아저씨들께 그리고 글을 읽는 주민들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생각해 보셨느냐"면서 "경비 아저씨들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그늘 하나 없는 주차장 한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경비실에 지금까지 에어컨 한대 없었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주민은 "공기 오염이 걱정되신다면 댁에서 하루 종일 켜두시는 선풍기 끄시고, 수명 단축이 걱정되신다면 운동을 하시고,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이 걱정이라면 분리수거 잘 지켜달라"고 충고했습니다.

 

출처 - 세계일보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이 대기업의 '갑질' 규제를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위아, 그리고 피자업계 선두권인 미스터피자가 그 대상입니다. 현대위아는 2013년부터 3년 동안 최저가 낙찰을 받은 하도급업체에 24차례에 걸쳐 납품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은 혐의가 드러났습니다. 이런 갑질로 현대위아는 연 매출 7조 원대에 달하는 회사로 성장했는데요, 공정거래위원회는 현대위아를 검찰에 고발하고, 3억 60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한편 박근혜 정부에 의해 좌천됐다가 문재인 정부에 의해 부활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첫 수사 대상으로 미스터피자를 지목했습니다. 미스터피자는 정우현 회장의 친인척이 관여한 업체를 중간에 끼워 넣어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비싼 값으로 치즈를 강매한 의혹을 받고 있죠. 지난 지난 21일 미스터피자 본사를 압수수색한 검찰은 회장 자서전 강매, 비자금 조성, 본사 책임의 광고비를 가맹점에 떠넘긴 의혹 등 다각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정우현 회장은 지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사옥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사과한 뒤 회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출처 - 시사포커스

 

패션잡화 브랜드 CM을 운영하는 성주디앤디의 김성주 공동 대표이사 또한 올해 초 하도급업체들의 납품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당해 갑질 논란이 일자 최근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죠. 그리고 20대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은 최호식 호식이두마리치킨 회장 또한 직을 내려놓았습니다. 6월 들어 3명의 오너가 추문 및 갑질 논란으로 줄줄이 물러난 셈이 되었습니다. 

 

 

하청사회, 대한민국

 

우리 사회에서 갑이 사회적 부를 움켜쥐게 된 까닭은 을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을 쥐어짜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갑질이 가능한 이유는 '하청'이라는 특수한 계약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원래 하청(subcontract)이란 일의 일부 혹은 전부를 위탁받는 상호계약이며, ‘갑’과 ‘을’도 계약거래 당사자 양쪽을 일컫는 명칭일 뿐입니다. 그러나 양자가 평등하거나 대등하지 않기에, 대개 계약은 일거리를 주는 원청인 갑에게 유리한 반면 일거리를 받는 하청인 을에게는 불리합니다. 이 때문에 흔히 갑은 우위에 있는 자로, 을은 지위가 낮은 자로 인식되죠. 생각비행이 최근 출간한 책, 《하청사회》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서 문제점을 고민해보겠습니다.


계약 조건상 유리한 위치에 있는 갑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을에게 부당행위를 합니다. 원청과 하청 사이에 널리 알려진 부당행위 또는 '불공정 하도급거래'에는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 구두발주, 하도급대금 부당감액 등"이 있습니다. '갑질'은 단지 갑이 '우위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하위에 있는 을을 '밟고 서는 것'을 포함합니다. 갑은 갑질을 통해 스스로의 우월한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궁극적으로 더 많은 지대 또는 이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출처 - 《하청사회》


하청사회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갑은 계속해서 갑의 위치를, 을은 계속해서 을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죠. 달리 말하면, 갑과 을의 불평등한 관계가 지속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하청사회는 존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갑은 어떻게 해야 계속해서 갑이 될 수 있을까요? 갑의 지위를 견고하게 지키거나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갑과 을 사이의 불평등이 점차 줄어든다면 갑으로서의 특권과 특혜도 점차 약화되겠죠. 따라서 갑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되 그에 따르는 을들의 불만을 무마해야 합니다. '낙수효과 이론'은 그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위 그림이 표현하고 있듯이 낙수효과란 고소득층의 소득 증대가 소비 및 투자 확대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저소득층의 소득도 증가하는 효과를 가리킵니다. 낙수효과 이론의 지지자들은 고소득층이나 대기업의 수중에 먼저 돈을 채우면 중력의 법칙에 따라 가난한 사람에게도 그 혜택이 흘러내려 온다고 설명해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그림처럼 '부자 감세'는 부유층의 지출 증가와 투자 증가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을에게 돌아갈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예언합니다.

출처 - 《하청사회》

 

과연 낙수효과로 빠른 경제성장의 선순환을 이루게 될까요? 갑들은 낙수효과를 반복해서 말하지만 실제로는 낙수효과를 차단하거나 지연하면서 갑의 위치를 확고히 지켜왔습니다. 경제학자들 또한 낙수효과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부자들은 감면된 세금만큼의 현금을 재투자하며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금을 확보하거나 자산에 투자했을 뿐이죠. 2016년 5대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370조 원으로 10년 만에 약 3배나 증가했습니다. 사내유보금이 많다는 것은 기업이 이익을 남긴 뒤 투자를 하지 않은 채 그저 '곳간'에 차곡차곡 채워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출처 - 《하청사회》

 

갑들은 '낙수효과'를 얘기하면서 을들의 불만을 억눌러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경제의 선순환은커녕 빈부의 차가 날로 확대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갈수록 더 많은 빚을 떠안는 악순환이 이어졌죠. 위의 그림을 살펴보시죠. 맨 위 칸의 와인잔 3개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사이에 화살표를 넣으면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도급을 주고받는 하청관계가 그려집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갈수록 맨 위 칸의 와인 양이 줄어드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도급관계, 즉 외주 혹은 하청관계에 있는 갑과 을의 처지를 설명해줍니다. 와인의 양은 외주 단계를 거칠수록 줄어드는데, 줄어든 양으로 아래 잔을 채워야 하는 을로서는 인력 활용도를 극대화하거나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죠.


화물 운송의 다단계 하청구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화물운전기사들은 2003년, 2008년, 2012년에 파업한 이력이 있습니다. 거듭된 화물연대 파업의 근본 원인으로, 화주와 운송회사, 운송노동자로 연결되는 화물운송의 다단계 하청구조를 꼽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화물운송노동자가 제대로 운임을 받지 못하고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 《하청사회》

 

위 표를 보시죠. 40ft(freight ton, 운임톤) 컨테이너로 부산―서울 구간을 왕복 운송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출입업체(화주)가 대형 운송회사에 123만 원을 지급해야 합니다. 대형 운송회사는 이 가운데 27만 원가량을 가져가고, 운송 업무를 알선업체에 맡기게 되죠. 알선업체는 수수료 명목으로 운임의 약 10퍼센트인 10만 원가량을 챙기고, 이를 다시 영세 운송사나 소규모 알선업체에 넘깁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도 10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8만 원을 수수료를 챙깁니다. 결국 실제로 운반 업무를 맡는 화물 노동자가 받는 운임은 최종적으로 78만 원으로, 수입업체(화주)가 지불하는 돈의 63퍼센트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당한 구조를 파타해야 하건만 이 시대의 을들은 성과주체로서 성공도 실패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고 책임이라 믿으며 끊임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게 됩니다. 을들은 학교나 회사 같은 조직에서 성적이나 성과로 서열을 매기는 무한경쟁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집단 전체가 그저 맹목적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고 마는 아프리카의 스프링폭스라는 산양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을'이 옆에 있는 다른 '을들'을 마주 보고 함께 조직을 이루거나 연대한다면, 그래서 을들이 질주를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하청사회는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청사회》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하청사회로 변모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분절화되고 개인화된 관계를 어떻게 청산하고, 원청과 하청 사이의 책임 있는 관계와 연대의 끈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갑질사회와 하청사회를 살아가는 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최근 언론, 방송을 통해 보도되는 갑들의 행패를 더는 좌시하지 않고 을들의 단단한 연대를 통해 갑들이 만든 시스템의 부조리를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합니다. 서두에서 인용했던 카뮈의 말을 다시 언급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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