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가을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과 단풍, 낙엽의 계절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이런저런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최근에 편지를 쓴 기억이 있습니까? 휴대전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메일, 메신저 등이 익숙한 시대입니다. 종이에 정성껏 펜으로 꾹꾹 눌러 편지를 써본 지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부는 이때, 편지나 엽서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이메일이라도 편지 형식으로 누군가에게 진솔한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건 어떨까요?

가을편지
                    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는 분이라면 이 시의 감흥을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편지나 엽서를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내기 어렵다면 이메일로 편지의 형식을 갖춰서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누군가의 그대가 되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면 스산한 가을 저녁에 외로운 밤을 보내진 않을 테니까요.

<가을편지>는 시인 고은이 쓴 노랫말에 약관의 미대생인 김민기가 곡을 붙이고 샹송 가수 최양숙의 목소리로 1972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입니다. 그 이후로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했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듣다 보면 당장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대인가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대이길 바라나요?’
현대인은 직장이나 각종 모임 혹은 온라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이 가을에 누군가를 그대로 생각하고 편지를 써보세요. 여러분이 바로 아름다운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호승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하지만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말입니다. 요즘 연인들은 예전처럼 편지로 소통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편지보다는 전화나 문자, 메신저 등으로 즉각적으로 소통합니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답문자가 오지 않거나 통화가 되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일이 잦습니다. 설레는 시간도 짧아졌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에서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은 꽤 길어집니다. 그리움의 눈물도 흘렸지만 원망보다 사랑이 더 깊어집니다. 외로운 마음은 첫눈으로 녹고 다시 설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사랑이 성숙하고 깊어지는 자양분입니다. 그 시간을 타고 편지가 옵니다. 마치 첫눈처럼….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또 기다리는 편지>와 다른 느낌이긴 해도 <즐거운 편지>에 나타난 ‘기다림의 정서’는 공통적입니다. '편지는 기다림'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말을 하고 평범하게 쓰지만 진한 울림을 간직한 채 수취인을 찾아갑니다. <즐거운 편지>의 화자는 사랑을 기다림으로, 기다림을 사랑으로 바꾸고 항상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귀한 사랑의 행위와 같습니다. 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여길 때 사랑은 완성됩니다. 편지도 받는 이가 즐겁고 설렐 때라야 기다림이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기다림과 사랑이 언제나 영원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화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는 표현처럼 화자는 기다림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며 편지를 계속 쓸 것이고 계속 기다릴 테지요. 

편지
            김명인

다시 가을이다
돌틈 새에 숨는 몇 마리 도마뱀들
숨어도 보이는 우리들의 꼬리를 
아프게 잘라버린다
친구여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느냐?
계절을 받고 또 계절을 내주고 섰는 
산 속으로 들어서며
가을이 가고 있군 가을이
풀잎 위에 떨구는 산여치의 울음
바람은 개울 위에 새 주렴을 펴고 있다
뒤따라가며 우리도 또한 흩어질 것이냐?
묵묵히 견디고 섰는
더 괴로운 물풀도 만나고 싶다
괴로움도 이제는 괴로움이 아니라고
친구여 맨살에 끊임없이 감기는 물소리
홀로 흐를 때 
물소리는 한결같이 차갑게 스민다


김명인 시인의 <편지>를 보면 친구와 보낸 어린 시절의 일들이 행간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편지는 추억이고 기억입니다. 시인처럼 친구에게 옛이야기를 써보세요.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겠지요. 이렇듯 '편지는 과거로의 여행'이기도 합니다. 괴로운 여행일 수도 있고, 행복한 여행일 수도 있습니다. 여행을 통해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죠. 그 즐거운 여행을 누구하고 할지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중략>… 그저 당신은 자기 작품 속에서 자랑스럽고도 자연스런 재화,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 그 생명의 목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적 필연성에서 이루어진 예술 작품은 훌륭한 것입니다. 시의 원천에 의해서만 시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이것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파고들어서 당신의 생명이 근원한 그 깊이를 음미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 원천에서부터 창작을 해야 할까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해답이 어떻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모르긴 해도 당신은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외부로부터 보상 따위는 염두에 두지 말고 그 무겁고도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창조하는 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이어야만 하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어울려 하나가 된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 글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인지망생 프란츠 크사버 카프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카프스는 자신이 습작한 시를 보내 평을 듣고 싶어 릴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위의 글은 릴케의 첫 답장 중의 일부분입니다.

시인 릴케는 자기 생각을 시인 지망생인 카프스에게 친절하고 성의 있게 썼습니다. 이들은 꽤 오랫동안 편지로 교류했습니다. 이들은 편지로 세대를 넘어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편지를 쓰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진심을 말이 아닌 글로 옮겨 보낼 때 더 큰 울림을 상대방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편지는 용기'입니다. 반드시 답장을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보내는 이에겐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요. 시인 지망생 카프스는 시인 릴케에게 자신의 습작을 보여줄 용기가 있었고 실행했기에 답장을 받을 수 있었죠. 

어느덧 완연한 가을입니다. 편지를 쓰세요. 그때가 ‘누군가의 그대’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기다리세요. 기다림은 사랑이요, 추억이니까요. 언젠가 편지는 사랑을 싣고, 추억을 싣고, 기다림과 설레는 마음을 싣고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이 시대에 친구를 잃고, 연인을 잃고, 사랑을 잃고, 과거를 잊고, 마침내 자신마저 잃어버리지는 않았나요? 편지는 이 모든 것을 찾게 도와줄 테니, 지금 곧 펜을 드세요.
 



지난주 김대중 대통령의 연하장 - 평화와 풍요가 온 나라에 이어 신학영 님께서 보내주신 또 하나의 물품을 소개합니다. 세월을 타서 군데군데 해진 봉투지만 가운데 찍힌 빛나는 금박 봉인이 이 편지의 출처를 말하고 있습니다. 네,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입니다.


다시 한 번 대한민국 대통령을 상징하는 무궁화와 봉황으로 시작하는 편지는 2003년 2월 퇴임을 앞둔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국민께 드리는 마지막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생각비행의 블로그에 옮겨봅니다.


대 한 민 국  대 통 령



친애하는 신학영님께,

새해 안녕하십니까?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면서, 먼저 그간의 성원에 대해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5년을 돌아보면 참으로 감개무량한 바가 큽니다. 좌절도 있었고 성취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너무도 큰 변화가 이 땅에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변화 속에서도 특히 우리 국민의 위대한 발전, 그리고 일류국가의 기초를 마련한 것, 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국민은 세계가 놀라워하는 업적을 이룩해냈습니다.

외환위기를 맞이하자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를 전개하여 전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한국을 지원하게 만들었습니다. 금융·기업·공공·노사의 4대 개혁을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지하고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경제는 3년을 앞당겨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지식정보화의 열풍을 일으켜 세계적인 IT강국을 만들어냈습니다. 월드컵과 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시키고 찬란한 응원 문화를 이룩해냈습니다. 관권이나 금권의 개입 없이 가장 공명한 대통령선거를 성공시켰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확고한 안보와 한미동맹의 기본틀을 유지하는 데 소흘하지 않았으며, 긴장완화를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국민은 오랜 소극성과 수동적 자세로부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큰 변화를 보인 것입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국민적 자신감으로 승화, 발전시킨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학영님,

국민의 정부는 이러한 국민의 저력과 성원에 힘입어 한국이 21세기 일류국가로 도약하는 국운융성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지금 민주인권국가로서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다.

많은 국제기관들은 한결같이 한국을 경제적 우등생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정보화 등 첨단기술이 크게 발전되었고, 이를 전통산업과 접목시켜 세계적 경쟁력이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과거 50여년에 걸친 900억 달러의 무역수지 누계 적자를 상쇄하고, 이제 흑자 국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용보험·산재보험·건강보험·국민연금 등 4대 보험의 틀을 갖추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시행한 것을 비롯해 선진국 수준의 복지체제를 완비했습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반도 긴장을 크게 완화시키고, 이산가족상봉과 경제분야, 문화·관광분야 등에서 남북간의 교류를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어 한국이 유라시아대륙의 물류중심이 될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북한 핵문제도 대화를 통해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학영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중산층과 서민의 생활문제, 농촌문제, 지역간 불균형문제 등 많은 미비한 과제들이 남아있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좀 더 이룩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며, 다음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에서 이 모든 것이 더한층 개선·발전될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위대한 국민 여러분의 현명함과 저력을 믿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더불어 보여준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긍심과 일류국가의 기반을 마련한 성과를 유지·발전시켜 나간다면, 국운융성과 모든 국민의 행복한 내일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희 내외는 한 시민으로서 민족과 국민의 평화와 발전을 기원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거듭 그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2003년 2월


대 통 령  김 대 중
             이 희 호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 편지에서 친애하고 존경한다고 말한 대상은 비단 신학영 님만은 아닐 겁니다. 군부독재 시절 그를 죽음의 수렁에서 매번 구해낸 국민, 인간 김대중이 끝까지 믿었던 현명함과 저력을 지닌 위대한 국민,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남긴 메시지라고 믿고 싶어요.^_^

계속해서 여러분의 좋은 사연과 추억이 도착하길 빌며 인사드립니다. 9월의 첫 주말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_^






《사랑의 승자》- 김대중, 빛바랜 사진으로 묻는 오래된 약속
( http://ideas0419.com/2 )

생각비행김대중 전 대통령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물건, 인연을 담은 , 추모의 글 등을 모집합니다. 언론을 통한 기록이 아닌 생생한 독자들의 사진과 사연을 모아 2주기엔 더 멋진 사진집을 엮고 싶습니다.

짧은 사연은 댓글로 남기셔도 좋습니다. 개인적인 인연을 담은 글은 트랙백을 이용하시거나 생각비행으로 원고와 사진을 함께 보내주시면 게재하겠습니다. 우리의 바람이 이뤄질 수 있도록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다음 포스트를 참조해주세요.

[제안] 김대중 대통령과의 추억들을 모아 보는 건 어떨까요? - 김대중 헌정 사진집 프로젝트( http://ideas0419.com/6 )

(1) 약속의 유효기간 - 오동명 님 ( http://ideas0419.com/9 )
(2) 살아계신 것 같아요. - 이은희 님( http://ideas0419.com/12 )
(3) 평화와 풍요가 온 나라에 - 신학영 님( http://ideas0419.com/14  )
(4) 친애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께 - 신학영 님( http://ideas0419.com/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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