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미투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조금씩 진전되고 있긴 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다음 달이면 한국 미투운동이 본격화한 시발점이 된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 2주년이 됩니다.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안태근을 시작으로 검찰 조직 내 성폭력의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뒤이어 연출가 이윤택,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유력 대선 후보였던 안희정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미투 폭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는 처벌받고 일부는 법망을 빠져나가기도 했습니다. 미투운동이 우리 사회의 인식을 진일보시킨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미투 폭로가 있을 때마다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대할 뿐 성폭력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는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출처 - 한겨레


대표적인 예는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남성들의 기준에서 판별하려 드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나이, 출신 평소 행동, 성폭력 전후로 보인 태도 등을 기준으로 소위 '피해자다움'을 감별하려는 것이죠. 일반인은 물론 범죄를 판결해야 할 판사, 검사,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런 잣대로 순결한 피해자인 여성과 소위 꽃뱀으로 피해자들 사이를 갈라치기하고 사회적 낙인을 찍습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2차 가해가 이어집니다.


출처 - KBS


성폭력만큼이나 2차 가해가 고통스럽다는 건 미투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2017년 5월 체육계에서 첫 미투 폭로를 한 이경희 리듬체조 국가대표 코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대한체조협회 김 모 전무이사를 성추행과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했는데 수사 과정에서 검찰에게서 받은 조사가 자동차 안에서 성폭력을 당한 경험을 재현해보라는 등 인격 침해적인 것투성이였다고 하죠.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본격적인 감사와 수사가 시작되자 가해자는 물론 체육계 주변인들로부터 각종 음해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원래 연인 사이였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깊은 사이이지 않았냐는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경희 코치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2차 가해에 대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승소를 합니다. 판결은 벌금 300만 원의 약식명령. 액수가 크지 않아 몇 년간 감내한 고통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만 가해자가 잘못하고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2차 가해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범죄이며, 올해부터 불법 영상물 피해자 대신 정부가 삭제 비용을 대고 이 비용을 가해자와 유포자들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은 큰 진전이었습니다.


출처 - 한겨레


하지만 사회구조적인 여성혐오와 차별은 여전합니다. 이전에 생각비행에서도 여러 사례를 든 바 있죠.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요즘은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데, 사례와 통계를 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남성 역차별? 여성이라 차별당하는 구조적 현실이 더 문제다! : https://ideas0419.com/998



학교, 학과, 학점이 같아도 여성 소득은 남성의 82.6%에 불과하며, 심지어 여성이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둬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사에 탈락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업계 전체가 사상 검증을 하듯 페미니즘을 검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3년 전 김자연 성우가 자신의 SNS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넥슨 게임에서 퇴출당한 적 있는데요, 3년이 지난 지금도 게임 업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아르카나라는 게임의 일러스트레이터가 3년 전 김자연 성우 지지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일러스트 작업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게임 회사는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가 리스트를 언급해 게임 업계 내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심을 샀죠. 자신들은 그저 업계 내 리딩 컴퍼니인 넥슨의 사례를 따랐을 뿐이라면서 말입니다. 게임 업계 내에서는 외주 일러스트 등의 작업을 하는 여성에게는 SNS 사용 유무 등을 체크하며 사실상 여성주의에 대한 검열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업계 특성상 남성 소비자의 비율이 높기 때문인 듯한데, 일부 극렬 소비자의 입장만을 대변할 경우 그 업계나 장르 자체가 점점 좁아지며 도태될 수 있으니 업계와 소비자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공 부문은 좀 나아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난 11일 전남도청 여성 공직자들의 승진이 불공정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전남도 공무원 직급별, 성별 분포 자료에 따르면 4급 공무원 99명 가운데 여성은 7.1%인 7명입니다. 3급은 19명 중 1명, 2급과 1급은 아예 없습니다. 여성이 공무원 성별 채용률의 56%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여성 합격자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어째서 고위직은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걸까요? 능력과 자질 대신 조직 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관행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굳어져서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출처 - 한겨레


교육계에서는 서울교대 집단 성희롱 사건으로 연루돼 서울시교육청이 중, 경징계 처분을 내린 현직 교사 4명과 임용대기자 7명 등 11명이 처분이 과하다면서 전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이들은 서울교대 재학 시절 단톡방 등에서 여학생 외모를 품평하고 성희롱 발언을 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한 현직 교사는 겉모습이 예쁘고 성숙한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는 따로 챙겨 먹는다는 입에 담기도 더러운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죠. 매일 아이들을 대면하는 교사의 인식이 이 모양이니 학급 남아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출처 - 한국일보


언론의 경우 진일보한 면도 있습니다. KBS 9시 뉴스를 진행하는 메인 앵커로 40대 여성 기자가 발탁되었죠. KBS 9시 뉴스 앵커를 여성 기자가 맡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MBC와 SBS가 일찌감치 메인 앵커로 여성 기자들을 발탁했던 것과 달리 KBS는 중년 남성 앵커와 젊은 여성 아나운서 조합을 고수했던 과거의 전례를 비추어볼 때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도 많습니다. 광주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례처럼 여성을 외모로 품평하고 미투를 우습게 여기는 말투를 여과 없이 공중파에서 내뱉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진행자가 여성 트로트 가수들 몸매를 품평하더니 미투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한 번쯤 만져보겠다는 소리를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했습니다. 같이 있던 진행자도 사실상 동조했고요.


출처 - 한겨레


기술 발달에 따라 점점 인공지능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런 인공지능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점을 합니다. 아마존은 2014년부터 개발해 온 AI 채용 프로그램을 폐기했다고 하죠. 프로그램이 경력 10년 이상 남성 지원자 서류만 후보로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채용 프로그램이 여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감점 요소로 분류하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 10년간 회사가 수집한 이력서 패턴을 AI가 학습한 결과를 토대로 지원자들의 서류를 심사하니 남성 비율이 높은 IT 업계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게 된 겁니다. 아무리 AI라고 해도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의식적으로 쌓아온 사회 시스템을 데이터의 원천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입사에 AI를 도입하기 시작한 기업들이 있는데요, 기술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올해 세계은행이 발표한 〈여성, 비즈니스 그리고 법〉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에게 경제적, 법적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나라는 187개국 중 단 6개국뿐이라고 합니다.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라트비아, 룩셈부르크, 스웨덴이 그런 나라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100점 만점 기준에 전체 평균 74.71점으로 여성이 누리는 권리는 남성의 4분의 3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5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체 153개국 중 108위에 머물러 성 격차가 큰 국가에 속했습니다. 다행히 작년보다는 7계단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세계경제포럼은 세계 성 격차 해소에 99.5년이 걸린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남녀평등을 이루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요? 우선 현실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100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가 정말로 평등해지는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합니다.

2016년을 마무리하며 크리에이티브 시각디자인 집단인 버틀러 잉크(Beutler Ink)에서 한 해 동안 벌어진 전 세계 사건, 사고를 한 장의 그림에 담았습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이 그림은 16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명화인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패러디하여 제작된 것입니다. 그림 안에는 탐욕스러운 트럼프 당선부터 카스트로,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등 우리 곁을 떠난 명사들에 대한 추모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연 어떻게 표현되었을까요? 삼성 갤럭시노트7 폭발 사건이 조그맣게 실려 있을 뿐입니다. (그림에 노란색 상자로 표시해두었으니 그림을 클릭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면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군요.  

 

출처 - Beutler Ink.com


2016년은 우리나라나 전 세계적으로 정말 '격동의 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해였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에겐 흥미진진할 장면일지 모르겠으나 '지금'을 사는 우리에겐 더없이 고된 한 해였죠. 굵직한 사건만 훑어봐도 이렇습니다.

 

 1월 북한 4차 핵실험

 2월 개성공단 폐쇄

 3월 이세돌 vs 알파고 대국

 4월 총선으로 16년 만에 여소야대 및 3당 체제 형성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6월 브렉시트

 7월 영남권 진도 5 규모 지진

 8월 브라질 대통령 탄핵 및 갤럭시노트7 폭발 사건

 9월 이화여대 정유라 특혜 의혹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 JTBC 태블릿 PC 특종

11월 카스트로 사망 /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12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100만 촛불집회 / 탄핵 가결 / 송박영신


이미 일어난 일들이긴 합니다만 정치, 사회, 경제적인 이슈부터 자연재해와 세계적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많은 일이 대체 어떻게 한 해 동안 다 일어날 수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훗날 2016년 역사를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이 시기를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집니다.


출처 - 유튜브

 


이 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 우리가 이뤄낸 것 역시 작지 않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국회를 움직여 대통령 탄핵 가결을 이끌어낸 일은 하나의 쾌거이자 세계인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영국 BBC는 100만 명 이상이 모인 대규모 시위를 평화롭게 진행한 대한민국 시민의 힘에 놀라워했습니다. 폭력으로 권력을 뒤집어엎는 피의 혁명이 아니라 평화와 비폭력의 방법으로 국민이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그 대리자인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뜻을 받들게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교과서와도 같은 모습을 거시적으로 실현해냈기 때문입니다.


출처 - JTBC


이 때문일까요? 2016년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습니다. 《교수신문》은 전국의 교수 611명을 대상으로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이메일로 설문조사를 진행해 2016년 한 해를 규정할 사자성어를 뽑았다고 밝혔는데요, '군주민수'란 《순자》의 왕제 편에 나오는 말로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君以此思危 則危將焉而不至矣)."는 뜻입니다.

 

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 교수는 좀 더 전복적인 추천 사유를 덧붙였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군주가 배고 백성은 물이란 비유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개념이라는 거죠. 유가사상에 입각한 전국시대의 지식인인 순자가 지배자에게 민본주의를 훈수하는 제왕학에서 파생됐기 때문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무조건 존경받아야 하는 군주도 없고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있는 착하고 어린 백성도 없으니 이 사자성어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번역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민주공화국에서 권력자는 국민의 힘을 대리하는 선출직 공무원일 뿐임을 잊어선 안 될 이유입니다.



이 밖에도 '역천자망(逆天者亡)' '노적성해(露積成海)' '빙공영사(憑公營私)' '인중승천(人衆勝天)' 등 민주주의 원칙과 재권주민의 의미를 밝히고 공적인 일을 빙자해 사익을 챙긴 이들에 대한 비판이 어린 사자성어가 후보에 올랐다고 합니다.

 

출처 - 뉴시스

 

2016년 12월 31일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도심에 시민 110만 명이 운집해 '송박영신' 촛불집회를 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박근혜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길 바란다는 염원이 10차 촛불집회까지 누적인원 1000만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출처 - YTN

 

201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7년은 최순실-박근혜, 그리고 그 부역자들을 엄벌에 처하고 세월호를 비롯한 숱한 의혹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생각비행 독자 여러분의 행복을 빕니다. 저희도 사회에 필요한 책을 펴내면서 힘차게 날아오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신간 《키워드 오덕학―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을 소개합니다.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이미 오래 전부터 생명력을 얻고 있는 한국식 표현이지요. 우리의 오덕 문화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되, 그 말이 쓰이는 맥락은 태반이 혼란스럽거나 혼동되거나 심지어는 적잖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오덕’은 일본의 ‘오타쿠’와는 또 다른 맥락성을 지니고 자생해가고 있는 중인데요. 《키워드 오덕학》은 ‘웹툰(WEBTOON)/오타쿠/코스프레/야오이 그리고 BL/OSMU(ONE SOURCE MULTI USE)/기록과 통계/백합(百合)/모에(萌)/지역 캐릭터/짤방/병맛/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서브컬처(subculture)’에 이르는 총 13가지 키워드(열쇳말)를 통해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지 상세히 살펴봅니다. 한마디로 《키워드 오덕학》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오덕 문화’를 충실히 소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덕후'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오타쿠'(おたく)는 일본에서도 멸칭으로 시작되었다.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는 《만화 브릿코》 1983년 6월호부터 실은 칼럼 〈'오타쿠' 연구〉에서 오타쿠를 '안경에 파묻혀 영양실조 걸린 하얀 돼지 같은데' '엄마가 사준 옷 차려입고' '세기말적으로 어두컴컴하다가 만화 행사장에선 잔뜩 모여 활개 치는' '남창 같은 구석이 있어 여자를 사귈 수 없을 것 같은 놈들'이라고 묘사했다. 명색이 연구란 말을 제목에 달아놓은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상적 악담을 쏟아낸 까닭에 연재가 중단되긴 했으나 이 칼럼은 '오타쿠'라는 용어의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1989년 미야자키 츠토무가 도쿄·사이타마 연속 여아유괴 살인 행각을 벌이자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일본 경찰은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수사기법을 동원해 범인을 검거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되고, 그 안에 호러 영화와 로리콘 성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언론은 '오타쿠=잠정적 범죄자'란 부정적인 인식을 유포하기에 이른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롤리타 콤플렉스 살인귀'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일본에서 오타쿠는 시각 기호로 창작된 캐릭터에 집착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범죄 예비군 정도로 인식되었다. 2008년까지 NHK는 오타쿠를 금지어나 다름없는 방송 문제 용어로 구분하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후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되고 그들이 심취한 산업의 규모가 재조명되면서 인문학적 연구가 거듭되고 있다. 이로써 오타쿠는 '꽂히는 취향에 일정 이상으로 몰입하는 사람'을 뜻하는 표현으로 일반화하는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때 일본의 신어사전은 오타쿠를 '만화, 애니, 비디오게임, 아이돌 등 허구성 강한 세계관을 좋아하는 이들을 일컫는다'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현재 오타쿠의 관심 대상은 철도나 밀리터리, 성우, 특정 인물 등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우리의 덕후 문화, 어디까지 왔나?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오랜 시간을 거쳐 생명력을 얻고 있던 한국식 표현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을 넘어 다수의 일반 한국 대중 사이에서 '오덕'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 건 TV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tvN, 2009. 3. 31~2013. 11. 26)였다. 2010년 1월 27일자 〈화성인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안는 베개(끌어안고 잘 수 있는 등신대 베개)를 들고 나와 "이 캐릭터와 혼인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출연자를 소개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조롱처럼 돌아다니던 '안여돼'(안경 여드름 돼지)형 인물이 화성인(=상식 밖 인물)의 대표주자 '덕후'의 표상으로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오덕' '덕후' 부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중에게 고정된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의 '오덕' 또한 일본 ‘오타쿠’의 전철을 밟은 듯하지만, '오덕 문화'는 거기에 머무르고 있지만은 않았다. 웹툰이 상업적 정립 10년을 넘긴 2013년을 거치며 미끼 상품에서 벗어나 콘텐츠와 상품으로서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덕후 문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유층과 함께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문화 코드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정의되던 범위 바깥으로 확장하며 경계를 무너뜨리고 급기야 멸칭마저도 유희화하는 현상을 겪게 마련이고 그러지 못하는 문화는 역설적으로 박제화하거나 사멸하는데, 오덕 문화는 다행스럽게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근래 화제를 모은 TV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능력자들〉(MBC, 2015. 11. 13~2016. 9. 8)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인류는 덕후들의 능력으로 인해 진화되었다" "당신의 덕심이 바로 당신의 능력이다"(프로그램 소개 중에서)라며 '덕후'를 별다른 주석문 하나 없이 전면에 내세웠다. 재밌는 건 〈능력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의 제목 자체다. 말 그대로 덕후를 '능력자'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여기서 한술 더 떠 "개개인의 전문성이 나라의 경쟁력이 된다"라고까지 피력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등장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어떤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변화로 비치는 현상 이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덕후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 미디어가 '능력자' 이전에 '화성인'으로 분류했던 이들을 의미한다.


아스카(〈신세기 에반게리온〉 여주인공 가운데 한 명)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연예인과 〈도라에몽〉에 미쳐 사는 몸짱 훈남 연예인처럼 사회적 인지도와 실력을 갖춘 그럴싸한 오덕층의 출현은 스스로를 덕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일반 대중에게는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라? 우와? 세상에?' 하며 놀라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이 '사회성 결여' 같은 비상식적 면모와 거리가 멀다는 점도 인지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는 어느 무언가에는 '덕'이다. '덕질'이 즐거운 유희가 되는 시점에 '오덕·덕후=안여돼' 프레임은 힘을 잃게 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창궐하던 사방천지의 덕질 놀이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TV라는 절대적 대중문화 살포 도구(!)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오덕' '덕후' '덕질'이라는 말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나 〈능력자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능력자들〉에 출연한 이들은 겉보기에 멀쩡하고 자기 일에도 충실했다. 더구나 관심 대상을 향한 애정과 노력은 실제 해당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조차 혀를 내두르다 못해 "너 이쪽으로 와라"라며 취업 제안을 즉석에서 받을 만큼 전문성마저 갖추고 있었다. 오덕들의 노력과 지식은 '덕질'이라는 범주 안에 놓이지 않아 왔을 뿐 덕후 문화가 애먼 논란 속에 정체를 겪고 있던 시기부터 이미 쌓이고 있었던 것들이다. 우리 시대의 흐름이 이들이 쌓아온 면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할 수 있는 데까진 온 것이다.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오덕 문화가 새로운 경제 동력이 되고 있다. 이들이 몰입하는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콘텐츠 시장이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이면 이 분야만 약 1700억 달러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오타쿠 시장의 규모를 알려주는 단적인 자료가 있다. 2004년 8월 24일 노무라종합연구소(野村総合研究所)가 발표한 〈마니아 소비층은 애니메이션, 만화 등 주요 5개 분야에서 2,900억 엔 시장—오타쿠층의 시장 규모 추계와 실태에 관한 조사〉라는 보도자료를 보면 '애니메이션/만화/게임/아이돌/조립PC' 다섯 개 분야에 걸친 오타쿠들의 소비 시장 규모는 2900억 엔(약 2조 9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콘텐츠 관련 네 개 분야, 즉 애니메이션, 아이돌, 만화, 게임 산업 전체의 시장 규모는 약 2조 30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오타쿠 소비층이 금액 기준 1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처럼 오타쿠는 구매 의욕이 높을 뿐 아니라 커뮤니티 형성의 핵심, 차세대 기술 혁신의 장, 신상품 실험 대상으로서의 가치도 높아 산업 관점에서 기대되는 역할이 큰 모집단이라 할 수 있다. 오타쿠든 한국화한 오덕이든, 이들에게 통하는 코어한 부분을 이용하려면 이들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오덕들의 문화와 역할은 일본의 오타쿠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되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더욱 달라질 것이다. 이 때문에 《키워드 오덕학》의 저자는 '오덕'을 '오타쿠'와 단순 동의어로 놓고 용어를 해설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이 책의 특징은 일본에서 유래한 '바닥 문화'를 파고드는 차원이라기보다 우리나라에서 오덕 문화와 개념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이 《키워드 오타쿠학》이 아닌 《키워드 오덕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겐 우리에게 맞는 '오덕' 담론이 필요하다. 아울러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을 공유하고자 한다.


 

지은이 

 

서찬휘
본명 임채진. 1979년생. 1998년 이후 지면과 형식을 가리지 않고 만화 이야기를 해온 만화 칼럼니스트. 자생한 한국산 2세대 오덕으로 한국 오덕 문화의 흐름과 성격을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꾸준히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만화, 애니, 성우, 애니송, 라이트노블 등을 덕질하다 현재는 만화를 중심으로 정착 중. 만화 정보 웹진 《만화인manhwain.com》 운영을 비롯해 대학 강의, 인터뷰, 팟캐스트 진행, 전시 기획, 세미나 기획 및 진행, 캘리그래피 등 만화와 연관성 있는 일들에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차례

 

들어가며 _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

 

01. 웹툰(WEBTOON)
‘MADE IN KOREA’ 만화 형식 웹툰의 정립 과정과 대외 브랜드화 현황에 관하여

-생각할 거리들

 

02. 오타쿠
‘화성인’에서 ‘능력자’까지, ‘덕후’의 즐거운 위상 변화

-생각할 거리들

 

03. 코스프레
불분명한 유래 집착과 일본 콤플렉스를 넘어서

-생각할 거리들

 

04. 야오이 그리고 BL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섹슈얼리티 판타지

-생각할 거리들

 

05. OSMU(ONE SOURCE MULTI USE)
똑바로 서지 못한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무시한다

-생각할 거리들

 

06. 기록과 통계
한국 만화가 진정 튼튼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

-생각할 거리들

 

07. 백합(百合)
소녀(여성) 간의 우정과 유대에 천착한 판타지 픽션

-생각할 거리들

 

08. 모에(萌)
극단적으로 부품화한 취향 코드와 언캐니밸리

-생각할 거리들

 

09. 지역 캐릭터
한국에서 ‘쿠마몬 성공신화’를 바라고 싶다면

-생각할 거리들

 

10. 짤방
이미지 속 맥락의 만화적 재해석

-생각할 거리들

 

11. 병맛
조롱을 내재화한 이 시대의 산물

-생각할 거리들

 

12. 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
상반된 마음의 간극을 부품화하다

-생각할 거리들

 

13. 서브컬처(subculture)
오타쿠 컬처? 문화콘텐츠?

-생각할 거리들

 

마무리하며 

 

 

"조현병 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있는 행정입원명령이 실효성을 거두도록 법적 근거 마련을 추진한다."


지난 26일 새누리당은 '여성안전 대책 당·정·외부전문가 간담회'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 시스템 마련을 논의하며 조현병 환자 전수조사와 인신보호관제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과연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생각할 법한 대책입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보다는 그냥 눈에 거슬리는 무언가를 치워서 없애버리겠다는 안이하고도 인권 유린적인 발상 앞에서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출처 - jtbc

 

서울 강남역 살인 사건, 수락산 살인 사건, 부산 길거리 무차별 폭행 사건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자 정부는 지난 1일 여성 안전 종합 대책이란 걸 내놓았죠. CCTV 확충으로 범죄안전 사각지대 해소, 재범 방지, 가해자들의 처벌 강화, 피해자 지원, 정신질환자 치료관리 등의 조처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난주 당정회의에서 조현병 환자를 강제입원시킬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했던 게 이번 여성 안전 종합 대책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공익인권법재단


'행정입원'은 조현병 환자로 판정되면 경찰이 의사에게 요청해 입원 필요성을 판단 받아 지자체에 입원을 요청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족의 반대나 인권 문제 가능성 때문에 입원 요청만 할 수 있을 뿐 강제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이를 강제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하고 정부 여당과 보건복지부, 법무부, 심지어 여성부와 국민안전처의 수장들이 모여 결론을 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경찰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정신이상자의 범죄로 몰아갔는데, 이제는 정부와 새누리당이 나서서 정신질환자 혐오로 사건의 본질을 덮어버리려는 형국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당연한 얘기지만 장애인 단체뿐 아니라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조현병 환자에 대한 전수조사와 환자 치료를 추적까지 하겠다는 대응에 대해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폭압적인 낙인 찍기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명수 경기도 정신건강증진센터장은 "조현병 환자에게 낙인을 찍어 잠재적 범죄자로 보겠다는 발상으로 히틀러 시대 우생학적 접근과 범죄를 미리 예측하고 막는 내용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연상시킨다"며 "조현병 환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듯한 정책들이 당혹스럽다"고 비판했죠.

 

출처 - 경향신문

 

안 그래도 현대인들은 정신병을 조금씩 가지고 있고 이를 돌보기 위한 정신의학 상담은 선진국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면 마치 미쳐서 범죄라도 저지를 정신병자 취급하기 십상입니다. 이번에 새누리당과 정부가 대놓은 대책은 이런 편견을 증폭시켜 조현병 환자를 범죄자로 낙인찍을 뿐입니다. 더구나 전수조사라니 말이 됩니까? 영화나 드라마만 봐도 상담 기록에 얼마나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부분이 많고 외부로 알려져선 안 되는 기록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상식이 부족해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출처 - 시선뉴스


2011년 다른 곳도 아닌 대검찰청 범죄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정신장애인의 실제 범죄율은 비장애인의 1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보건복지부의 정신질환자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란 자료를 봐도 조현병 환자들은 범죄와 폭력의 위험성이 매우 낮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게 일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정신의료기관 입원 환자 중 강제 입원은 이미 67.4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10퍼센트대인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높은 편입니다. 행정입원이 아니더라도 비정상적인 강제입원이 횡행한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치를 떠셨을 '형제복지원'만 해도 정부가 거리의 부랑자, 장애인들을 강제로 입원시킨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주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또 그런 짓을 하게 놔두자고요?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을 다루는 경찰과 정부의 대응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과 혐오 문제를 덮어버리고 책임을 또 다른 약자인 정신질환자에게 돌려 마녀사냥 하는 것으로 덮어버리려는 추악한 짓일 뿐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정부와 경찰이 최근 일어나는 사건을 혐오 범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것이 혐오 범죄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 혐오로 인해 이익을 보던 기득권이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약자들이 계속 약자로 밑에서 짓밟히고 있어야 그들이 정당하게 누릴 이익을 기득권이 착취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는 비단 여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위험의 외주화에 노출된 최하위 단계 노동자들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4명의 사망자와 10명의 부상자를 낸 경기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에 투입됐던 근무자 대부분이 용접 자격증이 없는 일용직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고 당시 안전 매뉴얼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258조에 따르면 사업주는 인화성 물질의 증기, 가연성가스 등이 산재해 폭발 또는 화재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통풍 및 환기 등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 폭발·화재를 미리 감지할 수 있는 경보장치 등을 설치하도록 명시하고 있죠. 법을 어기고 밀폐 공간인 사고 현장에 '환풍기'와 '가스 누출 경보기' 등을 설치하지 않음으로써 돈을 버는 이는 과연 누구겠습니까?

 

출처 - 경향신문

 

한편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발생한 안전문 유지 보수 협력업체 정비직원 사망 사건의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경찰이 사고 당일 2인 1조로 작업했다는 일지가 조작됐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사실 확인에 나섰으나 은성PSD의 작업일지에 2인 1조로 작업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19살 정비직원 김 모 씨가 숨진 결정적 이유가 혼자 작업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는 건 여전합니다.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보지 못한 건 주변 상황을 알려줄 동료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사고 당일 책임자가 작업일지를 조작했을 가능성은 경찰 조사를 통해 밝혀질 일이겠지만, 최하위 단계에 있는 노동자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안전에 취약한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범죄와 사고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원한다면 일시적인 조치로는 안 됩니다. 사회의 구조 자체를 혁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약자들이 연대해야 합니다. 안전을 위한 연대에는 여성, 장애인 등의 경계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여성 안전 종합 대책 문제로 돌아와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라도 경찰과 정부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찍기를 그만두고 치료 지속성을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를 촉구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