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미투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조금씩 진전되고 있긴 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다음 달이면 한국 미투운동이 본격화한 시발점이 된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 2주년이 됩니다.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안태근을 시작으로 검찰 조직 내 성폭력의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뒤이어 연출가 이윤택,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유력 대선 후보였던 안희정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미투 폭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는 처벌받고 일부는 법망을 빠져나가기도 했습니다. 미투운동이 우리 사회의 인식을 진일보시킨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미투 폭로가 있을 때마다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대할 뿐 성폭력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는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출처 - 한겨레


대표적인 예는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남성들의 기준에서 판별하려 드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나이, 출신 평소 행동, 성폭력 전후로 보인 태도 등을 기준으로 소위 '피해자다움'을 감별하려는 것이죠. 일반인은 물론 범죄를 판결해야 할 판사, 검사,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런 잣대로 순결한 피해자인 여성과 소위 꽃뱀으로 피해자들 사이를 갈라치기하고 사회적 낙인을 찍습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2차 가해가 이어집니다.


출처 - KBS


성폭력만큼이나 2차 가해가 고통스럽다는 건 미투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2017년 5월 체육계에서 첫 미투 폭로를 한 이경희 리듬체조 국가대표 코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대한체조협회 김 모 전무이사를 성추행과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했는데 수사 과정에서 검찰에게서 받은 조사가 자동차 안에서 성폭력을 당한 경험을 재현해보라는 등 인격 침해적인 것투성이였다고 하죠.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본격적인 감사와 수사가 시작되자 가해자는 물론 체육계 주변인들로부터 각종 음해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원래 연인 사이였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깊은 사이이지 않았냐는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경희 코치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2차 가해에 대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승소를 합니다. 판결은 벌금 300만 원의 약식명령. 액수가 크지 않아 몇 년간 감내한 고통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만 가해자가 잘못하고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2차 가해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범죄이며, 올해부터 불법 영상물 피해자 대신 정부가 삭제 비용을 대고 이 비용을 가해자와 유포자들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은 큰 진전이었습니다.


출처 - 한겨레


하지만 사회구조적인 여성혐오와 차별은 여전합니다. 이전에 생각비행에서도 여러 사례를 든 바 있죠.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요즘은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데, 사례와 통계를 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남성 역차별? 여성이라 차별당하는 구조적 현실이 더 문제다! : https://ideas0419.com/998



학교, 학과, 학점이 같아도 여성 소득은 남성의 82.6%에 불과하며, 심지어 여성이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둬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사에 탈락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업계 전체가 사상 검증을 하듯 페미니즘을 검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3년 전 김자연 성우가 자신의 SNS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넥슨 게임에서 퇴출당한 적 있는데요, 3년이 지난 지금도 게임 업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아르카나라는 게임의 일러스트레이터가 3년 전 김자연 성우 지지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일러스트 작업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게임 회사는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가 리스트를 언급해 게임 업계 내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심을 샀죠. 자신들은 그저 업계 내 리딩 컴퍼니인 넥슨의 사례를 따랐을 뿐이라면서 말입니다. 게임 업계 내에서는 외주 일러스트 등의 작업을 하는 여성에게는 SNS 사용 유무 등을 체크하며 사실상 여성주의에 대한 검열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업계 특성상 남성 소비자의 비율이 높기 때문인 듯한데, 일부 극렬 소비자의 입장만을 대변할 경우 그 업계나 장르 자체가 점점 좁아지며 도태될 수 있으니 업계와 소비자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공 부문은 좀 나아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난 11일 전남도청 여성 공직자들의 승진이 불공정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전남도 공무원 직급별, 성별 분포 자료에 따르면 4급 공무원 99명 가운데 여성은 7.1%인 7명입니다. 3급은 19명 중 1명, 2급과 1급은 아예 없습니다. 여성이 공무원 성별 채용률의 56%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여성 합격자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어째서 고위직은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걸까요? 능력과 자질 대신 조직 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관행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굳어져서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출처 - 한겨레


교육계에서는 서울교대 집단 성희롱 사건으로 연루돼 서울시교육청이 중, 경징계 처분을 내린 현직 교사 4명과 임용대기자 7명 등 11명이 처분이 과하다면서 전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이들은 서울교대 재학 시절 단톡방 등에서 여학생 외모를 품평하고 성희롱 발언을 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한 현직 교사는 겉모습이 예쁘고 성숙한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는 따로 챙겨 먹는다는 입에 담기도 더러운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죠. 매일 아이들을 대면하는 교사의 인식이 이 모양이니 학급 남아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출처 - 한국일보


언론의 경우 진일보한 면도 있습니다. KBS 9시 뉴스를 진행하는 메인 앵커로 40대 여성 기자가 발탁되었죠. KBS 9시 뉴스 앵커를 여성 기자가 맡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MBC와 SBS가 일찌감치 메인 앵커로 여성 기자들을 발탁했던 것과 달리 KBS는 중년 남성 앵커와 젊은 여성 아나운서 조합을 고수했던 과거의 전례를 비추어볼 때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도 많습니다. 광주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례처럼 여성을 외모로 품평하고 미투를 우습게 여기는 말투를 여과 없이 공중파에서 내뱉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진행자가 여성 트로트 가수들 몸매를 품평하더니 미투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한 번쯤 만져보겠다는 소리를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했습니다. 같이 있던 진행자도 사실상 동조했고요.


출처 - 한겨레


기술 발달에 따라 점점 인공지능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런 인공지능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점을 합니다. 아마존은 2014년부터 개발해 온 AI 채용 프로그램을 폐기했다고 하죠. 프로그램이 경력 10년 이상 남성 지원자 서류만 후보로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채용 프로그램이 여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감점 요소로 분류하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 10년간 회사가 수집한 이력서 패턴을 AI가 학습한 결과를 토대로 지원자들의 서류를 심사하니 남성 비율이 높은 IT 업계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게 된 겁니다. 아무리 AI라고 해도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의식적으로 쌓아온 사회 시스템을 데이터의 원천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입사에 AI를 도입하기 시작한 기업들이 있는데요, 기술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올해 세계은행이 발표한 〈여성, 비즈니스 그리고 법〉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에게 경제적, 법적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나라는 187개국 중 단 6개국뿐이라고 합니다.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라트비아, 룩셈부르크, 스웨덴이 그런 나라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100점 만점 기준에 전체 평균 74.71점으로 여성이 누리는 권리는 남성의 4분의 3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5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체 153개국 중 108위에 머물러 성 격차가 큰 국가에 속했습니다. 다행히 작년보다는 7계단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세계경제포럼은 세계 성 격차 해소에 99.5년이 걸린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남녀평등을 이루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요? 우선 현실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100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가 정말로 평등해지는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합니다.

들불처럼 번지던 우리나라 미투 운동에 기름을 들이부었던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성폭행 사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여성계는 물론 사회 각계의 분노와 반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서부지법은 14일 오전 진행된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이 위력을 행사하여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한 후 간음 및 추행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만한 증거가가 부족하다며 안희정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안희정 전 지사는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며 다시 태어나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죗값을 치르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한가 싶습니다.


출처 - 한겨레


SNS에서 미투를 지지하던 분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셉니다. 안 전 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로 앞으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더 입을 닫게 되었다며 재판부의 선고를 거세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의 최후의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입법부에 성폭력 판단에 대한 책임을 떠넘겼다는 비판도 나오며 위력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 점에 대한 항의도 이어졌습니다.


출처 - JTBC


사법부도 이 사건이 사회의 상식으로는 성폭력 사건이 맞다고는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해 더더욱 사람들이 분노하는 건데요. 재판부는 선고문에서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의 처벌 체계 하에서 이러한 사정만으로 피고인의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도 없다,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명했는데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에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 혹은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성관계로 나아가면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를 도입할 것인지 여부는 입법 정책적 문제'라고 명시했습니다.


출처 - JTBC


이와 더불어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본다면 이는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서도 '피해자의 자유 의사를 제압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법에 의거하여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는 법원의 입장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이는 입법부인 국회를 압박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겠으나, 후자의 경우 저 정도까지 위력을 인지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부분은 의아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라며 피해자를 타박하고 있는 겁니다. 위력이 총칼이나 완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사법부의 판단 기준에 따른다면 피해자가 저항하다 죽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위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판례가 될까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출처 - 한겨레


재판에서 보인 안희정 전 지사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고 이런 지점들이 판결로 이어지지 않았나 우려스러운 대목도 보입니다. 애초 안희정 전 지사는 구속영장 심사 단계에서 증거를 인멸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었는데 재판부는 피해자 김지은 씨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안희정 전 지사의 휴대전화 등 관련 증거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 전 지사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거나 인멸하려 했다는 의심을 살 만했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재판부는 말을 바꾼 점도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미투 폭로 직후 안희정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고 적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검찰에 출석해서는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에 의심이 간다고 선고문에 적었습니다.


출처 – JTBC


가장 문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목은 재판부가 여전히 '피해자다움'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었다는 점입니다. 피해자 김지은 씨가 사건 이후에도 수행비서로서 일을 계속해 나간 점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응당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정치인의 심기까지 배려해 의전하는 수행비서라는 피해자의 입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재판부는 정작 비정규직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겁니다. 안희전 전 지사는 무려 차기 대통령으로까지 점쳐지던 정치인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수행비서가 과연 어떻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저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걸까요?

출처 - 경향신문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구시대적인 정조 관념까지 거론하며 성적 자기 결정권의 의미를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가 정조 운운했을 때부터 1심 판결을 짐작했다고 피해자 김지은 씨가 얘기할 정도입니다. 현재 법체계와 보수적인 사회의 성 관념 아래선 앞으로도 이런 판결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출처 – CBS 유튜브



실제로 법조인들은 안 전 지사가 2심에서도 무죄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공소사실 10개가 모두 무죄 판결이 났으며, 성관계는 있었지만 위력은 없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38명 대한 재판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 전 지사 재판에서 드러났듯 증언만 있는 사건의 경우 현재와 같은 제반 사항 아래선 유죄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는 미투 운동이 처음 시작됐을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이기도 하죠.


출처 - 한겨레


이번 안 전 지사의 1심 무죄 판결로 온갖 유˙무형의 힘과 권위를 동원해 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갖은 괴롭힘을 행사하는 상사에게 일종의 면허를 부여해버닌 꼴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적어도 '인권'이라는 게 있다면 이를 내버려둬선 안 됩니다. 안희정 1심 판결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합니다. 우선 'NO MEANS NO RULE, YES MEANS YES RULE'을 관철하도록 입법 운동을 하는 한편 여론의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시위가 필요합니다. 지난 4일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7만 명의 규탄시위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김지은 씨가 2차 피해를 받지 않도록 배려하며 2심에서는 위력과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여론을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미투 운동이 나아갈 길이 멉니다. 지지와 연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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