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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안희정 1심 무죄 판결을 보는 우리의 자세

by 생각비행 2018. 8. 17.

들불처럼 번지던 우리나라 미투 운동에 기름을 들이부었던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성폭행 사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여성계는 물론 사회 각계의 분노와 반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서부지법은 14일 오전 진행된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이 위력을 행사하여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한 후 간음 및 추행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만한 증거가가 부족하다며 안희정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안희정 전 지사는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며 다시 태어나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죗값을 치르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한가 싶습니다.


출처 - 한겨레


SNS에서 미투를 지지하던 분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셉니다. 안 전 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로 앞으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더 입을 닫게 되었다며 재판부의 선고를 거세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의 최후의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입법부에 성폭력 판단에 대한 책임을 떠넘겼다는 비판도 나오며 위력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 점에 대한 항의도 이어졌습니다.


출처 - JTBC


사법부도 이 사건이 사회의 상식으로는 성폭력 사건이 맞다고는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해 더더욱 사람들이 분노하는 건데요. 재판부는 선고문에서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의 처벌 체계 하에서 이러한 사정만으로 피고인의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도 없다,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명했는데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에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 혹은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성관계로 나아가면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를 도입할 것인지 여부는 입법 정책적 문제'라고 명시했습니다.


출처 - JTBC


이와 더불어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본다면 이는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서도 '피해자의 자유 의사를 제압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법에 의거하여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는 법원의 입장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이는 입법부인 국회를 압박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겠으나, 후자의 경우 저 정도까지 위력을 인지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부분은 의아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라며 피해자를 타박하고 있는 겁니다. 위력이 총칼이나 완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사법부의 판단 기준에 따른다면 피해자가 저항하다 죽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위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판례가 될까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출처 - 한겨레


재판에서 보인 안희정 전 지사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고 이런 지점들이 판결로 이어지지 않았나 우려스러운 대목도 보입니다. 애초 안희정 전 지사는 구속영장 심사 단계에서 증거를 인멸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었는데 재판부는 피해자 김지은 씨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안희정 전 지사의 휴대전화 등 관련 증거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 전 지사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거나 인멸하려 했다는 의심을 살 만했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재판부는 말을 바꾼 점도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미투 폭로 직후 안희정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고 적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검찰에 출석해서는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에 의심이 간다고 선고문에 적었습니다.


출처 – JTBC


가장 문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목은 재판부가 여전히 '피해자다움'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었다는 점입니다. 피해자 김지은 씨가 사건 이후에도 수행비서로서 일을 계속해 나간 점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응당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정치인의 심기까지 배려해 의전하는 수행비서라는 피해자의 입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재판부는 정작 비정규직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겁니다. 안희전 전 지사는 무려 차기 대통령으로까지 점쳐지던 정치인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수행비서가 과연 어떻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저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걸까요?

출처 - 경향신문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구시대적인 정조 관념까지 거론하며 성적 자기 결정권의 의미를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가 정조 운운했을 때부터 1심 판결을 짐작했다고 피해자 김지은 씨가 얘기할 정도입니다. 현재 법체계와 보수적인 사회의 성 관념 아래선 앞으로도 이런 판결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출처 – CBS 유튜브



실제로 법조인들은 안 전 지사가 2심에서도 무죄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공소사실 10개가 모두 무죄 판결이 났으며, 성관계는 있었지만 위력은 없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38명 대한 재판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 전 지사 재판에서 드러났듯 증언만 있는 사건의 경우 현재와 같은 제반 사항 아래선 유죄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는 미투 운동이 처음 시작됐을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이기도 하죠.


출처 - 한겨레


이번 안 전 지사의 1심 무죄 판결로 온갖 유˙무형의 힘과 권위를 동원해 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갖은 괴롭힘을 행사하는 상사에게 일종의 면허를 부여해버닌 꼴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적어도 '인권'이라는 게 있다면 이를 내버려둬선 안 됩니다. 안희정 1심 판결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합니다. 우선 'NO MEANS NO RULE, YES MEANS YES RULE'을 관철하도록 입법 운동을 하는 한편 여론의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시위가 필요합니다. 지난 4일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7만 명의 규탄시위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김지은 씨가 2차 피해를 받지 않도록 배려하며 2심에서는 위력과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여론을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미투 운동이 나아갈 길이 멉니다. 지지와 연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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