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한때 생각비행에서 연재했던 기사 [독립, 하셨습니까?]를 책으로 엮어 출간했습니다. 2012년 8월 2일부터 2013년 7월 26일까지 총 8번의 연재물로 진행된 기사의 기획의도는 이랬습니다.

 

"꿈을 펼치는 일의 연장선에서 글을 써보려 한다... 인터뷰와 문화 리뷰+칼럼이 뒤섞여 모호하지만, 어딘가로부터 독립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글이랄까. 내가 면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자본으로부터의 철저한 독립, 대중성 없음, 알아주는 이 적으나 열광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보편에 기대는 이야기들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로부터, 무언가로부터 '독립'한 사람들과의 만남,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다시 들려주는 이은 씨의 연재물은 특별했습니다. 다양한 삶의 궤적을 그리며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있었기에, 독립된 삶을 살아가는 인터뷰이의 진심에 한층 더 귀를 기울이는 진정성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연재물 종료 이후 생각비행은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을 더 취재해 별도의 책으로 기획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은 씨에게 협업을 제안했습니다. 그 이후로 근 2년간의 작업 끝에 드디어 한 권의 책이 완성되어 나왔습니다. 자기만의 길을 찾아 어딘가로부터, 무언가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분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권합니다.  

 

독립, 하셨습니까

꿈을 꾸며 자기만의 길을 낸 사람들

 

▸분야: 인문  ▸지은이: 이은  ▸판형: 신국판(152*225)

▸쪽수: 228  ▸가격: 15,000원

▸ISBN 978-89-94502-37-3 (03300)

 

 

"삶을 규정하는 형용구를 찾아 떠난 여행"

 

《독립, 하셨습니까》는 꿈을 꾸며 자기만의 길을 낸 9명의 대상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삶을 정리한 기록이다. 저자 자신이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고단한 삶을 견디면서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꿈꾸었기에,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9명의 인터뷰이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은 스스로 성찰하며 성장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삶의 여정에서 대개 '무엇이 될까'를 고민한다. 하지만 의사, 변호사, 회계사, 교수 등의 직업에서는 특정한 삶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직업을 나타내는 명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는 '형용구'에서 그의 인생, 신념, 지향점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신부이자 저술가 차동엽은 '차디찬 시대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사람이다. 반올림 노무사 이종란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의 희망, 안전할 권리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저자가 만난 9인의 삶을 담은 이 책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형용구를 찾아가는 여정에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독립을 꿈꾼다"

 

우리는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꿈꾼다. 하지만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거나 자신의 포부를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삼포세대'(직장이 없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층), '청백전'(청년백수 전성시대), '십장생'(10대도 장차 백수가 될 생각을 해야 한다) 등의 신조어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비단 젊은이만이 아니라 50대, 아니 은퇴 이후 세대까지도 '독립'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화두가 되고 있다.


저자 역시 백댄서(연습생), 연예기획사 아르바이트, 할인마트 판매직, 잡지사 리포터, 시민단체, 사보 취재 기자 등을 거치며 이 땅의 젊은이와 비슷한 고민의 시기를 거쳤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인 독립보다 더 중요한 '삶의 독립'을 선택했다. 틈틈이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면서 '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자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독립, 하셨습니까?》는 '삶의 독립'을 화두 삼아 저자가 인생 여정에서 만난 9명의 인터뷰이의 삶을 정리한 치열한 기록이다. 그중에 한 명이 차동엽 신부였다.

 

근거가 없더라도 희망의 끝을 놓지 마라
가톨릭 신부이자 저술가인 차동엽은 '소유'와 '욕망'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보이는 삶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삶의 재미나 보람이란 꼭 남들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차 신부는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그로 인해 얻은 성찰을 나누면서 사람들의 일상 속에 숨은 행복을 일깨우는 즐거움을 맛보며 산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의 말을 건네고, 갈을 묻는 이에게는 아는 만큼 가르쳐준다.


이를 위해 꾸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차 신부는 평생 공부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 강연과 인터뷰, 상담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지만, 틈날 때마다 책을 놓지 않는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고전과 20대 때의 독서가 그에겐 삶의 자산이 됐다. 인문학이나 독서의 필요성마저 스펙 쌓듯이 얕은 지식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차 신부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회적 슬픔 앞에서 우리에게 '사유의 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차 신부 외에 8명의 인터뷰이의 삶이 담긴 《독립, 하셨습니까》는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무언가로부터 '독립'을 꿈꾸며 삶을 개척하려는 이 땅의 존재들을 위한 응원가로 봐도 무방하다. 열정으로 자신만의 길을 내는 것은 이미 누군가 걸어간 길을 가는 것에 비해 몇 배는 힘들다. 하지만 그 길 끝에 '실패'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저자가 만난 9인의 삶이 오롯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지은이  이은


글 쓰고 영화 만드는 사람.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과 대중문화를 공부했다. 1년 반의 휴학기간 동안 세상을 알아보겠다는 미명하에 백댄서(연습생), 연예기획사 아르바이트, 할인마트 판매직, 잡지사 리포터 등으로 일하며 몸으로 살아내는 일을 깨쳤다. 스물여섯 늦깎이로 졸업한 후 지역의 시민단체와 대안교육 단체 일을 잠시 거쳐 첫 정규직으로 사보 취재 일을 했다. 성희롱에 문제 제기하며 2년 정도 다닌 직장을 그만둔 후, 프리랜서 기자로 수년간 여성지에 원고를 썼다. 잠시 연예부 기자로 외도하는 한편 틈틈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시나리오도 끄적이기 시작했다. 여성단체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와중 크고 작은 연극 공연도 올렸다. 노동방식에 대한 선택지와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이 훨씬 큰 세상을 꿈꾸며, 자본에 얽매이지 않은 여러 매체를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에세이집 《언니들, 집을 나가다》 기획
-안티 친족성폭력 다큐 <잔인한 나의, 홈> 제작·구성
-여성국극 다큐 <왕자가 된 소녀들> 마케터
-격주간 《빅이슈》 칼럼 ‘도시채집망’ 연재
-단편 극영화 <탱고와 스니커즈> 연출
-카페바인 운영위원

 

 

차례

 

추천사 | 삶의 형용구를 찾은 사람들
머리말 | 독립이라는 그 멀고도 지난한 여정

 

동물복지와 환경을 말하는 패션지, 《오보이!》가 들려주는 남다른 평화
-사진가, 《오보이!》 편집장 김현성

 

차디찬 시대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다
-신부, 저술가 차동엽

 

자본을 거슬러 더 생명에 맞닿은 삶을 기획하는 일
-카페 수카라 김수향

 

단순 명쾌한 배우의 삶, 소년과 청년 사이 어디쯤
-배우 이주승

 

인문학이 밥 먹여주는 세상, 인디고서원
-《Indigo》 편집장 박용준

 

천연가죽의 멋을 살린 핸드메이드 잡화 브랜드
-유르트 강윤주, 김영민

 

노력으로 꽃피운 팝핀댄서 듀오, 블루 웨일 브라더스
-팝핀댄서 팝핀제이, 크레이지 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반올림 노무사 이종란

 

사막의 바람을 거스르며 주류 영화계에 도전장을 내다
-영화 프로듀서 김효정

 

감사의 글 |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2013년 들어 첫 기사를 올립니다. 큰 희망을 품고 시작한 2013년의 1월이 그새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말에 '셀프 사면' '훈장 남발' 등으로 다시 한 번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암울한 상황이 여전한 때에 [독립, 하셨습니까?] 기사를 연재 중인 이은 씨가 생각비행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독자분들께 이렇게 인사를 전하고 싶답니다. "아마도 선거 결과에 많이 절망하고 계실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짓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생각비행도 같은 마음입니다. 하늘에서 복이 뚝 떨어지길 바라기 전에 우리 손으로 2013년 복을 많이 지어냅시다. 이번 기사는 <보이스 코리아>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많은 이를 깜짝 놀라게 했던 한 가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디션의 틈바구니에서
'요아리'라는 장르를 건져올리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 녹화장. 심사위원들의 의자가 무대 쪽이 아닌 객석을 향해 있다. 노래하는 1분 30초 동안 하나의 의자도 돌려세우지 못하면 그것으로 마지막이다. 그 시간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들려주어야 한다. 긴장했음이 역력한 한 참가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정적을 깨듯 전주가 흐른 뒤 100미터 경주처럼 노래의 피치를 올려간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듣는 이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노래였다. 몇 소절 듣지도 않은 채 '원조 아이돌' 강타가 벨을 눌러 의자를 돌렸다. 벌어지는 입을 감추지 못하며 가수 백지영, 신승훈, '리쌍'의 길도 연달아 의자를 돌렸다.


가수 타이틀 버리고 목소리로 띄운 승부수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깐깐한 심사위원 모두의 러브콜을 받은 참가자. 절박한 심정으로 부른 노래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과 시청자의 귀마저 사로잡았다. 힘 있는 목소리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단 한 번의 무대로 오디션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강미진_요아리’다. 


그는 아이유의 데뷔 초기 곡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미아>를 불렀다. 강미진_요아리는 올해 본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적인 도전자였다. 이 장면은 정말로 수십 번이나 돌려볼 만큼 극적이었다.

노래 실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2007년 스무 살에 데뷔, 실력파 록밴드 '스프링쿨러'의 보컬로 활약했다. 2010년에 솔로 앨범을 내기도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6개월 연습하고서 바로 데뷔했지만(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막상 가수가 되고 나서는 인기 가도를 달리지 못했다.

2012년 말에 발표한 신곡 <Lie>

독특한 음색 때문일까, 요아리의 노래는 소수의 팬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는 편이다. 함께 연습하던 동료가 대중가수로 승승장구할 때 지켜보는 입맛이 썼다. 같은 소속사인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멤버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걸그룹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5년이 넘도록 한 길에서 버텼지만, 언제까지 무작정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 오디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어요. 저는 프로니까 잘돼야 본전이고 떨어지면 망신이잖아요. 이번에 떨어지면 접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걸 포기하고 요아리란 예명이 아니라 본명인 강미진으로 나간 거예요. 아이유 씨 앨범을 들을 때 제 노래처럼 입에 감기는 느낌이어서 기회가 되면 불러보고 싶었는데, 사실 심사위원 네 분이 다 절 선택할 줄은 몰랐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듯이' 부분에서 마지막이라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던 것 같아요. 경쟁하는 건 무서웠지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요."

본격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초인 <슈퍼스타 K>와 뒤를 이은 공중파의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 <케이팝스타> 등 홍수처럼 수많은 오디션이 있었으나 요아리가 <보이스 코리아>(이하 <보코>)를 선택한 이유는 명백했다. 외모가 아닌 가창력만으로 뽑는다는 콘셉트 덕분에 <보코>에는 타오디션과 구별된 프로급 참가자가 대거 등장했다. 본선 첫 무대에 한정되기는 했으나 목소리만으로 진짜 노래 실력을 겨룬다는 점에서 <보코>는 신선했고 외모 때문에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한 '얼굴 없는 가수'들을 위한 장이 되었다. 생방송에서는 살짝 긴장감이 덜했지만, 토너먼트 식으로 둘씩 자웅을 겨루는 라이벌 매치의 긴장감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폭발 직전이었다. 실시간으로 투표하는 승부 예측마저 엇비슷해서 누가 떨어져도 아쉽지 않을 정도였다. 외모나 나이 때문에 아이돌이 되지 못해서, 가수가 될 만한 체구가 아니어서 쓴웃음을 삼키던 뮤지션들이 이때다 싶어 노래를 토해냈다.


가수의 재능 물려준 아버지를 향한 노래

강미진은 4강 문턱에서 아쉽게 좌절했지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만큼 얻은 것이 많았다. 늘 아쉬웠던 대중적 인지도를 고스란히 챙겼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가 새삼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자퇴하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편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그에게 노래는 다른 인생을 열어준 우연하지만 결정적인 기회였다. 그의 목소리에 무언가가 서려 있다고 말하는 데는 이런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19살 때 노래 대회에 나갔어요. 상품이 유럽여행권이었거든요. 노래를 배운 적도 없었는데 우승해서 고생하신 엄마 해외여행을 보내드렸어요. 남들한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게 노래라는 걸 알게 됐죠. 그때부터 운명을 믿기 시작한 것 같아요. 20살 때 인터넷에 '모나리자녀'로 UCC 영상을 올렸는데 그게 화제가 돼서 데뷔하게 됐어요. 길이 쉽게 열리니까 소중한 줄 모르고, 어렵게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인가 보다 했어요. 음반이 잘 안되면서 방황도 했고 음악적으로 철이 들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학교를 그만둔 후로는 늘 돈을 벌었다. 동대문에서 옷이나 신발을 팔고 미용실 스태프나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은 곧잘 했지만 아르바이트 급여로는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어쩌면 노래는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노래를 하면 늘 칭찬을 받았고, 운이 따랐고, 즐거웠다. 소질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타고난 것이었다. 어릴 적을 떠올리면 늘 "날 닮아 노래를 잘한다"며 좋아하시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보코> 마지막 무대에서 부른 노래가 인순이의 <아버지〉라는 노래였다. 리허설 때 너무 우는 바람에 감정을 빼고 부른 탓인지, 정작 생방송에서는 강미진 특유의 감성이 살아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후련했다. 마지막처럼 불렀고, 정말 마지막이었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진행형이니까.

"그 노래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때 아니면 언제 부를까 싶었어요. 아버지가 노래를 너무 잘 하셨대요. 가족들하고 놀러갈 때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꼭 시키셨어요. 5학년 때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아버지가 제 노래를 보실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고 싶었어요.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와서 웃겨주시고 그러니까 무대에서는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컸어요. 비록 떨어졌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제 음악을 궁금해 할 만큼은 한 것 같아요. 제가 자신 있는 노래나 고음으로만 승부하지도 않았고요."

우승은 스무 살 손승연에게 돌아갔다. 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부러워할 시간이 없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자신을 보여줄 준비를 해나갔다.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무엇보다 못 다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2년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싱글 앨범도 냈다. 그렇게 2012년이 바삐 지나갔다. 그의 곁에 아버지는 없지만 빈자리를 채워준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니, 톱클래스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윤일상이다(인터뷰로 만난 자리에서 그는 최고의 보컬리스트를 물을 때 '요아리'를 첫손에 꼽았다. 그래선지 요아리라는 가수의 존재가 더 궁금했다.)

"음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부자지요. 제가 데뷔할 때 회사 이사님이셨어요. 브아걸 콘서트에서 멤버 '미료'와 함께 축하 공연을 할 때 처음 보셨대요. 그때 밴드가 해체되어서 개인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활을 선물해주셨어요. 매일 나가는 연습 공간, 음악적 색깔에 대한 발언권을 주셨는데, 이십대 초반의 제겐 큰 경험이었어요. 제게 '충분히 예뻐' '살 그만 빼'라고 용기를 주세요. 그래서 더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2010년 처음으로 낸 싱글《저기요》

2010년, 싱글 《저기요》를 내면서 요아리는 삭발까지 했다. 귀엽기만 한 얼굴인데 밴드 보컬로 데뷔하면서 신비주의 전략으로 가면을 썼던 것이 패착이었다. 노래하는 이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여(성)가수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 앞에 신인 요아리의 자존감은 낮아졌다.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스프링쿨러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결국 홀로 서서 싱글 음반을 내며 요아리는 대중 앞에 결연하게 자신을 얘기했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은 <저기요> 뮤직비디오는 외모지상주의를 향한 저항의 방식이었다. 성형 대신 끝없는 도전과 변신을 꾀하면서 진학을 위해 짬짬이 공부하는 요아리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이다.


오디션이 주는 위로 혹은 냉혹함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력만으로 등용될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에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 그리고 대리 충족의 경험을 통해 초기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포맷 자체가 식상해진데다 억지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편집 때문에 도리어 프로그램에 꼭 필요한 긴장을 잃어버렸다. 한때는 오디션이 스타를 꿈꾸는 이들만이 아니라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많은 이에게 매력적인 기회와 희망을 건네줬지만, 이제는 누가 우승하는지가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느낌마저 든다.

요즘은 눈물겨운 사연에 뛰어난 노래 실력을 지닌 참가자보다는 소위 '엄친아' '엄친딸'로 불리는, 집안 좋고 외모도 뛰어난 이들이 더 높은 관심을 받는 경향이 있다. (올해 <슈퍼스타케이 4> 우승상금 5억 원이 모 주조회사의 2세인 로이킴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이 상금을 기부했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기존 소속사의 연습생 선발 프로그램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케이팝스타>는 가요 프로그램에 바로 데뷔할 만한 인재를 찾아내 갈고 닦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애초 '공정한 기회의 장'으로 연예기획사의 눈에 들지 못하던 사람들의 돌파구였던 오디션도 이미 기존 스타시스템의 구조 어딘가에 안착해버린 모양새다. 참가자들의 수준이 떨어지면서 '오디션의 수가 너무 많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최근 방송 중인 <케이팝스타 2>를 보면 십대 초중반 참가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현상도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형 인재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영향 때문에, 아이돌 가수를 인생의 모델로 삼아 차근차근 준비해온 꿈나무들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자신의 곡을 노래할 줄 아는 싱어송라이터처럼, 끝없는 경쟁과 대중의 사랑을 얻기 위한 분투에서 결국 살아남는 이는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가사를 쓰는 데 재능이 있는 요아리는 작사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혼자 노래방에 가서 아이돌 노래를 맘대로 편곡해 부르는 거란다. 언젠가는 이런 모습도 보여줄 것이다.

"미디움 템포의 켈리 클락슨이나 리드미컬한 케이티 페리, 댄스 팝이나 스트레이트 창법의 부드러운 록을 좋아해요. 비욘세처럼 춤을 춰도 노래가 들리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의상에도 관심이 많아서 소품 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가요계의 '낸시 랭'처럼 파격적인 것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 듣기 좋아요. 요아리라는 장르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라이브형 가수, 콘서트를 기다리게 하는 가수가 돼야죠. 남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노래에 미친' 가수요."

일렉트로닉이 가미된 록적인 사운드의 <맘에 드니?>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윤일상(키보드)이 직접 세션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강미진은 다시 요아리로 돌아왔다. 앨범 준비를 하며 틈틈이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나던 그가 1월 15일에 미니앨범 《맘에 드니?》를 발표했다. 타이틀곡 <맘에 드니>를 비롯, 전 곡을 윤일상이 작곡하고 대부분 요아리가 가사를 썼다. 아이 같으면서도 성숙함이 깃든 묘한 보이스, 힘 있는 진성의 고음과 절묘한 완급 조절, 록과 댄스음악을 종횡무진하는 요아리의 목소리. 삶은 그에게 손쉬운 성공이나 명예를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그 덕에 복잡다단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낼 줄 아는 아주 드문 음색을 갖게 되었다.

음악만 들으면 다소 '센' 인상이지만, 장난기 많은 소녀의 이미지도 엿보인다.

오디션 무대의 화려한 무대 뒤안을 보지 못하는 시청자로선 입이 벌어지게 하는 그의 노래 실력 뒤에 어느 만큼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요아리는 묵묵히 노래한다. 그만의 작은 희망을 위해. 요아리의 노래를 들으며 섣부르지 않게, 작은 희망을 품게 된 것도 그의 노래가 쉽지 않아서일 테다. 이제 다시 그의 노래를 만나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2012년 10월 7일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 센텀시티 문화홀에서 열린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플래시 포워드 부분 감독 프레젠테이션에서 지미 라루슈 감독은 "내 영화(<상처>)는 한 인간이 아동기에 겪은 상처가 인생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립, 하셨습니까?] 기사를 연재하고 있는 이은 씨가 <상처>를 관람하고 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아울러 풀어냈습니다. 지난번 연재 이후 오랜만에 올리는 글입니다. 내년에 상영될 친족 성폭력 다큐멘터리 <잔인한 나의, 홈> 제작 일정으로 연재가 늦어졌다고 합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다큐멘터리에 관심 있는 분들의 후원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상처〉를 대하는 태도,
지미 라루슈 감독에게 묻다

‘상처’는 삶의 복잡다단함을 보여주는 한편 삶을 직면하지 않을 핑계도 제공해준다. 때로는 삶의 중요한 순간을 은근슬쩍 피해 숨을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장치 아닌가 말이다. 그런 태도로 면피해온 것들을 근래 자주 느끼고 있다. 어릴 적 누구에게나 일상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가정에서 혈연가족이 가하는 폭력은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지난 상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상처와 불화하게 되는 것은 그 후폭풍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한 편의 영화에 이끌려 부산으로

애초 부산에 갈 계획은 없었다. 화려한 레드카펫, 국경을 가로지르는 거장의 영화, 밤마다 넘실대는 술잔…. 영화 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나와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가치관이 비슷한 이들과 마음이 움직이는 일만 하다 보니, 그중에서도 독립의 독립, 자본과 무관한 작품들이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영화가 관객과 만나도록 기획하는 일로 바삐 움직인 터라 정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부산국제영화제에는 (관객으로도) 가본 적이 없었다.

<상처>의 메인 포스터. 붉은 색감이 무척 강렬하다. 묵직하게 쓰여진 시놉시스는 또 어떻고! 하지만 영화는 붉은 빛보다 잿빛에 가깝다. 

"잘못된 인생에서 미래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씻을 수 없는 상처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듯, 리차드의 어린 시절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의 상처는 그의 인생을 알게 모르게 바꾸어놓는다. 삼십 년이 지난 후, 그는 복수를 위해 그 장소를 다시 찾고,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는 순간을 강렬한 심리적 서스펜스로 그려낸다."

영화 <상처>의 시놉시스를 보는 순간, 나의 무의식과 의식이 한달음에 '꼭 봐야 할 영화'라며 소리쳤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새벽기차를 타고 내려가 조조로 영화를 보고야 말았으니, 근래 드물게 유별난 끌림이었다. '트라우마 상담'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살아온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와중에 소란스럽던 내면이 조금 정리되는 경험을 했는데, 그 어딘가 영화가 와 닿을 것 같아서였다. 상처 많은 사람이라 여기며 실상 그 이름에 스스로를 가둔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걸 조금씩 깨닫던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심신이 온전히 자라기 이전이므로 별 뜻 없이 저지른 일들이 큰 상처로 남아 평생의 무게가 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사건의 영향력이나 피해에 비해 빨리 아무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 아주 큰 트라우마를 겪고서도 남을 돕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예를 왕왕 볼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연쇄 살인범이라도 매 순간이 상처의 기억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듯,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꼭 사람을 혐오하는 성인으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상처나 사건 자체보다는 그 후의 처치나 오랜 시간의 관리(혹은 치유), 그리고 자라나며 접하는 환경이란 변수가 꽤 크게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과정이 쉽거나 자연스레 이뤄질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도리어 내면에 괴물을 키워낼 수도 있다. 꼭 가족이나 가까운 이가 아니라도 마음의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가 있다면 상처는 치유의 길로 시나브로 접어든다.

영화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상처>는 매우 현실적으로 등장인물, 가해 혹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판타지를 접목해 인물들의 정서를 놀랄 만큼 세세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예측하지 못한 결말까지 숨도 못 쉬도록 몰아붙이는 촘촘한 솜씨에 소름이 돋을 정도.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던 감독의 이중적 경험을 캐릭터의 감정으로 탄탄히 쌓아올렸기 때문이리라.

30년 전의 리차드와 폴, 그리고 폴의 친구들. 둘 사이의 권력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리차드도 그들 중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폭력이었다. 

극 중 리차드는 창고에서 린치를 당하고 돌아오지만 싸늘한 집안 공기에 혼자 마음을 쓸어내린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와의 불화로 어머니가 떠난 후였다. 감싸 안아줄 이가 없었던 그의 마음은 점점 황폐해지고 그조차 마음의 빗장을 열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상담이나 도움을 받으려 해보지만 상처는 봉합되지 않고 커져만 갔다. 한편 리차드를 집요하게 괴롭힌 폴에게는 위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는 타인의 고통에 이입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리차드는 아들과 부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는 폴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긴다. 창고에서 재현되는 폭력적 상황은 판타지와 실재를 오가며 그의 분열된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30년 후, 창고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용서와 화해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결말은 기대를 처참하게 배반한다.


상처를 증폭시키거나 잦아들게 하는 것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엄마'의 부재 때문으로 그려지지만 실상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린 아이를 누군가 때렸다고 치자.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의 부재라는 근원적인 원인이 있지만, 실상 폭력을 직접 유발한 것은 친구의 놀림이다. 아이에게 엄마의 부재가 트라우마일 수는 있지만, 이를 거론하며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자신이 어쩌지 못할 상황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절망한 아이는 계속 주먹을 휘두르거나 그러다 때때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연쇄구조를 뷰파인더에 담으며 감독은 냉랭할 만큼 거리를 둔다.

도움의 손길에도 폭력으로 대응하는 리차드는(이는 도와주려던 이를 물어뜯는 개의 모습으로 대변된다), 물어뜯긴 자국이 마음으로 번져 통제하지 못할 무기력에 휩싸인다. 감독 혹은 리차드는 30년 전의 사건을 호출하고, 그곳으로 가해한 친구를 데려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며 어떻게든 고통을 '해결'하려 발버둥친다. '복수'를 계획했다는 사실이 그 절박한 마음을 대변한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강함으로 가리며 살아온 폴에게 그 사건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폭력의 결과로 마음이 망가진 리차드의 항변도 그에겐 '약해빠진 놈들의 핑계'로 치부될 뿐이다. 실패한 복수는 삶의 의지마저 앗아간다.

혼자가 된 리차드. 아내도 아들도 그를 외면한다. 배우 마크 비랜드(Marc Beland)는 드라마 시리즈의 주연 배우로,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잘 표현했다.   
 
나는 처음에 이 이야기가 실패한 복수, 탈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씹어보니 그저 절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벗어나기를 포기한 게 아니라,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쓸수록 더욱 그것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하지만 "영화의 절반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고백한 감독은 장난꾸러기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두운 절반을 영화에 쏟아붓고 나니 조금은 홀가분해진 것일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을 익힌 그는 렌즈를 통과한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드러내었다. 그만한 거리를 둘 수 있게 됐다는 뜻일 터.

지미 라루슈 감독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었어요. 다행히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지만 어머니의 부재를 매 순간 느꼈어요. 체구가 크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고 싸우기도 많이 했어요. 그러지 않게 된 건, 아마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게 된 무렵인 것 같습니다. <상처>는 이전에 만든 두 개의 단편을 이어 더 풍성하게 만든 영화고요."

아쉽게도 그의 영화가 거친 폭력을 연상(오해이긴 하지만)시켰는지, 평단이나 관객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작은' 영화들은 사실 영화제의 상영작 수를 채우고 가끔 의외의 발견을 위해 존재할 뿐, 스포트라이트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라인업에서 정해진다. 영화제의 위상에 걸맞은 영화를 프로그래밍하고 추천작으로 선정하고 스타들을 레드카펫에 세워 시선을 끄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도 적은 예산(총 제작비가 1,100달러, 약 1억 2000만 원의 저예산 영화)으로 영화를 만들기가 녹록하지 않은 것은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그렇다고 그 성취가 크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애 첫 장편영화인데, 영화제에서 초청해주어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사비와 프로듀서의 출연으로 제작했는데 개런티에 무관하게 배우들이 출연해주었어요. 덕분에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어요."

아무리 자전적인 이야기로 만든 영화라도 '극영화'임이 분명한데, 나는 자꾸 만든 이의 '삶'에 집중해 이야기를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보니 극영화와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고, 영화를 통해 만든 이의 삶 혹은 정서를 들여다보게 되는 태도로 영화를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 읽기가 갈수록 어렵다. 삶과 영화의 경계, 감상과 성찰의 경계, 영화 속 삶과 영화 밖 삶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 점점 무거워지는 까닭이다.


아마도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상처는 상처에 의해 증폭되거나 묻히거나 혹은 해결되기도 한다. 갈 곳 잃은 상처야말로 가장 위험한 종류의 내상이라고 생각한다.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자원이라고 여기는 것도 과언은 아닐 터. 포기하는 것조차 선택일 수 있지만 돌이킬 기회가 있을 때에야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수잔 브라이슨이 쓴 책,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에 나오는 문구로 글을 맺어야겠다.

"트라우마 생존자의 목표는 무엇일까?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트라우마를 초월하는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 희생자가 겪는 생존자의 딜레마를 푸는 것도 아닌 단지 견뎌내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그저 견뎌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일 수 있다.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살아야만 해'라는 매일 매일 반복되는 (사무엘) 베케트적 딜레마를 푸는 것이 얼마나 자신들을 지치게 하는 일인지 잘 이해한다."

어쨌거나 삶도, 영화도 계속된다. 내놓을 용기가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묻어두려 하지만 않으면 어떤 상처라 하더라도 응당한 대가를 돌려준다고 '믿는다'. 감독의 다음 영화가 코미디라는 사실이 지금으로서는 의미심장하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저희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이은 씨와 함께 <독립, 하셨습니까?>라는 꼭지로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꿈을 펼치는 일의 연장선에서 글을 써보려 한다... 인터뷰와 문화 리뷰+칼럼이 뒤섞여 모호하지만, 어딘가로부터 독립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글이랄까. 내가 면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자본으로부터의 철저한 독립, 대중성 없음, 알아주는 이 적으나 열광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보편에 기대는 이야기들은 아닐 것이다"라는 기획의도에서 앞으로 어떤 글이 나올지 짐작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달에 대략 두 명 정도를 인터뷰하여 다양한 문화계 인사가 살아가는 모습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독립, 하셨습니까?> 꼭지의 기획의도를 풀어낸 글을 싣습니다. 다음 주엔 영화 <조선명탐정> <의뢰인>의 제작자이자 첫 장편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감독, 19살 연하의 동성애인과 결혼선언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조광수의 삶을 소개합니다.

 1. <당연한 명제에서 열린 결말으로>
 2. <동성애와 드라마의 행복한 공존, 김조광수의 영화 두결한장> 

흔해빠진 세 개의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넌 꿈이 뭐니?"
"한 해 수입이 얼마나 되시나요?"
"그렇게 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겠어?"

첫째 질문의 유효기간은 아마도 대학을 졸업하는 즈음까지일 것이다. 대체로 20대 중후반, '어른이 되어 자신의 두 발로 서기'를 강요(?)당하는 시기. 이 질문을 더 받지 않게 된 시점을 돌이켜보면, 아마 무언가를 전업(그러니까 풀타임)으로 하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밥벌이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붓고, 그 대가로 보통의 삶을 영위하고, 또 그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과정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야 하는 굴레'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 기준이 늘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인데, 늘 묘한 박탈감 혹은 경쟁심이 짝패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질문은 요즘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묻는 말이란다. 선을 본 적이 없는 나는 대놓고 이런 질문을 하거나 받은 적이 없지만 이 질문이 오가는 장면을 떠올릴라치면 시쳇말로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믿지 않는 판에 서로의 외모와 조건(연봉부터 가정환경까지)을 검증한 다음 결혼을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은 도무지 신뢰가 가질 않는다.

사실 셋째 질문은 둘째 질문을 거쳐 결혼에 골인한 이후에도 수시로 들어야 하는데, 다년간 여성들이 주로 보는 잡지에 글을 써온 입장에서 '적어도 남들만큼'이라는 강박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서 극대화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아이를 잘 키우는 비법이나 필수품 같은 것들은 맞벌이로 아이를 충분히 돌보지 못하는 양육자의 부채감을 한껏 자극하는데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한 꺼풀 벗기면 탐욕스레 벌어진 현금투입기와도 같더란 말이다. 끊임없이 돈을 버는데도 늘 가난하다고 느끼고 자산만큼 빚도 늘어나야 신용등급이 올라가는 기묘한 세상.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는데 꼭 저래야 하나, 싶었다.

당연한 명제에서 열린 결말으로 

어쨌거나 세간의 질문에 동의하거나 적당히 순서를 밟으며 살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씩 다른 선택을 시작했고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내가 유일하게 묻고 또 답하는 질문으로 1번이 남아 있다. 사실 한순간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 일을 멈추지 않은 것뿐인데.

대학 진학을 계기로 원 가족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갖게 된 지 대략 수년, 어느 때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사람을 만나 글을 썼고, 또 몇 년이 지나니 인권단체의 활동가가 돼 있었으며 언젠가부터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돈 안 되는 일만 하면서도 먹고살 돈은 열심히 벌었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고 (사교육 전무에 등록금 대출도 다 갚은 지 오래니 부채감이 없다) 2년마다 이사를 하면서도 내 공간만큼은 꾸려가고 있다.

세상엔 뼛속 깊이 존경할 만한 사람도, 무조건 경멸할 만한 사람도 드물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절감한다. 너무나 당연한 명제가 내겐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열린 결말에도 익숙해졌다.

세상에 당연한 일만 있는 건 아니더라는 아주 새삼스러운 기분.
새삼 뒤집어보기 시작했는데 크게 위험할 것도 없던데 뭘.
이렇게 나는 다소간 위험한 여자가 되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대체 뭐가 되고 싶은데? 묻는 이들을 위해 대답을 해야겠다. 글쎄, 십 년쯤 후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겠지만 지금 주로 쓰는 인터뷰보단 조금 더 창의적인 작업이었으면 한다. 직접 쓴 글로 연극무대를 꾸미고, 영화작업을 해나갈 수 있길 바란다. 연기도 계속하고 싶고 그때엔 고료도 (제발 좀!) 올라서 부업으로 가끔 기고하는 것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길. 더 넓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 여전히 옳다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손발을 놀리면서도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몸도 마음도 건강했으면. 사실 이게 거의 전부다. 실은 욕심이 없는 게 아니고 아주 많은 거다!

자본, 가부장제가 쓴 각본 뒤집기 

어쨌거나 꿈을 펼치는 일의 연장선에서 글을 써보려 한다. 꼭지명은 <독립, 하셨습니까?>. 인터뷰와 문화 리뷰+칼럼이 뒤섞여 모호하지만, 어딘가로부터 독립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글이랄까. 내가 면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자본으로부터의 철저한 독립, 대중성 없음, 알아주는 이 적으나 열광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보편에 기대는 이야기들은 아닐 것이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뒤집어보는 경험에서부터 사람은 성장하고, 무언가를 보는 안목 또한 길러진다고 믿기에 나는 가능한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것이고,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글을 쓸 것이며, 나 역시 그렇게 살 것이다. (드문 가능성이지만) 돈을 많이 벌거나 더 이상 누군가의 불편함을 살피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서게 된다 해도 이 글을 시작하는 마음만은 절대 놓지 않으리란 다짐도 더해서.  

무가지에 공짜로 안겨주는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니, 평론가라도 되는 양 날카로운 관점이나 전문 지식에 기대기보다는 조금 더 의미가 있고 마음을 울리는 것들에 대해 써보련다. 작지만 소중하거나 더 아름다운 가치에 대해 한 겹의 소박한 포장만 하는 글을 쓰리라. 그것이 읽는 이들에게도 자그마한 공명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이 글이 누군가의 꿈에 밑그림이 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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