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과 집필진이 공개되었습니다. 역시나 집필진 31명 중에 뉴라이트 활동 이력이 있거나 박근혜 정부를 찬양하는 학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가의 독단에 의해 만들어진 우편향 교과서라는 우려가 현실이 된 겁니다.


출처 - 세계일보


교육부는 28일 교육부 국정 역사교과서 특설 페이지에 현장검토본을 공개하며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혼이 비정상"인 정부가 "무당에게 홀려" 만든 교과서가 올바르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일단 그래도 살펴보기는 해야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 수 있겠죠.





교육부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특설 페이지(교육부) : http://www.moe.go.kr/history/real_index.jsp?



국정 역사교과서는 이북 형태로 전용 웹사이트에서 받아볼 수 있습니다. 교육부는 각 시도 교육청에 현장 검토본을 택배로 배포해 한 달간 각계의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의견을 내려면 공인인증서나 휴대전화, 아이핀 등으로 전용 웹사이트에서 본인 인증을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참 시대에 뒤떨어진 의견 수렴 방법입니다. 이건 사람들을 귀찮게 만들어 의견을 받지 않겠다는 심보 아니면 비판하는 이의 정체를 낱낱이 파악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 아닌가 싶군요.


출처 - 세계일보


이번에 공개된 집필진을 살펴보면 참으로 가관입니다. 특히 초미의 관심사였던 현대사 집필에 참여한 학자 6명 중 역사학자는 단 한 명도 없어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역사학자가 쓰지 않은 역사교과서라니 대체 말이 됩니까? 그나마도 현대사를 집필한 학자 6명은 경제, 법, 북한학, 정치외교학, 군사학 전공자들이라 대체 무슨 정신으로 역사교과서를 쓰겠다고 덤벼들었을까 싶은 면면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를 위해 역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싶었나 봅니다. 현대사 집필진 과반인 4명은 뉴라이트 단체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잘살 수 있게 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한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이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격 미달의 우편향 인사들만으로 집필된 이유는 지난해 국정화 논란 당시 역사학자 대부분이 국정교과서 집필을 거부해 집필진이 급조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집필을 거부한 역사교과서라니 감이 딱 오지 않습니까?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 필진들이 제대로 된 원고를 쓰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이른바 국정교과서 대필 의혹이 제기된 겁니다. 원래 집필진은 초고본, 개고본, 최종본 총 3번의 원고를 넘기는데 그때마다 심의를 받습니다. 이 심의는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들이 맡기 때문에 원래 국사편찬위원회 직원들이 간여할 여지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국정 역사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직원들이 초고를 거의 다시 쓰다시피 수정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죠. 지난해 국정교과서 논란으로 역사학계가 국정교과서에 부역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자 시간과 인력 풀이 부족해지자 박근혜 정부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집필진을 모았기 때문에 집필진 역량이 상당히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지난 5월 초고를 받아보니 자기들이 보기에도 도저히 교과서로는 쓸 수 없는 수준의 졸문이 들어왔다고 하네요. 시간상 다시 작업할 수도 없으니 국사편찬위원회 직원들이 동원돼 대대적으로 고쳐 쓴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국정 역사교과서의 저작권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있다고 하더라도 집필진이 아닌 편집진이 거의 책을 다시 쓰는 수준으로 손을 본 셈입니다. 이럴 거면 집필진은 왜 있고, 심의위원은 왜 있습니까? 국정 역사교과서는 국정 논란 이전에 교과서 그 자체로서의 질도 떨어진다는 증거입니다.


출처 - 세계일보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가 이 정도로 심각하니 내용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국정 역사교과서는 건국절 타령으로 현대사를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란 표현 대신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대한민국 수립일을 헌법 전문에 기술된 1919년 3월 1일이 아닌 1948년 8월 15일로 왜곡한 겁니다. 이는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건데요. 그렇게 되면 과거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은 면죄부를 받게 되어 친일 행적이 희석됩니다. 1948년 8월 15일 이전에 있던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게 되니까요.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가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를 위해 싸웠던 게 되고, 친일파들은 대한민국이 아닌 나라에서 부역한 셈이니 대한민국에 죄를 지은 건 아니게 되는 이상한 논리가 생기죠.


출처 - 브릿지경제


이승만, 박정희 역시 지나치게 미화됐습니다. 한미 상호방위 조약 체결의 역사적 의미나 민주화 운동은 경제, 사회 발전 과정에서 국민의 자각으로부터 비롯됐다는 표현은 일견 맞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슬쩍 넘기고 사회가 그냥 발전해서 일어난 일인 양 치부하고 있습니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가장 안 좋은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견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으로 학생들을 현혹하지만 실상 뜯어보면 이는 친일파에 대한 면죄부와 독재에 대한 찬양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치 박근혜를 현혹한 최태민, 최순실처럼 말이죠. 참 교활하죠.


출처 -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와 교육부, 새누리당은 문제를 만들어놓고도 대한민국의 긍지를 일깨우는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학계의 권위자들, 전문가, 현장 교사들이 참여해 만든 최선의 결과물이라고 말입니다. 나라를 말아먹는 철면피들이 지금 같은 시국에서도 참 강심장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국정 역사교과서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야 3당은 국정 역사교과서를 친일, 독재 미화 교과서로 규정하고 국정 역사교과서가 강행될 경우 교육부 장관 해임, 교육부 폐지 등 가능한 모든 조처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시민단체들도 하나같이 반헌법적 건국절 사관에 입각해 집필한 국정 역사교과서를 당장 폐기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완결판 같은 역사교과서이기 때문이죠.


이뿐 아니라 일선 학교에 국정 역사교과서를 배포해야 할 전국 시도 교육감들도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서울, 경기, 광주, 충북, 경남 등 진보교육감들은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공개본에 대해 친일, 독재를 미화했다며 폐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란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한 퇴행적 행위이기 때문에 교육부에서 주도하는 국정교과서 검토본의 검토 과정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주도한 역사교과서는 원칙적으로 잘못됐기 때문에 검토할 가치도 없다는 거죠. 출판계에서는 국정 교과서를 대체할 대안 교과서를 잇달아 출간하고 있습니다. 현장 교사와 역사학자 등이 모여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출판하는 등 역사 교육의 다양성만큼 출판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 25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 방침을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사실상 박근혜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며 청와대는 뇌사 상태에 빠졌음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이후 일선 학교에서 국정교과서와 검정, 대안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게 하면 어떻겠냐는 조삼모사 같은 제안 정도로 밝혀지긴 했지만, 이 역시 청와대와 조율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교육부를 통제할 힘조차 없는 것이 청와대의 현실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이렇게 논란이 큰 박근혜 정부 안에서도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일이 진행되다 보니 고스란히 피해는 학생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수정본이 마련된다 하더라도 어쨌든 국정 역사교과서는 이미 국민들이 거부했고, 직접적으로는 교육감들이 배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년 학생들은 역사교과서 없이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를 혼용하거나 지난 검정 교과서를 쓰면 되지 않나 싶지만, 현재 대통령령에 국정교과서가 있을 때는 국정교과서로만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니 국정교과서를 무효화하려면 대통령령부터 바꿔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세계사를 먼저 가르치자는 방안까지 나오고 있죠.


출처 - 뉴스1


자신들의 치부 가리기와 이권 따먹기에 급급해 무리하게 진행해온 국정 역사교과서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그 동력을 잃고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친일 독재 세력의 생명력은 무척이나 질깁니다. 국정교과서가 실제로 사라지고, 박근혜와 이 사태의 책임자들이 처벌받는 그 순간까지 신경을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순간이 미래 역사교과서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최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폄훼하는 게시물을 올려 사회적 논란을 촉발한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 광고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간 일베에는 리얼클릭, 구글 애드센스, 미디어나루 등 인터넷 광고대행업체들이 광고를 게재하고 있었습니다. 광고대행사 리얼클릭은 22일 공지글을 통해 "제휴 매체 일간베스트에서 역사인식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유해 정보가 많이 올라오고 있어 광고주와 인터넷 유저들을 보호하기 위해 광고를 차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간베스트저장소

보수 우파의 집결지로 불리며 파워 사이트로 떠오르고 있는 일베 커뮤니티 회원을 얼마 전 국가정보원이 안보 특강에 초청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일베 회원들이 인터넷에 공개한 국정원의 초청장에 따르면, 국정원은 일베 회원을 포함해 간첩 신고를 한 보수 누리꾼들을 뽑아 오는 24일 열리는 국정원 안보 특강에 초청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갑자기 각종 뉴스를 선점한 '일베' 현상,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요? 도현신 작가의 [어제, 오늘, 내일 2]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봅니다.   

전효성의 '민주화' 발언으로 부각된 일베 현상

얼마 전, 떠들썩한 소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2013년 5월 14일, SBS 라디오 프로그램 <최화정의 파워타임>에 출연한 아이돌 그룹 시크릿의 전효성이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라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한 발언이 구설수에 오른 것입니다. 전효성이 “민주화”라는 단어를 쓴 맥락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남을 괴롭힌다는 나쁜 뜻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적으로 만든다는 뜻인 민주화라는 단어가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나쁜 말로 쓰이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주위로부터 반발과 비판이 거세지자 전효성은 뒤늦게 사과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실언으로 번진 파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대체 전효성은 무슨 생각에서 민주화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말했던 것일까요? 그것이 전효성 개인이 처음 한 발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화를 나쁜 말로 쓰는 어법의 출처는 일간베스트저장소, 줄여서 ‘일베’라고 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입니다.

일베는 원래 다른 인터넷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 줄여서 ‘디시’에서 갈라져 나온 곳입니다. 일베의 모태가 된 디시라는 커뮤니티에 관해 잠시나마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디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회로 수많은 누리꾼의 방문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한때 한국 인터넷을 대표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로 꼽혔습니다. 초창기의 디시는 상당히 좋은 사이트였습니다. 디시 접속자들은 서로를 불교에서 도를 닦는 승려를 뜻하는 용어를 변용한 ‘햏자’라는 호칭으로 대하며 존중해주었죠.

2002년 디시에 연재된 만화, <햏자의 역습>. 이 무렵, 디시 접속자들의 매너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았고, 사이트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이런 디시는 2005년 이후부터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존댓말이 사라지고 반말과 욕설이 나타났고, 특정 지역(전라도와 대구 등)을 모욕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게시물이 마구 올라왔던 것입니다. 당시 사이트 운영자들은 이런 사태를 막거나 엄히 다스리기는커녕, 오히려 악성 게시물을 올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디시의 타락을 방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디시에는 양식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특정 지역과 여성들을 모독하는 게시물들은 윤리적으로 나쁘니 삭제하도록 요청해서 지워졌습니다. 그러자 “그냥 재미 삼아 인터넷에서 하는 말들인데 왜 지우냐?” 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따로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디시에서 삭제된 문제 게시물들을 다시 올렸습니다. 일베의 모태가 된 디시도 2010년 무렵에는 막말과 욕설, 비속어가 들끓는 등 그다지 좋은 사이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디시에서도 감당하지 못해 삭제된 게시물들을 모아 놓은 곳이 바로 일베였으니, 이런 유래를 본다면 일베라는 사이트 자체가 애초에 잘못된 출발을 한 곳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일베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베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그리고 ‘일베’라는 사이트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를 놓고 많은 사람이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더라도 “일베는 인터넷의 익명성을 바탕으로 마구 날뛰는 악성 네티즌들의 집단”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지금은 안 쓰지만, 한때 ‘키보드 워리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상 정보가 닉네임 속에 완전히 가려진 인터넷의 특성을 악용하여, 다른 누리꾼에게 욕설과 인신공격을 퍼부으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이런 악성 누리꾼들은 인터넷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피시통신이 운영되던 1990년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어느 여중생이 “너는 걸레”라는 욕설을 듣고 충격에 빠져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뉴스도 있었지요.

일베도 근본적으로 이런 악성 누리꾼들이 모인 사이트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규모와 이용자 수가 다른 인터넷 공간보다 훨씬 방대하다는 것뿐이죠. 자신의 신분이 철저하게 비밀이니,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불이익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익명성을 근거로 평소에는 사회의 도덕적 제약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하던 말들을 인터넷에 대고 마구 쏟아내는 곳이 바로 일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베 회원들은 사이트 내에서 어떤 도덕이나 윤리적인 제약도 지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씹선비”라는 모욕적인 말로 부르며 조롱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인터넷은 어차피 가상공간이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마음껏 해도 되는 곳인데 무엇 때문에 현실 세계의 예의나 도덕 같은 귀찮은 제약에 얽매이느냐, 그런 자들은 착한 척하는 더러운 위선자들이다, 라는 겁니다.

일베에 온갖 패륜적인 게시물들―강아지와 수간을 하고, 6살 난 조선족 여자 아이를 집단 강간하러 모의하며, 자신들을 비판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딸을 스토킹 모의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원정녀(매춘부)라고 부르며, 한국 여성들을 김치녀로 혐오하고, 전라도 사람들을 가리켜 홍어 냄새난다면서 다 죽여야 한다는 등―이 마구 올라오는 이유도 바로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댔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비판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딸을 스토킹하겠다고 글을 올린 일베 회원들

그렇다면 일베 회원들이 욕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는 대상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한국의 독재자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 일베 회원들이지만, 아직까지 이 세 사람에 대한 비방 게시물이 올라오거나 베스트로 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전두환을 전땅크라 부르며 우상화하는 일베 회원들이 만든 그림. 그들은 전두환이 저지른 광주 학살을 알고도 오히려 잘 죽였다며 무자비한 폭력을 찬양한다.

어째서일까요? 일베 회원들이 저 세 독재자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몰라서 저러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저지른 국가적 폭력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에 대해 분노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열렬히 찬양합니다. 한 예로 일베 회원들은 전두환 일당이 저지른 광주 학살에서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진을 보고는 “전땅크, 부릉부릉, 홍어들 냄새난다”고 댓글을 달며 신군부의 살인을 찬양하고 광주 시민을 조롱합니다.

일베 회원들이 쓰는 말들, 모두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쓸 수 없는 수준이다. (출처: JTBC)

독재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숭상한다면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정치인들(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을 일베 회원들은 어떻게 볼까요? 극렬히 증오합니다. 그중에서도 일베 회원들이 제일 미워하는 대상은 바로 민주화 진영에 속한 정치인인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일베에서는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가 바로 김대중과 노무현 때문에 벌어졌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김대중과 노무현을 욕하는 것이 일베 회원들의 모습입니다.

일베 회원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욕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이 평생 추구해왔던 가치인 민주주의마저 부정합니다. 일베에서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는 모든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말로 쓰입니다. 글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가수 전효성이 자기들 그룹이 민주화를 시키지 않는다고 한 말은 원래는 일베에서 쓰이던 표현이었습니다.

일베 회원들이 민주주의 자체를 증오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어떤 게시물의 밑에 그것을 반대하는 버튼의 이름을 ‘민주화’라고 붙인 것입니다.

게시물 밑의 반대 버튼 이름을 민주화라고 붙여놓은 일베 사이트

이것이 일베 회원들의 핵심 정체성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개발 독재자들은 찬양하면서 민주화를 추진한 김대중과 노무현 같은 정치인들은 증오하고 있는 겁니다.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하며 폭력을 휘두른 독재자들을 좋아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한 정치인들은 미워하는 일베 회원들.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원래 일베라는 사이트 자체가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쓸 수 없었던 반도덕적이고 패륜적인 게시물을 모아놓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일베를 만들고 이용하는 누리꾼들은 ‘도덕’이라는 가치관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가치인 민주화를 추구한 정치인들을 위선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나쁜 놈이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또한 일베 회원들은 도덕적인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분출하는 행위 자체를 즐깁니다. 그러니 무자비한 학살과 폭력을 휘두른 독재자들을 솔직하고 진실하다고 보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다른 관점에서, 일베 회원들은 약자를 혐오하고 힘을 숭배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미워하는 대상들은 하나같이 한국 사회에서 약한 집단입니다. 전라도는 박정희 시절부터 차별을 받았고, 한국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 우월주의의 희생양이었으며, 김대중과 노무현은 한국의 주류 권력 집단과 보수 언론으로부터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약자들이었죠. 반면 일베 회원들이 찬양하는 독재자들은 모두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강자들입니다.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쫓겨났지만 아직도 뉴라이트 같은 보수 단체들로부터 국부 대접을 받고 있으며, 박정희는 죽어서도 국민이 제일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인식되고 있고, 그의 딸이 2013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은 권좌에서 밀려났지만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 일가족이 상류층에 편입되어 떵떵거리고 있으며, 황제 경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부의 보호도 받고 있습니다. 독재자들을 추종했던 세력은 지금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 집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베 회원들의 눈에 세 독재자가 절대 강자로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약자를 미워하고 힘을 숭상하는 집단이라니, 왠지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독일의 나치가 바로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나치의 우두머리인 히틀러는 이 세상에는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을 권리가 있으며, 약자들은 존재할 자격도 없으니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독일 국민 중에서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 및 장애인 같은 약자들은 국가에 부담만 주는 쓸데없는 방해물이라고 여겨 모조리 독극물로 독살해 버렸습니다. 일베 회원들은 히틀러 같은 극악무도한 파시스트 독재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걸까요?

일베는 사회 실패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일베가 악명을 떨치자, 이를 분석하는 사람 중에 “크게 문제 삼을 것 없다. 일베는 어차피 가난한 저학력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별 볼일 없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베를 단순히 사회 부적응자들의 모임 정도로 보는 인식은 너무나 안이합니다. 일베는 저소득층이나 저학력자들만 가려서 받는 사이트가 아닙니다. 일베를 이용하는 사람 중에는 예전에 진중권 씨와 토론을 벌인 ‘간결’ 같이 하버드로 유학 갈 정도의 고학력자도 있으며, 국정원과 깊은 관계를 가진 정규직 종사자도 많습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예전에 운동권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된 임수경 씨의 아들이 죽었다는 인터넷 뉴스 기사에 “잘 죽었다” “꼴 좋다”는 식의 악성 댓글을 단 누리꾼들은 철없는 청소년이 아니라 대기업 간부와 중소기업 사장과 같이 지극이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 말한 것처럼, ‘악의 평범성’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했지요.

이러한 이유로 저는 일베 현상이 두렵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일베 같은 사이트에 열광한다는 것은, 곧 보통 사람들 사이로 파시즘이 자연스레 스며든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의 역사가 마크 마조어가 그의 저서인 《암흑의 대륙》에서 밝힌 사실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대부분의 유럽 젊은이가 파시즘의 강렬한 매력에 자발적으로 매료되었으며, 경제대공황 등의 위기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무능하다고 여겨 혐오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 당시 유럽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요? 일베에 제일 많이 접속하는 계층은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인데, 이들이 독재자를 찬양하고 민주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면, 자발적으로 파시즘에 환호하고 민주주의를 경멸했던 유럽 젊은이들을 흉내낸다는 지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일베의 하루 접속자 수는 400~500만에 이릅니다. 대략 우리나라 인구의 10퍼센트 정도가 매일 일베에 접속한다면, 이는 그저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한국의 보수 세력과 일베의 결탁 현상

지금은 잠잠하지만 작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민주당은 국정원이 전국 70여 개의 비밀 지점에서 ‘오늘의 유머’ 같은 국내의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박근혜 후보를 찬양하고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리는 이른바 댓글 정치 공작을 벌여왔다고 폭로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정원 여직원이 머물고 있다는 강남의 한 오피스텔을 습격해, 어서 나오라고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지요. 거의 이틀을 버틴 끝에 여직원은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대선을 이틀 앞둔 시점에서 조사를 벌인 경찰은 민주당이 문제 삼은 대선 관련 게시물을 그 여직원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적이 없다는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대선이 끝나고 나서 경찰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정원 여직원은 이명박 정권을 옹호하고 북한과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게시물을 오늘의 유머에 무려 91건이나 올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국정원 직원과 일베 회원이 손잡고 정치 관련 게시물들을 인터넷 사이트에 계속 퍼다 날랐다는 보도. (출처: JTBC)

더욱 놀라운 사실은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이 ‘대북 심리 정보국’이라는 별도의 부서까지 만들어가며, ‘오늘의 유머’와 ‘보배드림’과 ‘뽐뿌닷컴’ 같은 국내의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다 국정원 여직원이 한 것과 똑같은 일을 집중적으로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부 기관이 개입된 정치 공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국정원 여직원은 일베의 회원인 이모 씨와 함께 일베의 글을 오늘의 유머에 여러 번 인용했으며, 자신이 만든 아이디를 5개나 빌려주었다고 합니다(2013년 5월 6일 JTBC 방송 내용). 이렇게 보면 일베가 단순한 유머 사이트로 머물지 않고, 국정원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 세력과 손잡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염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올해 2월 28일, 국정원은 일베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극우 논객인 변희재 씨를 초청해 국정원 직원들을 상대로 종북주의자를 비판하는 내용의 강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또한 5월 24일, 국정원은 일베 회원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상품권과 시계를 선물하는 행사까지 열었습니다.

국정원에서 초청 전화가 왔다고 말하는 일베 회원


일각에서는 일베의 서버가 디도스 트래픽이 40기가까지 초과되었는데도 이를 막아냈다는 점을 들어서 혹시 일베가 국정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서 운영되고 있는 사이트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일베가 비단 18대 대통령 선거만이 아닌, 한국 보수 세력과 알게 모르게 결탁하여 앞으로 투표권을 갖게 될 젊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민주화 세력을 폄훼하고 박정희와 전두환 등 독재자로 상징되는 보수 세력을 향한 지지를 심어주려는 작업을 인터넷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극우 논객인 조갑제 씨는 일베 회원들이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을 도운 1등 공신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일베 회원들도 자신들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걸 보면, 일베가 정치적 사이트라는 의문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최근 5.18 광주민주화항쟁 기념일을 전후로 종편에서 보도한 5.18 광주 북한군 개입설을 확산하는 일베와 달리 조갑제닷컴에서 이를 허구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린 이후 조갑제 씨를 일베 회원들이 종북좌파로 규정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일베에 대한 최종 평가

처음에는 그저 저질 유머 사이트로 출발한 일베는 어느새 하루 접속자 5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방문자 수를 자랑하는 거대 사이트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일베가 우리 사회에 끼친 악영향은 너무나 커서, 이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언론이 일베를 부정적으로 다루는 상황입니다.

2012년 5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일베 회원들이 보인 태도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성추행 의혹을 일으켜 나라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피해자의 마음에 상처를 준 윤창중 전 대변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성추행 의혹 사실을 처음 폭로한 사이트인 미시USA가 “친노종북 사이트”라는 엉뚱한 음모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베 회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뿐이었습니다.

스스로 일베 회원임을 입증한 논객 변희재 씨가 제기한 종북 발언에 발끈한 미시 USA 회원들.

한국사회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심리적 자존감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베 현상을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의 현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문화평론가 최영일 씨는 “일베의 유해성을 놓고 적대시해서 때려잡는다고 사라질 문제가 아니다”며 “성매매를 단속한다고 없어지지 않듯이 일종의 사회심리적인 집단현상이 있는데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현상을 덮어버리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평가와 염려와 비난에도 일베는 존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그저 재미삼아서 일베를 하는 건데 뭐가 나쁘냐?” 하고 의문을 품는 분이 혹시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미삼아 한 일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재미삼아 고층 아파트에서 던진 돌에 사람이 맞아 죽고, 재미삼아 불을 질렀다가 사람이 타죽는다면 그저 재미로 한 일이라고 넘길 일은 아니니까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비방성 발언과 인격모독 등의 행위도 정도를 벗어나면 그저 넘길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인격을 현저히 폄훼하는 행위에 대한 자정능력을 잃어버리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공유했으면 합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도종환 민주통합당 의원이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도종환보다 시인 도종환으로 훨씬 유명한 그가 세간의 이슈로 떠오른 계기는 편향적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잣대 때문이었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국회의원 신분이 된 도종환 시인의 작품을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중학교 교과서에서 삭제하도록 해당 교과서 출판사에 권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교육평가원의 이러한 삭제 권고의 근거로 “교과서 심사 원칙은 교육의 중립성 유지를 위해 현존 인물(현역 정치인 포함)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는 것이었음”이라고 밝혔습니다만, 이러한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박원순 서울시장의 수필 <아무나 가져가도 좋소>도 빠져야 하고,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뛰어드는 순간 <내 삶의 가치>라는 수필도 교과서에서 빼야 할 겁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실제로는 편향적인 교과서 심사원칙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정치가의 기준을 정당에 관련된 인물이나 투표로 선출된 사람으로만 한정할 수 있을까요? 대표적인 뉴라이트 인사로 박근혜 대선캠프에 속한 박효종 교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의 공동저자입니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정치적 이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김동길 교수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라는 글도 교과서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교육평가원의 기준이 공정하다면 이들의 글은 교과서에 왜 실릴 수 있을까요?


종점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오다
―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골목을 채운 아이들 육이오 노랠 듣는다.
구름은 북으로 기울고 새들은 낮게 나는데
우리 누이들 단발머리 풀풀 고무줄 할 때
양지쪽에 기계충독 오른 머릴 쪼이며
― 원수에 하나꺼지 쳐서 무찔러
쪼그려 앉아 따라 부르던 노래
지금도 도깨비 시장 리어카 끄는 서상사 아저씨
짧은 여름밤은 전쟁 얘기로 흥겨웁고
멋진 군인이 되고파 주먹을 쥐게 하더니
아직도 유월이면 이 증오의 노랫소리 들리고
장마전선은 내일도 걷히지 않으리라 한다.
그땐 어찌하여 말해주지 않았을까.
일방적인 증오가 애국심이 아니라는 것쯤
폭력의 언어와 내용없는 적개심만으로
글짓기 대회 그리기 대회의 상들을 타게 하고
그것은 통일의 방법도 뭣도 못된다는 것쯤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전쟁은 신나는 일도 스릴과 써스펜스도
아니라는 것쯤 왜 가르치지 못했던 것일까.
어둠은 쉬이 오고 곤청색 산들을 끌며
비구름은 지평선을 넘는데
벽 돌담 아래에 아이들은 모여든다.

도종환 시인의 <종점>이란 작품에서 “일방적인 증오가 애국심이 아니라는 것쯤/폭력의 언어와 내용없는 적개심만으로/글짓기 대회 그리기 대회의 상들을 타게 하고/그것은 통일의 방법도 뭣도 못된다는 것쯤/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라는 구절이 가슴에 남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보다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실 지금 사회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세대가 이런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고스란히 받은 이들입니다. 지금도 교육현장에서 이러한 주입식 교육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도종환 시인은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쳐왔고 바른 교육을 정립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적어도 그는 <종점>이라는 시에서 지적한 일방적인 증오심을 키우는 교육, 적개심을 일으키는 교육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민중이니 민족이니 역사니 하는 것을 먼 곳에서 찾지 않는다.
식민지 시절에 앗기우며 한 세월을 보낸 할아버지, 태평양전쟁 말기 남양군도에 징병으로 끌려가 돌아가신 큰아버지, 그 큰아버지와도 싸웠을 군대에 배속되어 분단의 전쟁을 치른 아버지, 소금장수, 이발쟁이, 날품팔이, 농사군 형제들, 언청이, 못난이 누이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내 이웃의 삶 속에는 생생한 역사와 삶의 아리고 한스러운 흔적들이 흉터처럼 박히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민중은 내 가까운 피붙이와 내 자신 속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다. 이 모든 동시대인들의 삶에 몇 발작 비켜서서 자학하고 탄식하며 오만함 속에 또한 신비한 체험 속에만 빠져서 반성문 같은 시, 변명 같은 시만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하리라 믿는다.
분단시대 약소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들 속에 서서 튼튼한 시를 쓰고 싶었다."
-《고두미 마을에서》 후기 중에서


시인 도종환은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의 후기에서 말하는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시를 충실하게 써왔습니다. 전교조가 사회의 이슈로 떠올라 시끄러웠던 때에 전교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시를 썼고, 사회의 벽이 느껴질 때는 그 벽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시를 썼습니다.
 
그렇게 사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대면했던 시인 도종환은 이제 국회의원 도종환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정치와 관련 없는 시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더 힘든 정치인생을 겪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자랐던 우리는 이제 시인 도종환이 아닌 정치인 도종환의 모습을 지켜볼 것입니다.

이번에 시인 도종환의 시를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했던 한국교육평가원의 판단은 정치인 도종환이 쓴 <담쟁이>의 일부분을 문재인이 대선에 참여하면서 인용했고, 정치인 도종환이 문재인 대선 캠프에 합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이던 2004년에 문학사상사가 펴낸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라는 책에서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되었고, 살아가면서 풀어가야 할 과제가 되었다”면서 “인생의 지표가 된 이 시를 매일 아침 새롭게 가슴에 새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측근 비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는 요즘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로 끝나는 함석헌 선생의 시를 아직도 이명박 대통령이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는지 의심스럽군요.
  
정치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많은 사람에게 밝힌다는 것은 그 시의 상징적 무게를 등에 업는 것과 같습니다. 새누리당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과 김문수 경기지사는 윤동주의 <서시>를,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정치가는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고들 합니다만, 시의 상징성을 등에 업으려 하는 정치가에게 '시어'는 오만한 거짓을 드러내는 진실의 현미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의 <서시>중에서)”는 시인의 표현에 맞게 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하며,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중에서)”라는 외침을 과연 실천할 수 있는지 그들은 되물어야 할 겁니다.

2012년은 정치의 해입니다. 많은 사람의 눈과 귀가 정치가의 언행에 쏠려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정치가가 그립습니다. 정치 세력을 따라 호가호위하려는 언론이나 검찰 등 권력층의 행동은 이 더위에 국민을 더 짜증 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도종환
1954년 청주에서 출생하여 충북대 사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7년 청산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사의 길과 시인의 길을 함께 걸어오다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고 투옥되었으며, 1998년 해직 10년 만에 덕산중학교로 복직하여 교사로 재직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청주지부장, 장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충북지회 문학위원회 위원장, 제4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을 지내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제8회 신동엽 창작기금, 제7회 민족예술상, 2006년 올해의 예술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2006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해인으로 가는 길》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마음의 쉼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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