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주 52시간 계도기간 종료를 앞둔 12월 《조선일보》에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퇴근 시간 즈음에 보일러 고장 신고가 접수됐는데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당일 밤에 처리할 수 없게 됐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보일러가 고장 난 사람은 덜덜 떨면서 추운 밤을 보내게 생겼다면서요.

 

출처 -  《조선일보》

 

같은 해 5월, 조선일보 노동조합은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근로시간이 단축되는 것과 관련해 회사에 노동 강도를 낮추고 '저녁이 있는 삶'을 실현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조선일보 노조는 "밤샘 근무가 아니라도 교대 없이 매일 야근하는 것은 인권 침해 상황"이라며 "낮에 노동을 끝내고 밤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휴식 시간을 보내는 것은 노예들에게조차 보장됐던 생활 패턴이다. 심지어 수십 년 전의 관리자들조차 야근을 낮 근무와 등가로 보지 않았기에 야근 뒤엔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고 교대 근무를 시킨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근무 환경은 '노예'보다 못하다고 호소한 겁니다.

 

출처 - 미디어 오늘

 

그로부터 5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3월 6일 윤석열 정부는 주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2018년 당시 주 52시간제로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국민이 피해를 볼 것이라는 기사를 썼던 《조선일보》는 윤석열 정부의 홍보지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출처 - 조선일보

출처 - 고용노동부

 

얼마 전 카카오가 재택근무제 폐지를 발표하자 직원들이 한꺼번에 노조에 가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근무제 개편 발표 후 노조 가입률이 10% 정도 급증했다고 하죠. 전면 출근 체제에 대한 직원들의 반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삶의 상당한 부분을 단번에 바꿨습니다. 재택근무나 단축근무 같은 노동 환경의 변화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염병 시대에 우리는 한국 노동 시장의 변화 가능성을 엿보았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전국적으로 단축근무와 재택근무가 단번에 시행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출처 - 한국일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집계한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2021년 기준 시간당 42.9달러라고 합니다. 미국(74.8달러)을 포함한 독일(68.3달러), 프랑스(66.7달러), 영국(59.1달러), 일본(47.3달러) 등 주요국(G5) 평균인 63.2달러의 67.9%에 불과한 수치입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OECD 37개국 가운데 29위에 해당합니다. 근무 시간이 적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한국의 긴 업무 시간은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으니까요. 한국은 OECD 평균보다 연 200시간 더 일하고 있습니다. 10년 사이에 10% 감소한 노동 시간인데도 그렇습니다.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2022년 OECD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2021년 근로시간은 연간 1915시간으로 회원국 중 5위를 차지했습니다. 2011년에는 2136시간으로 회원국 중 1위였는데, 한국의 노동시간 순위가 하락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주52시간제를 시행한 영향도 있고, 콜롬비아와 코스타리카 같은 나라가 OECD에 가입한 영향도 있었습니다.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정부가 최근 발표한 근로시간제 개편안은 주 단위로 돼 있는 연장 근로 관리 단위를 최대 연까지 넓히는 게 핵심이어서 한 주에 최대 69시간까지도 일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장근로 관리 단위가 한 달인 사업장에서 월초에 연장 근무 52시간을 다 썼다면 월말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칼같이 일한 뒤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윤석열 정부의 설명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개악을 꾀하고선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라"는 미사여구로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69시간을 바짝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일찍 퇴근해 쉴 수 있는 노동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해 정부 관계자들이 직장 생활을 안 해본 티가 나도 너무 납니다. 출근 시간은 지켜도 퇴근 시간은 안 지키는 게 K-회사란 걸 모르고 있으니 말이죠.

 

출처 - YTN

 

'크런치 모드'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노동 강도가 심한 IT 업계는 옛날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크런치 모드란 업무 마감 시한을 앞두고 수면, 식사, 위생, 기타 개인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연장 근무하는 행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주 52시간제를 시행하기 전에는 소프트웨어나 게임 등 신작 출시나 업데이트를 앞두면 한숨도 못 자고 40시간씩 일하는 게 다반사였죠. 졸도하듯 자다 일어나자마자 업무에 복귀해야 하는 게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업계에 주52시간제라는 방파제가 생겨 그나마 개인의 삶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의 노동개악으로 근무시간이 옛날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미사여구조차 '조삼모사'에 불과한 터라 사실상 노동 시간 총량만 늘리는 정책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죠. 

 

출처 - 메트로

 

이렇게 되면 노동자의 건강권은 크게 위협받게 됩니다. 윤석열 정부는 근무일 11시간 연속 휴식을 보장하거나 4주 평균 근로시간이 64시간이 넘지 않도록 해서 건강권을 보호하겠다고 했습니다만, 이조차 연장 근로를 연 단위로 관리하는 회사의 경우 되레 노동자에게 매주 64시간 근무를 4달 연속으로 시킬 명분으로 작용합니다. 3달 동안 한 주 평균 60시간 또는 발병 직전 한달간 주 평균 64시간을 일하다 숨지면 과로사로 인정하는 현행법에 비춰보면 이제는 과로사할 때까지 4달까지는 일을 시키는 게 합법이 된다는 소립니다. 우리나라는 주 52시간제인 현재로서도 OECD 연평균 근로시간보다 199시간 더 많이 일하는 과로 사회입니다.

 

출처 - 호주 ABC 방송 / MBC

 

호주 ABC 방송은 <한국, 주 69시간 근무제 제안. 호주나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주 최대 69시간제'를 소개하며 '과로사'를 발음 그대로 'Kwarosa'라고 표현했습니다. ABC는 "한국인들은 지금도 다른 나라보다 오래 일한다"며 "1년에 평균 1915시간을 일해 OECD 평균 1716시간을 크게 넘는다"고 설명했습니다. ABC는 한국의 이런 근로 문화 때문에 'kwarosa'라는 단어가 있다며 "극심한 노동으로 인한 심부전이나 뇌졸중으로 돌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출처 - 시빅뉴스

 

2021년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이 한국어 유래 표제어 26개를 등재했습니다. 세계가 K-컬처에 열광했기 때문인지 새로운 영어 단어 1650개를 발표한 가운데 한국어에서 기원한 단어 26개를 별도로 소개할 정도로 특별한 대접을 받았죠. 그런데 윤석열 정부 들어 노동개악이 현실화하면서 이제는 'kwarosa'라는 단어가 등재되지 않을지 걱정하게 됐습니다.

 

출처  - 뉴시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단결하고 한 목소리를 내 저항해야 할 텐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 이유가 결단력 및 추진력일 정도로 노조에 대한 강경 대응 같은 '노동자 혐오' 정책에 호응하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MZ 세대 등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자 윤석열 대통령은 마지못해 고용노동부가 입법 예고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해 "입법예고 기간 중 표출된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 특히 MZ 세대의 의견을 면밀히 청취해 법안 내용과 대국민 소통에 관해 보완할 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매국 외교를 일삼고, 민생을 도외시하고, 경제를 파탄 낼 뿐 아니라 노동자의 삶까지 망가뜨리려는 사람을 그대로 둬도 되는 걸까요? 이제는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때입니다.

"내가 죽었어야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죄송하게 생각하고 사죄드립니다."


지난 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7중 추돌사고를 낸 광역버스 운전기사가 김씨가 경찰에 출석해 한 말입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 신양재나들목 인근에서 차량 6대를 잇달아 들이받는 사고를 냈습니다. 버스에 직접 들이받힌 승용차에 타고 있던 50대 부부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추돌사고로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숨진 부부는 손주 출산을 3개월 앞두고 참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출처 - 한국일보


추돌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광역버스 기사 김씨의 졸음운전이었습니다. 졸음으로 아차하고 집중력을 잃은 사이 버스가 앞서 달리던 승용차에 돌진해버린 겁니다. 이 때문에 사고 초기에는 버스기사 김씨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이 밝혀지면서 여론이 반전되었죠. 사람이버티기 힘들 정도로 고된 스케쥴을 소화하며 운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씨는 졸음운전으로 7중 추돌 사고를 내기 전 4일 동안 하루만 쉬었을 뿐 매일 15~18시간의 살인적인 근무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사고를 낸 당사자로서 도의적인 책임은 져야 하겠지만, 5시간도 못 자고 매일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 상황을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번 사고가 김씨 개인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2017년 2월 개정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르면 버스는 1일 운행 종료 후 연속 휴식시간 8시간을 보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또한 1회 운행 후 최소 10분 이상, 2시간 이상 운행 시 15분 이상 휴식 시간을 부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법은 멀고 관행은 가깝죠. 이번 7중 추돌사고를 낸 운전기사 김씨가 속한 오산교통은 노사가 합의한 근로시간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운전기사 김씨는 사고 전 3달 동안 월 300시간 이상 파김치가 될 때까지 운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과도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근로기준법 59조 특례조항에 따라 버스기사의 1일 운전 시간은 노사 합의로 결정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버스 회사들의 협정 근로 시간은 적게는 15시간에서 많게는 19시간에 달합니다. 많은 업계는 근로기준법 59조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좀 먹고 야근을 권장하는 악법이 되어버렸다고 성토합니다. 

 

출처 - SBS

 

제59조(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업에 대하여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 서면 합의를 한 경우에는 제53조제1항에 따른 주(週) 12시간을 초과하여 연장근로를 하게 하거나 제54조에 따른 휴게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1. 운수업, 물품 판매 및 보관업, 금융보험업
2. 영화 제작 및 흥행업, 통신업, 교육연구 및 조사 사업, 광고업
3. 의료 및 위생 사업, 접객업, 소각 및 청소업, 이용업
4. 그 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필요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

 

강도 높은 노동을 하고도 월급으로 250만 원 받기가 어려운데 연속 운전 및 휴게시간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나면 회사뿐 아니라 운전기사 본인마저 과태료를 내거나 면허가 취소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이번 사고는 먹고살기 위해,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밀려 운전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과로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인재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사고의 원인을 기사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졸음운전'이 아닌, 사측과 법의 구조적 문제로 노동자를 벼랑으로 내모는 '과로운전'으로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출처 - SBS


안전을 비용으로만 생각하는 버스업계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지난 10일 영동고속도로 강천터널 빗길에 미끄러진 버스가 비상 회차로를 넘어와 반대 방향에서 마주오던 승용차를 덮쳐 1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친 사건이 있었죠. 이 사고는 닳고 닳은 타이어 때문에 브레이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차가 미끄러지면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재생타이어를 사용하는 버스나 트럭으로 인해 발생하는 안전사고가 빈번한데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승객과 운전자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 더는 없기를 바랍니다.

 

차량 관리 문제 외에 도로에서 일어나는 사고에는 법적 미비함도 한몫합니다. 현행법상 길이 11미터가 넘는 대형버스는 자동비상제동장치와 차로이탈경고장치를 의무적으로 장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11미터 규정은 버스 운송업체들의 영세성을 감안해 9~11미터 크기의 버스들 중 가장 큰 규격을 적용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 경부고속도로 7중 추돌사고의 원인이 된 버스의 차체 길이는 11미터에서 딱 5센티미터가 작은 10.95미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는 안전장치 의무 장착 대상에서 제외되어 일어난 경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업체의 영세성은 감안하면서 그보다 더 약한 노동자 개인의 처우는 왜 감안하지 않는지 의아합니다. 버스가 차로를 이탈했을 때 경고음을 내는 장치나 자동으로 비상제동하는 장치가 달려 있었더라면 이번 사고를 피할 수 있었거나 피해 규모가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출처 - 경향신문

 

이번 사고는 과로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인재로 얼마나 큰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또한 노동자의 권익이 바닥일수록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지를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기사가 충분한 월급을 받았다면, 법이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제대로 보장했더라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었겠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예산을 동원해 자동비상제동장치 등 관련 안전장치 장착을 서두르라고 지시했지만, 법적인 미비함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제2, 제3의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일이 사회적 안전을 지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과로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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