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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과로사회의 예고된 인재, 경부고속도로 7중 추돌사고

by 생각비행 2017. 7. 13.

"내가 죽었어야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죄송하게 생각하고 사죄드립니다."


지난 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7중 추돌사고를 낸 광역버스 운전기사가 김씨가 경찰에 출석해 한 말입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 신양재나들목 인근에서 차량 6대를 잇달아 들이받는 사고를 냈습니다. 버스에 직접 들이받힌 승용차에 타고 있던 50대 부부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추돌사고로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숨진 부부는 손주 출산을 3개월 앞두고 참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출처 - 한국일보


추돌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광역버스 기사 김씨의 졸음운전이었습니다. 졸음으로 아차하고 집중력을 잃은 사이 버스가 앞서 달리던 승용차에 돌진해버린 겁니다. 이 때문에 사고 초기에는 버스기사 김씨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이 밝혀지면서 여론이 반전되었죠. 사람이버티기 힘들 정도로 고된 스케쥴을 소화하며 운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씨는 졸음운전으로 7중 추돌 사고를 내기 전 4일 동안 하루만 쉬었을 뿐 매일 15~18시간의 살인적인 근무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사고를 낸 당사자로서 도의적인 책임은 져야 하겠지만, 5시간도 못 자고 매일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 상황을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번 사고가 김씨 개인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2017년 2월 개정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르면 버스는 1일 운행 종료 후 연속 휴식시간 8시간을 보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또한 1회 운행 후 최소 10분 이상, 2시간 이상 운행 시 15분 이상 휴식 시간을 부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법은 멀고 관행은 가깝죠. 이번 7중 추돌사고를 낸 운전기사 김씨가 속한 오산교통은 노사가 합의한 근로시간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운전기사 김씨는 사고 전 3달 동안 월 300시간 이상 파김치가 될 때까지 운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과도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근로기준법 59조 특례조항에 따라 버스기사의 1일 운전 시간은 노사 합의로 결정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버스 회사들의 협정 근로 시간은 적게는 15시간에서 많게는 19시간에 달합니다. 많은 업계는 근로기준법 59조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좀 먹고 야근을 권장하는 악법이 되어버렸다고 성토합니다. 

 

출처 - SBS

 

제59조(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업에 대하여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 서면 합의를 한 경우에는 제53조제1항에 따른 주(週) 12시간을 초과하여 연장근로를 하게 하거나 제54조에 따른 휴게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1. 운수업, 물품 판매 및 보관업, 금융보험업
2. 영화 제작 및 흥행업, 통신업, 교육연구 및 조사 사업, 광고업
3. 의료 및 위생 사업, 접객업, 소각 및 청소업, 이용업
4. 그 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필요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

 

강도 높은 노동을 하고도 월급으로 250만 원 받기가 어려운데 연속 운전 및 휴게시간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나면 회사뿐 아니라 운전기사 본인마저 과태료를 내거나 면허가 취소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이번 사고는 먹고살기 위해,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밀려 운전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과로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인재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사고의 원인을 기사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졸음운전'이 아닌, 사측과 법의 구조적 문제로 노동자를 벼랑으로 내모는 '과로운전'으로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출처 - SBS


안전을 비용으로만 생각하는 버스업계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지난 10일 영동고속도로 강천터널 빗길에 미끄러진 버스가 비상 회차로를 넘어와 반대 방향에서 마주오던 승용차를 덮쳐 1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친 사건이 있었죠. 이 사고는 닳고 닳은 타이어 때문에 브레이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차가 미끄러지면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재생타이어를 사용하는 버스나 트럭으로 인해 발생하는 안전사고가 빈번한데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승객과 운전자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 더는 없기를 바랍니다.

 

차량 관리 문제 외에 도로에서 일어나는 사고에는 법적 미비함도 한몫합니다. 현행법상 길이 11미터가 넘는 대형버스는 자동비상제동장치와 차로이탈경고장치를 의무적으로 장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11미터 규정은 버스 운송업체들의 영세성을 감안해 9~11미터 크기의 버스들 중 가장 큰 규격을 적용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 경부고속도로 7중 추돌사고의 원인이 된 버스의 차체 길이는 11미터에서 딱 5센티미터가 작은 10.95미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는 안전장치 의무 장착 대상에서 제외되어 일어난 경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업체의 영세성은 감안하면서 그보다 더 약한 노동자 개인의 처우는 왜 감안하지 않는지 의아합니다. 버스가 차로를 이탈했을 때 경고음을 내는 장치나 자동으로 비상제동하는 장치가 달려 있었더라면 이번 사고를 피할 수 있었거나 피해 규모가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출처 - 경향신문

 

이번 사고는 과로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인재로 얼마나 큰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또한 노동자의 권익이 바닥일수록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지를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기사가 충분한 월급을 받았다면, 법이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제대로 보장했더라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었겠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예산을 동원해 자동비상제동장치 등 관련 안전장치 장착을 서두르라고 지시했지만, 법적인 미비함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제2, 제3의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일이 사회적 안전을 지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과로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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