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맛난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가족이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대화의 접점이 적어지고 맛난 음식을 준비하는 가사 노동을 여자들에게 전가되기 십상이며 집안에 나눌 재산이라도 걸려 있다면 명절이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기 쉽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세를 누릴 종가에서도 2018년 새해부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앙받는 영웅, 아니 성웅으로 불릴 정도의 위인인 이순신 장군의 집안에 큰 다툼이 벌어진 것이죠. 바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현충사의 현판이 화근입니다.


아산에 있는 현충사는 초임 군장교나 경찰 공무원이 임관되기 전, 불굴의 의지로 우리나라를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찾는 뜻깊은 공간입니다. 현충사에는 300년 역사의 숙종이 내린 현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6년 군부 독재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자신과 군부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곳 현충사에 자신의 친필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그 현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


그런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난중일기》의 소유주인 15대 맏며느리, 즉 종부가 이 박정희의 현판을 내리고 원래 있었던 숙종의 현판으로 교체해달라고 문화재청에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청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뒤로 미루자 2018년 들어 15대 종부는 박정희 현판이 내려질 때까지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합니다.

 

15대 종손에게 자손이 없었기에 현재 《난중일기》는 그 배우자였던 15대 종부에게 적법하게 상속된 유산입니다. 그렇기에 종부의 결정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친회는 현판 교체에 적극 반대하며 종부가 《난중일기》를 볼모로 사리사욕을 차리려는 속셈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일견 15대 종부의 입장은 민주주의 시민 사회의 당연한 요구로 보입니다. 독재자였던 박정희의 현판이 아직도 현충사에 걸려 있다는 것은 진보한 우리 사회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으며, 애초에 걸려 있던 숙종 사액 현판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가치와 정당성에서 빼어나기 때문입니다. 두 현판을 비교해서 보기만 해도 누구나 그 가치의 차이를 느낄 만합니다.


한편 종회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그들의 가치는 시대착오적이고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S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인터뷰를 한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 회장 이종천의 말을 들으면 대체 저런 사람이 21세기 한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죠.


◇ 김현정> 1966년에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그때.


◆ 이종천> 네. 그때 지어서 거기에 맞게 박 대통령이 현충사라는 현판을 썼는데.


◇ 김현정> 그렇죠.


◆ 이종천> 숙종만 임금인가, 박정희 대통령도 임금이요.


◇ 김현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 이종천> 박정희 대통령이 임금 아닙니까?


◇ 김현정> 대통령이 임금은 아니죠. 지금 군주시대가 아니니까.


◆ 이종천> 임금이나 마찬가지죠.


◇ 김현정> 이제 대통령이라는 거는 선거로 뽑힌 거니까, 민주주의 제도에서. 임금은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리더란 의미 말씀하시는 거예요, 국가의 리더?


◆ 이종천> 그래서 그 현판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그 현판을 내리려면 현충사를 다 부숴야 돼요. 박정희 대통령이 해 놓은 걸 현판만 내리면 됩니까? 다 부숴야죠.


◇ 김현정> 현판을 내리려면 현충사도 부숴라? 그거 너무 극단적인 주장 아니세요?


◆ 이종천> 여보세요, 최순선 얘기만 듣고 그런 얘기를 자꾸만 하는데. 현판을 내리려면 현충사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 놓은 현판이나 현충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그 현충사에는 숙종이 내린 현판은 보이지도 않아요. 너무 작아서.


현충사 현판 "숙종것으로 교체" VS "박정희도 임금인데.."(노컷뉴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이후에도 박정희 찬양에 열을 올리는 종회 회장은 박정희 현판을 내릴 거면 현충사까지 다 때려부수라며 예의 없는 인터뷰를 일관하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기에 이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독재자를 떠받드는 노추를 드러낸 겁니다.


출처 - 뉴스1


그러자 다음 차례로 인터뷰한 15대 종부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오염되어 온 면이 있으니 이 기회에 문화재청이 결단을 내려 숙종 사액 현판으로 현판을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무라이를 경배하며 술자리에서 매번 엔카를 불렀던 박정희가 왜색으로 치장해놓은 현충사도 이 기회에 복원해야 한다고 말이죠. 애초에 15대 종부인 자신이 상징적으로 소유권을 가진 건 맞지만 《난중일기》를 비롯한 충무공의 유물은 이미 1960년대부터 현충사에 위탁해 공공기관에서 관리를 해왔으니 《난중일기》를 볼모로 사리사욕을 채우려한다는 모함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사태만 놓고 보면 15대 종부의 발언이 이치에 맞습니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비롯된 적폐 청산의 차원에서도, 군부 독재 종식 차원에서도, 그리고 문화재 복원의 측면에서도 말이죠.


다만 종회의 비난이 거짓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실제로 15대 종부는 2009년에 사기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15대 종부는 2005년부터 충남 일대 토지를 매입해 건설사에 되파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모 씨에게 5억을 투자하면 배로 불려주겠다고 속여 투자금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구속될 당시 이미 13억이 넘는 빚을 지고 토지매입 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죠. 또한 같은 해 3월 빚 때문에 자기 명의로 돼 있는 현충사 충무공 고택 터 등을 경매 처분당했습니다. 자칫 현충사 고택 터가 무관한 남의 땅이 될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덕수 이씨 풍암공파 문중이 이를 되사서 겨우 막은 바가 있습니다. 15대 종부가 이번 현판 관련 건에 관해서는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있지만, 과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역사 바로 잡기를 위한 것인지는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깁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호부견자(虎父犬子)라더니 새해 벽두부터 가장 유명한 위인의 집안이 콩가루가 되어 싸우는 소식이 들려와 안타깝습니다. 이치는 명백하지만 어느 한편을 지지하기 힘든 이전투구로 보인다는 점에서 더 안타깝습니다. 하늘에 계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 부끄러운 후손의 모습이 누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올바른 역사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드러나는 일이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담은 영화에서 계엄군이 시위를 벌이는 광주시민을 사격하는 장면이 날조되었다고 반발하는 전두환 측 사람이나, 새해 벽두부터 12.28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를 짚기는커녕 외교기밀을 왜 공개했는가만 문제 삼는 등 말도 안 되는 발언으로 '혼수성태'라는 별명을 얻은 정치인도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혼이 비정상'이 아닌가 싶군요. 이들을 반면교사 삼아 2018년 한 해는 올바른 역사 인식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12월 달력에 20일이 빨갛게 표기되어 있어 '어? 무슨 날이지?' 하고 생각한 분들 계실 겁니다. 탄핵 없이 박근혜가 대통령이었다면 원래 대선일은 12월 20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SNS에서는 박근혜의 차기 대통령으로 김무성이나 반기문이 당선되는 패러디 뉴스를 올린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죠. 국정농단을 좌시하지 않고 우리나라 국민은 촛불을 들고 추운 겨울을 거리에서 싸웠습니다. 그 결과 법치와 민주주의에 의거한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고, 장미 대선으로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촛불 시민은 독일 에버트 인권상을 받았고 《이코노미스트》지는 2017년 올해의 국가로 프랑스와 함께 대한민국을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유튜브


국정농단의 여파로 촛불집회에 직접 참여한 시민들이 늘어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인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주목을 받은 한 해였습니다. 지난해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 이어 올해는 좀 더 세련되게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가 다큐 영화 사상 최단 기록으로 100만 관객을 넘어서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대통령 당선 이전의 문재인 후보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부분이 있었다는 얘기가 나와 관심을 끌기도 했죠.


출처 - JTBC


독특한 다큐 영화도 나왔습니다. 촛불을 가로막고 박근혜를 지키겠다고 튀어나온 일군의 사람들을 보셨을 겁니다. 이른바 '박사모'들로 자칭 태극기 집회라는 걸 주도한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를 관조하는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도 개봉했습니다. 이 다큐는 청주에 의관을 갖추고 박정희 사진에 절을 하는 한 할아버지 농부와 울산에 살며 박정희에 관한 것에 둘러싸여 사는 한 부부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왜 저러는지, 어떤 감성과 생각으로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것인지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쫓아갑니다.

 

정치, 사회 이슈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고발하는 성격을 띠기 쉬운데, 〈미스 프레지던트〉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해부하는 데 주력하는 독특한 영화입니다. 일정한 거리 두기를 통해 현상과 인물을 객관적으로 조명하여 관객이 각자 판단하기를 권하는 연출을 택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촛불 시민들에게서는 박사모를 미화하는 영화라고 비판받고, 박사모들에게서는 박사모를 비하하는 영화라고 하여 양쪽에서 비판을 받은 다큐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탄핵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때 그 사람들은 무엇이었나를 각자 나름대로 생각해볼 만한 이야깃거리를 주는 영화이니 흥미로운 건 사실입니다.


출처 - 유튜브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적폐인 굴욕적인 12.28 위안부 합의 때문인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영화도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아이 캔 스피크〉입니다. 2007년 2월 미국 하원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일본의 만행을 증언한 이용수 할머니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연말 영화제에서 이용수 할머니 역을 맡은 나문희 배우가 연이어 수상하고 있을 정도로 재미와 메시지를 둘 다 잡은 수작이었죠. 이용수 할머니는 올해 열린 한미정상회담 당시 청와대에 초청되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포옹을 하기도 해 박근혜의 위안부 합의가 언어도단이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출처 - 유튜브


하지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 또 한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도 했습니다. 송신도 할머니는 외국에 거주한 마지막 한국인 위안부 피해 생존자셨기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로는 유일하게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던 분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1993년 처음 소송을 제기해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가 확정되기까지 10년간 법정에서 싸웠습니다. "재판에 졌지만 내 마음은 지지 않아!" 하고 외친 송신도 할머니의 이 10년에 걸친 재판은 〈다이빙벨〉의 공동감독이기도 했던 안해룡 감독의 2007년작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라는 다큐 영화로 개봉한 바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자원봉사자들과 아픔을 딛고 씩씩하게 싸우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셔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이 밖에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루어낸 1987년 6월 항쟁을 영화화한 〈1987〉 등 개봉을 앞둔 실화 영화도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어떤 영화를 보셨나요? 2017년이 지나기 전에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를 찾아보며 우리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나 되돌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2018년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에도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