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72주년 제헌절입니다.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5일 뒤인 7월 17일, 조선왕조 건국일에 맞춰 헌법이 공포되었고 이날을 우리는 제헌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제헌절은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과 더불어 5대 국경일에 속합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 "시대변화에 발맞춰 헌법을 개정할 때가 되었"다면서 "코로나 위기를 한고비 넘기는 대로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자고 했습니다. 아울러 "정치권의 이해가 아닌 오로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시대 정신을 반영한 새 국가 규범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헌법은 항구불변의 가치를 담은 약속이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국민의 요구에 부합해야 하며, 더 많은 권익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출처 - 뉴시스

 

7월 17일 과거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84년 전인 오늘,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정권을 잡은 공화진영에 맞서 국민진영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소련이 공화진영을 지원한 반면 파시즘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진영을 지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 양상으로 비화했고,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내전으로 약 50만 명이 숨지고 스페인의 국토가 황폐해졌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장군은 총통의 지위를 꿰차고 공화파를 학살했습니다. 그러고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파시즘 독재정치를 이어갔습니다.

 

출처 - Magnum Photos / © Robert Capa ©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 당시 〈어느 인민전선(공화군) 병사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해 싸우다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쓰러지는 공화파 병사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착한 덕분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사진으로 로버트 카파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누렸지만 한편으로 사진을 조작했다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Amical de Mauthausen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Benito Bermejo

 

이와 달리 자신이 찍지 않은 사진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 있습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의 주인공 '프랑시스코 부아'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있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친위대나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 나치의 앞잡이)에 의해 자행된 '비자연사 죽음'을 속이기 위해 나치는 사진을 조작했습니다. 이런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된 프랑시스코 부아는 조작된 일련의 사진 원본 필름을 빼돌렸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하여 나치 지도자들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아울러 그의 노력을 통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가 부각되었죠.

 

 

오늘은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번역하신 문박엘리 님과 인터뷰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시스코 부아'와 '스페인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Q 안녕하세요? 생각비행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들께 간략히 소개 부탁합니다.

A 안녕하세요.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번역한 문박엘리입니다. 서울에서 대학교 졸업 후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일반회사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고요, 지구와 인간과 우주 만물의 연계, 그리고 역사 등 다방면에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사와 그 유산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 말기의 유럽 정세와 오늘날에 이르는 영향까지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Q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그래픽 노블'입니다. 장르의 특성과 함께 출판계에서 그래픽 노블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해주시죠.

A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은 대개 문학적 구성과 특성을 지닌 작가주의 만화를 가리킵니다. 영어의 '코믹스'와 일본의 '망가'와 한국의 '만화'보다 무게감과 진지함이 부여된 듯한 이 용어는 1960년대 이후 널리 쓰이게 됩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탄탄한 스토리와 구성으로 전개되는 만화 부분과 그 만화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인물과 사실을 설명하는 사료 부분으로 이루어져 전형적인 그래픽 노블에 속합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프랑스어권 만화는 오랫동안 유럽 만화 시장을 지배해왔는데요, 특히 그래픽 노블 영역은 1960년대 이후 크게 번창했습니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그래픽 노블을 포함한 프랑스 만화 업계는 최근 10년 동안 매출이 20% 증가했으며 프랑스 출판 시장에서 일반 문학과 청소년물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만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로 인정받았고 만화 전시회가 점차 대중적인 인기와 전문가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빠트릴 수 없는 축제가 1974년 이래 매년 프랑스 앙굴렘에서 개최되는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만화 페스티벌 중 하나로 매년 1월 말에 열리는데요, 이 축제에서는 프랑스는 물론 세계 각국의 만화와 관련 영상물이 전시되고, 다양한 강연회와 상영회, 시상식 등이 열립니다. 이 축제를 찾아오는 전 세계 만화 애호인들과 관련 종사자들과 기자들의 수가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Q 넷플릭스에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책과 영화는 어떻게 다른지요?

A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스페인 여성 영화감독 마르 타르가로나(Mar Targarona)가 연출한 작품으로, 2018년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프랑시스코 부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참상과 나치의 만행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특히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프란츠 치라이스 소장이 아들의 생일 파티에서 시중을 들던 포로들을 죽이는 장면은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합니다. 실제로 치라이스는 아들 생일 파티에서 40여 명의 포로를 살해합니다. 프랑시스코가 빼돌린 실제 사진들이 마지막에 나오면서 끝나는 영화는 여러 사건을 두서없이 나열한 듯해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스페인 시나리오 작가인 살바 루비오와 스페인 만화가 페드로 콜롬보가 합작하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책이 영화보다 한 해 앞서 2017년에 출간되었죠.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매된 이 책은 만화계 인사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만화의 경우, 실존 인물인 프랑시스코 부아를 중심으로 수용소 사진 빼돌리기와 전쟁 후 그 사진의 용도를 드러내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영화보다 한층 탄탄한 플롯으로 전개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주인공의 내레이션은 독자가 주인공의 심리에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적절한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영화보다는 책이 재미와 감동을 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Q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이 부분을 말씀해주시고, 이후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시죠.

A 스페인 홀로코스트는 종전 후 일반 대중에게 대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전후 사학자들의 우선 관심사도 되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 참전국이 아니었기에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수많은 스페인 포로가 희생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 후 강력한 독재체재를 구축하고 1975년 종신 때까지 스페인의 총통을 지낸 프랑코 장군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스페인 포로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홀로코스트는 사실상 프랑코 정권과 나치의 합작물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기원은 1936년 7월 17일(84년 전 오늘이군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로 발발한 스페인 내전이라고 봅니다.

왕당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원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스트 세력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파에 맞서 싸운 이들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을 비롯한 공화파 사람들이었습니다.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에서 패한 공화파의 상당수가 망명길에 오르는데, 당시 프랑스로 망명한 이들만 50만 명에 달합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거나 레지스탕스와 연대하는 방식으로 나치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나치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 Amical de Mauthausen

 

이 수용소는 책에 나오듯 노역으로 인한 절멸수용소로 분류된 지옥이었습니다. 서류상 입증된 수만 거론하자면 4816명의 스페인 포로가 이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스페인 공화파 포로들은 1945년 해방 이후 대부분 프랑스를 비롯하여 제3국으로 제2의 망명을 해야만 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끝내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처럼 두 번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을 만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프랑시스코 부아의 경우는 스페인 포로 대다수의 여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는 어떤 사람인가요?

A 1920년생인 프랑스시코 부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열렬한 공화파 가족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청소년기에 스페인 사회주의청년연합당(JSU)의 일원이었던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파 군대에 입대하여 싸웠습니다. 패전 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억류되기까지 부아의 운명은 앞서 말씀드린 스페인 공화파 참전 포로들과 비슷합니다. 그는 1941년 1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된 이래 해방 때까지 신원확인국에서 사진사로 일했습니다. 

 

© Amical de Mauthausen

 

특이한 점은 부아가 수용소 내 나치의 만행을 담은 사진을 빼돌리는 데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 나치 상관들과 관계가 원만했다는 사실입니다. 나치가 사진사로서 부아의 실력을 인정했음은 기록에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밝고 사교적이었던 그의 성품이 한몫을 한 것 같습니다. 종전 후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약했던 그는 1951년 7월 파리에서 31년이 채 안 되는 생애를 마칩니다. 그의 사후 현실화된 스페인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스페인 홀로코스트 관련 참고자료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관련국(프랑스, 독일 등)에서 생존자와 유가족 대우에 관한 후속 조치들이 시행되었습니다. 2017년 프랑스 정부는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 시장이 주재하는 안장식 행사와 함께 프랑스시코 부아의 유해를 파리 시내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치했습니다. 올해는 프랑시스코 부아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얻은 질병으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넋을 기리고 생전에 파시즘에 맞서 맹활약한 젊은 영혼을 기억하는 행사가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Q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다양한 인물이 있었지만, 신원확인국 책임자인 ‘파울 릭켄’이라는 인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존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는데요, 그는 어떤 일을 했고 프랑시스코 부아와 어떤 관계였나요? 

 

© Amical de Mauthausen

 

A 파울 릭켄은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신원확인국 책임자였습니다. 신원확인국에서 사진 현상을 담당했던 프랑시스코 부아의 직속 상관인 나치였죠. 릭켄은 부아의 업무능력을 높이 샀습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의 미학'을 부아에게 강변하는 것은 끔찍하긴 하지만 릭켄의 정신세계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릭켄이 촬영했던 수용소 생활과 포로들의 사진들은 훗날 부아가 수용소 밖으로 빼돌려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나치 전범들의 행적을 증언하는 증거자료로 제출됩니다. 그 사진들과 부아의 증언을 통해 수용소 내 만행이 드러났고 관련 나치 전범들의 죄가 입증되었습니다.

 

 

Q 책을 번역하면서 특히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지요.

 A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고 책의 사료 부분에 사진 한 장으로 소개된 인물인 카를로스 그레이키(Carlos Greykey)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피부색과 복장이 일반적인 수용소 포로들과 달라 의아하게 생각하다 곧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카를로스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유일한 흑인 포로였습니다. 수용소 나치 친위대원들은 그에게 호텔 웨이터 복장을 입히고 식사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수용소에 힘러와 같은 나치 고관이 방문하면 카를로스는 '식인종 아비의 자식이지만 스페인에 살던 흑인'으로 소개되기도 했어요. 굴욕적이었겠지만 견뎌내야 했습니다. 살인적인 채석장 노역으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포로들의 평균 생존 기간이 6개월에서 1년을 넘지 못했는데, 카를로스는 식사 시중을 하면서 수년을 버틴 끝에 살아서 해방을 맞이했거든요.

 

1941년 수용소 입소 당시 나치 친위대원은 수건으로 그의 피부를 문질러댔다고 합니다. 흑인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카를로스가 검댕이를 덮어썼다고 생각한 거죠. 그가 흑인임을 확인한 나치는 카를로스를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1925년 출간된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 의하면 유대인만이 아니라 흑인도 열등한 존재로서 아리아인 혈통을 오염시키는 위험한 인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카를로스가 나치 장교의 질문에 독일어로 대답했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즉각 처형을 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는 스페인어와 독일어 외에도 카탈루냐어, 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습니다. 191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의대생으로 재학 중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공화파로 참전했고 패전 후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스페인 공화파 참전용사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망명 후에도 반파시스트 전쟁을 프랑스 편에서 이어가다가 결국 독일 나치에게 체포되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어 사진 속의 모습으로 나치 친위대원들의 식사 시중을 들게 된 것이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프랑코 총통 치하인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는 프랑스에 두 번째 망명을 했고 몇 년 후 프랑스에 귀화해 결혼을 하고 자녀도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방 후 초기 카를로스는 수용소 생존자들의 정기 회합에 참석했으나 이후 발길을 끊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그의 자취는 상세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딸에 의하면 카를로스는 카바레에서 댄서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전기공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77년부터 1982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적도기니공화국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카를로스가 만년에 스페인 민주화가 아니라 적도기니공화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다는 기록은 그의 부모님이 스페인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페르난도 포(Fernando Pó)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포는 19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적도기니공화국에 속한 지역입니다.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한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ías Nguema)의 독재정치는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Teodoro Obiang)의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2대 대통령이 된 테오도로 오비앙은 1979년 이래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적도기니공화국은 독립 이래 현재까지 독재정권 치하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된 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책의 주인공도 아니고 심지어 만화에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인 카를로스 그레이키에 대한 소개를 길게 한 까닭은, 엄청난 영광도 명예도 동반하지 않은 삶의 여정을 처음에는 연민의 감정으로 띄엄띄엄 추적하는 와중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부색과 출신의 불리함과 아마도 풍족하지 못했을 생계 방편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회피하지 않았고, 잔혹한 차별의 세상과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가치에 따른 투신을 죽을 때까지 거듭했습니다. 그는 험난하게 굴곡진 세월을 선의로 뚜벅뚜벅 살아낸 영웅이었습니다.     

 

 

Q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3분의 2가 그래픽 노블의 형식으로 된 만화이고, 3분의 1은 사료와 해설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 상황과 실재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데요, 유심히 보신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Amical de Mauthausen


A 개인적으로 마리-클로드 바이앙-쿠튀리에(Marie-Claude Vaillant-Couturier)가 나오는 부분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946년 1월 28일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그녀가 증언을 마친 뒤 프랑시스코 부아가 증언을 했는데요, 이 책에서 그 상황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를 보고 그 세밀함에 감탄했습니다. 또한 뉘른베르크 공판에서 증언을 마치고 난 그녀가 부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작가에 의한 상상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을 넘어 초당적인 명성과 존경을 받은 여성 정치인의 인품과 매력이 잘 드러난 부분이라 자꾸 보게 됩니다.

 

 

Q 짧은 인터뷰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를 독자들께 간략히 말씀해주시죠.   


 A 7월 17일 오늘은 한국의 제헌절이자 스페인 내전 발발일입니다. 스페인 내전 때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은 패전 후 스페인 밖에서도 파시즘과의 전쟁을 이어갔고, 그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스페인 홀로코스트로 희생되었습니다. 비단 스페인과 유럽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파시즘의 위협은 오늘날에도 지구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스페인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지구상에서 재발하지 않으려면 먼저 그것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배경과 진행에 대해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민지 통치와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군부독재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한국의 20세기 역사와 닮은 점이 많은 스페인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형식의 입문서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가짜 뉴스가 판친다

 

트럼프 후보의 미국 대통령 당선,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 박근혜 탄핵 정국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페이크 뉴스, 즉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가 불안한 정국으로 치달을수록 사람들은 믿을 만한 소식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가짜 뉴스는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노리고 자기 진영에 유리하도록 현실을 호도하는 정보를 속보나 공증된 뉴스인 양 퍼뜨리는 정보 조작의 일환입니다. 요즘은 정보가 퍼지기 쉬운 환경인 SNS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가짜 뉴스가 양산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어르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카카오톡 단톡방이나 네이버 밴드 등에서 가짜 뉴스가 판치고 있습니다.

출처 - 불교신문


헌재의 탄핵 선고가 초읽기에 들어간 우리나라에서도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재판관들의 평의 결과가 유출되었다고 주장하는 허위 글이 퍼지더니, 급기야 박사모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탄핵 반대가 지지받고 있다는 가짜 여론 조사 결과들이 올라오고 있죠. 예를 들어 지난 5일에는 친박 인터넷 카페에 여론조사 결과가 탄핵 반대 응답이 47퍼센트로 찬성보다 높다졌다는 가짜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여론이 뒤집혔다는, 사람을 혹하게 하는 뉴스였습니다만 여론조사 기관은 인터넷 사이트조차 없는 유령업체였습니다. 72퍼센트 이상의 국민이 압도적으로 박근혜 탄핵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진짜' 사실입니다.


출처 - JTBC


지난해 12월, 박근혜 탄핵 국회 표결을 앞둔 시점에 박근혜 지지자들의 SNS에는 영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아르토리아 팬드레건 교수, 일본의 석학 히키가야 하치만 박사가 촛불집회에 대해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탄핵하려는 한국민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우려를 표명했다는 기사가 퍼지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박사모와 친박 단체들은 세계의 지성들이 박근혜를 지지한다며 열심히 퍼 날랐지만, 둘 다 일본 만화 캐릭터를 따와 적당히 만든 가짜 뉴스여서 비웃음을 산 적이 있습니다.


출처 – 제주의 소리


 

대중 선동의 심리학

 

하지만 가짜 뉴스의 파괴력은 불안한 현실의 틈을 파고들면서 정교해지고 한층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드에 대한 보복이 계속되는 가운데 상하이 와이탄에선 한국인이 한국말을 썼다는 이유로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괴담이 흘러나와 교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후보가 대통에 당선된 것도 페이스북과 구글을 중심으로 퍼진 가짜 뉴스의 위력이라는 분석도 속속 나오고 있죠.


출처 - YTN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즘과 히틀러의 광기 뒤에는 대중 선동의 정치를 펼친 괴벨스(Joseph Goebbels)가 있었습니다. 제3제국의 선전장관이자 '총력전' 전권위원이었던 괴벨스는 열광적인 히틀러 숭배자였습니다. 그는 몇 마디 말과 몇 줄의 글로 사람들의 분노를 촉발하여 급기야 광기의 소용돌이로 내몰았습니다. "이성은 필요 없다. 감정에 호소하라!" 이런 괴벨스의 생각에서 드러나듯이, 감정의 극단을 정치에 이용하는 탁월한 선동 덕분에 히틀러는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괴벨스는 돌격대의 북소리, 군사 행진, 깃발, 전단, 포스터, 라디오 연설,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총동원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선동 정치를 펼쳤습니다. 철저한 계산으로 군중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끌어냈기에, 괴벨스가 선동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생긴 게 아닐까요? 사기도 제대로 치면 '예술'이 되는 현실, 과연 누굴 탓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가짜 뉴스가 판치는 지금 상황에서 괴벨스가 남긴 말을 되새겨볼 필요는 있습니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출처 - 경향신문

 

가짜 뉴스 제작자인 폴 호너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만든 가짜 뉴스 사이트에는 언제나 트럼프 지지자들이 찾아왔다며 트럼프가 내 덕분에 백악관에 있게 된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는다면서 트럼프 캠프의 선대본부장도 자신의 가짜 뉴스를 사실로 여겨 자신의 SNS에 게시했다고 꼬집었습니다. 가짜 뉴스가 이렇게 퍼진 이유에 대해 폴 호너는 사람들은 분명히 더 멍청해졌다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기 때문에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애초에 그는 트럼프 지지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사람들이 돈을 받고 반트럼프 시위를 한다고 가짜 뉴스를 만들었는데,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걸 진짜 뉴스로 믿고 확산시켰다고 합니다. 가짜 뉴스 제작자인 폴 호너는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트럼프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가짜 뉴스를 만들었으나 오히려 그를 도운 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 진영이냐를 가리지 않고 가짜 뉴스 자체가 사회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단면입니다.


출처 - 한겨레


지금 대한민국에선 가짜 뉴스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의혹을 제기하면 이를 극우 매체와 그 지지자들이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여론은 곧 정치 쟁점으로 부각됩니다. 알맹이 없는 선동에 사회가 휘둘리는 셈이죠. 그러니 '탄핵'이나 '중국 사드 보복'처럼 쟁점이 되는 정보를 보실 때는 한발 물러서서 꼭 팩트 체크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기사는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것,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합니다.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 잘 쇠셨는지요? 가족, 친지를 만나 쌓인 회포도 풀고, 아이들의 재롱도 보면서 정을 나누는 명절에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평소와 다른 기름진 식단과 과식 때문에 배탈이 나기 쉽기 때문이지요. 설과 한가위 다음 날에 가장 잘 팔리는 약이 소화제이기도 합니다. 먹을 게 없어 명절 때만 되면 배가 터지도록 먹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아무래도 설의 분위기와 오랜만에 모여 같이 밥을 나누는 정 때문에 평소와 달리 과식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과식이나 소화불량으로 약을 찾는 손님들 때문에 약방은 설 특수를 맞기도 한답니다. 오랜 세월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소화제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궁중 무관인 선전관(오늘날의 대통령 경호관) 출신 노천 민병호에 의해 1897년 탄생한 활명수는 한국 최초의 브랜드이자 최장수 의약품이기도 합니다. 활명수가 세상에 나온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약은 구하기가 어려워 급체나 심한 설사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활명수는 조선 민중의 아픈 속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 그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조부모님 때부터 마셔온 활명수는 구한말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역사와 궤를 같이했습니다. 오늘은 120년간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를 통해 지난 역사를 한번 돌아볼까 합니다.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

 

 

활명수의 발상지, 정동


정동과 서소문 일대는 한국 최초(最初)이자 최고(最古) 브랜드인 활명수의 발상지입니다. 정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급변하는 한국 근현대사가 오롯이 압축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비롯한 일제의 무력시위가 진행된 가운데 아관파천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 또한 정동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2대 주인인 민병호의 아들 민강의 지원 아래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결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연통부가 비밀리에 설치되기도 했죠.

 

서울연통부 기념비

 

활명수의 아버지 민병호는 고종의 어의이자 제중원 의사였던 알렌과의 인연으로 서양의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에서 새롭게 알게 된 서양의학과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궁중 비법과 한의학 지식을 융합하여 활명수를 만들어냅니다. 최초의 현대식 국립병원이었던 제중원 이야기가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활명수'의 탄생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드라마 29회에 등장하는 '박하맛 나는 소화 물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실제 활명수 탄생 이야기를 드라마의 배경에 맞춰 각색한 것이긴 하지만, 활명수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비교적 충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으로 다뤄질 정도로 의미 있었던 최초의 서양식 국립 의료기관 제중원은 조선 사람과 서양의학이 만나는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만남과 관계 속에서 탄생한 활명수는 한방과 양방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낳은 옥동자와 같았죠. 하지만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많은 백성이 본토를 떠나 중국 만주로, 러시아 연해주로, 미주 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갓 태어난 활명수 앞에는 나라 잃은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과 동행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활명수와 조선 독립 그리고 경제자립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 궁궐의 용도를 마음대로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창경원으로 바꾼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일본은 헌병경찰 제도를 시행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잡아들였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민족지사들의 활동을 탄압했습니다. 또한 농업과 상공업 등에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합니다.

 

경복궁의 건물 일부를 허물고 상업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오늘날의 산업박람회)를 개최한 일은 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행사였습니다. 조선 기업인들은 이 공진회 참가를 두고 고민이 컸습니다. 조선에서 벌인 첫 박람회였지만 동시에 일제 식민통치를 만방에 알리는 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밉지만 사업의 홍보와 판촉을 위해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은 공진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마련된 수익금은 그가 설립한 소의학교에 기부했으니 동화약방으로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나름의 방법으로 이용한 셈이죠. 이 공진회를 계기로 조선의 지식인층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독립과 경제자립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민강 사장은 약업으로 이룬 집안의 부를 사회를 위해 사용해왔습니다. 접근성이 좋은 경성부 내의 동화약방 점포는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과 연락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엔 그의 과감한 행동이 기업의 자랑이 되었으나, 일제치하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은 물론 사업과 집안의 몰락을 불사한 용단이었죠. 독립운동에 참여한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회사는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장이 현장을 지키지 못하고 투옥되어 있거나 해외로 나가 있으니 사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죠. 활명수뿐 아니라 동화약방의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활명수의 모기업 동화약방에 큰 위기가 닥친 1920년대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가치만 놓고 보자면 분명 마이너스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를 기점으로 동화약방은 무형의 자산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동화약방이 힘쓰는 노력이 알려지자 해외 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만주, 미국 하와이에서 활명수를 찾는 이가 늘었다는 자료도 있으니까요. 오늘날 활명수 브랜드에 깃든 무형의 자산 가치는 그때 그 시절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활명수,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


조선 유일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 방송국에서 1936년 한 경기가 생중계됐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경기였습니다. 비록 일제 식민치하에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경기였지만, 손기정 선수는 자신을 'Korean'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승 후 작성한 방명록에도 기테이 손이 아닌 ‘손긔정 KOREAN’이라고 써서 떳떳한 조선 남아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힘으로 약소민족을 짓밟고 있던 군국주의에 대한 그만의 저항이기도 했지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후 여러 기업에서 그의 승리를 모티브로 활용해 광고를 했습니다. 동화약방의 활명수도 우승 다음 날인 1936년 8월 11일 《조선일보》에 우승 축하광고를 게재합니다.

 

반도남아의 의기충천

손기정, 남승룡 양 선수 우승축하


건강한 체력, 견인불발하는 내구력에 근원은

오직 건전한 위장에서 배태된다. 

건강한 조선을 목표하고

다 같이 위장을 건전케 하기 위하여

활명수를 복용합시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축하하고 건강한 위장을 위해 활명수를 마시자는 기업 이미지 광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이나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이상 가는 민족적 경사 앞에서 동화약방은 민강 사장이 사망한 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와중에 과감히 축하광고를 실었습니다. 식민지 시절 조선 선수의 세계 제패는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막힌 속을 뚫어주는 청량제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세를 과시하던 히틀러는 3년 뒤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세계를 다시 한 번 참혹한 전쟁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역사는 파국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한여름 시원한 냉수와도 같았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는 정확히 56년 뒤인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달린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으로 다시 한 번 재현됩니다. 1936년 암울했던 시절 광화문 광장에 모여 손기정과 남승룡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손자, 손녀들이 66년 뒤인 2002년 여름 광화문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을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손기정의 세계 제패를 기념하던 활명수의 광고 문구인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은 그렇게 실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활명수 광고 속 전화기와 자동차


1950년 안타까운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는 일은 국가적인 과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수출 전략과 민족 특유의 근면성을 바탕으로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경제개발을 이뤄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정치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경제가 점차 발전하자 우리 정부는 경공업을 넘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이 다 이때 만들어졌죠. 생활수준이 조금씩 향상됨에 따라 나름의 소비문화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자식 교육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에 대한 욕망은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고 계층을 형성함으로써 가치와 부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1960~1970년대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전화기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손에 하나씩 들고 있지만, 그 당시엔 동네에 전화기 한 대 있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전화 신청이 밀려 백색전화 한 대 값이 250만 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유할 수 있어 사고팔 수 있는 백색전화는 투기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80킬로그램 쌀 한 가마니 가격이 6만 3000원 정도였고 서울 시내 집 한 채 값이 250만 원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전화기 값이 비쌌는지 알 수 있죠. 


"하루가 끝나도 내일의 일이 또 남아 있습니다. 전화연락할 일, 만나야 할 중요한 약속시간 때문에 대식가로서 또는 애주가로서 먹고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다?"라며 활명수를 권하는 광고가 신문에 게재됩니다.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였습니다. 1968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활명수 광고에 처음으로 다이얼 전화기 그림이 등장하는데요, 이는 아직 전화기가 일반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전화기 옆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익숙한 전화 그림을 넣은 것이었죠. 활명수의 전화기 그림 광고에서 현대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문명의 이기인 전화기를 사용하는 타깃 고객인 직장인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 동화약품의 고민의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70년 8월 17일 《동아일보》 활명수 광고에는 자동차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1903년으로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포드 자동차를 들여온 것이 처음이었다고 하지요. 선택받은 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것. 당시 자동차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 우리나라는 미군이 남기고 간 자동차의 부품을 활용하여 조악한 디자인과 성능이긴 해도 운행에는 문제가 없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시발(始發)’ 즉,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죠. 이 시발 자동차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언젠가 차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1968년 전화기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와 1970년 자동차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는 당시 보통 사람이 소유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가치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화기와 자동차가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활명수 광고에 담겨 있던 이상이 실현된 것이죠.  


 

과음, 과식의 시대에도 활명수


19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농업 생산성이 향상하면서 어느 정도 먹을거리 문제가 해결되자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것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던 고단백 고칼로리 음식을 평소에 먹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과음과 과식을 하는 이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활명수도 이런 시대적 변화에 발맞췄습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과음'과 '과식'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5월 13일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과음 과식을 하지 맙시다!"라는 캠페인성 광고가 실립니다. 광고 문구를 보면 "언제나 튼튼하고 건강한 위를 위해서는 위에 부담을 주는 과음, 과식을 피하고 항상 알맞는 양의 음식을 규칙적으로 드시도록 하십시요.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반드시 규칙적인 식생활만을 하기란 어려운 일! ― 뜻밖의 과음, 과식을 하셨을 때는 곧 알파활명수를 복용하십시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현대인의 과음, 과식에 적절히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활명수 복용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과음, 과식 그리고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경제 발전으로 예전보다 풍요로워졌지만 물질적 풍요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바쁜 생활 속에서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한 끼 식사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2010년에 이르러 활명수는 가족식사를 제안하는 '맑은 바람 캠페인'을 제안합니다. 광고는 "하루 한끼, 가족이 밥상에서 만나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출처 - 동화약품

 

한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소비자들은 편의점에서도 간편하게 활명수를 구매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 2011년에 드링크제, 액제 소화제, 외용연고 등 48개 품목의 일방의약품을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의약외품으로 지정합니다. 소비자의 구매 편의성에 대한 요구가 이어지자 동화약품은 이를 수용하여 의약외품으로 전환된 제품 중 부채표 '까스활'을 출시합니다. 까스활의 탄생은 편의점과 대형마트의 대중화로 인한 소비 형태의 변화와 이에 따른 액제 소화제 시장의 트렌드와 현행법에 맞게 활명수의 브랜드를 적절하게 공유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죠.

 

활명수 하면 자연스럽게 부채표 상표가 떠오릅니다. 부채표는 활명수의 초창기부터 함께했습니다. 부채표 상표는 활명수 병 라벨에 브랜딩되어 100년 이상을 우리와 함께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활명수 하면 곧 부채표를 생각하는 것이죠. 동화약품이 최근에 출시한 미인활명수의 병 디자인을 보면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위에 새겨진 부채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디자인 안에 담긴 활명수의 가치를 음미합니다. 활명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소비자의 요구와 감각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제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10년 뒤 20년 뒤 활명수의 병과 라벨 그리고 부채표 상표는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출처 - 동화약품

 

2016년 올해로 딱 119년.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겪어온 활명수의 나이입니다. 근 120년간 활명수는 한국인의 지친 속을 달래주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 중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소비자의 99.8퍼센트가 활명수를 알고 있으며 연간 1억 병이 생산됩니다. 한마디로 활명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입니다. 활명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혼란과 전쟁,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 그리고 민주화와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주었습니다.

 

1897년 이래 활명수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처음 등장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활명수는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할 것입니다. 활명수가 미래가치를 담아 소비자와 사회에 더 많은 일을 할 때입니다. 120년간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과 동고동락한 활명수의 이야기를 담은 책,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에 오늘 전하지 못한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꼭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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