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선명히 엇갈리는 2개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학의와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행에 대한 결과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넘어간 건 아닌가 싶어 돌아봅니다.


출처 - AFP


미국의 거물 영화제작자였던 하비 와인스타인은 지난 3월 11일 뉴욕 1심 법원에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수많은 아카데미상 수상작으로 영화계에 군림하던 와인스타인은 1급 성폭행 혐의로 20년형, 3급 강간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번 선고는 2006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미리엄 헤일리를, 2013년 뉴욕 호텔에서 제시카 만 등 2명을 성폭행한 혐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고소, 고발에 따라 앞으로 형량이 더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운동을 촉발시킨 원흉이니까요. 하비 와인스타인은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앞세워 90명이 넘는 배우와 스태프 등의 여성에게 성폭력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출처 - 스톰픽쳐스코리아


와인스타인은 항소하겠다고 했는데요. 지겹게 들어온 수많은 가해자들의 단골 멘트처럼, 자신은 합의된 관계를 맺은 것이라면서 그 여자들이 자신과 자고 싶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는 그는 현재 67세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선고된 징역 23년 만으로도 사실상 종신형에 가깝다도 봐야겠죠.


 

출처 - 문화일보

 

그런데 같은 날 우리나라에서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범죄 의혹과 관련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왔습니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단장 여환섭 대구지검장)은 지난 1월 말 최모 씨를 건설업자 윤 씨와 함께 성폭행한 혐의(특수강간치상)로 고소당한 김학의 전 차관을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이로써 지난해 3월 관련 수사단이 출범한 지 10개월 만에 수사는 아무런 소득없이 종결되었습니다.

출처 - YTN


검찰은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이를 허위로 입증할 반대 증거 또한 충분치 않다며, 김학의가 진술을 거부해 구체적 증거 없이는 기소가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 말 잔치를 할 거면 대체 수사를 왜 다시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검찰은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 김학의를 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2013년 수사지휘 때부터 경찰이 신청한 영장을 11차례 반려하는 등 검찰이 수사 의지가 없었던 것은 드러난 사실입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신청한 체포·통신사실조회·압수수색·구속 영장을 9차례, 출국금지 요청을 2차례 반려하기도 했죠.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 속에서 지난해 3월 문재인 대통령은 김학의 사건을 언급하며 권력형 범죄에 대해 재수사를 강조했습니다. 이에 검찰은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한솥밥을 먹은 법무부 차관에 대한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로, 첫 수사부터 부실 수사와 늑장 기소로 가해자에게 이미 면죄부를 준 셈이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문재인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던 검찰이 세 번째 수사로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난 3월 11일 김학의에 대한 무혐의 처분으로 드러났습니다. 김학의는 지난해 11월 뇌물 수수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1심 무죄를 받았고, 현재 2심을 앞두고 있죠. 검찰의 짬짜미가 국민의 인식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겁니다. 김학의에 대한 이번 판결로 결국 검찰은 짜고치는 고스톱에 대한 비난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는 김학의 개인 차원이 아닌 검찰의 부실, 은폐 수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다 검찰의 자업자득입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출처 - 미투시민행동

 

같은 권력형 성폭행 사건을 두고 한쪽은 종신형에 가까운 죗값을 치르게 된 반면 다른 한쪽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대체 이런 차이가 어디서 나온 것일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한샘 성추행 사건, 현대카드 성추행 사건, 성심병원 간호사 노출 강요, 유니세프 회장의 성추행 발언에 이르기까지 올 한해 우리나라에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내로라하는 기업들에서 성범죄가 연이어 터져 나왔습니다. 몰래카메라나 리벤지 포르노, 도촬로 인한 범죄도 만연했습니다. 성적인 욕구나 변태성 때문에 이런 범죄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권력 혹은 직급을 이용한 성범죄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몰카 역시 나는 몰래 훔쳐보는데 도촬 당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미묘한 우월감과 권력감의 발현이라고도 하죠. 크리스마스, 송년회, 신년회 등 회식과 모임이 빼곡한 요즘 여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한샘이나 현대카드는 그나마 이름 있는 대기업이니 문제도 되고 기사도 나옵니다. 반면 규모가 작은 기업에서 이뤄지는 성범죄는 훨씬 심각하더라도 징계는커녕 뭘 잘못했는지조차 인식을 못 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출처 - JTBC


이런 성범죄가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처는 우리나라와 판이하죠. 아카데미상을 수두룩하게 따낸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올해 그간 있었던 성범죄가 드러나며 퇴출당했습니다. 자기가 세운 영화사 와인스타인 컴퍼니에서 쫓겨난 건 물론이고 영화사마저 매각되어 사라지게 될 전망입니다. 거물 제작자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것까진 우리나라 대기업들과 같지만 그 대가는 자신이 평생 일군 회사에서 쫓겨날 정도로 혹독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누구든 성범죄를 저지르면 혹독한 처벌을 피할 수 없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관련 법안 등도 개선해야겠죠. 성범죄에 민감한 사회로 변화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 안심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출처 - 한겨레


사회 각계각층에서 목소리를 내고 폭로를 한 덕분에 그나마 여러 대책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9월 디지털 성범죄와 전면전을 선포했죠. 우선 인격 살인에 해당하는 디지털 성범죄인 몰카,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불법 영상촬영물 삭제를 국가가 지원하는 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전해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국가가 유포된 몰카 삭제를 위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 신속하게 성폭력 피해자를 구제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간 피해자들이 수백만 원의 사비를 들여 온라인 정보 삭제 대행업체를 이용하던 것이 현실이었죠.


출처 - 한국일보


이와 함께 개인영상정보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앞으로 화장실, 탈의실 등 사생활 침해 우려가 큰 곳엔 영상촬영기기 설치가 금지됩니다. 고정되는 CCTV 같은 것은 물론이고 스마트폰, 스마트워치 등등 웨어러블 기기로 포함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5000만 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업무 목적으로 촬영할 경우 반드시 촬영 사실을 표시해서 누구나 촬영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자신도 모르게 찍힌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될 경우 촬영자나 게시자에게 열람, 삭제 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할 경우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발목을 잡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한 예산을 자유한국당이 절반으로 삭감해버렸습니다. 이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출처 - 헤럴드경제


성범죄에 민감해지는 분위기라서 그런지 '이러다가 이제 성관계 할 때 각서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농담을 하는 분들도 계신데요, 이런 말조차 앞으로는 조심해야 합니다. 합의 각서를 쓰고 성관계를 했더라도 협박한 정황이 있다면 강간이라는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죠. 서울고법은 19일 물리적인 폭행이 아니더라도 협박의 정도가 상당하면 합의 각서를 썼더라도 강간에 해당한다며 가해자에게 징역 4년과 80시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했습니다. 1심에서는 성관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며 이 부분에 무죄 판결을 내렸는데, 2심에서 이 부분을 파기한 것이죠. 이 판결은 우리에게 아주 간단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성관계에 앞서 각서 같은 걸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라는 겁니다.


출처 - 한겨레


친절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미소를 보인다고 호감이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기분이 더러워도 상사 앞에서는, 손님 앞에서는 웃는 낯을 유지해야 하는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은 모두 '고객 만족'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친절'을 강요당하는 감정노동자들의 현실은 외면하지요. 자신의 감정과 요구되는 감정이 다를 때 일어나는 감정부조화는 스트레스로 작용합니다. 그러니 고강도의 감정노동을 개인의 성격이나 품성으로 치부하며 손쉽게 처리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아울러 자신을 대신할 다른 사람이 많으니 일단 참고 지내보자 하는 식의 대응으로는 노동자 자신의 삶도, 사회의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한국 사회에서 감정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한 전쟁터에서 무분별하게 착취되고 있습니다. 구조적 병폐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활 속의 적폐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부 기업은 '고객대응 매뉴얼'을 마련하여 만일의 사태를 예방하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 사회가 감정노동자에게 과도한 친절을 강요하거나 직장 안에서 직급 혹은 권력 관계를 이용한 성추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감정노동자와 성범죄 피해자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니까요. 실효성 있는 법 개정과 인식의 전환을 통해 생활 적폐를 하나씩 제거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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