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5일, 헌법재판소는 야당에서 청구한 미디어법 권한쟁의심판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총 9명의 재판관 중 4명이 인용, 4명이 각하, 1명이 기각 의견을 내어 인용을 위한 정족수 5명에 1명 모자라 안타깝게도 기각되었습니다.

참고로 문제의 핵심인 미디어법은 이런 법입니다.

미디어법 [media law]
 
법률상의 용어는 아니나, 편의상 흔히 미디어에 관련된 여러 법을 통틀어 미디어법으로 부른다. 주로 방송법, 신문법, IPTV법, 정보통신망법, 언론중재법, 디지털전환법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한나라당이 개정을 주장하였으나 야당과 진보 세력의 반발을 야기했고, 2009년 7월 22일 국회에서 논란 끝에 통과되었다. 통과 과정에서 투표의 유효성 논란이 발생했다. 7월 3일 민주당 등 세 야당은 헌법재판소에 방송법의 효력정지가처분 및 권한쟁의심판청구를 신청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개정안에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여 대기업과 일간신문이 방송사 지분을 소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도는 지상파 방송 10%, 종합편성 채널 30%, 보도채널 30%까지다. 또한 외국인은 종합편성과 보도 채널을 60%까지 소유할 수 있다. 지상파, 종합편성 및 보도 채널을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대 지분도 66%로 상향조정되었다. 외국의 경우 대부분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고 있으나 언론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제한장치를 두고 있다.

출처 : DAUM 백과사전 시사상식사전

일부 대기업과 언론사가 독과점을 이룰지도 모를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거죠. 이때 통과 과정에서 재투표, 대리투표 등 날치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절차상의 문제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올려주신 따뜻한 카리스마 님의 예를 참조하시면 더욱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개 국민 입장에서 미디어법 통과, 왜 잘못됐는지 설명해볼까요?( http://careernote.co.kr/686 )

문제는 이미 헌재가 국회 표결 당시 절차상의 위법은 있지만 법안 자체가 무효는 아니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작년 10월 이 때문에 '컨닝한 것은 인정되지만 합격이 무효는 아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등 국민 사이에 헌재를 비꼬는 말이 많았죠. 절차에 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 결과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적어도 절차상 하자는 하자, 공을 돌려 받은 국회는 이 하자를 제거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헌재에 문제를 제기했고, 올해 11월 25일 결국 이런 웃지 못할 대답을 듣게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헌재가 한 말은 이런 말입니다. 잘못한 건 맞는데 늬들 일은 늬들이 알아서 해결해라.

자기들이 저지른 일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라... 언뜻 옳은 말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헌재가 이미 미디어법 표결 절차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상 법적인 문제로 다뤄야 함에도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해버렸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한 한상희 건국대 교수와 임지봉 서강대 교수의 말을 옮겨보죠.

한상희 건국대 교수 : "헌재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사건"
임지봉 서강대 교수 : "헌재가 존립하는 이유는 위법 위헌 상태를 적극적 위헌 판결을 통해 바로잡고 우리사회의 헌법질서를 수호하도록 한 것이다. 이번 결정을 보면 헌재가 있을 이유가 없고 위헌이나 위법의 유권 해석은 법학자에게 물어봐도 될 사안"

출처 : 미디어법 기각 … “헌재 스스로 존재이유 부정”(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83690&sid=E&tid=0, 내일신문)

정치적인 선택으로도 직무 유기에 가깝습니다. 민주주의 정부의 근간은 삼권분립입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서로 권력을 견제한다는 사실은 중학교 사회 시간에도 배웁니다. 헌법재판소는 사법부의 상징으로서 입법부의 잘못을 견제해야 하는 정치적 의무가 있음에도 그 의무를 방기해버렸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법조계 사람들과 의식있는 언론인들은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반대로 현 정부의 방통위와 방송 시장에 진출하려는 대기업 그리고 이른바 조중동은 신이 났습니다. 헌재의 판단까지 나왔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거죠. 방통위는 이미 종편 심사 절차와 관련된 일정을 밀어붙이기로 했습니다. 조선, 중앙, 동아, 매경 등 종편과 보도채널을 준비하는 언론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란 기자가 진실이란 칼을 탐사보도란 끈기로 벼려내어 그 유명한 석유 독점재벌 록펠러의 문어발을 잘라내 해체한 후 100년. 이젠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이 스스로 독점재벌이 되려고 합니다. 이 나라의 언론인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약자의 입장에 서서 진실을 파헤치는 참다운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이 그리운 이때입니다.
2010년 11월 11일. 누군가에게는 G20, 누군가에게는 빼빼로데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농업인의 날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차게 일어서 직립하라는 뜻을 담은 지체장애인의 날.

일반적으로 빼빼로데이로 널리 알려진 이날, 상술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강철 같은 의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갔던 여성들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솔로라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_^;;;;;;;;

'철의 여인'이라고 하면 '강한 의지를 품은 여성'에게 붙이는 별명이지만, 여성 국가원수를 비롯해 어떤 권력의 정점에 올라간 여성들을 지칭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 인디라 간디

우선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총리가 된 여성 인디라 간디가 있습니다.

이름에 간디가 들어가지만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은 아니고요. 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입니다. 자와할랄 네루라고 하면 《세계사 편력이란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이 책은 자와할랄 네루가 영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하다가 여섯 번째로 투옥당했을 때 딸이 서구 편협한 역사관에 갇힐까 염려해 보낸 편지에서 비롯되었죠.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에게서 그 편지를 받아보며 역사의식을 키운 《세계사 편력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성의 몸으로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조국을 수호했지만, 자국 내 시크교도들의 독립운동을 탱크를 동원해 진압하여 6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는 무자비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로 말미암아 암살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도의 처음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철의 여인이라고 할 만하지요.



낙천적 독립투사 - 골다 메이어

두번째 철의 여인은 인디라 간디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총리가 된 여성,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입니다.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한 명이며,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에는 수류탄을 속옷에 숨겨 가지고 다니며 국경을 넘는 임무도 마다하지 않은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성격은 낙천적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살해 당하자 이스라엘 첩보기관인 모사드에 그 테러 관련자들을 조건없이 모조리 죽이라는 지시를 내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후에 중동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책임 논란이 일며 결국 5년만에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이스라엘의 처음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입니다. 불관용과 비타협의 시대를 무력으로 돌파한 철의 여인이지요.


가장 널리 알려진 철의 여인 - 마거릿 대처

세 번째 철의 여인은 '철의 여인'이란 별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영국의 총리 마거릿 대처입니다.

과감하게 시장주의를 도입하여 영국을 영국병으로부터 구하고자 했으며 아르헨티나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녀의 경제 정책은 훗날 경제 호황을 가져온 밑바탕이 되었다고 인정받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영국병을 근본부터 고친 게 아니라 '대처리즘'이라고 이름 붙은 진통제를 놓았을 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정책 탓으로 노동자들은 진압당했으며 반공주의에 사로잡힌 나머지 독단적인 국정 운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영화로도 유명한 그래픽 노블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그 시절 대처리즘의 극우성을 통렬히 꼬집었다고 하네요. '철의 여인'이란 별명도 그런 반공주의 때문에 소련에 의해 붙여졌다는 듯.

음, 분명히 이분들 역시 철의 여인들이지만 좀 아쉽군요. 정치란 권력을 통해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이라 그런지 어둡고 위압적인 면이 조금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밑에서부터 싸워 이겨낸 여성은 없을까요? 그래서 조금 더 찾아봤습니다.


미 여성참정권 운동의 어머니 - 수전 앤서니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872년의 11월. 미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에 로체스터의 한 투표소에 여인들이 몰려듭니다. 여성도 투표할 권리가 있다고 항의하는 시위였죠. 시위대의 맨 앞에 많은 여성을 이끌고 온 수전 앤서니가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로써는 여성의 몸으로 투표하겠다는 건 명백한 불법행위. 수전은 재판에 회부되고 벌금형을 선고받습니다. 하지만 수전은 그 벌금의 납부를 거부하고 더더욱 여성참정권운동에 헌신하게 되지요.

기소된 후 수전은 미국 전역을 돌며 <여성도 사람입니까?>라는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이 연설은 영어권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힌다는군요.

수전은 여성참정권운동 이전에도 금주, 노예제 폐지 등 사회개혁운동 전반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여성참정권운동에 헌신하게 되지만, 결국 살아생전에는 미합중국 최고재판소로부터 여성투표의 합법성을 거부당했다고 하네요.

다행히 이런 노력은 사후에 결실을 보아 1920년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는 수정헌법 19조를 의회에서 통과시키며 '수전 앤서니 수정헌법'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살아생전에 강철 같은 의지를 품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낸 대표적인 여성은 없을까요? 골리앗과 싸워 이겨낸 다윗처럼 말입니다.


석유재벌 록펠러와 싸워 이긴 여성 저널리스트 -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바로 그런 여성이 존재합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여성 저널리스트로서 미국의 진보시대에 유력한 지도자이자 언론인이었죠.

당시 미국 석유의 95퍼센트를 독점한 곳은 존 D. 록펠러가 이끄는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거대한 회사였습니다. 스탠더드 오일은 동일산업 부문에서 자본의 결합을 축(軸)으로 한 독점적 기업결합. 즉 경쟁자를 없애려고 같은 업종의 기업을 합병하여 독점하는 방식인 '트러스트'와 각종 획책과 로비를 더해 미국 정유업계의 공룡이 된 상태였습니다.

이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반독점법이 부활하게 되고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섭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오랜 탐사 끝에 《매클루어 매거진의 연재 기사를 통해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비열한 수법들을 낱낱이 폭로합니다. 날 선 비판을 담은 기사는 훗날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합니다.  탐사보도폭로라는 언론의 무기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일도 바로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아이다 타벨의 폭로기사를 근거로 소송이 진행되고, 1911년 연방대법원은 석유재벌이었던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수십 개의 작은 회사로 해체하라고 판결합니다. 루스벨트가 대기업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부활시킨 반독점법이 이제는 독점재벌을 해체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연방정부가 이렇게 각종 트러스트를 규제할 수 있도록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여성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었습니다. 정말 현실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참조 포스트 : 미국의 반(反)독점법에 대해 아시나요?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의 폭로기사를 정리한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는 《뉴욕 타임스에서 선정한 20세기 미국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100개의 보도 가운데 5번째로 꼽혔습니다.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워터게이트 사건을 포함해 수없이 많은 20세기 미국 저널리즘의 보도 중 5번째로 꼽힌 보도를 살아생전에 해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의 강철 같은 의지와 행동력에 존경으로 다시금 고개가 숙여집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늦가을,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강철같은 의지와 행동력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낸 철의 여인들의 삶을 되돌아 보며, 어떻게 하면 보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_^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어떻게 한 명의 저널리스트가 독점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렸나




분야 : 정치, 사회                      지은이 : 스티브 와인버그 옮긴이 : 신윤주이호은

판형 : 신국판(152*225)                                                쪽수 : 464가격 : 23,000

발행일 : 20101110일                                      ISBN : 978-89-94502-02-1 (03300)


진실은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아이다 M. 타벨 vs. 존 D. 록펠러"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inerva Tarbell, 1857. 11. 5~1944. 1. 6)과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7. 8~1937. 5. 23)의 대결은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록펠러는 독점기업 스탠더드 오일을 이끈 재계의 거물로 미국의 석유산업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타벨은 이런 록펠러의 음모를 파헤친 여성 저널리스트였다.
석유 개척기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사업을 시작한 수많은 석유 생산업자, 정유업자, 운반업자는 모두 록펠러의 희생양이었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석유의 95퍼센트를 독점한 스탠더드 오일은 타 기업을 흡수·통합하고, 사세를 확장해 거대한 트러스트를 만든 재벌기업의 전형이었다.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뇌물 수수와 협박, 담합, 위법 행위, 폭력적 행동이 숨겨져 있었다. 그 실상을 취재해 거대 독점기업인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린 아이다 타벨의 삶과 기자정신은 부의 파워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부패의 고리를 파헤치는 탐사보도의 역할이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그대로 반복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판치는 재벌의 문제를 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아이다 타벨과 그의 정신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이다 타벨의 삶과 기자정신"


아이다 타벨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 저장 탱크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석유산업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겪었다. 타벨은 석유업계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남동생의 영향으로 소규모 석유 생산업자들과 스탠더드 오일의 부당한 경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타벨은 펜실베이니아 주 미드빌에 있는 앨러게니 대학에서 공부한 재원이었다. 그 당시 여성은 대학 교육을 받는 일이 드물었으나 교육의 중요성에 일찍 눈뜬 부모의 영향으로 타벨은 폭넓은 세계를 경험했다. 남북전쟁 이후 뉴욕 주 셔토쿼 호숫가 마을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교회 봉사자를 훈련하는 모임으로 시작한 교육운동은 대중의 지적 탐구심을 자극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타벨은 셔토쿼 문학과학 서클의 편집장과 잡지 셔토퀀의 편집기자로 활동하면서 저널리즘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난 타벨은 체계적인 조사 연구 기법을 배우는 한편 다양한 언론매체에 기사를 기고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다. 매클루어 매거진의 발행인 새뮤얼 시드니 매클루어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아이다 타벨을 발탁해 거대 독점재벌인 스탠더드 오일의 상거래 독점 상황을 파헤치는 탐사보도를 연재하게 한다.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1902년부터 19회에 걸쳐 록펠러와 기업의 비리를 통렬하게 파헤친 폭로기사로 말미암아 스탠더드 오일은 191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기업분할 명령을 받아 해체되기에 이른다. 1904년에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한 타벨의 폭로기사는 20세기 탐사보도의 역작이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현대적 탐사보도의 선구자인 타벨의 유년시절부터 석유제왕 록펠러를 파헤치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정밀하게 묘사하면서 진실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



지은이

스티브 와인버그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6권의 저서를 냈고 여러 언론 매체에 활발하게 글을 기고하고 있다. 세계적인 언론 단체인 미국 탐사기자 및 편집인협회IRE, Investigative Reporters and Editors 전직 대표였으며, 9년간 미국 비평가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지금은 미주리 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에서 탐사보도를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옮긴이

신윤주
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를 졸업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현재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호은
한동대학교 언론정보문화학부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M. Div)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관심을 두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비즈니스 관계 심리학 : 빅 파이브가 있다.


차례

서문

1.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석유와 함께한 어린 시절

2. 존 데이비슨 록펠러
    석유산업의 잠재력을 내다본 열혈 청년

3.
남북전쟁
    성장하는 석유산업

4.
도약
    소명을 찾아서

5.
잃은 것과 얻은 것
    타협이 아닌 저항을 꿈꾸다

6.
활자의 힘
    여성 저널리스트로 향하는 길

7.
타향살이
    문화적 차이에서 깨달은 통찰

8.
매클루어 매거진
    사회 변혁의 씨앗이 되는 잡지의 탄생

9.
나폴레옹
    탐사보도로 되살아난 영웅

10.
증인, 자료, 인터뷰
      펜 끝에서 되살아나는 역사

11.
폭로적 사고방식
      탐사보도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들

12.
괴물
      드러나는 스탠더드 오일의 실체

13.
폭로
      사실을 보도하는 저널리즘의 가치

14.
인격의 문제
      록펠러라는 사람을 향한 의구심

15.
폭로의 여파
      스탠더드 오일을 해체하다

16.
그 이후 그들의 인생
      타벨, 매클루어, 록펠러가 남긴 교훈


자료의 출처
참고문헌
감사의 글
옮긴이 후기

* 하단 아이콘을 클릭하시면 각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다미네르바타벨어떻게한명의저널리스트가독점재벌스탠더드오일?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언론인
지은이 스티브 와인버그 (생각비행,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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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시 미국의 반(反)독점법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한때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즈에 설치한 웹 브라우저 익스플로러 때문에 다른 기업들로부터 소송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이는 반독점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반독점법은 1890년 7월 2일, 벤저민 해리슨 미국 대통령이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에 서명한 것으로 기인합니다. 이 법은 상원 표결에서 51대 1, 하원에선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요, 당시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은 이 법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결과로 말미암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반독점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래나 상업을 제한하는 모든 계약은 무효
독점화 시도 금지
독점으로 피해를 입은 기업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상원의원 존 셔면, 기업의 독과점을 막다

존 셔먼(John Sherman) - 출처 : 위키피디아

반독점법이 만들어진 계기는 무엇일까요? 우선 미국의 기업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해야겠네요. 역사적으로 미국의 기업 정책은 레세페르(‘내버려두라’라는 프랑스 말)로 대표됩니다. 국가가 개인의 이익을 통제해선 안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무한경쟁주의 쯤으로 이해하시면 되겠네요.

레세페르가 옳다고 생각한 미국 정부는 개인과 개인, 회사와 회사의 경쟁(선의든, 혹은 그 다른 의도이든)을 방관합니다. 우리가 사회 시간이나 역사, 경제 시간에 배운 이른바 야경국가로서의 역할만 수앵한 것이죠.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독과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자본이 많은 기업이 상대적으로 자본이 적은 경쟁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격을 낮추는 식으로 악의적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돈이 많은 기업이 승리를 거두면 그때 제품의 가격을 확 높여서 폭리를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오하이오 주 출신 상원의원 존 셔먼(John Sherman)은 법안을 제출합니다. '셔먼 반독점법'이 등장하는 순간이죠. 셔먼의 법안 제출에 대해 많은 기업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만, 셔먼은 다음과 같이 답해 반론을 잠재웠다고 합니다.

"정치체제로서 군주를 원하지 않듯, 경제체제로서 독점을 원하지 않는다"


존 셔먼에 의해  반독점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내용이 모호한데다 기업의 로비와 편법 탓으로 거의 사문화되었던 것이죠. 점차 효력을 잃어는 듯했던 반독점법은 어떠한 계기로 부활하게 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반독점법을 부활시키다

과연 반독점법은 어떻게 다시 부활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죠.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 출처 : 위키피디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미국의 제 26대 대통령으로 1901년에서 1909년까지 약 8년 동안 재임했습니다. 24세에 젊은 나이에 뉴욕 주의원이 되었고, 37세에는 뉴욕 경찰청장이 됩니다. 루스벨트를 뉴욕 경찰청에 임명한 이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인데요, 그는 자신이 민주당임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인 시어도 루스벨트를 뉴욕 경찰청장에 임명했다고 합니다. 이후 루스벨트는 1898년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 쿠바 민병대를 이끌고 참전해 케틀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고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윌리엄 매킨리와 더불어 당선되어 부통령이 됩니다. 하지만 1901년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대통령직을 물려받습니다.

42세라는 젊은 나이(미국 역대 최연소 대통령)로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가 대통령이 되어 한 일은 셔먼 반독점법의 부활이었습니다. 당시 트러스트(동일산업 부문에서의 자본의 결합을 축(軸)으로 한 독점적 기업결합. 즉 경쟁자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 같은 업종의 기업을 합병하여 독점하는 방식)를 통해 독과점을 형성해 나갔던 굴지의 대기업들, 즉 J.P. 모건, US스틸, 스탠더드 오일 같은 거대 기업을 견제합니다. 또한 그는 당시 국내적으로 어려웠던 경제, 노동 문제에도 힘을 써서 대중의 인기를 얻어 19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합니다.
(공화당 출신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반독점법을 옹호했다는 점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기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반독점법으로 대기업을 견제한 이유는 미국에 사회주의가 뿌리내리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하는군요.)

왼쪽 : 독점 기업가들과 싸우는 시어도어 루스벨트(풍자화), 오른쪽 : 트러스트로 많은 기업을 손에 넣은 록펠러(풍자화) - 출처 : 위키피디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석유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리다

왼쪽부터 :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 Tarbell), 헨리 H. 로저스(Henry Huttleston Rogers)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활약에 힘입어 반독점법이 부활하자 대기업를 견제하는 법으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결국 반독점법은 대기업 견제를 넘어서 거대한 재벌을 해체하는 성과를 냅니다. 미국 석유의 95퍼센트를 독점한 존 D.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을 해체한 쾌거가 바로 그것이죠.

앞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미주리 주에서 정유한 석유의 9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업 규머에 이르기까지 록펠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스탠더드 오일을 키웠습니다. 당시 석유를 운반하는 철도회사에 압력을 가해 석유 운반 운임을 협상하고 돌려받는 방식으로 이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리베이트 건으로 말미암아 스탠더드 오일의 경쟁사들은 엄청난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의 타개책으로 경쟁사들은 송유관을 설치해서 불이익을 감소해보려 했으나 이 또한 록펠러의 로비 활동으로 힘들어졌습니다. 휘청거리는 경쟁사를 록펠러는 앞서 이야기한 '트러스트'라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무너뜨렸고, 정유업계에서 스탠더드 오일은 거대 독점재벌이 된 것이죠.

스탠더드 오일의 석유업계 독점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데요, 그 가운데 특출난 한 여성이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섭니다. 그 여성이 바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 Tarbell)입니다.

McClure 매거진 - 출처 : 위키피디아

매클루어 매거진

아이다 타벨은 선생님이자 작가, 그리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1900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조수 존 시덜과 함께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헨리 H. 로저스(Henry Huttleston Rogers)와 첫 인터뷰를 갖게 되는데요, 그는 스탠더드 오일의 중역으로 미국 재계의 거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인터뷰 중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거든요. 헨리 H. 로저스의 인터뷰에서 스탠더드 오일의 비즈니스 관행-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이 밝혀지게 된 것이죠. 이 내용은 당시 매클루어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총 19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매클루어 매거진 에 실린 그녀의 기사는 1904년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합니다.)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제야 소송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그 소송은 5년여 정도 진행되었고 결국 1911년 연방대법원의 결정으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수십 개의 회사로 해체되고 맙니다. 반독점법이 승리한 것이죠.

현재의 반독점법

반독점법은 1913년 클레이턴법과 연방거래위원회법이 제정되면서 독점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현재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반독점법은 커다란 기업의 독점을 막기 위해 사용되고 있어서 가끔 TV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이 반독점법으로 몸살을 앓기도 하죠.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반독점법을 강화해 자국의 기업을 보호하고 해외 기업들을 규제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EU와 FTA를 체결했고 머지않아 미국과 FTA를 체결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과연 여기서 반독점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습니다.

* P.S. 말하지 못한 이야기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별명은 테디라고 합니다(자신은 부정했다고 하네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곰 사냥을 나갔는데요, 새끼 곰을 발견하곤 그냥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뉴욕의 장난감 가게 주인이 곰 인형에 테디라는 이름을 붙여서 팔았는데요, 그것이 테디 베어의 유래라고 합니다.
- 헨리 H. 로저스는 허클베리 핀, 톰소여의 모험 등을 쓴 마크 트웨인의 절친이었다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모든 자산의 관리를 헨리  H. 로저스에게 맡겼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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