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들의 위기를 보도하는 뉴스가 연일 나옵니다. 보수 야당들은 이번 정부 들어 자영업 폐업률이 90%가 넘는다며 최저임금 문제를 건드립니다.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은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못 지킨 데 대해 사과를 했습니다. 

 

이번에 교체된 통계청장에 관한 논란도 이런 경제 상황에 대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현재의 경제 위기와 양극화가 통계에 의해 부풀려진 것이냐 혹은 보수 야당의 주장처럼 청와대가 입맛에 맞게 통계를 조작하려 한 것이냐는 것이죠. 과연 우리나라 경제 상황의 정확한 모습은 무엇일까요?

 

출처 - 뉴시스

 

문제가 된 통계는 1·2분기 소득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소득 결과였습니다. 통계청은 각 시기별 소득이 8%, 7.6%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가구와의 격차가 벌어져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이 같은 통계를 보수언론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고용률이 악화되고 저소득층 소득이 감소했다며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폐기를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했습니다.

 

반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 28일  KBS라디오 〈정준희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통계청의 가계소득 동향 통계가 오류라고 지적했습니다. 2017년 이전과 이번 조사의 표본이 달라 서로 비교가 불가능한데 이를 비교해 저소득층의 가계소득이 7.6% 감소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심 의원은 같은 표본을 가지고 2017년과 2018년을 비교한 결과 오히려 0.4%가 증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 의원은 "통계청이 가계소득동향 조사를 폐기했다가 다시 부활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표본을 짜다 보니 함께 시계열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통계를 같이 붙여서 비교했다"면서 "과연 믿을 만한 통계인가"라고 지적했습니다.

 

출처 - 한경닷컴

 

사실 가계동향조사 결과는 이전에 한 차례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지난 5월 저소득층 소득이 급감했다는 1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가 나오자 청와대가 이를 반박한 겁니다. 당시 청와대는 가계동향조사의 원시자료를 한국노동연구원 등 국책연구기관에서 재가공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를 근로자 개인 기준으로 다시 집계했더니 근로자 90% 이상의 소득이 늘었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 머니투데이

 

이 때문에 청와대가 이번에 통계청장 교체를 통해 저소득층 가계소득이 증가했다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소득주도성장 기조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하려 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하지만 통계청 통계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했던 강신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신임 통계청장으로 임명한 탓에 논란을 빚었습니다.

 

출처 - 조선일보


지난 6월 OECD가 발표한 ‘사회적 엘리베이터는 붕괴했는가?’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소득 하위 10% 가구에 속한 자녀가 국민 전체 평균 소득을 벌려면 다섯 세대 정도가 걸린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손자의 증손자, 즉 150년 정도는 걸려야 겨우 중산층 소릴 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OECD 회원국 중 복지가 잘된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 기간이 짧은 것으로 나타나 덴마크는 2세대,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은 3세대가 걸렸습니다.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젠 고학력조차 시장에서 계층 상승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이동성이 떨어지면서 노력해봤자 안 될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구나 중산층이라고 한들 걱정 없을 정도로 부를 이루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연평균 소득은 월 280만 원 꼴이지만,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중위 소득으로 본다면 우리나라 회사원의 절반은 월급이 200만 원 이하인 것으로 집계됐기 때문입니다. 상위 1%의 연평균 소득은 2억 4300만 원으로 회사원의 월급에 비해 10배가 넘습니다.


출처 – MBC 유튜브


특히 사회에 진입하고자 노력하는 청년 세대가 파산 신청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대법원이 세대별 파산 신청자를 집계한 결과 지난 5년 내내 20대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큰 돈 때문이 아닙니다. 최저임금을 겨우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프거나, 그만두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동안 학자금 대출 상환이나 생활비가 부족해 50만 원, 100만 원, 딱 월세하고 최저생활비만 빌렸을 뿐인데도 그렇습니다. 갓 20살이 지난 청년들에게 사회적 신용이나 보증이 있을 리 만무하니 불법적인 수법을 권하는 업체들에게 떠밀려 가게 되고, 사회 경험이 부족하니 사기에 쉽게 노출되며, 신용불량과 추심업체의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1000~2000만 원이 없어 파산 신청을 하곤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앉은 채로 죽으라는 소린데 그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현재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세대 중 소득이 줄고 있는 건 30세 미만이 유일합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보수언론의 최저임금 타령을 계속 들어야 하겠습니까?


출처 - 시사저널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기형적인 부의 쏠림입니다.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대표적 대기업 집단 60개를 놓고 볼 때 삼성, 현대, SK, LG 국내 4대 그룹의 자산이나 매출이 나머지 대기업 집단 56곳과 맞먹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0대 그룹으로 따지면 자산과 매출 비중이 전체의 70%에 달했습니다. 재벌기업 내에서조차 부의 편중 현상이 감지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대로 가면 4대 그룹의 자산은 사상 처음으로 1000조 원을 넘으며 대한민국 GDP의 절반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가 대기업 4곳에 저당 잡히는 꼴이죠. 이번 롯데 신동빈 회장의 2심 판결이나 진행 중인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부는 대기업의 패악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편법, 불법을 동원한 2세, 3세 승계, 일감 몰아주기, 과도한 수직계열화, 정치권과의 부정한 밀착 등으로 말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미국은 어떨까요? '기업범죄와 지배구조'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0여 년 동안 회계부정으로 책임추궁을 당한 임원의 범죄 이후 경력을 조사한 결과 미국은 93%가 조사 진행 도중, 혹은 조사 종료 직후 해고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최고 경영진들은 해임 후 재취업 기회를 박탈당하고 가지고 있던 스톡옵션 행사 기회도 잃어버렸습니다. 이 중 28%는 형사처벌을 받고 평균 4.3년을 복역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 오너들이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그들의 부도 유지됩니다.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오너들이 범죄를 저지를 당시 재직하던 회사나 그 회사가 속한 재벌그룹의 다른 계열사 임원으로 복귀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특히 전문경영인의 경우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이 집행유예에 그쳤죠. 여기까지만 봐도 현재 한국 경제의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이며 빈익빈 부익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돈을 쥐고 있는 대기업들을 개혁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겨우 몇천 원 수준의 최저임금을 붙잡고 늘어지는 건 기업들이 그 기름진 배를 더 기름지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 《미디어오늘》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올해 최저임금 인상 문제를 다루거나 언급한 기사량은 지난해의 5.5배였습니다. 1년 전보다 4.7배, 2년 전보다는 9.8배 높았으며, 증가분의 약 70%가 경제지 및 보수 언론 보도였죠. 2018년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된 공포 여론을 경제지와 보수언론이 주도한 겁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학계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단기간에 확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언론이 경제성장률 변동 원인을 단순히 최저임금에 국한해서 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자영업자 다죽는다는 프레임도 마찬가지입니다. 2017년 자영업자 568만 명 가운데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가 70%에 가까운 407만 명입니다.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는 161만 명이었죠. 70%가 사장 혼자 일하는 게 자영업계의 현실이란 말이므로 최저임금이 오른다고 영향 받을 자영업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거죠. 오히려 자영업자들은 골목상권 보호, 적정 하도급 단가 보장, 카드 수수료 인하, 건물 임대료 규제 등을 더 주요한 과제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들은 모두 기업이나 건물주들에게 고스란히 불이익이 되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언론은 최저임금만 죽어라고 보도한 겁니다. 사실상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공포는 언론이 만든 셈인데, 이는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 단물을 나눠먹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


출처 - 조선일보


지난 28일 국회에서 정의당 공정경제민생본부와 추혜선 의원 주최로 대기업 갑질피해 증언대회가 열렸습니다. 삼성·현대·한진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현대자동차, 에스케이(SK), 현대건설, 롯데 등 대기업들로부터 ‘갑질 피해’를 당한 협력업체, 피해자 단체가 참석해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손정우 태광공업 대표는 현대자동차 2차 하청업체를 꾸리다가 24년간 거래해온 현대자동차 1차 협력사로부터 고소된 상태입니다. 손 대표는 직원들 퇴직금 마련을 위해 자신의 보험금을 생각하며 자살까지도 생각했다면서 "상대방이 크다면 법적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스스로 살 길을 찾으십시오"라며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대기업과 대형로펌 앞에선 상황과 어려움을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얘기입니다.

 

출처 - 한겨레

 

이 자리에 함께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여러 피해자분들에게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면서 "우리 사회의 저소득층 그다음에 소상공인, 중소기업들에게 먼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 더 팩트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모두발언을 통해 "납품단가 후려치기, 선시공 후계약, 기술 탈취 등 대기업과 원청의 갑질로 인해 도산하고 심지어 기업의 대표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면서 "공정 경제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은 무엇보다 갑질 경제의 청산"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한국 서민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정확히 짚어야 올바른 해결책이 나옵니다. 한국 경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이들이 대체 누구인지,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국민의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신간 《키워드 오덕학―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을 소개합니다.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이미 오래 전부터 생명력을 얻고 있는 한국식 표현이지요. 우리의 오덕 문화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되, 그 말이 쓰이는 맥락은 태반이 혼란스럽거나 혼동되거나 심지어는 적잖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오덕’은 일본의 ‘오타쿠’와는 또 다른 맥락성을 지니고 자생해가고 있는 중인데요. 《키워드 오덕학》은 ‘웹툰(WEBTOON)/오타쿠/코스프레/야오이 그리고 BL/OSMU(ONE SOURCE MULTI USE)/기록과 통계/백합(百合)/모에(萌)/지역 캐릭터/짤방/병맛/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서브컬처(subculture)’에 이르는 총 13가지 키워드(열쇳말)를 통해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지 상세히 살펴봅니다. 한마디로 《키워드 오덕학》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오덕 문화’를 충실히 소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덕후'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오타쿠'(おたく)는 일본에서도 멸칭으로 시작되었다.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는 《만화 브릿코》 1983년 6월호부터 실은 칼럼 〈'오타쿠' 연구〉에서 오타쿠를 '안경에 파묻혀 영양실조 걸린 하얀 돼지 같은데' '엄마가 사준 옷 차려입고' '세기말적으로 어두컴컴하다가 만화 행사장에선 잔뜩 모여 활개 치는' '남창 같은 구석이 있어 여자를 사귈 수 없을 것 같은 놈들'이라고 묘사했다. 명색이 연구란 말을 제목에 달아놓은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상적 악담을 쏟아낸 까닭에 연재가 중단되긴 했으나 이 칼럼은 '오타쿠'라는 용어의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1989년 미야자키 츠토무가 도쿄·사이타마 연속 여아유괴 살인 행각을 벌이자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일본 경찰은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수사기법을 동원해 범인을 검거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되고, 그 안에 호러 영화와 로리콘 성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언론은 '오타쿠=잠정적 범죄자'란 부정적인 인식을 유포하기에 이른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롤리타 콤플렉스 살인귀'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일본에서 오타쿠는 시각 기호로 창작된 캐릭터에 집착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범죄 예비군 정도로 인식되었다. 2008년까지 NHK는 오타쿠를 금지어나 다름없는 방송 문제 용어로 구분하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후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되고 그들이 심취한 산업의 규모가 재조명되면서 인문학적 연구가 거듭되고 있다. 이로써 오타쿠는 '꽂히는 취향에 일정 이상으로 몰입하는 사람'을 뜻하는 표현으로 일반화하는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때 일본의 신어사전은 오타쿠를 '만화, 애니, 비디오게임, 아이돌 등 허구성 강한 세계관을 좋아하는 이들을 일컫는다'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현재 오타쿠의 관심 대상은 철도나 밀리터리, 성우, 특정 인물 등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우리의 덕후 문화, 어디까지 왔나?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오랜 시간을 거쳐 생명력을 얻고 있던 한국식 표현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을 넘어 다수의 일반 한국 대중 사이에서 '오덕'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 건 TV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tvN, 2009. 3. 31~2013. 11. 26)였다. 2010년 1월 27일자 〈화성인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안는 베개(끌어안고 잘 수 있는 등신대 베개)를 들고 나와 "이 캐릭터와 혼인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출연자를 소개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조롱처럼 돌아다니던 '안여돼'(안경 여드름 돼지)형 인물이 화성인(=상식 밖 인물)의 대표주자 '덕후'의 표상으로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오덕' '덕후' 부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중에게 고정된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의 '오덕' 또한 일본 ‘오타쿠’의 전철을 밟은 듯하지만, '오덕 문화'는 거기에 머무르고 있지만은 않았다. 웹툰이 상업적 정립 10년을 넘긴 2013년을 거치며 미끼 상품에서 벗어나 콘텐츠와 상품으로서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덕후 문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유층과 함께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문화 코드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정의되던 범위 바깥으로 확장하며 경계를 무너뜨리고 급기야 멸칭마저도 유희화하는 현상을 겪게 마련이고 그러지 못하는 문화는 역설적으로 박제화하거나 사멸하는데, 오덕 문화는 다행스럽게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근래 화제를 모은 TV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능력자들〉(MBC, 2015. 11. 13~2016. 9. 8)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인류는 덕후들의 능력으로 인해 진화되었다" "당신의 덕심이 바로 당신의 능력이다"(프로그램 소개 중에서)라며 '덕후'를 별다른 주석문 하나 없이 전면에 내세웠다. 재밌는 건 〈능력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의 제목 자체다. 말 그대로 덕후를 '능력자'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여기서 한술 더 떠 "개개인의 전문성이 나라의 경쟁력이 된다"라고까지 피력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등장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어떤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변화로 비치는 현상 이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덕후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 미디어가 '능력자' 이전에 '화성인'으로 분류했던 이들을 의미한다.


아스카(〈신세기 에반게리온〉 여주인공 가운데 한 명)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연예인과 〈도라에몽〉에 미쳐 사는 몸짱 훈남 연예인처럼 사회적 인지도와 실력을 갖춘 그럴싸한 오덕층의 출현은 스스로를 덕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일반 대중에게는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라? 우와? 세상에?' 하며 놀라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이 '사회성 결여' 같은 비상식적 면모와 거리가 멀다는 점도 인지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는 어느 무언가에는 '덕'이다. '덕질'이 즐거운 유희가 되는 시점에 '오덕·덕후=안여돼' 프레임은 힘을 잃게 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창궐하던 사방천지의 덕질 놀이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TV라는 절대적 대중문화 살포 도구(!)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오덕' '덕후' '덕질'이라는 말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나 〈능력자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능력자들〉에 출연한 이들은 겉보기에 멀쩡하고 자기 일에도 충실했다. 더구나 관심 대상을 향한 애정과 노력은 실제 해당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조차 혀를 내두르다 못해 "너 이쪽으로 와라"라며 취업 제안을 즉석에서 받을 만큼 전문성마저 갖추고 있었다. 오덕들의 노력과 지식은 '덕질'이라는 범주 안에 놓이지 않아 왔을 뿐 덕후 문화가 애먼 논란 속에 정체를 겪고 있던 시기부터 이미 쌓이고 있었던 것들이다. 우리 시대의 흐름이 이들이 쌓아온 면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할 수 있는 데까진 온 것이다.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오덕 문화가 새로운 경제 동력이 되고 있다. 이들이 몰입하는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콘텐츠 시장이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이면 이 분야만 약 1700억 달러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오타쿠 시장의 규모를 알려주는 단적인 자료가 있다. 2004년 8월 24일 노무라종합연구소(野村総合研究所)가 발표한 〈마니아 소비층은 애니메이션, 만화 등 주요 5개 분야에서 2,900억 엔 시장—오타쿠층의 시장 규모 추계와 실태에 관한 조사〉라는 보도자료를 보면 '애니메이션/만화/게임/아이돌/조립PC' 다섯 개 분야에 걸친 오타쿠들의 소비 시장 규모는 2900억 엔(약 2조 9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콘텐츠 관련 네 개 분야, 즉 애니메이션, 아이돌, 만화, 게임 산업 전체의 시장 규모는 약 2조 30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오타쿠 소비층이 금액 기준 1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처럼 오타쿠는 구매 의욕이 높을 뿐 아니라 커뮤니티 형성의 핵심, 차세대 기술 혁신의 장, 신상품 실험 대상으로서의 가치도 높아 산업 관점에서 기대되는 역할이 큰 모집단이라 할 수 있다. 오타쿠든 한국화한 오덕이든, 이들에게 통하는 코어한 부분을 이용하려면 이들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오덕들의 문화와 역할은 일본의 오타쿠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되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더욱 달라질 것이다. 이 때문에 《키워드 오덕학》의 저자는 '오덕'을 '오타쿠'와 단순 동의어로 놓고 용어를 해설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이 책의 특징은 일본에서 유래한 '바닥 문화'를 파고드는 차원이라기보다 우리나라에서 오덕 문화와 개념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이 《키워드 오타쿠학》이 아닌 《키워드 오덕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겐 우리에게 맞는 '오덕' 담론이 필요하다. 아울러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을 공유하고자 한다.


 

지은이 

 

서찬휘
본명 임채진. 1979년생. 1998년 이후 지면과 형식을 가리지 않고 만화 이야기를 해온 만화 칼럼니스트. 자생한 한국산 2세대 오덕으로 한국 오덕 문화의 흐름과 성격을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꾸준히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만화, 애니, 성우, 애니송, 라이트노블 등을 덕질하다 현재는 만화를 중심으로 정착 중. 만화 정보 웹진 《만화인manhwain.com》 운영을 비롯해 대학 강의, 인터뷰, 팟캐스트 진행, 전시 기획, 세미나 기획 및 진행, 캘리그래피 등 만화와 연관성 있는 일들에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차례

 

들어가며 _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

 

01. 웹툰(WEBTOON)
‘MADE IN KOREA’ 만화 형식 웹툰의 정립 과정과 대외 브랜드화 현황에 관하여

-생각할 거리들

 

02. 오타쿠
‘화성인’에서 ‘능력자’까지, ‘덕후’의 즐거운 위상 변화

-생각할 거리들

 

03. 코스프레
불분명한 유래 집착과 일본 콤플렉스를 넘어서

-생각할 거리들

 

04. 야오이 그리고 BL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섹슈얼리티 판타지

-생각할 거리들

 

05. OSMU(ONE SOURCE MULTI USE)
똑바로 서지 못한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무시한다

-생각할 거리들

 

06. 기록과 통계
한국 만화가 진정 튼튼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

-생각할 거리들

 

07. 백합(百合)
소녀(여성) 간의 우정과 유대에 천착한 판타지 픽션

-생각할 거리들

 

08. 모에(萌)
극단적으로 부품화한 취향 코드와 언캐니밸리

-생각할 거리들

 

09. 지역 캐릭터
한국에서 ‘쿠마몬 성공신화’를 바라고 싶다면

-생각할 거리들

 

10. 짤방
이미지 속 맥락의 만화적 재해석

-생각할 거리들

 

11. 병맛
조롱을 내재화한 이 시대의 산물

-생각할 거리들

 

12. 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
상반된 마음의 간극을 부품화하다

-생각할 거리들

 

13. 서브컬처(subculture)
오타쿠 컬처? 문화콘텐츠?

-생각할 거리들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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