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이제 곧 겨울입니다. 눈도 내리겠지요. 푸름을 자랑하던 나무도 낙엽을 떨구며 겨울로 향하고 있고 2012년도 11월을 넘어 2013년을 향해 달려갑니다. 올 1월에 세웠던 계획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더라도 한 해를 잘 보내겠다던 생각은 간직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년을 준비하며 보냈으면 합니다. 

2012년은 12월에 있을 대통령선거로 마감합니다. 대한민국의 정계를 둘러보면 많은 정치가가 입문할 때 다짐했던 첫 마음을 잊고 사는 듯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시작한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대개는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정계에 들어왔겠지요. 부디 그 초심을 기억하고 실천하기 바랍니다. 특히 대통령이 될 유력 후보들이 출마하면서 했던 말을 끝까지 지키기 바랍니다.

 


초심

눈 오는 아침은
설날만 같아라

새 신 신고 새 옷 입고
따라나서던 눈길
어둠 속 앞서가던 아버지 흰
두루막 자락 놓칠세라
종종걸음치던 다섯 살
첫길 가던 새벽처럼

눈 오는 아침은
첫날만 같아라

눈에 젖은 대청마루
맨발로 나와
찬바람 깔고 앉으니
가부좌가 아니라도
살아온 흔적도 세월도
흰 눈송이 위에 내리는
흰 눈송이 같은데

투둑, 이마를 치는
눈송이 몇
몸을 깨우는 천둥 소리

아, 마음도 없는데
몸 홀로 일어나네
몸도 없는데
마음 홀로 일어나네

천지사방 내리는 저 눈송이들은
누가 설하는 무량법문인가

눈 오는 아침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만 같아라

많은 사업가가 기업을 처음 시작하던 때의 마음을 잊고 지냅니다. 자신의 부를 위해, 돈에 대한 욕심으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노동자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기업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기업을 키우려고 열심히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욕망이란 괴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순수한 사람들의 초심을 앗아갑니다.

초심을 잃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과연 어디에서 차이가 생겼을까요. '조금'과 '지금'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아주 조금, 조금만 더 사업체를 키운다면 사회를 위해, 직원들을 위해 무언가를 실천하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조금'을 기다리는 사업가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할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사업체가 커가는 사이 변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바쁘고, 거래처에 부담을 지우고, 직원의 노동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악덕 기업주로 변해버립니다. 반면 초심을 잃지 않는 사업가에게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자신이 처음 생각한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초심을 실천하려 합니다. 

시인은 초심을 "눈 오는 아침은 / 설날만 같아라"라고 표현하는데, '눈이 오는 아침'이 '설날'로 이어지면서 눈에 이입된 초심의 이미지가 확대되는 효과를 거둡니다. 어린 시절 설날은 흥분되고 기다려지는 가장 풍요로운 날입니다. 떡국과 맛난 음식, 세배하고 받는 세뱃돈 등 어린 시절의 설날을 생각하면 언제나 설레는 기억뿐입니다. 이런 기억은 "종종걸음치던 다섯 살 / 첫길 가던 새벽처럼" 새 신에 새 옷 입고 아버지를 놓칠세라 따라가는 다섯 살 아이의 설레면서도 조급한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시인은 설빔을 입고 아버지를 따라 설을 보내러 가는 다섯 살 아이의 마음으로 ‘눈이 오는 날을 설날 같다’고 초심을 묘사합니다. 시인에게 초심은 다섯 살 아이의 마음으로 설날을 맞는 벅찬 감정인 셈입니다. 

어린아이의 초심은 "눈 오는 아침은 / 첫날만 같아라”처럼 눈이 오는 첫날 아침의 이미지로 성장하여 어른의 눈으로 '초심'을 생각합니다. 초심은 다섯 살 어린아이의 천진한 설날에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다시 힘을 내어 살아야 하는 첫날로 변화합니다. 지나온 모든 흔적을 덮는 눈, 아무도 밟지 않는 눈, 그것을 보는 시인은 처음 품었던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첫날을 느낍니다.

 

"눈에 젖은 대청마루 / 맨발로 나와 / 찬바람 깔고 앉으니 / 가부좌가 아니라도"라는 표현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시인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설날을 맞이하는 다섯 살 아이의 설레는 시각과, 오랜 시간 현실과 맞서 싸우면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버티는 현재의 시점으로 떨어지는 흰 눈송이를 봅니다. 그런 마음이기에 "살아온 흔적도 세월도 / 흰 눈송이 위에 내리는 / 흰 눈송이 같은데”라고 자신이 걸어온 세월과 초심을 돌아볼 수 있었겠지요.
  
일관된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시인이지만 혹여 초심을 잃을 수도 있을까 싶어 자신을 경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 심정이 "투둑, 이마를 치는 / 눈송이 몇 / 몸을 깨우는 천둥 소리"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주 작은 눈송이가 이마에 떨어졌을 뿐인데도 시인은 그것을 천둥소리로 느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초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지요. 시인에게 이러한 충격은 지금까지 견지해온 삶의 무게에서 기인합니다. 그 충격이 "아, 마음도 없는데 / 몸 홀로 일어나네 / 몸도 없는데 / 마음 홀로 일어나네"와 같은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천지에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누가 설하는 무량법문인가 하고 스스로 묻지만, 사실 시인은 이미 답을 얻었습니다. 고승의 설법이 아니더라도 시인의 이마를 적시는 흰 눈송이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하고 잊지 말아야 할 초심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맞으며 깨달음을 얻은 시인이 눈 내리는 아침을 새롭게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눈 오는 아침은 /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 첫날만 같아라"라는 표현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제 곧 서울에도 첫눈이 내리겠지요.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지난날의 흔적을 지우려 하기보다 어린 시절 품었던 이상과 올바름을 간직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 여러분의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백무산
1955년 경상북도 연천에서 태어났다. 1984년 《민중시》 1집에 <지옥선>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대 노동의 삶에 관한 관심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한 그는 자본의 무한 잡식성을 비판하고 자본의 가치를 넘어서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생각들을 시에 담아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0년에 출간한 그의 두 번째 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는 '정치 조직을 통한 노동자 계급의 권력 획득'을 선언하며 노동계급의 투쟁을 직설적으로 노래했다. 1988년 말부터 1989년 초까지 약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울산 현대중공업 대파업투쟁을 한 편의 완결된 장시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작가의 실제 삶이 문학적 표현으로 투영된 흔치 않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인간의 시간》《길은 광야의 것이다》《초심》《길 밖의 길》《거대한 일상》《완전에 가까운 결단》《그 모든 가상자리》 등이 있다.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1997년 제12회 만해문학상, 2007년 제6회 아름다운 작가상, 2009년 오장환문학상, 제1회 임화문학상 등을 받았다.


첫눈이 내렸지만 휴일 잘 보내셨는지 여쭙기가 무서운 주말이었습니다. 23일 군인 두 명과 민간인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평도 포격전의 상처는 다 아물지도 못했고, 28일 일요일부터 시작된 한미연합훈련 시에는 북측에서 또 한 번 포성이 들려와 또다시 대피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소리로만 그치고 대피령도 곧 해제되었지만요.

주말 동안 인터넷에서 재밌지만 의미심장한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23일 연평도 포격전을 처음으로 알린 연합뉴스의 사진을 원본으로 좌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색감과 프레임 등을 바꿔버린 1면 사진들입니다. 《경향신문》《한겨레》《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일간지와 원본이 된 《연합뉴스》의 사진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네요.

원본과 비교하자면 《한겨레》의 경우 원본보다 다소 연기가 덜해 보이고, 《중앙일보》의 경우는 마치 핵전쟁이라도 일어난 거 같아 보입니다. 사실 언론사도 기업으로서의 속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자사 신문의 구독자 취향을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압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언론사별로 편집 기조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요.
그럼에도 이런 중대한 사건까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현실만을 보려 하고 또 그런 현실만을 골라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일에 언론이 앞장서는 행태는 최소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노출한 프레임을 통해 그 의도대로 현실이 확대, 재구축 되도록 하는 행위가 과연 언론과 기자의 본분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사태 해결을 위한 객관적인 현실 파악에도 혼란을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위 사진뿐 아니라 각 언론사의 기사 역시 각자 자기 입장을 대변하기 급급한 글이 대부분이었죠.

타벨은 록펠러의 삶을 조사하면서 한 개인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록펠러를 오직 선한 존재나 혹은 악하기만 한 존재로 한정하는 일은 전기적인 죄악 그 자체였다. 타벨은 록펠러의 생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면서 때로 인정사정없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사업적 성취를 선이나 악이라는 감상적인 틀에 맞춰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타벨은 록펠러에 대해 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을 '실로 대단한 스탠더드 오일 The Legitimate Greatness of the Standard Oil Company'이라고 붙이기도 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어떻게 한 명의 저널리스트가 독점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쓰러뜨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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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비행이 출간한 책《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 나온 위 내용처럼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가 견지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은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정보 전달이 아닐까요? 그것을 토대로 토론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건 바로 독자들의 몫일 겁니다. 그러니 적어도 독자를 현혹하는 일이 그들의 임무는 아니겠지요. 특정 계층의 나팔수라 불리기 싫다면, 우리나라 언론은 냉정함을 지키며 한 번쯤 초심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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