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아버지의 한결 같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위해서 보람 있는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점이지만,
가까이에는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는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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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부모로서 32세가 된 자식을 자기로 인해서 직장도 못 갖게 하고 결혼도 못 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어찌 큰 고통이 아니겠소.

가족에게 항상 미안했던 아버지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돌아왔습니다. 올 추석은 연휴 기간이 짧아 아침부터 고향으로 내려가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이나 친지분들과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소개하는 내용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가 김대중은 민주화 운동과 바쁜 의정활동 탓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자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장남 홍일 씨는 젊은 시절 장교로 입대하여 군인으로서 꿈을 이루고자 했지만, 야당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가 내란음모사건으로 고초를 겪을 때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목을 다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런 아들에 대해 평생토록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정치인 김대중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가족 앞으로 보낸 편지(옥중서신)에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경애하는 당신에게(그리고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당신과 아이들의 편지를 통해서 집안이 서로 화목한 가운데 사랑과 협력으로 생활하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지난 10개월 동안 당신과 자식들이 밖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쓰라림을 생각할 때 언제나 가슴 아프고 죄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소. 당신 편지에도 있지만 특히 홍걸이의 처지는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애가 매일 학교 다니면서 겪어야 했을 마음의 갈등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것을 한마디도 없이 참아내준 데 대해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홍일이와 지영 모의 태도를 볼 때 그들이 처음 겪는 시련을 이토록 잘 이겨내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직 두 사람이 합심해서 장래의 성공적인 인생을 이룩하는 데 이번 경험이 좋은 교훈과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감사 속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홍업이의 최근 편지를 보면 그 애의 신앙이 당신이 말한 것 같이 상당히 깊고 바르게 자리잡혀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홍업이에게 준 여러 가지 고난을 생각하면 역시 아비로서 면목이 없고 안타까운 심정뿐이지만 본인이 그러한 시련을 훌륭히 극복하고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해주니 기쁘고 감사한 심정입니다. (중략)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차분히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홍업이나 지영 모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기도는 일상생활속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실천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오. 홍걸이도 마찬가지지요. 몇 가지 예를 들면,

1) 버스 탔을 때 같이 탄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한 하루를 위해 기도한다.
2) 길을 걸을 때 횡단보도를 걷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한다.
3) 다방이나 식당에서 종업원을 대할 때 그들과의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위해 기도한다.
4) 학교에서나 기타 약속으로 친구를 만났을 때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하략)

* 이 편지는 1981년 1월 31일 육군교도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처음으로 가족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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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승자 - 김대중, 빛바랜 사진으로 묻는 오래된 약속


오해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참으로 큰 빚을 진 사람입니다. 자식들에게, 형제·친척들에게,
친구
·동지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과 폐를 끼치고 있습니까. 비록 본의는 아니라고 해도
그 피해가 너무나 크고 장시일(長時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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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측근  그만 좀 찍으시지요? 너무 가깝게 찍으시던데.            
           오 기자  (웃으며)상대 후보의 부인은 주문대로 잘 해주시던데……. 
                      그러면 좀 더 고운 표정의 사진이 나오거든요.

이희호 여사 측근  (정색하며) 저희는 그렇게 못 해요. 그런 분이나 잘 찍어 드리세요.
           오 기자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머쓱하게 바라보며 혼잣말로) 도움되는 말인데
…….

그때 누군가의 손바닥이 카메라 앞으로 불쑥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사실 그런 행동은 찍지 말라는 것이며, 이는 언론의 편파적 보도 태도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이희호 여사의 측근들은 내가 어느 신문사 기자인지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기자가 신문사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신념으로 일하던 나로서는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호의를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나는 그때 저지하던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측근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내 행동을 가까이에서 이희호 여사의 얼굴에 패인 주름을 더 잘 드러내도록 찍으려는 악의적인 행동으로 본 데서 비롯한 것 같다. 당시 대통령 선거전에서 김대중 후보는 건강문제를 운운하는 상대 후보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나를 막아선 것도 그런 내용을 가감 없이 보도했던 일부 언론의 악의적 행태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었다. 억울하기 그지 없을 피해자 처지에서 보일 법한 반응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다른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이미 떠난 자리에서, 나 또한 급히 다른 현장으로 이동해야 하는 그 짧은 시간에 이희호 여사를 찍고 또 찍어야 했던 이유는, 지금 고백하건대 주름이 너무 많아서 조금이나마 주름이 안 보이도록 찍으려는 순수한 의도였음을 지금이라도 알아주시면 좋겠다.

그 시절, 애써서 찍어가 봐야 고운 사진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장된 사진, 20년이 지나 이미 색이 바랬고 언젠가는 세월의 흔적으로만 남을 사진. 너무나 늦은 시점이긴 하지만, 이제라도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기 전에.

오비이락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란 말이 있습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이죠.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살 때 쓰는 사자성어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일이 잦습니다. 잘못된 소문 탓으로 생기는 오해부터,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나 회사 같은 배경으로 말미암아 오해를 받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한 내용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의 승자》의 저자 오동명 선생님은 1997년 12월 15일 서울시 영등포구에 있는 동아제과학원에서 이희호 여사를 촬영했습니다.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지만 소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보도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으나 이희호 여사와 측근, 그 밖의 사람들은 오동명 선생님의 의도를 묻기 이전에 《중앙일보》라는 배경을 먼저 의식하고 카메라를 치우라고 했겠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의도하지 않은 일로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을 아직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이들이 있으며, 그분의 큰 성과 중 하나인 햇볕정책까지 질시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초에 오해받을 짓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오해를 두려워하기 이전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변의 이목에 아랑곳없이 옳은 일을 하는 게 곧 신념이니까요.

올해도 5월 18일이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이날만 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문이죠. 5.18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벌써 31년이나 흘렀는데, 과연 사람들 가슴에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박정희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고, 많은 사람이 그를 그리워하기까지 합니다. 1980년에 벌어진 5월 광주의 비극은 이른바 박정희 키드였던 신군부에 의해 일어났고 6월 항쟁으로 물러나기까지 철권통치를 자행했습니다만, 정작 그 당시 시민의 피로 쟁취한 자유를 누리고 사는 우리는 폭압자들의 과오를 잊고 지내는 건 아닌지 돌아봤습니다. 생각비행은 5.18 광주 민주항쟁 31주년을 기념하여 그날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기억하려 합니다. 특히 방송과 언론이 어떤 모습으로 신군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2.12사태로 촉발된 신군부의 권력집권 야망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의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와 비서실장 차지철을 살해했기 때문이지요. 김재규를 비롯한 10.26 관련자를 보안사가 체포하며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그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10월 27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되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맡으며 사람들 앞에 나섰다.

이후 사람들은 TV에서 생소한 사람을 한 명 보게 됩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그는 10.26 사건의 수사를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사회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제3호 보고서를 보면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으면서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12.12로 4성 장군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이등병으로 강등된 채 강제로 전역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12.12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장태완, 특전사령관 소장 정병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하소곤 같은 이들 또한 체포되어 수모를 겪습니다. 이와 반대로 12.12사태를 주도했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말도 안 되는 진급에 진급을 거듭하여 군 요직을 두루 차지했습니다.

5·17 쿠데타, 본격적인 권력 탈환 작업

군 내에 최고 권력으로 빠르게 부상한 전두환과 신군부의 야망은 쉽게 멈추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에 의해 정치군인으로 성장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점차 사회 전면으로 나섭니다. 그런 이면의 모습과 달리 표면적으로 사회는 10.26 이후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민주인사들의 석방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꽃피겠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비유하여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습니다.

중앙정보부장서리였던 전두환이 유학성 신임 중앙정보부장에게 중앙정보부기를 넘겨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인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여 전두환을 왕(King)으로 세우겠다는 계획, 이른바 'K-공작계획'을 시행합니다. K-공작계획은 언론을 회유하고 때론 협박하여 군부의 정치 참여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여론을 조성하고자 기획된 공작이었습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의 일환, 또는 연속선에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신군부는 언론인 간담회를 개최해 언론사주, 간부 등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신군부 측에 협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간담회에서 신군부는 사령관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과 평가를 수집·보고하고, 간담회 내용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또한 보고합니다. 이렇듯 언론의 협조를 유하는 가운데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공석이었던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여 사실상 정보기관을 장악했습니다.

모든 정보를 손에 쥔 전두환과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권력 탈환 작업에 착수합니다. 1980년 5월 12일, 전두환과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면 명목으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모의합니다. 이는 신군부가 정치에 전면으로 나설 계기를 만들려는 계획으로,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권력을 차지한 방법과 비슷합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을 중심으로 시위대는 10만 명이 모이는 등 최고조에 달했다.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학생들은 자진 해산했다.


심상치 않은 신군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학생 운동권과 정치권은 전두환과 신군부를 경계하는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5월 초부터 대학생들은 '전두환 퇴진, 민주화 일정 제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정치권은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가 개헌안을 접수하고 5월 20일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계엄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 정치 현안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5월 13일부터 대학생들에 의한 본격적인 가두시위가 시작되어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 대학생 10만 명이 집결했습니다. 그러나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대학생들은 해산합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한 것이죠. 이날 신현확 총리는 정치 일정을 앞당겨 1980년 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1981년에 선거를 시행해 정권을 이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들은 전국총학생회 회장단은 당분간 집회를 중지하기로 했습니다.

포고문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계엄법 제8조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 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2.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신고를 하여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순수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하되 정치적 발언을 일체 불허한다.
나.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학 포함)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라.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한다.
마.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① 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② 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③ 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는 일체 불허한다.
바.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상적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한다.
사.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 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1980년 5월 17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학생들과 정치권의 움직임 때문에 전두환과 신군부는 권력 찬탈을 위해 더욱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학생들의 거센 시위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5월 20일 임시국회에서 논의되는 계엄 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 찬탈 계획에 차질을 빚을 사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결의를 받아내고, 이를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강요합니다. 17일 오후 9시, 무장한 군인들이 중앙청에 배치된 가운데 국무회의가 열리고 특별한 토의 없이 비상계엄 확대안이 통과되어,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됩니다. 신군부는 이와 동시에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와 같은 일단의 조치를 단행합니다. 또한 보안사는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하고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했습니다. 12.12 사태 이후 치밀하게 준비한 5.17 군사쿠데타는 10.26 사건 이후 잠시나마 시민의 마음을 녹였던 서울의 봄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평범한 군인이 왜 잔혹한 진압군이 되었나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따라 전국에 계엄군이 투입되었습니다. 계엄군의 투입 목표는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함이었죠. 이런 사실은 투입된 계엄군의 90퍼센트가 전국 대학교에 주둔했다는 상황이 증명합니다. 계엄군의 움직임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조금씩 달랐으나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 수백 명이 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령 확대와 휴교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에 계엄군이었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구타하며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이런 만행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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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가 시행한 충정훈련. 공수부대원들은 강도 높은 훈련 탓으로 잠재적 분노가 쌓였다. (출처: MBC 드라마 <제5공화국>)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전남대학교에서 시작된 공수부대의 대응은 이상하리만큼 끔찍했습니다. 그 때문에 군인에게 흥분제를 먹였다는 소문도 돌았고, 일부 증언을 보면 계엄군한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는 내용도 확인되었습니다. 계엄군으로 투입되기 전에 공수부대는 특별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충정훈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훈련은 수도권 소요사태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대학생들의 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훈련이었습니다. 공수부대는 광주에 투입되기 전 충정훈련을 받았는데요, 훈련 강도가 대단히 높았다고 합니다. 부대원들은 부대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계속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유를 박탈당한 공수부대원들의 마음엔 분노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신군부는 계엄군에게 광주를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종용했습니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의 증언을 따르면 시위 진압이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한 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습니다. 5월 18일 23시부로 전달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을 보면 계엄군은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공수부대원은 광주 시내 골목을 누비며 가택을 수색하여 학생들을 체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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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계엄군. 시위자 체포가 목적이었기에 진압은 실로 잔인하게 이뤄졌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첩(고정간첩)’들의 책동으로 몰았습니다.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라고 발표했는데요, 이렇게 광주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규정한 상층부의 지침과 현장에 유포된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원들로 하여금 광주 시민을 국가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적으로 규정하게 했고, 결국 공수부대원들이 과격하게 시위를 진압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입대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자, 요인 암살과 특수 임무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공수부대원들이 보호하고 지켜야 할 대상을 무참히 진압해야 했던 어두운 역사 속에서 광주 시민이 일차적 피해자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군인 신분으로 엄청난 폭력을 휘두른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 또한 역사의 피해자는 아니었을까요?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에서 잔인한 폭력의 경험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어떻게 파멸로 이르게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권력에 굴종한 언론과 방송

오늘날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사는 5.18을 ‘민주화운동’이나 ‘민중항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과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당시에도 그런 평가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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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과격파, 간첩, 선동이란 자극적인 이야기로 광주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언론과 방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부르며 폭도가 시민과 군경을 다치게 했다는 허위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특히 《조선일보》는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이유는 '고정간첩의 침투 선동'에 의한 것이라며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전했습니다. K-공작계획부터 이미 언론은 신군부의 검열을 받고 있었고, '시국수습방안'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하며 발표된 계엄포고령 10호로 말미암아 언론 검열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언론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었고 신군부의 나팔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길들거나 일부 자발적으로 복종한 언론과 방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신군부가 규정한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가 사회를 어지럽히는 난동으로 묘사했습니다. 왜곡 보도에 격분한 광주 시민은 광주 MBC를 불 지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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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를 신설한 전두환의 행보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모습과 흡사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되자 신군부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권력 찬탈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신군부는 국보위를 통해 '안보 체제의 강화' '경제난국의 타개' '정치발전 내용의 충실'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의 확립'을 이야기했고, 자신들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박정희가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한 다음 이를 이용하여 군부의 정치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과 같은 행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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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은 전두환에게 아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전두환의 생일이나 딸의 결혼식 취재에 열을 올릴 정도였다.

신군부에 의해 전두환이 5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자 언론과 방송은 전두환 추켜세우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마치 <용비어천가>를 방불케 하는 행태였습니다. 전두환의 성장 배경과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뉴스와 각종 영상물은 독재자들이 국민을 세뇌하기 위해 단행하는 '프로파간다'와 다름없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오르기라도 하면 카퍼레이드가 벌어졌고 시민은 거리에 동원되었습니다. 언론과 방송은 그런 모습을 생중계하며 전두환을 치켜세웠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해외 순방길에 동행한 언론과 방송은 전두환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방송했습니다. 전두환은 독재자의 전형이었습니다. 권력에 굴종한 방송은 심지어 전두환 가족의 대소사까지 직접 챙기며 영상물을 제작해 바치는 어이없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신군부의 어두운 역사는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난 6월 민주항쟁으로 막을 내립니다. 시대적 흐름을 역행했던 신군부는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결국 6.29선언을 통해 항복하고 맙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얻어낸 민주화는 우리에게 민주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질 때마다 과거 독재의 악령들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회에 뭔가 희망이라도 보였다는 듯이 말이죠. 국민의 요구를 뭉개버리고 생명과 자유를 앗아가고,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으며, 자신들의 배만 불린 독재 잔당을 어떻게 희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광주민주화운동 31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떤 분이 재미있는 기사를 쓰셨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을 할 수는 없겠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그랬다면 '재스민 혁명'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성공하지 않았을까요?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기사보기: 31년 전 5.18에도 SNS가 `있었더라면'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생각비행 1주년을 기념하여 열렸던 오동명 선생님 강연회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이날 강연은 〈보도사진과 혁명〉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는데요, 사진에 대한 오동명 선생님 자신의 경험을 비롯하여 사진과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카메라를 든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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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 선생님

대학 강연을 그만둔 지 벌써 2년이 되었네요. 그러다 보니 약간은 떨립니다. 제가 유명인이나 대단한 사람들 앞에선 떨지 않습니다만, 젊은 사람들이나 진지한 사람들 앞에선 긴장하는 편이거든요. 오늘 참석한 여러분이 젊고 진지한 분들 같아서 긴장되네요. (웃음)

제가 생각비행과 인연을 맺은 건 《사랑의 승자》를 기획하면서부터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 개인적인 인연이 있긴 했습니다만, 생각비행의 첫 책으로 출간된 책이니《사랑의 승자》부터라고만 말씀드리죠. 어쨌든 생각비행 분들, 매우 진지한 분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강연 주제도 매우 진지한 내용을 주셨어요. 〈보도사진과 혁명〉.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보도사진이라는 분야와 혁명을 붙인 이유는 아마도 제가 신문사 기자 출신이라는 딱지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시는 분은 《중앙일보》 이야기를 꼭 하시거든요. 벌써 12년이나 흘렀는데 말이죠. 전 그저 《중앙일보》에서 일어난 일이 창피해서 나온 것뿐인데 많은 분이 아직까지 이야기해주십니다. 고맙고도 부끄러운 일이죠. 이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제가 카메라를 처음 만진 때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였습니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경제학을 전공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경제학은 제게 잘 맞지 않았나 봅니다. 공부하기 싫은 차에 마침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잡은 카메라가 직업으로 이어졌죠. 사람들이 돈 많이 주는 좋은 직장이라고 이야기하는 제일기획, 《국민일보》 《중앙일보》를 거쳤습니다. 공부도 잘 못했던 제가 그런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경기가 좋았기 때문이었겠죠. (웃음)

사진으로 자기계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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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게르와 니에프스(출처: 위키피디아)

요즘은 카메라 다들 하나씩 갖고 계시죠? 제가 기자생활 할 때만 해도 카메라는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다게르(Louis Daguerre)니에프스(Joseph Nicephore)가 공동연구로 시작했다가, 1839년에 다게르가 독자적으로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카메라는 매우 크고 무거운 물건이었습니다. 그랬던 게 롤필름이 나오면서 한층 가벼워져 휴대하기 간편해졌죠. 조금씩 대중화하던 카메라는 최근 10년간 디지털화를 거치는 사이 완전히 대중의 일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이제 누구나 카메라 한 대씩은 가지고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너도나도 가지고 있는 카메라로 이른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면 어떨까요? 최근에 제가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라는 사람의 책을 한 권 봤는데요, ‘자기계발’이야말로 미래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말대로 사람들이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도구는 아주 다양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진’을 통한 자기계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죠.

여러분 혹시 다들 취미 하나씩 갖고 있는지요? 영국의 유명한 석학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취미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뭔가 하고자 하는 게 있고, 그 일에 집중하면 주위에 휩쓸리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이는 곧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음악가인 브람스(Johannes Brahms)의 좌우명은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였습니다. 여기서 고독이란 뭔가에 집착하고, 외부와의 단절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렇게 어떤 일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요?

자, 그렇다면 사진을 취미 삼아 집중해보는 건 어떨까요? 저야말로 사진으로 자기계발을 했던 사람입니다. 앞서 대학교 시절에 카메라를 처음 접했다고 말씀드렸죠? 원래 저는 매우 소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진기를 잡게 된 이유도 그런 성격을 바꿔보려는 일환이기도 했죠. 사진을 찍기 위해선 적극적이어야 하니까요. 좋은 사진을 얻으려면 피사체를 향해 좀 더 다가가야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하거든요. 그러니 사진은 좋은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소통의 도구로 카메라 활용하기

요즘 같은 불통의 사회에서 어떻게 보면 사진이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선 피사체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관찰이 필요한데요, 그러다 보면 사람이 적극적으로 변하게 됨과 동시에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평소보다 침착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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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다게르 타입 카메라와 라이카의 M7(출처: 위키피디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소통의 도구로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를 흔히들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카메라의 발전, 특히 카메라의 디지털화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셔터 누르기를 남발하고, 사진을 찍기까지 생각하는 시간이 짧아졌습니다. 불과 10년 전 필름을 사용할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필름 값이 아까워서라도 사람들은 피사체를 진지하게 관찰하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필름 값이 들지 않는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하면서 사람들은 무조건 찍기 바쁩니다. 더구나 포토숍 같은 수정·보정 도구의 등장은 사진을 더더욱 성의 없이 찍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대충 찍은 사진이라도 포토숍을 이용해 보정을 거치면 전혀 다른 사진이 되니 사람들은 한 컷 한 컷 찍는 데 의미를 두지 못하는 것이죠.

프로슈머(Prosum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소비자는 생산자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생산자라는 생각으로 사진을 촬영한다면, 셔터 누르기를 남발하고 성의 없게 촬영해선 안 되겠죠. 요즘은 사진 기자만이 아니라 일반인이 찍은 사진도 얼마든지 보도사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는 편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대구 지하철 사건 때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보셨겠지요? 그 사진은 무겁고 사용하기 어려운 DSLR로 촬영한 게 아닙니다. 기자가 촬영한 사진은 더더욱 아니지요. 현장에 있던 어느 학생이 휴대전화기로 촬영한 사진이었습니다. 연평도 포격사건도 기억하시겠지요? 연평도 포격사건을 다룬 뉴스에서 처음 보도된 사진 또한 일반인이 콤팩트 카메라로 촬영한 겁니다. 이처럼 이제는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현장에 있다면 언론에 제공할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언론을 경계할 수도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훌륭한 보도사진을 찍으려면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는 문제겠지요. 대구 지하철 참사, 연평도 사태를 담은 사진을 봐서 다들 아시겠지만, 일단은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기자들이 보도사신을 찍을 수 있는 이유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현장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도 현장에 있다면 당연히 자신만의 고유한 사진을 담을 수 있습니다. 현장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활하는 영역도 훌륭한 현장이 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청소하는 분들의 생활을 잘 모릅니다. 대부분 사람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 일어나 일하시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청소하시는 분이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담는다면 그것도 훌륭한 보도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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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LR이든 콤팩트 카메라든 그 종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출처: 캐논 컨슈머 이미징).


다음으로 사진을 잘 찍으려면 대화와 관찰이 필요합니다. 피사체가 사람이라면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에 대해 많이 알수록 좋은 사진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피사체가 사물이라면 어떨까요? 끊임없이 관찰해야겠죠. 금낭화를 예를 들어보죠. 사람들은 금낭화의 대롱을 많이 찍습니다. 여러분도 그 이외의 사진을 본 적이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금낭화를 잘 관찰한 사람이라면 씨앗을 찍었을 겁니다. 별모양의 금낭화 씨앗은 아주 예쁘거든요.

또 하나, 여러분은 피사체와 관련된 정보를 두루 습득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대학에서 강의할 땐 초반에 미술책을 자주 보게 했습니다. 구도, 빛과 같이 미술의 기본적인 요소는 사진에서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미술에 대한 기본지식을 습득한 이후 본격적인 사진수업에 들어갔죠.

마지막으로 보도사진가를 지망하는 분이라면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둬야 합니다. 신문을 계속 읽으면서 사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사회과학 서적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보도사진가는 뷰파인더를 통해 본 사회를 담기 이전에 제가 앞서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 찍는 사람은 보도사진가가 아닙니다. 여러 지식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시선을 담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진정한 보도사진가입니다.

자유롭고 고독하게 사진 찍기

아, 사진을 배우실 때 주의할 점을 빠뜨렸네요. 사진을 처음 찍는 분들이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가 ‘~따라하기’ 같은 책을 구입하는 겁니다. 제일 좋은 사진책은 말이죠, 카메라 제품설명서입니다. 사실 다른 카메라에 대해 알 필요는 없잖아요. 자기가 소유한 카메라에 어떤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만 파악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겁니다.

남들 따라 동호회에 들어가지 마세요. 사진을 빨리 배우겠다고 동호회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런 분들은 대부분 사진기부터 바꿉니다. 주위 사람들이 갖춘 장비에 현혹되기 때문이지요. 서투른 사람이 연장 핑계를 대는 법입니다. 저도 경험해본 바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냥 사람이 좋고 사진은 겸해서 배우려는 분이시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제대로 배우려는 분이시라면 삼가기 바랍니다. 차라리 사진 설명서를 제대로 보고 교양과 시각을 형성하는 데 좋은 책을 사보시는 편이 사진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생각비행, 생각비행 1주년, 생각비행 1주년 기념 강연, 보도사진과 혁명, 자기계발 혁명

보도사진과 혁명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꽤 오래 이야기했습니다만, 혁명이야기는 안 하고 다른 이야기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웃음) 사실 저는 혁명이라고 해서 크고 대단한 담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자기계발을 통해 성장하고 그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겠죠.

여러분 중에 혹시 오선지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아시는 분이 있나요? 아무도 모르시죠. 저도 얼마 전에 알았답니다. 몇백 년 전에 수도사들이 음계와 함께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아쉽게도 오선지를 만든 수도사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유명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이름 없는 사람들 덕분에 점점 변했고, 바로 이런 변화가 하나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의 과정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을 남기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유명한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라는 사람의 묘비명을 아시는 분 있나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하는군요. 현대인들은 여러 이유로 망설이는 일이 잦습니다. 그럴 때 망설이지 말고 뛰쳐나오시기 바랍니다. 브람스의 말처럼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살아보는 것도 좋겠죠. 그때 여러분의 도구가 사진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사진으로 고독한 자기계발을 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 계신 분 모두가 자유로워지셔서 그 힘이 한데 모여 혁명을 이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닐까요?

참석해주시고 오랜 시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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