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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생각비행은 서울디지털포럼에서 재미있는 내용의 발표를 들었습니다. 최근 서구권을 비롯해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위키리크스에 관련된 주제 발표였는데요, <위키리크스 대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발표였습니다. 강연자는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마르셀 로젠바흐가 맡습니다. 그는 독일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 《슈피겔》 기자로, 줄리언 어산지를 직접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출간했지요. 로젠바흐의 주제 발표는 위키리크스에 대한 느낌과 함께 위키리크스와 같은 폭로 저널리즘이 기존 언론과 어떻게 협력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간단한 발표지만 건질 내용이 많습니다.

위키리크스 대 저널리즘
- 마르셀 로젠바흐(《슈피겔》 기자,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 공동저자)
 
위키리크스가 한국에서 관심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간 위키리크스가 여러 가지 비밀 문건을 발표했음에도 한국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 비밀문건 중 역대 한국의 대통령을 평가하는 내용의 문건을 발표하자 한국도 위키리크스에 관심을 보였다.

위키리크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크게 환영하기도 하는 반면 혹평도 받고 있다. 평가가 어떠하든 위키리크스가 나온 뒤 그 영향은 무척 크다. 위키리크스 이후 미국에선 오픈리크스가 생겼고,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도 위키리크스와 비슷한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어느 언론에서도 위키리크스와 같은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줄리언 어산지와 만나 이야기하고 경험했던 위키리크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위키리크스라는 존재를 알게 된 계기는 2008년 독일 해외정보국에서 조사한 내용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유출된 사건에서 비롯했다. 그 존재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조사했지만, 간단한 인터넷 사이트와 발신자 불명의 메일 외에 단서가 없었다. 이후 집요한 조사 끝에 나는 런던에서 어산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위키리크스는 반(反)미디어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미디어에 반대하고,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특히 싫어했던 내용은 전쟁보도였다. 어산지는 어떠한 정보를 유통하는 데 있어서 주관적 견해를 넣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처음 공개된 정보는 다듬어지고 각색되어 원래 모습을 잃고 만다. 어산지는 주관적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고 원본을 공개함으로써 사람들 스스로 사건을 이해하도록 접근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줄리언 어산지가 이야기하는 〈과학적 접근방식〉이었다.

사실 위키리크스가 최초의 폭로 플랫폼은 아니다. 위키리크스 이전에도 그러한 플랫폼을 만든 사람들은 존재했으며, 익명으로 문서를 공개해왔다. 줄리언 어산지는 그런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했으며 그들로부터 플랫폼을 배웠다. 어산지의 위키리크스가 담당한 큰 역할은 이러한 폭로 플랫폼을 세계화했다는 데 있다.

줄리언 어산지가 이야기한 과학적 접근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첫째로 아무리 중요한 문건을 공개하더라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센지는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가 신발을 신지 않고 양말만 신고 다녔기 때문에 알아보는 사람은 몇몇 있었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문에 어산지는 미디어와 손을 잡았다. 미디어에 기밀정보를 제공한 순간, 줄리언 어산지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둘째로 정보를 줘도 그것을 이용해 재해석할 사람들이 부족했다. 어산지가 이야기한 과학적 접근을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는 제대로 된 기밀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리면 각자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산지는 그러한 역할을 할 사람을 네티즌과 블로거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의 외교 문건이 공개되었다고 해보자. 내가 몸담은 《슈피겔》만 해더라도 그 자료를 해석하고 기사화하기 위해 50여 명의 전문 기자가 협업한다. 외교 문건만이 아니다. 그 밖의 여러 문건도 마찬가지다. 문건이 공개되어도, 거기에 쓰인 언어는 전문용어이고, 자신들만 아는 약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해석 가능한 내용이 많다. 이러한 문건을 한 명의 블로거가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줄리언 어산지는 자신이 비판했던 미디어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는 블로거들이 유일한 원래 정보를 활용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가 미디어와 손을 잡긴 했지만, 아직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선 편집의 문제다. 어산지는 문서 원본을 공개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내가 속한 《슈피겔》만 하더라도 공익에 맞는 자료만을 공개한다.

다음으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의 성격도 다르다. 기존 언론에 정보를 공개한 사람들은 자신이 공개한 정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확인한다. 즉 공개한 정보로 무언가 바뀌길 기대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에서 제공한 정보와 정보제공자는 그 다음 과정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정보를 제공한 데서 끝난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결국 위키리크스의 변화를 가져왔다. 위키리크스와 같은 형태의 플랫폼이 기존 미디어에 생겼으며, 이는 위키리크스와 미디어의 윈-윈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미디어가 하지 못했던 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모델로 제시된 것이다. 물론 위키리크스 자체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결론은 위키리크스 그 자체로 성공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미디어와 협력해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는 기존 미디어에 분명히 큰 도움을 주었다. 위키리크스는 기존 언론이 알아내지 못한 정보들을 공개했다. 기존 언론이 하지 못한 일은 해낸 셈이다. 이러한 모습은 〈탐사 저널리즘〉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 위키리크스는 전통적인 미디어와 협력하여 성공했다.
- 문서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증가
- 위키리크스 자체에 대한 관심도 증가
- 2010년 기부금은 기록적인 수치를 기록
- 여러 논란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음
- 오히려 외교 전문들이 튀니지의 민주화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 우리의 경험은 이와 같다.
- 폭로 플랫폼과 미디어의 관계는 윈-윈 모델이 될 수 있다.
- 기존의 저널리즘을 대체할 도구는 없다.
- 폭로 사이트들이 기존의 미디어를 보완하거나 향상할 수 있다.
- 플랫폼 운영자들은 책임감 있게 운영해야 한다.

폭로적 사고방식의 기원을 찾아서


어떻습니까? 로젠바흐의 주제 발표 내용에서 도움을 좀 받으셨는지요? 생각비행은 '탐사보도'라는 화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블로그에서 탐사보도의 의미와 역사, 한국의 대표적인 탐사보도 프로그램 등을 소개해왔습니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탐사보도의 간략한 역사와 대표적인 언론인을 한 명 소개하려 합니다.

20세기 초에 언론 발행인들이 탐사보도를 시도한 일은 자연스럽게 얻은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보도 방식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용어조차 정립하지 못한 시기였으니까요. 신문, 잡지 발행인들은 "편안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려고 남용과 사기, 악용의 현장을 캐고 다닌다는 개념을 어떤 말로 부르든 간에 이로 말미암아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점"을 직감했습니다. 이런 언론 보도를 시행하려면 엄청난 취재비를 들여야 했습니다. 또한 비용이 많이 드는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도 컸습니다. 무엇보다 원고를 완성하려면 숙련된 기술로 광범위한 편집 작업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잡지와 신문사 발행인들은 곧 자신이 가진 권력과 책임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심층적인 언론 보도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 불공정한 사회, 부패한 사회를 대중에게 설명하는 수단이 되어 다양한 위험을 무릅쓰고 활짝 꽃 피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널리스트 겸 철학자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은 새로운 종류의 저널리즘이 등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저널리즘은 공직 활동의 기준을 재계의 특정 영역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추문을 들춰내고, 누구나 사업에 참견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탓에 사업가들은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_《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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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수많은 기업이 명멸한 극심한 격변기였던 1900년대에 여성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inerva Tarbell, 1857. 11. 5~1944. 1. 6)은 한 기업의 이면을 파헤치는 탐사보도를 시작했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조차 없던 시대에 여성 저널리스트 타벨과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7. 8~1937. 5. 23)의 대결은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록펠러는 독점기업 스탠더드 오일을 이끈 재계의 거물로 미국의 석유산업을 대표하는 어마어마한 인물이었으니까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많은 트러스트가 산업화 이후의 산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트러스트는 산업 너머의 산업이었으며 법 테두리 바깥에서 산업을 독식하는 괴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타벨은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경제 집단을 파헤치겠다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기획에 착수합니다. 이 기획특집은 20세기를 규정하는 중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였고, 실제로 미국적 대서사시가 되었습니다.

독점 재벌을 무너뜨여성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여기서 잠깐 아이다 타벨을 모르시는 분을 위해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타벨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 저장 용기 제조업을 시작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석유산업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겪은 인물입니다. 석유업계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남동생의 영향으로 소규모 석유 생산업자들과 스탠더드 오일의 부당한 경쟁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석유 개척기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사업을 시작한 수많은 석유 생산업자, 정유업자, 운반업자는 모두 록펠러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석유의 95퍼센트를 독점한 스탠더드 오일은 타 기업을 흡수·통합하고 사세를 확장해 거대한 트러스트를 만든 재벌기업의 전형이었습니다.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뇌물 수수와 협박, 담합, 위법 행위, 폭력적 행동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타벨은 펜실베이니아 주 미드빌에 있는 앨러게니 대학에서 공부한 재원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여성이 대학 교육을 받는 일은 드물었으나, 교육의 중요성에 일찍 눈뜬 부모의 영향으로 타벨은 폭넓은 세계를 경험합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난 타벨은 생계를 유지하려는 목적과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에 대한 관심으로 본국(미국)에 있는 여러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합니다. 이때 《매클루어 매거진》이라는 잡지의 발행인이었던 새뮤얼 시드니 매클루어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아이다 타벨을 기자로 발탁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에이브러햄 링컨을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연재기사로 엄청난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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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클루어 매거진

정치권의 부패와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시사가 쏟아지는 시기에 매클루어와 타벨은 역사 이래 최고의 갑부인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추문을 파헤치는 연재기사를 기획했습니다. 그 내용을 들은 타벨의 친척과 친구, 동료는 록펠러의 엄청난 재산과 그의 무자비한 성향을 염두에 두고 타벨의 안전을 걱정했습니다. 록펠러의 응징을 경험한 바 있는 노쇠한 아버지도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타벨은 그런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용기 있는 행동을 한다며 칭찬하는 말을 듣고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당한 역사적 작업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옹호자가 아닐뿐더러 비판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독점기업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업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탐구하려는 저널리스트였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타벨이 조사를 시작할 무렵,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 반트러스트 운동이 상승세를 탑니다. 1901년 9월 6일에 무정부주의자로 자처하는 암살자가 매킨리 대통령을 총으로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부통령이 대통령 직무를 이어받았습니다. 루스벨트는 저널리스트들과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연설에서 국가가 큰 기업의 재산 문제와 맞붙어 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자선사업을 많이 했다고 해도 그 재산을 얻기까지 저지른 불법 행위를 속죄할 수는 없다.”

루스벨트가 스탠더드 오일을 필두로 하는 트러스트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자 트러스트를 반대하는 법정 소송이 급증했습니다. 사법부의 활동이 전개됨에 따라 빛을 본 자료가 바로 타벨의 탐사보도였습니다. 폭로기사에서 타벨은 특히 스탠더드 오일과 록펠러의 정직성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우리는 상업적 인간이다. 우리는 예술품을 자랑하지 못한다. 숙련된 기술이나 재배한 작물을 뽐낼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부는 자랑한다. 이 때문에 사업의 성공을 신성하게 생각한다. 사실 성공을 위해서 사용한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점점 더 폭넓은 계층에서 정당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스탠더드 오일이 지금처럼 자본을 축적하기까지 필요했던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사실을 감추려고 속임수를 쓰고, 궤변을 늘어놓고, 중상모략하는 온갖 방법이었다. 특히 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비밀스러운 노력을 계속해서 얻은 특혜가 주요했다. …… 록펠러가 폭력과 속임수를 사용해서 목적을 달성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건 사업일 뿐이잖아.' 하고 말하면서 록펠러를 옹호한다. 즉 그 말은 학대와 속임수, 특혜에 대한 적법한 변명이 되는 셈이다. …… 그런 사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자선 교리에 의지한다. 우리는 실수를 범하는 유한한 인간이므로 서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용납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간의 약점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면서 주머니를 터는 기업가의 모습으로 귀결되고 만다.”

타벨은 갖은 시련과 압박에도 탐사보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탠더스 오일에 대한 폭로와 이를 뒷받침하는 록펠러 인물 탐구를 통해서 미국의회와 주의회, 연방정부, 주정부 안에서 개혁적 활동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기관 밖에서도 법원의 판결과 대중 운동이 전례 없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매클루어 매거진》에 1902년부터 장장 19회에 걸쳐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록펠러와 기업의 비리를 통렬하게 파헤친 폭로기사로 말미암아,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1911년 연방대법원으로부터 기업분할 명령을 받아 해체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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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벨의 폭로기사는 스탠더드 오일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 1909년 2월 3일, 루터 대니얼스 브래들리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에 실은 만평에서 스탠더드 오일이 조용히 관련 회사를 포섭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언론, 무엇을 배워야 하나

자, 여기서 100년이 지난 우리의 현실을 한번 돌아볼까요? 최근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인 유성기업 노조원의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한 일로 온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정당하게 파업을 한 500여 명의 노동자를 30개 중대 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연행한 경찰의 행위를 보면 참 기막힙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노동자를 탄압하던 정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일부 보수 언론은 “1인당 연봉 7000만 원이 넘는 회사의 불법 파업을 국민이 납득하겠느냐”는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의 발언을 빌려 거짓 정보를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유성기업 노동자를 공격했죠.

또 이런 일도 있습니다. GS그룹 계열사인 GS칼텍스가 영세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바이오 디젤 사업에 진출한다고 하여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SK와 애경이 절반 가까이를 점유한 바이오 디젤 시장에 삼성 또한 진출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관계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재벌이 원가 절감을 이유로 MRO 계열사를 만들어 문구나 공구류 같은 소모품마저 손대기 시작하면서 그 분야에서 뿌리내리고 일하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100년 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진실을 알리는 필봉으로 무너뜨린 거대 재벌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괴물로 존재하고 있으며, 날로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재벌과 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말도 안 되는 경제 논리에 귀를 기울이는 국민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도 높아졌고 ‘톨레랑스’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모두 지난 100년간 오로지 ‘진실’을 위해 빛과 같이 살다간 언론인들이 토대를 닦은 탐사보도의 힘 때문입니다. 거대 트러스트의 실상을 취재해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린 아이다 타벨의 삶과 기자정신은 부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부패의 고리를 파헤치는 탐사보도의 역할이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그대로 반복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판치는 재벌의 문제를 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이다 타벨과 그의 기자정신을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진실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일깨워주는 제2, 제3의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 11월 28일 25만여 건의 미국 기밀 외교전문 폭로로 전 세계 외교가를 강타한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 http://ko.wikipedia.org/wiki/%EC%9C%84%ED%82%A4%EB%A6%AC%ED%81%AC%EC%8A%A4, 위키피디아(KR))

현재 美 국무부는 위키리크스 접속 전면 금지 조치(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665842, 매일경제 )를 취한 상태라는 소식이 있으며,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언 어산지에게 간첩법 적용이 가능한지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올 상반기 위키리크스는 이미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문서를 7만여 건이나 폭로해 미 국부부로부터 똑같은 조치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키리크스 한국전문 2007년대선때 보고 다수포함 - '정치권 핵폭풍' 배제 못해 [한국전문전체목록파일 첨부]( http://andocu.tistory.com/entry/위키리크스-한국비밀전문-전체목록-2007년대선 때-보고-다수포함-정치권-핵폭풍-될까 )
위키리크스 파문, BBK 등 2007년 대선 이슈로 번질 수도(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page=&pg=5&Section=&article_num=20101202110120, 프레시안)


하지만 미국의 상황과 별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폭로된 25만여 건의 외교 비밀전문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한국 재벌, 정치인 관련 자료를 수집해 폭로하는 블로그 'SECRET OF KOREA'를 운영하고 계신 안치용 님께서 올려주신 내용을 보면 이 문제가 자칫 잘못하면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안치용 님은 작년에 효성 오너 일가가 미국에 무더기 부동산을 매입한 사실을 폭로한 바 있습니다.

위키리크스, 한국 외교에 '불똥'…청와대·정부 '곤혹'(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49826, 노컷뉴스 )

이번에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문건은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인 2006년부터 2010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 확인되느냐에 따라 정계에 상당한 파문을 몰고 올 듯하다고 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BBK사건에 대한 내용이나 만사형통인 이상득-노건평의 신사협정,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문제 등에 대한 미국의 보고 내용에도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고 하네요. 이미 공개된 몇몇 문건에 따르면 한중관계나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에 대한민국 외교라인은 지난주 미국 정부측으로부터 공개 예정인 2000여 개의 문건을 건네 받아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합니다. 


위키리크스 줄리언 어산지는 누구?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51083, 노컷뉴스)
진실 쫓는 운동가? 허명 쫓는 망상가?(http://news.joinsmsn.com/article/aid/2010/12/02/4407644.html, 중앙일보)

세계 외교가를 강타한 위키리크스. 당연히 그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에게도 시선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랑극단으로 살아 정기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컸는데 컴퓨터와 해킹에 매료되어 16세에 해커 단체를 조직했다고 합니다. 2006년 그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내부고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설립합니다. 서버는 내부고발자 보호가 보장된 스웨덴에 두었다고 하네요. 그는 스스로를 위키리크스의 편집국장이라고 일컫는다고 합니다.

위키리크스의 편집국장 줄리언 어산지는 폭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100년 전 총 19회에 걸친 폭로기사록펠러의 석유제국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해체시킨 여성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과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권력을 가진 한 대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각종 정보를 취합해 정체를 폭로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의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폭로기사는 이미 탐사보도의 효시이자 폭로 저널리즘의 상징이 되었고,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는 2009년 국제사면위원회로부터 국제 앰네스티 미디어상을 수상하였으며 올해는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른 점도 눈에 띕니다. 탐사보도의 효시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하기로 유명했는데요, 스탠더드 오일과 록펠러의 실체를 다루는 폭로가사의 이면에는 문서에 대한 검증이 주를 이뤘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천 장의 문서를 샅샅이 조사한 다음 회사 경영진과 경쟁업체 사람, 기업 규제 담당 공무원, 과거와 현재의 학술 전문가를 일일이 만나고 인터뷰해 알아낸 사실에 근거해 기사를 전개했습니다.

반면 현재 위키리크스 폭로는 익명의 제보자, 즉 내부고발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정보는 자체적인 검증 시스템을 거치며 이미 공개된 내용이나 단순한 소문은 다루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고 있긴 하지만요. 한편 건네받은 정보는 국방부 기밀문서를 통째로 해킹해 빼낸 사례도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끈질긴 탐사보다는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하는 면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 결과와 과정, 인간사에서 끊이지 않는 딜레마인 듯합니다.

그 딜레마처럼 현재 위키리크스를 대하는 시선은 언론사와 시민단체들의 옹호처럼 공공의 이익과 알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의견과 미 국무부와 법무부의 비난처럼 현실적인 국익을 무시한 무책임한 폭로라는 의견이 서로 맞서고 있습니다.

위키리크스 다음 표적, 뱅크오브아메리카?(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2/01/0200000000AKR20101201007000071.HTML, 연합뉴스)

그런 위키리크스의 다음 폭로 대상은 미국의 거대 은행이라고 합니다. 현재로서는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유력시 되고 있나 봅니다.

위키리크스 출신들, 새 폭로사이트 계획(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2/02/0200000000AKR20101202225800082.HTML, 연합뉴스)

재미있는 점은 줄리언 어산지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문제 삼아 위키리크스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독립해 새로운 폭로 사이트를 만들 예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폭로 사이트의 내부를 폭로하게 되는 셈입니다. 권력 분립과 적절한 견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만큼 좋은 일로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 폭로를 위한 폭로만 늘어나 황색언론으로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런 조짐에 대해 위키리크스 측은 쿨하게 "위키리크스 같은 조직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로, 행운을 빈다"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내부고발자들과 컴퓨터, 인터넷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는 위키리크스. 과연 20세기 폭로 저널리즘의 상징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처럼 의미 있는 21세기 폭로 저널리즘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오늘 다음뷰를 확인했더니 베스트에 올랐네요. 여러분의 관심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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