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의 적폐가 하나하나 드러나는 가운데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큰 적폐라고도 할 수 있을 전두환의 5.18 관련 범죄도 차례차례 밝혀지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SBS 뉴스에서는 지난 37년 동안 기무사에 감춰져 있던 5.18 민주화운동 사진첩 중 일부가 공개되었습니다.


출처 - SBS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운동 가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증거물로 찍거나 모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전남대 복학생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모자로 몰렸던 정동년 전 광주 남구청장과 홍남순 변호사, 정상용 전 국회의원 등이 수의를 입고 있는 모습 등이 담겨 있습니다. 5.18 직후 광주 상무대에서 열린 군사재판 장면입니다. 당시를 회상한 사람들에 의하면 군사재판의 공포 분위기로 변호사가 변호를 할 수 없었고 내란 혐의 판결을 해야 했던 재판부 가운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첩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주범으로 지목한 이른바 내란 범죄 개요도도 실려 있었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이 5.18을 내란으로 폄훼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고자 했던 사진들이 이제는 오히려 당시 시대의 억울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출처 - 광주일보


이와 함께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대표적 사건이었던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 명령자는 중령이었던 조창구 제11공수부대 63대대장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995년 작성된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의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문서에 따르면 조창구가 대대장 지프에 보관하던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지급하고 위급 시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즉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되고 실탄이 지급되었다는 것은 발포 허가가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조창구는 이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지만 2006년 서훈이 취소된 바 있죠. 이에 앞서 20일 밤 광주역 3공수 집단발포 명령자는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이었습니다.


출처 – JTBC


여기에 더해 전두환 정권과 뒤이은 노태우 정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뜯어고쳤습니다. 특히 1988년 청문회를 앞두고 당시 보안사는 511분석반을 설치하고 철저히 은폐공작에 나섰습니다. 511분석반은 발포명령자, 대량살상무기 사용, 사망자 수까지 은폐 왜곡하기 위해 각종 지시를 내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와 1995년 검찰 조사, 2007년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조사 때 511분석반에 의해 조작된 자료가 제출된 바 있습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최초 사격에 관여했고 발포 통제를 한 사살이 그 당시에 밝혀졌더라면 직속상관인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신군부 핵심 세력으로 5.18 당시 헬기까지 타고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수시로 접촉한 정황으로 볼 때 최종 발포 명령자 규명이 가능할 수도 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출처 – 뉴시스


늦긴 했으나 양심선언을 하는 군인과 경찰들의 증언이 이제라도 나오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5.18기념재단은 지난 21일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교도소 일원에서 3공수여단 11대대 부대대장 출신인 신순용 전 소령으로부터 5.18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민간인 희생자 암매장에 관여했다는 진술을 청취했습니다. 또한 사병으로 복무한 유모 씨 등 추가 제보자가 제시한 암매장 의심 지역들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날 신 소령은 옛 교도소를 찾아 암매장 추정지를 지목했습니다.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옛 교도소 서쪽 담장 주변으로 5.18 이후 폐수처리시설이 증축된 곳입니다.

 

군 기록에 따르면 민간인 27~28명이 5.18 당시 옛 교도소 일원에서 숨졌는데 민주화운동이 끝나고 임시매장된 형태로 찾은 시신은 11구에 불과했습니다. 지난 8일 유해 발굴 작업으로 암매장 추정지에서 배관 8개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암매장 시신의 자취를 찾고 있습니다만, 1980년 이후 통신 배관과 상하수도 배관 등등 4번가량 이곳에서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보아 유해의 흔적이 이미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땅속에 묻힌 진실을 찾아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한편 5.18과 관련해 경찰이 당시 현장 경찰관들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처음 입장을 냈습니다. 광주 치안에 문제가 없었음에도 계엄군의 과격 진압과 발포가 이뤄졌고, 이를 왜곡하기 위해 경찰 내부 문서까지 조작했다는 겁니다. 5.18 직후 보안사에서 보존한 전남 경찰국 치안일지에는 군부의 주장처럼 시민들이 먼저 나주 경찰지서에서 총기를 탈취하고 장갑차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주 남평지서 경무과장의 감찰 진술서에는 집단 발포 이후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시민들이 몰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군부가 먼저 시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경찰은 당시 현장에 동원되었던 기동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심지어 야유회를 갈 만큼 치안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군이 개입했다거나 시민군이 약탈과 강도를 하는 무법천지였다는 보도는 신군부에 의한 왜곡된 발표였음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경찰은 계엄군의 과격 진압을 제지하지 못하고 그동안 침묵해온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출처 - SBS


이제 남은 것은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독재의 잔당들과 아직도 적폐를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우리나라 군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꼬인 현대사를 푸는 것은 5.18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국가의 폭력에 의해 더는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5.18의 진실을 캐내기 위한 관심과 행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올해로 36주기가 되는 5.18 민주화항쟁도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으로 시작했습니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이런 일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죠. 박근혜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실상 제창하지 못하게 지침을 내렸으며 박승춘 보훈처장은 이 교시를 받들어 올해도 제창을 불허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청와대 회동에서 협치를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또 하나의 쇼였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야당은 청와대 회동 무효를 선언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심지어 새누리당 원내대표조차 청와대와 보훈처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야당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내기로 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


1997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제창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제외되기 시작했습니다. 집권당과 정권의 성격을 보면 그 의도가 너무나 명백하죠. 보훈처의 해석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적으로 제창과 합창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개념이지만, 보훈처의 유권해석으로는 제창은 참석자 전원이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지만 합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죠.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5.18 민주화항쟁 기념식 동영상을 보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입을 다물고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외워서 부르고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주먹을 움켜쥔 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반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들고 있는 종이만 들여다볼 뿐 입을 열지 않습니다.


출처 - 유튜브


보훈처의 유권 해석대로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국가 기념식의 관행을 어긴 것이며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를 고의로 부르지 않은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보훈처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례와 무식함을 계속 알리고 싶어 이런 방침을 자꾸 고수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를 막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고 있는 걸까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그 이유가 그대로 드러나긴 합니다.


출처 - 페이스북


〈임을 위한 행진곡〉은 보수단체의 주장과 달리 종북이나 김일성 찬양을 위한 노래가 아닙니다. 탈북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는 주성하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에서 허락없이 부르면 잡혀가 정치범이 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과 연결시키는 찌질한 짓거리" 좀 그만하라면서 말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한 노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보면 그 수준의 저열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한편 5.18 민주화항쟁 당시 학살의 책임자였던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4대 조건이 선결되어야 된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신변 보호와 박탈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를 갖추는 등의 조건이 선결되어야 5.18 묘역을 참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광주에서는 죄인에게 무슨 예우냐는 반응이 나오고, 5.18 관련 단체는 책임 인정과 광주에 대한 사죄 그리고 대국민사과가 선결 조건이라고 대응하기도 했죠. 

 

출처 - KBS


하지만 살인마 전두환은 지난달 27일 《신동아》 기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항쟁 당시 시민군을 향해 총을 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동석한 전두환의 지인들도 인터뷰에 참여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나왔습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광주 침투와 관련된 정보 보고를 받은 적 없다는 전 전 대통령 말에)


고명승 전 삼군사령관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연희동에서 코멘트 한 일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전 의원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전 대통령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일베에서 5.18 관련으로 "종북, 빨갱이" 타령할 때 흔하게 나오는 주장이 북한 특수군 얘기죠. 그런데 그 주범인 전두환이 이런 논거를 부정한 셈입니다. 광주와 북한이 관련 있다는 일베의 주장이 헛소리임을 전두환이 밝힌 셈입니다. 한편 역사적 책임감으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두환은 "광주에 내려가 뭘하라고요"라고 되물어 책임 인정과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출처 - 스포츠동아


한국인 작가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얘기했죠.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출처 - 《소년이 온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과 같이 고립되고 힘으로 짓밟히고 훼손된 사건 이면에는 광주를 수없이 되태어나게 한 국가의 원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해마다 후벼지는 그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철철 나고 있습니다. 5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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