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와 압제에 항거하여 만세시위를 펼친 역사를 기념하는 제95주년 삼일절입니다.

2014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3.1운동의 의미를 독립운동(민족혁명)이라는 좁은 의미로 이해할 게 아니라 민주혁명으로서 그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찬란한 '3·1 혁명', 누가 '3·1 운동'으로 바꿨나). "1919년 3월 1일부터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민중의 힘으로 주권재민의 근대국민국가 수립과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한 민족·민주혁명이었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복권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늘 이 자리에서 논의하려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선열이 흘린 핏값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헌법 제1조를 얻었습니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95주년 삼일절을 맞이하며 과연 헌법의 근본정신이 이 시대에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수많은 국민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정이 유지되고 있건만, 정작 국가가 국민의 권익을 보장하지는 못할망정 죄 없는 시민을 간첩으로 내모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만행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23년 만에 무죄 판결.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을 잘 아실 겁니다. 이 사건은 1991년 명지대생이었던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사건에 항의해 분신한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이 대신 써줬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3년을 복역한 시국사건입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운동권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동료의 자살을 종용하는 파렴치한으로 몰렸습니다. 먹이를 물은 듯 주류 언론은 연일 맹공을 퍼부었고, 이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은 조작이었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사회와 일부 언론은 사건 초기부터 유서 대필이 검찰의 조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해왔습니다. 6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오랜 시간 동안 20대 피고인은 어느덧 50대가 되었고, 30대 변호인은 60대가 되었습니다. 그간 유서를 대신 써주며 동료의 분신자살을 방조한 범죄자라는 누명을 감내해야 했던 강기훈에게 드디어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말을 굳게 믿는다." 이 말은 무죄 판결을 받은 김용판이 기자들에 둘러싸여 의기양양하게 읊조린 말이다. "이 사건으로 삶이 뒤틀린 수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이 판결로 그분들의 아픔에 위안이 되길 바란다." 이 말은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의 소감이다.


1991년 12월 4일 서울형사지법의 유죄선고가 있은 지 만 23년 만입니다. 재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는 13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았던 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날 법정 안은 숙연했고 박수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

강씨의 변호인단은 “재판부가 검찰의 무리한 추론은 받아들여 ‘운동권은 목적을 위해 유서를 대신 써주기도 하는 집단’이라는 엄청난 편견을 합리화시켜줌으로써 그동안 대필 여부를 두고 사실관계로 두터던 사건을 정말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만들고 말았다.”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식의 승리‘라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조르쥬 클레망소의 말대로 ’상식의 승리‘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며 항소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과거 강 씨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항소와 상고를 기각했던 사법부의 사과는 없었으며, 검찰 역시 아무런 사과의 뜻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상식의 승리를 믿고 23년간 함께 싸워준 변호인만이 무죄 판결이 난 선고의 최후 변론에서 “진실 만세!”로 끝을 맺었을 뿐입니다. 이번 무죄 판결에 목이 메었다는 이석태 변호사의 인터뷰를 함께 보시죠.

출처 – 오마이뉴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말이 자꾸 등장하는데요, 증거조작과 마녀사냥에 의한 인권탄압의 대표적인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삼일절을 맞이하여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나는 고발한다!

제목 : 가족의 저녁식사
“우리 오늘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맙시다.”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잖아!”
출처 – 르 피가로

선거철 우리나라 밥상머리 상황같이 꽤 친숙한 모습입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양분하여 극한으로 대립하게 했던 드레퓌스 사건 당시 신문에 실린 만평입니다.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드레퓌스는 어느 날 갑자기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됩니다. 비공개로 진행된 군법회의 끝에 간첩 혐의로 종신유형이 선고됩니다. 이때 재판부가 유죄판결을 내린 근거는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음에도 당시 프랑스 군부, 보수 가톨릭 교회, 수구 언론은 일제히 유대인인 드레퓌스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결국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한 섬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2년 후 군 정보국에서 근무한 피카르 중령의 중대한 발견으로 문제가 부각됩니다. 간첩 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는 겁니다. 피카르 중령이 우연히 당시 문건을 열람한 결과 독일대사관에 팔려간 프랑스 기밀문서의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이 조사 결과를 상부에 알리고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지만, 군 상층부는 그를 한직으로 좌천시켜 쫓아내고 재심 요구를 무시합니다. 제국주의가 시작되던 시기에 가톨릭과 보수세력은 자국 군대의 위신과 국가의 질서가 일개 유대인에 의해 교란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에 따라 진범인 에스테라지는 오히려 존재치도 않는 유대인 비밀조직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피카르 중령은 좌천도 모자라 군사기밀누설죄로 체포됩니다. 그 후 드레퓌스의 형도 에스테라지를 고발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며 이를 묵살합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대통령 각하,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립니다."

_<나는 고발한다!> 중에서 

이때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대문호인 에밀 졸라가 행동에 나섭니다. 그는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란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보냅니다. 이를 통해 에밀 졸라는 죄 없는 드레퓌스에게 종신유배를 선고한 법정과 진범인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정을 고발하고, 재심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에밀 졸라의 용기 있는 행동은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습니다.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은 에밀 졸라에게 깊은 존경과 찬사를 보내며 진실을 감추는 군인과 성직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결국 드레퓌스 찬·반파로 프랑스 사회는 양분되어 극한 대립에 돌입합니다. 이 와중에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법원이 재심을 열었지만 드레퓌스를 종신유배에서 10년형으로 감형하는 데 그칩니다. 재심으로 진실이 승리할 것으로 믿었던 세계 각국의 인사들은 다시 의기투합하여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나섭니다.

결국 세계 여론에 떠밀린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하게 됩니다. 무죄가 아닌 특별사면 형식이어서 불만의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몸이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이를 일단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 만인 1904년에 형의 도움으로 새로운 증거를 첨부해 재심을 청구하고 피카르 중령과 함께 최고재판소에서 무죄와 함께 복권을 선고받습니다.

이후 건강상 이유로 전역했던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베르덩 전투 등 큰 전투에 참가하여 세운 공훈으로 레지옹도뇌르 훈장까지 받습니다. 자신에게 온갖 누명과 고난을 안긴 조국을 위해 희생하여 다시금 큰 공을 세우다니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사코와 반제티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안타깝게도 드레퓌스와 유사한 처지에 놓였던 이는 강기훈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계 이민이었던 미국의 사코와 반제티도 누명을 썼으나 드레퓌스 사건처럼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나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1920년 4월, 매사추세츠주(州)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제화공장(製靴工場)의 회계담당 직원과 수위(守衛)가 두 명의 남자에게 사살되고 종업원의 급료를 탈취당했다. 경찰은 이탈리아계(系)의 이민(移民)인 N.사코와 B.반제티를 용의자로서 체포, 이듬해 5월부터 재판이 열렸다. 두 사람 모두 무죄를 주장하여 7년에 걸친 법정 투쟁이 전개되었으나, 용의자들이 외국 이민이라는 것, 제1차 세계대전 중 징병을 기피했다는 것, 무정부주의자라는 것 등이 사람들의 편견과 반감을 샀다. 또 당시의 미국사회가 외국 이민을 좌익분자로 보는 경향도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의혹이 남겨진 채 1927년 4월에 사형을 선고하였고, 재심(再審)을 요구하는 세계 여론도 아랑곳없이 그 해 8월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런데 1959년에 진짜 범인이 판명되어, 이는 미국 재판사상 하나의 큰 오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처럼 사코와 반제티 역시 이탈리아 이민자라는 사실로 공격을 받았고, 무정부주의자로서 징병을 거부했던 점 때문에 애국심이 부족하다며 법정은 물론 대중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이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세계의 지성들이 항의 서한을 보내고 호소문을 발표했지만, 미국은 사형선고를 내린 지 4달 만에 형을 집행하고 맙니다. 결국 사코와 반제티는 누명을 쓴 채 전기의자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50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무죄 사실이 입증되어 복권되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죠.

출처 - 위키피디아

드레퓌스 사건이 강기훈 사건과 겹쳐 보인다면, 사코 반제티 사건은 사법살인이었던 인혁당 사건과 겹쳐 보입니다. 역사는 장소를 옮겨가며 반복되는 걸까요? 아니, 장소조차 바뀌지 않고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정권의 편의에 따라 간첩을 만들어내던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의혹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증거마저 조작하는 오늘날 검찰의 행태를 보면 말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김요한 기자는 “‘간첩’과 ‘증거조작’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 ‘유우성이 간첩이냐’와 ‘국정원이 증거를 조작했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유우성이 간첩이든 아니든 수사기관은 증거를 조작해서는 안 된다”며 “검찰도 정치권도 언론조차도 ‘사실이 무엇인가’보다는 ‘누구 편에 유리한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비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수사기관이 직접 증거자료를, 그것도 외국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을 속이려 했다면 이는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을 만한 일이며, 검찰 자체가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권도 언론도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를 애써 꺼리는 듯한 분위기”여서 “사안의 본질은 어디 가고 여느 때처럼 곁가지 공방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드레퓌스, 사코, 반제티, 강기훈, 그리고 어쩌면 유우성.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드레퓌스 사건이 회자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관심과 목소리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국가폭력, 언론을 통한 여론조작 문제를 좌시할 수 없습니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하다면 이런 상황 자체가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버린 형국을 방증합니다. (관련 자료: 국정원·검찰 '증거 조작' 의혹에도 '눈뜬장님' 행세하는 '불량 언론'! )


박근혜 정부 1년, 무엇을 남겼나?

박근혜 정부 출범 1년을 맞은 지난 25일, 여러 시민사회 단체가 한목소리로 민주주의와 민생 후퇴를 지적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을 지킬 것을 촉구했습니다.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 10개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에서 "지난 1년간 표현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권리는 공권력에 의해 위축됐고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으로 민주주의가 공격당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실로 그렇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걸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사실상 폐기 또는 변질했습니다. 최근 박 대통령이 발표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선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마저 사라졌습니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노조탄압, 민영화 정책 등의 실정을 반성하기는커녕 정부가 앞장서 대선개입 사건 수사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한 사실이 속속 증명되고 있으며, 민영화 반대를 외친 철도파업 행위를 탄압하기 위해 정부가 여론 조작과 허위사실 유포 같은 치졸한 행위마저 서슴지 않았음이 보도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1년을 돌아보면 '이명박 정권 6년차'라는 세간의 비판이 아주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최시중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삼는 등 측근 인사를 요직에 앉혀 제왕적 통치의 기반을 굳히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도 ‘친박’ 인사로 분류되는 이경재 전 새누리당 의원,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인 김원배 목원대 총장, 김병호 전 새누리당 의원을 각각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문화방송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에 앉히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저널리스트 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는 매년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를 발표합니다. 세계 각국·지역 보도의 자유도에 순위를 매김으로써 검열 상황, 제도장치, 투명성, 인프라 등의 항목으로 세계 180개국·지역을 채점해왔습니다. 지난 2월 12일에 발표한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 2014'에서 한국은 57위를 기록했습니다.

출처 - 국경없는 기자회

우리나라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노무현 정부에서 최고 31위(2006년)까지 기록했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속적으로 하락했습니다((2011년: 42위, 2012년: 44위, 2013년: 50위). 아시다시피 2009년 역대 최하위인 69위까지 떨어진 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등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 등이 순위에 영향을 주었죠.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자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유래 없이 언론사 총파업 같은 행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이번 2014년 결과 순위가 알려주듯이 정권의 언론장악 환경은 큰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생각비행은 지금까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겨 관련 기사를 꾸준히 발행해왔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정리해서 보여드립니다.
 
-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기각과 언론 재벌의 독과점
- 언론은 진실만을 전하고 있는가?
- 맷값 최철원 선생과 PD수첩 무죄 판결
- 이 시대의 폭로 저널리즘? '위키리크스'
- <PD수첩> <시사매거진 2580>과 같은 '탐사보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법원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
- 한국의 탐사보도 - MBC가 제작한 탐사보도 프로그램
- PD수첩이 사라진다면 무한도전도 위험합니다
- 검사와 스폰서 사건에서 발견한 탐사보도의 가치
- 중요한 사회문제를 덮어버린 서태지-이지아 가십기사
- 다시 기억해야 할 5.18 광주민주화운동, 신군부의 독재와 언론·방송의 굴종사
- [서울디지털포럼 참관기] 위키리크스로 돌아보는 탐사보도의 역사와 현황
-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사회 변화의 씨앗 있다
- 《PD수첩》 무죄판결로 살피는 탐사보도의 가치
- 《경향신문》 창간 65주년 기념 MB氏 불통강령 단독입수!
- 1퍼센트의,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를 위한 종편 개국
- 리영희 선생 1주기에 돌아본 한국 언론의 현실
- 1퍼센트를 위한 종편을 넘어 SNS에서 대안을 찾자
- 질질 끄는 미디어렙법 처리, 누구를 위한 정치 놀음인가?
- <뉴스타파> <제대로 뉴스데스크>에서 대안언론의 가능성을 보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며 표현의 자유를 다시 돌아보다
- <천안함 프로젝트>,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95주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헌법의 근본정신을 이야기하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지난 2013년 촛불시민과 누리꾼이 주축이 되어 발표한 선언문을 게재하는 것으로 이만 인사 올립니다.

<촛불시민·누리꾼 3차 시국선언문>
 
- 우리는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민저항권을 발동한다 -
 
대한민국의 근본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국가의 근본 질서를 규정하는 헌법이 특정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마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법과 민주주의가 무너진 결과 대한민국은 정의와 진실과 원칙이 짓밟히고 거짓과 음모와 술수가 판치는 삼류 국가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을 이렇게 치욕스럽게 만든 주범은 1219 부정선거의 주범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이며, 이러한 범죄 행위에 대한 최고 책임자는 이명박과 박근혜이다. 우리는 이승만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저항한 4.19 시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굴복하지 않은 유구한 민주화 투쟁과 80년 5월 광주의 민중항쟁 그리고 86년 6월 민주항쟁에 바친 피와 죽음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장구한 세월 동안 민주열사와 애국시민들의 희생을 바쳐 쟁취한 민주주의가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에 의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이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종교계를 필두로 대학 교수와 청년 학생 그리고 수백 개 시민단체와 일반 시민들 그리고 고등학생들까지 나서서 국정원의 개혁과 박근혜의 책임 있는 결단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반성과 사죄는커녕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선량한 시민을 종북좌파 세력으로 매도하며 제2의 유신독재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향후 어떤 선거도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어 마침내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덤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 반역의 무리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경고한다. 일제강점기의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열사들과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친일 종속적인 망언, 망동으로 민족정신을 훼손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자격이 없다. 민족 분단의 비극과 모순을 극복할 의지도 능력도 없이 선량한 시민들을 향해 종북좌파 운운하며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에 편승하여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급급한 세력에게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자들이 더 이상 민주주의를 능멸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반역의 무리들을 척결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갈 것이다.
 
우리는 헌법 파괴와 국기문란의 주범인 박근혜 정권을 향해 엄숙하고도 강력하게 선언한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는 국민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 선거의 공정성을 지키는 데 있다. 하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는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의 야합과 음모 속에 부정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는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무시하고 국기를 문란하게 한 범죄 행위이다. 더구나 위의 세 집단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가리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과 범법 행위를 무차별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국기문란 세력을 진압하고 이들의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을 권리와 책임을 통감한다. 이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국민 저항권을 발동한다.우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 강령을 선포한다.
 
하나,우리는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을 바로잡기 위한 무기한 투쟁에 돌입한다.
 
하나,국정원과 경찰의 부정선거 연루자는 국민 앞에 사죄하고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부정선거를 주도한 국정원은 즉각 해체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국가 기관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한다.
 
하나,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이 공모한 부정선거의 최대 수혜자이자 최고 책임자인 박근혜는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하나,우리 촛불 민주시민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복하는 세력에 맞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그날까지 어떠한 위협이나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임을 독립열사와 민주열사 앞에 맹세한다.
 
2013년 10월 5일
촛불시민·누리꾼 일동

오늘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꼭 50년 되는 날입니다. 한국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10.26, 12.12사태,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의 성장통을 겪으며 지금과 같은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경제 사정이 조금 어려워질 때면 많은 국민이 박정희 시절을 생각하며 그때가 좋았다고들 얘기합니다. 과연 3·4공화국 동안 한국 국민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크나큰 경제 발전을 이뤘을까요? 박정희라는 인물이 과연 칭송을 받을 만하며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일까요? 생각비행은 5.16 군사쿠데타 50주년을 맞이하여 박정희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해봤습니다.

5.16 군사쿠데타, 과연 정당한가

5.16을 맞이하여 여러 신문에서 군사쿠데타에 참여한 원로를 인터뷰하여 기사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일부 보수인사의 인터뷰를 인용하여 마치 5.16 쿠데타를 필연적인 사건으로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말마따나 과연 5.16 군사쿠데타는 정당한 것이었을까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관련 사진 복사 촬영. 박정희 소장(가운데)이 박종규 소령(왼쪽), 차지철 대위(오른쪽)와 함께 군사쿠데타 당일 시청 앞 광장에서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의 원인으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자주 거론되는 한국군 내부의 불만과 2공화국의 정치적 무능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쿠데타 당시 한국 군대는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급속히 팽창한 군부에서 종전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의 급속한 진급에 비해 정규 사관학교 출신 후진의 진급은 매우 더뎠고, 심지어 봉쇄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민주당은 7.29 총선에서 감군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 후 이 공약을 부분적으로 단행하여 군대의 불만을 샀습니다. 군 내부의 불만이 쌓여갈수록 같은 기수의 사관학교, 같은 지역 군인들의 결집을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집단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공화국의 무능함이 5.16 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는 사람도 많은 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7.29 총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혁신세력이라 할 사람들이 거의 국회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4월혁명 이후 진보운동으로서는 한계를 보인 국민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혁신정당들이 국민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결과가 더 크다고 봅니다. 부정축재자 처벌이나 부정선거 관련자 엄단과 같은 국민의 요구가 정치권에서 흐지부지되면서 2공화국은 점점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가 5.16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해주진 않습니다. 국민은 강압적인 구정치질서 , 만연한 부정부패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 특권층 발호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불만을 제기하긴 했으나 계속 되풀이되는 시위에 점차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시민의식이 성숙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런 시국에 굳이 쿠데타 세력이 이야기하는 '군사혁명'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5.16은 4.19혁명 이후 비등한 민주화, 민족통일 요구에 체제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이 모의한 집단 방어적 쿠데타였습니다. 합헌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하고 그 이유를 장면 정부의 무능으로 돌리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정면 정부 시기와 박정희 정부를 비교할 때 쿠데타 세력이 창출한 정권이 더 유능하다는 근거를 찾기도 어려우니까요.

쿠데타세력이 말하는 '혁명'은 과연 이루어졌는가

5월 16일 쿠데타 세력은 '혁명'에 성공했다고 내세우면서 다음과 같은 혁명공약을 발표합니다.

  1. 반공(反共)을 국시의 第1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력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용인즉 반공을 최고의 국시로 삼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며, 경제를 발전시킬 밑거름을 만들어 자신들은 뒤로 물러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발표한 혁명공약이 제대로 지켜졌을까요?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공약인 부패와 구악 일소입니다. 혁명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벌을 내세워 5월 28일 재벌 총수를 구속하고 외제품을 모아 불태우는 한편 많은 정치 깡패를 체포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특히 정치깡패들의 시가행진은 많은 사람한테서 박수를 받았죠. 몇몇 사람은 이 일을 두고 5.16 군사쿠데타는 혼란과 부패를 청산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호도하기도 합니다.

참회의 시가행진을 벌이는 깡패들 - 혁명정부는 자유당정권 밑에서 정치의 비호를 받으며 날뛰던 깡패세력의 일제 소탕에 나섰다.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 신정식을 사형으로 다스렸고, 1000여 명의 깡패가 국토개발사업에 나가 땀으로 속죄했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습니다. 부정축재 처벌로 구속되었던 당시 재벌 회장들은 곧 석방되었고, 공장 건설과 같은 주식 납부 방법으로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처벌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박정희의 "혁명은 끝나고 경제재건에 앞서야 하니 경제인들이 나서달라"는 말에 기업들은 경제재건촉진회를 발족합니다. 이 단체는 현재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기도 합니다. 결국 쿠데타 세력이 내세운 '구악 일소'는 초기에 큰 퍼포먼스만 보여준 채 흐지부지하며 넘겨버린 일이었습니다.

더 어이없는 행태는 쿠데타 세력이 저지른 4대 의혹사건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일본에서 승용차를 면세로 수입하여 두 배로 판매한 '새나라 자동차사건', 일본에서 도박기계를 면세로 수입한 '빠찡꼬사건', 1962년 4월 정부관리 주식을 145배나 뛰게 하여 폭리를 얻은 '증권파동', 마지막으로 유흥시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공사자금을 횡령한 '워커힐사건'입니다.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은 공화당 창당에 드는 엄청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일으킨 사건으로, 구악에 뺨치는 신악으로 명명될 정도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 국민은 과연 행복했을까

앞선 1·2공화국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혁명정부는 혁명을 완수했다며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는 듯했지만, 그들은 공화당 창당으로 말미암아 이미 자신들의 앞길을 다져둔 상태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고, 3선개헌과 유신선언으로 독재정부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에 과연 국민은 행복했을까요?

3공화국은 집권과 함께 경제개발계획을 내놓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자립경제의 구축을 위해 에너지원을 확보하고 기간산업,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죠. 하지만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조달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낮추어 잡고 자금을 외국에서 조달하는 방향을 선회합니다. 1·2차 경제개발계획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식량자급, 수출증대, 철강, 화학공업의 기계화에 성공했고 10.5퍼센트라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합니다.

YH무역이 문을 닫자 200여 여공이 실직에 항의, 신민당사에 몰려 '우리를 나가라면...'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곡물 수입액은 약 7배로 늘었고,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은 외국 자본이 국내로 들어오는 길을 활짝 열어버렸습니다. 또한 외자와 기술을 들여와 낮은 임금으로 만든 상품을 외국 시장에 파는 수출지향적 발전 방향의 채택은 후에 노동자들로부터 큰 반발을 얻게 됩니다. 1970년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과 1979년 YH사건은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통제를 통한 산업화 추진에 대한 노동자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결과였습니다.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는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었지만, 반대로 재벌들은 엄청난 이익을 얻었습니다. 1965년 제3공화국은 조세감면 규제법을 마련하여 기업의 세금을 덜어주었습니다. 수출소득세를 50퍼센트나 감면해주었고, 돈이 부족한 기업엔 수출산업기금을 조성하여 돈을 대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쟁 특수로 성장한 기업도 있었는데요,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건설업 분야에서 활동한 기업 가운데 큰 수익을 올려 신흥 재벌로 떠오른 기업도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명분도 없는 싸움터에 나가 목숨을 잃고 피를 흘릴 때 그들은 '전쟁 특수'를 노려 재벌이 된 것이죠.

당시 사회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과거 자신이 남로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미국정부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삼았습니다. 이는 혁명공약 제1조의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라는 말로 알 수 있죠. 이처럼 반공을 강조한 정부는 시시때때로 반공을 이용하여 사회비판 세력을 물리적이고 강압적인 통치방식으로 처벌합니다. 1·2차 인민혁명당사건, 통일혁명당사건, 민청학련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고, 유신 시기 남발된 긴급조치로 국민은 숨조차 맘 편히 쉬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인혁당 관련 피고들

이렇게 국민에게 힘든 생활을 조장하면서 돈 많은 사람과 권력자에겐 각종 혜택을 줬던 사회를 두고 과연 희망이 있고, 살기 좋은 사회였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반문해볼 일입니다.

박정희는 과연 한국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가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박정희와 5.16 군사쿠데타 세력은 한국을 기형적인 사회로 만든 암적인 존재들입니다. 박정희식 경제개발은 저임금, 고노동의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노동자가 일궈낸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한국인은 한국전쟁의 상흔을 벗어나고자 하는 잠재의식이 있었고, 각자의 어려움을 대물림해선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기인한 높은 교육열 덕분에 잠재적 산업예비군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한국인의 근면함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파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승 분위기 속에서 국제적 여건 또한 한국의 경제 성장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여러 선진국은 자국의 2차 산업을 물려받고 분업관계를 떠맡을 국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동아시아에서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그 역할을 떠안았으며,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이런 국내외 경제적 여건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박정희와 군사쿠데타 주역들이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 한국 국민의 힘과 국제정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경향신문》에 5.16 쿠데타 50주년을 돌아보는 <박정희 시대 산업화, 역사의 연속이지 신화 아니다>란 기획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박정희 시기 산업화에 대해 인정한다. 다만 너무 신화하되고 과대평가됐다. 객관성을 위해 세 가지 비교준거를 들겠다. 먼저 박정희 시기와 유사한 초기 산업화를 이뤘던 나라들과 비교할 때 박정희 정부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50년대 북한의 산업화와 비교해도 경제지표만으로는 박정희 시기가 특별히 우월하진 않다. 끝으로 87년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그 단계으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정부 못지않은 경제적 성취를 보여줬다. 종전 및 한·미동맹으로 인한 전쟁재발 가능성 종식과 국가역량의 국내발전에 집중할 여건의 도래, 토지개혁 성공으로 인한 산업화 저항세력으로서의 지주계층 몰락, 학교·학생·언론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교육기적과 국민교육 등 이른바 '산업화의 가능 조건들'은 전부 이승만 정부에서 이뤄졌다.

박정희와 군사쿠데타 주역들은 반공이라는 국시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에게 반하는 세력을 힘으로 억눌렀을 뿐입니다. 경제개발에 큰 역군이었던 공장 노동자들의 요구는 무시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정치인과 지식인은 억압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이들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어떻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몹쓸 향수에 젖어 있을 수 있습니까?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사회의 정의와 법적 질서를 어지럽혔고, 약육강식의 경제체제를 형성한 주범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비정규직 고용자가 800만 명이 넘고, 지금도 곳곳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각종 재벌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도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피해 갑니다. 생각비행은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과연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박정희의 그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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